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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의 죽음은 미실로 하여금 그녀의 이제까지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세종의 여자가 되어 궁으로 들어간 것이나, 다시 이모인 사도왕후의 일로 하여 지소태후의 미움을 사 궁에서 쫓겨난 것이나, 그리고 사다함과 부부의 연을 맺기로 하고서도 다시 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 무엇보다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다함을 잃게 된 것에 대해서... 그 모두는 결국 그녀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고 피동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따라가려고만 했기 때문이었다.

미실은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아픈 경험은 하지 않으리라."

다행히 그녀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진흥왕의 후이자 그녀의 이모인 사도왕후였다. 

"삼생 - 전생과 현생과 후생에 한 몸이 되리라."

사도왕후와 미실은 혈연적으로는 숙질간이면서 모계로 전해지는 대원신통에 속해 있었다. 당시 궁은 지소태후와 지도태후 등의 진골정통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사도왕후로써도 같은 대원신통이면서 아름답고 매력적인 미실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서로의 필요에 따른 숙질간의 이모부를 사이에 둔 동맹이 체결된 것이었다. 어차피 당시 신라사회에 이모와 조카가 한 남자를 공유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리하여 동맹을 맺고 처음으로 추진한 과제가 바로 진흥왕의 태자이며 사도왕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미 진골정통이던 지도태후가 역시 진골정통인 만호공주를 동륜태자와 짝지어주려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그에 대한 견제로써 사도왕후가 미실을 내세워 그를 미연에 막으려 한 것이었다.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다. 태자와 사귀어 아들을 낳게 되면 너를 태자비로 삼을 것이다."

태자비가 되고 나면 태자가 즉위하면 왕후가 된다. 사도왕후에 이어 2대에 걸쳐 대원신통이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미실로써도 그것은 다시 없을 큰 기회였기에, 미실은 기뻐하며 기꺼이 사도왕후의 계책을 따랐다.

계획은 간단했다. 사냥을 나서는 동륜태자를 따라가서 그를 유혹하는 것. 동륜태자를 따라가는 것이야 사도왕후의 입김이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고, 궁에 갇혀 살며 아직 순진하기만 한 동륜태자를 유혹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영재교육을 받고 인생의 쓴맛을 보며 경험마저 풍부했던 미실에게는 차라리 손바닥 뒤집기가 더 어려울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얼마 안 있어 미실은 계획한 대로 동륜태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이 꼬이려는 것일까? 아니 꼬인다기보다는 뭔가 예상보다 더 나아지려는 것도 같았다. 계획대로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는 듯 하던 것이 진흥왕이 미실을 자신의 거처로 부르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흥왕이야 동륜태자가 이미 미실과 그런 관계인 것을 몰랐고, 미실의 입장에서야 애초부터 목표는 진흥왕이었기 때문에 굳이 동륜태자에게 의리를 지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진흥왕과도 관계를 갖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왕과 태자라는 두 거물을 포섭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미실이 음사를 잘했기 때문에 진흥왕의 총애가 날로 무거워져 황후궁 전주로 발탁되었다. 그 지위는 황후와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자신감 그대로 그녀는 마침내 지소태후의 화풀이에도 무력하게 쫓겨나야 했던 처지에서 한 나라의 왕후에 버금가는 지위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일단 지위를 손에 넣자 미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왕의 총애로 얻은 지위란 총애가 사라지면 바로 꺼질 바람과도 같은 것이니, 실질적으로 자신을 뒷받침해줄 세력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것이 자신의 남편이던 세종이었다. 여전히 미실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마치 신하처럼 다루는 그녀에게도 기꺼이 복종하던. 왕과 태자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그녀는 세종을 놓지 않고 그에게도 명령을 전했다.

"밖으로 나아가 공을 세우라."

