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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나는 옳은가? 나는 바른가? 나는 잘못되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과연 진정으로 옳고 그릇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회의가 나와 다른 주장에 대해 관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성이란 의심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오롯한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에 가장 두려운 것이 내가 옳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못나고 어리석고 부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내가 혹시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또한 의심이 들기에 더 완고해지기도 한다.
틀린 걸 안다. 분명 그것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안다. 아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인정하는 순간 마치 자기가 진 것 같고, 도태된 것 같고, 도태될 것 같고, 그래서 아예 다른 가능성을 말살해 버린다.
"어딜 감히!"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나는 어리석지 않아! 나는 무능하지 않아! 나는 못나지 않아!
그러나 그 자체가 사실 못난 것이다. 지금 부족하면 채우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모자르면 그만큼 채워 놓으면 그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매부에게 얹혀 살던 여몽은 제대로 배우지 못해 손책을 따라다니며 여러 싸움에서 공을 세워 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학식이 부족하여 그 이상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그를 안타까이 여긴 손권이 권하여,
"공자께서도 책을 가까이 하라 하셨고, 광무제도 전장에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소. 이제부터라도 공부에 힘을 씀이 어떠하오?"
마침내 몇 년이 지나 노숙이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에는 당대의 재사인 노숙마저 놀라게 할 정도가 되었다.
"자네는 이제 오나라의 그 여몽이 아니로구먼非復吳下阿蒙.” "사람을 사흘 만나지 않고 있으면 바로 눈을 바로 뜨고 상대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세士別三日 卽更刮目相對.”
유명한 괄목상대의 고사다.
과연 여몽이 그래도 장군이라고, 공이 있다고 배움을 소홀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히려 자신을 무시한다 윽박지르려고만 들었다면? 자신의 공과 지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만만 품고 있었다면?
현재에 만족하고 말 사람이었다면 손권이 그를 그리 중히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유와 노숙의 뒤를 이어 오의 도독이 되고 마침내 양양의 관우를 잡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그릇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한계가 아니게 된다... 스스로 부족함을 먼저 인정하고 나면 부족함은 곧 가능성이 된다...
사실 쉬운 게 아니다. 살다 보니 깨닫게 되는 것이 그것이지만 그러나 머리로 안다고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쉽다면 세상이 이리 어지러울까?
그래서 항상 후회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만 있었다면. 나의 어리석음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내가 못난 것을 오기를 부리지 말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물론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여기서 전제는 나 또한 이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일 터이니.
내가 무조건 옳다는 믿음은 버리는 것이 좋다. 내가 무조건 맞다는, 내가 남들보다 낫다는 근거없는 확신도 버리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래도 결코 버려서는 안되는 것, 그것은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나의 가능성, 나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다.
사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관용도 가능한 것이다. 관용이란 더 나아질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여유이기도 할 것이니.
어찌 보면 역설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있기에 의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거침없이, 거의 무한정으로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의심할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까지도 끊임없이 탐욕할 수 있는 것이다.
하긴 믿음이 없는데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의처증도 아내라고 하는 믿음이 전제되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의심부터 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과연 의심이란 가능할까? 다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의심이 또한 그에 대한 침해일 수도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 뿐이다.
먼저 의심하라,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이란 곧 의심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했을 때 남는 것은 의심하고 있는 자신이라. 그러나 그 의심하고 있는 자신마저도 의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관용이다.
뭐 말로만 그렇고 사실 나도 못하는 것이다. 역시나 나 또한 컴플렉스 덩어리라 내가 못나고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리 힘들다. 의심하기에는 자아가 확고하지 못해서. 그래서 발전이 없다. 항상 그 자리. 세상에 말로 떠드는 만큼만 행동할 수 있다면 뭔들 힘들까?
남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기를.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을 믿기를. 자신의 눈을, 귀를, 머리를, 가슴을, 그리고 가능성을.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용납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데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용납 못할 일이 어디있을까? 다른 사람의 오류도, 다른 사람의 잘못도, 나 또한 오류이며 잘못될 수 있는 것을. 그러나 버려서는 안되는 것, 그럼에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 희망. 믿음.
관용이란 그런 것일 게다. 먼저 자신을 알고 그를 통해 남을 알고 그리고 믿는. 특히 자기를 믿고 의심할 수 있는.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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