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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의 고향이 하남성 온현 진가구라면, 팔극권의 고향은 하북성 창현 맹촌이다. 청 연간 이미 창현을 중심으로 이웃한 염산현과 남피현, 영진형 등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시작에 대해서는 신창 이서문의 제자로 팔극권의 보급에 힘썼던 유운초가 <중국무술자료집간>에서 팔극권의 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팔극권은 옛날에는 파자권巴子拳이라 부르기도 했었기 때문에, 명나라 때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에 당시의 명가로써 실려 있던 파자권곤巴子拳棍이 혹시 그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어, 팔극권의 질실고박質實古璞 - 옛스럽고 질박하여 알찬 - 한 부분이 있어 꽤나 오랜시대부터 행해져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원래 파자권의 파자巴子란 파자金+巴子로 쇠스랑 모양의 무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주로 상대의 무기를 찍어 눌러 제압하는 용도로 쓰이던 장병기였는데, 이것이 꼭 팔극권의 독특한 주먹쥐기인 호조권虎爪拳, 혹은 공심권空心拳과 닮았다 해서 아마 파자권이라 불렀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파자라는 말 자체가 그다지 고상하지 못함으로써, 문인 가운데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어 파자와 발음상으로 통하면서, 무언가 깊은 뜻이 있는 듯한 팔극八極이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팔극에 대해서는 팔극권의 발경인 십자경이 사방팔방으로 폭발하여 작용하므로 그것을 팔극이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확실한 것은 없다. 차라리 파자가 훨씬 권법의 특징에 맞는달까?
아무튼 그렇게 창현에서 시작된 팔극권은 청대를 거치면서 인근의 여러 고을들로 퍼져나가는 한편 창현 안에서도 여러 유파로 분파되기 시작했는데, 워낙에 폐쇄적으로 전승이 이루어지던 탓에 나중에 가면 그 기술이나 단련법에서 서로 사뭇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러 유파 가운데 지금 정통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이서문계 - 원래 이서문은 절초를 배우지 못하는 방계였었는데 마침내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팔극권을 대표하는 정통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이서문계 팔극권의 특징이라면 우선 벽괘장을 함께 배우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벽괘장이란 원래 장권의 일종으로 상체를 흔들어 양손을 휘두르듯 내치며 공격하는 권법인데, 거리가 길고 동작이 유연하며 자세가 곡선 위주로 되어 있다. 이는 강맹함을 중시해서 허리를 중심으로 좌우로 회전시키며 폭발하듯 직선으로 내치는 팔극권의 자세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것으로 서로 보완하는 것이었다.
원래 팔극권이라는 자체가 질실고박이라는 말 그대로 이것저것 다른 잔재주 없이 오로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다는 본연의 목적을 극대화한 권법이었다. 전보와 마보의 보법으로 앞으로 뛰어들면서, 머리와 손바닥, 주먹, 팔, 어깨, 등 등의 몸의 각 부위로 발경을 일으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일격필살의 기세야 말로 그 요체라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렇다 보니 적이 공격해 오면 그것을 막거나 막지 못하면 몸으로 받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기술에 숙달되면 충분하 자기 거리를 만들고 적의 공격을 막거나 최소화하며 자기 공격을 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도리어 스스로 위험으로 뛰어드는 양날의 칼과도 같은 위험한 권법이었던 것이다. 십자경과, 전사경, 침추경 등의 팔극권 특유의 폭발하는 듯한 발경은 매우 치명적이고 위협적이었지만, 그러나 그러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은. 간단히 마주선 두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이로 일직선으로 빠르게 달려들며 일격을 가하는 사람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어찌 보면 참으로 말도 안되는 황당한 권법이 바로 팔극권이었던 것이다.
이서문이 굳이 벽괘장을 가르친 이유도 그래서였다. 팔극권은 짧고 벽괘장은 길다. 팔극권은 직선인데 벽괘장은 곡선을 그린다. 팔극권은 굳고 단단하지만 벽괘장은 유연하다. 팔극권은 일격필살을 노리지만 벽괘장은 소나기와 같은 연속공격을 꾀한다. 말하자면 팔극권이 말하는,
"곰과 같이 움직이고 호랑이와 같이 공격한다.熊步虎爪"
와 벽괘장에서 가르치는,
"매처럼 치고 뱀처럼 뒤집는다.鷹지蛇腰"
의 어우러짐이라 할 수 있다. 호랑이의 맹위와 중후와 직진을 특징으로 삼는 팔극권에 대해 매의 준절, 격령, 우회를 특징으로 하는 벽괘장이 서로 보완하고 상생하여 극의를 이룬달까?
다만 이서문은 워낙 성격이 괴팍하여 제자도 여럿 두었지만 그 진전을 전한 것은 중년의 곽전각과 노년의 유운초 두 사람 뿐이었다. 사실 곽전각과 유운초 두 사람도 배운 시기가 다른 만큼 그 배운 바도 사뭇 달랐는데, 곽전각이 배운 것은 이서문이 처음 배운 원형 그대로의 팔극권, 유운초가 배운 것은 말년에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정리한 것이라 한다. 곽전각은 이후 만주국의 황제 푸의의 호위를 맡으며 만주에 정착해 장춘에 자신의 팔극권을 전하고 있었고, 유운초는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중국의 공산화 이후 대만에 정착 제자를 양성하며 팔극권의 보급에 힘썼다. 곽전각의 팔극권을 동북장춘계, 유운초의 팔극권을 무단계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이서문에게 배운 이로 마영도, 한화신, 조수덕이 있었다. 이들은 1928년 중앙국술관 겸 국술전문학교가 세워지면서 열린 제 1차 전국국술고시에서 나란히 합격하여 교사로 채용되고 있었는데, 마영도와 한화신이 도수박투 부분에서 우등의 성적을 얻어 마침내 팔극권이 정식과목으로 채택되고 이들이 그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지금의 팔극권이란 대개 이때 마영도, 한화신, 조수덕 세 사람이 중앙국술관에서 가르친 것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인데, 나중 대만에서 자유중국군에게 거권이라는 이름으로 팔극권을 가르친 이원지도 바로 여기서 배운 이였다. 다만 마영도와 한화신, 조수덕 이들은 이서문에게서 배운 것을 임의로 바꾸어 고쳐서 가르쳤기 때문에 이서문계의 본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단 유운초와 더불어 가장 널리 퍼진 팔극권이 바로 이 중앙국술관 팔극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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