그리고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어 낭도를 이끌고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그녀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바로 30년 전 폐지된 원화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원래 원화란 화랑을 이끌던 여성을 일컫던 이름이었다. 법흥왕 때 처음 시작되었는데, 당시 두 명의 원화 가운데 하나인 남모가 법흥왕의 딸이었을 정도로 왕권과 관련이 깊었다. 즉 화랑도가 존재한 원래 이유 - 종교적인 목적에, 지배층의 자제를 화랑이라고 하는 제도로써 묶어 포섭하는 한편 인질로 삼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된 제도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그만 삼산공의 딸로써 또 한 사람의 원화였던 준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바로 폐지되었던 것이었는데,

미실은 바로 그 원화제도를 수십년이 지나 다시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다시 만들어진 원화의 자리에는 자신이 앉고.
참고로 원화가 폐지되고 원화를 대신해서 선화라 하여 화랑 가운데 선출된 이가 화랑을 이끌도록 제도가 바뀌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풍월주였다. <화랑세기>는 바로 이 풍월주의 기록이며, 미실의 아버지인 미진부랑이나, 미실의 첫사랑 사다함, 첫남편이자 가장 측근인 세종 모두, 각각 2대, 5대, 6대 풍월주였다. 미실의 아들인 하종은 11대 풍월주고, 김춘추와 김유신도 각각 14대, 15대 풍월주로 나오고 있다.

아무튼 그러한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화랑들의 지지였다. 이에 대해 미실은 자신의 친동생인 미생과 또 한 사람의 화랑인 설원랑을 끌어들여 일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그것이 알려지게 되면 낭도들의 신망을 잃고 세상의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삼으려 하지 않느냐?

말했듯 미생은 미실의 친동생이었다. 그런데 사사로운 관계라... <화랑세기>는 당연히 미실이 설원랑은 물론 미생과도 정을 통하고 있었다 기록하고 있다. 이거야 원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데... (잘려도 내 책임 아니다.)

어찌되었거나 여론조작이란 고금동서에 정치공작의 기본이라, 미생과 설원 두 화랑을 앞세운 미실의 운동은 마침내 화랑의 여론을 움직여 진흥왕으로 하여금 원화를 되살리도록 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시 설치된 원화의 자리는 진흥왕의 총애를 얻어 왕후에 버금가는 자리에까지 오른 미실이었고, 6대 풍월주이던 세종은 진흥왕에 의해 풍월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사랑하는 미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게 되엇다.

"새 원화는 내 옛부인이니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세종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낭도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을 때, <화랑세기>에 따르면,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지 못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니 당시 미실의 여론조작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즉 다수의 화랑들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적인 명령이었지만, 결국에 그 화랑의 여론이라는 것이 진흥왕을 움직여 원화를 되살린 것이었으니.

그러나 이미 세종이 미실의 사람이었고, 자신들이 모시던 풍월주가 저렇게까지 말하고 나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화랑들로써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폐지된 지 29년만에 원화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이를 기념하고자 진흥왕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미실과 더불어 남도로 나아가 조알을 받고 큰 잔치를 베풀었으니, 연호마저도 이를 계기로 대창大昌이라 바뀌어, 미실의 큰 포부가 이루어지는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아래는 당시 잔치에 대한 <화랑세기>의 묘사다.

이날 밤, 진흥왕과 미실은 남도의 정궁에서 합환하였다.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가득찼는데, 밝은 등불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에 끓어 넘쳤다.

진흥왕이 원화와 함께 난간에서 구경하고 있으니 낭도들이 각기 유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고, 그때마다 만세소리가 진동했다. 진흥왕은 매우 크게 기뻐하여 원화와 함께 채전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이리 말했다.

"저들도 각기 암컷과 수컷이고 너와 나도 암컷과 수컷이다."

이에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진흥왕의 품에 파고들며 이리 말하니,

"이모의 존귀함으로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의 기풍을 크게 가진 탓이다.

그리고 또한 미실이 원화의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서도 <화랑세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면서 좋은 계책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확실히 지금과 당시와의 도덕관념이 판이하게 달랐다 하겠다. 거의 난교에 가까운 잔치 모습이나, 이모와 조카가 한 남자를 섬기고, 또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동시에 관계를 갖고, 그런데도 그에 대한 어떠한 비난이나 비판도 찾아볼 수 없이 오히려 긍정적이기까지 하니. 그래서 더욱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당시 진흥왕이 미실에 대해 "천하를 뒤집을 만큼 사랑했다."라고 할 정도로 반해 있던 데에는 단순히 미실의 아름다움이나 색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랑세기>에 "문장을 잘 지었다."고 묘사된 그대로 학문에 능했던 것이 더 컸다. 클레오파트라도 외모가 아름다워서보다는 그녀의 탁월한 지성과 화술이 뭇남성을 녹였다던가? 진흥왕이 정사를 볼 때도 옆에서 모시며 참견할 정도로 - 참견을 허락받을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가 갖는 매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조야의 권세를 옥진궁으로 돌아가게 했고, 대원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자신을 쫓아냈던 지소태후와 진골정통에 대한 가장 통렬한 복수이기도 했다.



갈수록 수위가 높아진다. 누이와 남동생에, 이모부와 조카에, 사촌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사촌동생과 이모부를 동시에? 거기다 마지막에는 거의 혼음 분위기. 이거야 원 소리가이드 같은 데나 어울릴 것 같은 내용 아닌가? 위서니 진서니 이전에 그 내용 때문에라도 야설이라고 불살라질 듯. 야설치고도 보통 독한 내용이 아니거든. <선덕여왕>을 보면서 미실을 보다가는 민망해질 것 같은 이유다. 상상이 될 것 같거든. 아주 웃긴다.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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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le77@Y 2009.06.24  08:50

임동주 교수의 '우리나라 삼국지'도 한 번 읽어보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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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009.06.25  00:59

화랑세기는 백퍼센트 위작입나다
박창화는 일본왕실도서관에 근무했는데 많은 음란 역사소설을 썼고 주몽에 대한 위서를 만들려 한 전력도 있습니다
위서로 만들어 발표는 못하고 죽었는데 몇십년 뒤 1989년 발표된 것입니다
혹시 일본의 개입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학계 대부분이 위서라고 단정지었는데 이영훈교수느 이종욱교수등이 진서라 주장하는데 이영훈-일본과 연관 있는 것 아시죠?
그리고 초고라 할만한 원고들도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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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2009.06.25  01:02

그러니까 선덕여왕을 볼 때 단지 극의 재미를 위해 선덕의 반대편을 설정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
미실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면서 봐야겠죠
하나더 삼국사기 등에 안나오고 화랑세기에 나오는 인물 중 금석문에 나오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는 것 즉 화랑세기는 박창화 또는 일본이 만든 위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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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yoo1 2009.06.25  07:48

이건완전히 개판이구만.. 이게 진서든 위서든 아무근거없이는 쓰지않았겠지.. 신라시대 남녀관계가 자유로웠다는 말은 들어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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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2009.06.25  10:01

역사를 완전 개떡으로 만들어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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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2009.06.25  10:06

삼국사기라는 정서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인물로 구성한 화랑세기는 위서이다 윗 분이 밝힌 바와 같이 박창화는 음란소설작가인데 화랑세기라는 제목으로 신라를 빗대어 등장인물을 자작하여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음란소설류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당시의 성풍속은 지금의 유교적 성향과는 전혀 다른 시대이고 미실처럼 저런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지금보다는 자유스러운 것같기도 한데 이를 두고 현대에서 옳다그르다라고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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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1666@Y 2009.06.25  10:21

이렇게라도 영남지방의 근본을 흔들고 싶은의도가 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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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2009.06.25  10:24

한반도의 성풍속은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가 들어오면서부터 달라진 것이다. 그것이 현대에 와서 일부일처제의 서양식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고려까지의 성풍속은 지금과는 판이하다. 그렇다고 조선이전의 풍속을 현대의 잣대로 판단할 수도 없지만 지금의 잣대로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누워서 침뱉는 격이 된다. 전라도사람이 은근히 신라는 경상도식으로 하여 욕을 할 때 도구로 사용하는데 적어도 경상도는 백제를 도구로 전라도를 욕하지는 않는다. 백제의 본향인 충남을 경상도사람이 욕하지 않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700년가량 신라의 풍습과 고려의 풍습으로 살았던 선조의 후손이다. 현재의 풍습은 조선과 그 이후 즉 600년 가량의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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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h9897 2009.07.26  12:53

백제 멸망 후 거의 모든 기록이 통일 신라에 의해 관리되면서 소실된 부분이 많아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욕하고 싶어도 못하죠 .더구나 통일이라는게 그다지 자랑할 만한 역사로 평가받지 못하는데 백제를 들어 전라도를 욕하기엔 오히려 불리해집니다그려.

자유인 2009.06.25  10:43

화랑세기라는 역사서는 이름만 있고 실존하지 않는다. 후세 박창화가 소설을 쓰면서 제목을 화랑세기라고 한 것인데 역사적으로 존재한 화랑을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미실과 엮어 만들어낸 애정소설 또는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음란소설류에 가깝게 만들어낸 것이다. 그 표현자체가 딱딱한 역사서체가 아니라는 것만 봐도 그렇고 박창화가 정통 역사가가도 아니고 소설가 중에서도 음란역사소설을 쓴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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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yreal 2009.06.25  11:27

썅도는 다른 두 글자로 표현하면 발정, 난교 또는 음란이라고나 할까? 참 웃기는 신라의 달밤이로군.....! 거기에 임란당시 자진해서 왜구에게 벌린 녀들의 후손이니 참....! 하여튼 신라공주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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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35y 2009.06.25  13:54

미실이란 인물이 실존 인물이며, 신라때는 근친간 결혼이 가능한것도 사실이고,, 자유연예주의 사회였던것도 사실입니다..
신라의 탑돌이 문화는 남녀간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행사의 일부였다고도 하더군요..
다만 위의 내용이 많이 과장된듯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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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gp123 2009.06.25  14:09

이것참! 주지하다시피 선덕의 동생 진덕여왕으로 성골왕통의 가계는 끊어졌다합니다.
그렇다면 대원신통이라는 해괘한 가계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진골과 대원신통이 결혼을 하게되면 성골이 나옵니까?
애초에 박창화의 글은 '이것은 소설이다.'라고 분명히 못박고있습니다.
대원신통이라는 창작물을 통해....
애초에 선덕이 성골이 아니라면 여자의 몸으로 오아이 도리수는 없었을 터이고,
그 많은 반대에도 불고하고 오아의 자리에 있었던것은 다른 성골피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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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 2009.07.26  13:45

저기요 아직 적응 안되는가 본데 쟨 뭐 재대로 아는게 없어요 소설이랑 사학이랑 구별을 못하는거 같지 않나요?
그냥 드라마 보구 드라마 댓글보구 주워듣고 대충 말부쳐지는대로 막 갈겨요 -_-;

**** 2009.06.25  16:46

[귓속말 입니다.]

로랭 2009.06.25  18:48

화랑세기는 위서가 아닌 진서가 맞습니다. 화랑세기 한번 읽어보고 다들 댓글 달기 바랍니다. 그 당시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수 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물론, 그 내용들이 현재 역사학적으로 다 맞구요.. 무엇보다도.. 유교관이나 기타 윤리관에 어긋난다고 가정하고 무조건 아니다.. 하는 태도는 버리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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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suk_suh 2009.07.26  08:13

그당시에 안살았으면 몰랐던 사실이 써있다? 그걸 그럼 그당시에 안살은 댁이 어떻게 알지요? 별 같잖은 논리로 역사조작에 공범이 되시려나..아님 걍 한번 아는척하고 싶으신건가.

와와 2009.07.26  13:49

ㅇㅇ 마자요 로랭님이 마자요 유교관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 없죠 성종이 유교를 변질시켰으니
고려,조선때 쓰여진 기록으로 보면 퇴폐적인 내용이지만 그시대 사람들의 의식에서 보면 당연한거고 문란한것이 아니죠
결혼관이 완전히 다를때니까 당시에는 근친이 많이 행해 졌는데 보통 드라마 보면 엄청난 큰죄인양 만들죠 왜 소설이니까
그걸보고 믿고 드라마에 빠져서 우와 역사다 드라마 줄거리 외워서 나 박식하다 하는 찌질이들이 엄청 많아요

와와 2009.07.26  13:52

아참 깜빡했네 남녀칠세부동석의 어원도 모르는 사람은 좀 제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유교라서 어쩌구저쩌구 남녀 칠세부동석이라는 헛소리 좀 하지마세요 유교가 들어오기 천년이전에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유교랑은 전혀 상관없고
본질적인 유교관은 오히려 일본이 더 제대로 입니다.

dmgkgkgk 2009.06.25  19:26

저 선덕여왕은 유교적 관념으로 보면 안됩니다
원래 신라는 성이 자유분방하였고 종내혼이 성했습니다
이는 고려를 봐도 압니다
신라문화가 욕먹는 것은 삼국사기와 조선 왕실의 유교 관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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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10000 2009.06.25  23:29

그냥 왕이되면 재미 없쟎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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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10000 2009.06.25  23:33

신라는 모개사화였습니다. 그런개 그것이 김춘추 이후 대규모의 유고문화의 흡수로 부계사회화 되죠. 왕이 여러 여자 대리고 사는 거랑 그 당시 여자귀족이 여러남자 대리고 사는 거랑 같죠...글구 성골 ,진골 예기 나오죠 그것은 족내혼을 의미합니다. 왕족은 왕족끼리결혼하고 개중 첩과 나거나 타 성과 결혼하면 잡종이 나오죠.. 거기서 성골, 진골을 구분합니다. 왕족끼리 결혼하다보니 남자가 다 죽어서 결국 잡종이 득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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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dhouse27 2009.07.26  23:50

모개가 아니라 모계아닌가요? ㅡㅡㅋ

kay10000 2009.06.25  23:36

고대왕국 이집트나 신라나 족내혼이 자손유지에 문제가 생기니 유교에서는 족내혼을 금지시키죠.. 근데 결혼 문화와 장래문화는 정말 지지리 않바뀌는 거라서 족내혼 금지는 조선시대에나 됩니다. 대부분 상민들은 성도 없어서 이게 족내지 족외인지도 모르니 전국민 족외혼 성립은 조선시대 말 18세기 이후 일반 백성들도 족보를 만드는 시기에나 확립됬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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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aegab 2009.06.26  00:06

성적타락을 여러가지 인본주의적 사고로 판단하면 실체가안보이지요?인간의 성적타락이 아니고 시대적 문제라고 생각들할겁니다.
성은 도덕적으로 도를 넘어선 것은 다 사탄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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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부장 2009.07.10  13:56

그당시를 지금의 교과서 적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설명하기 어럽죠
아무튼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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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 2009.07.26  13:42

도데체 역시나 제대로 아는건 하나도 없고 어디서 주서들은 이야기랑 드라마랑 짬뽕을 시켜서 참골치 아픈녀석이다 정말
그리고 태후 좋아 한다 --;; 삼국중에 군주를 왕이라 칭한건 신라가 최초이며 진흥왕 때다 뭐좀 알고 좀 해라 너 왜 뜨는지 아니?
야후에서 너 욕먹이는거여 사람들 한테 욕먹고 이슈되는게 좋냐 조선기준으로 보면 남자가 왕하는건데 신라는 여왕이 유독만타 이유가 먼지나 아냐 도데체 뭘 아냐 참 할짓없나보다 블로그 글보면 너보다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 한심하다. 말이 왜 안되냐고? 확실히 아는게 아니라 주워듣고 대충 글을 쓰는 티가 안나는거 같니? 한심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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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 2009.07.26  13:43

대체적으로 문란했겠지 정도의 차이가있지 다만찬가지였을꺼다 삼국통일의 신기원을 이룩한 신라나 그것을 이어받은 고려나
얼마나 문란했으면 조선을연 태조의 연계책이 유교이였겠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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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awman 2009.07.26  15:12

떡글레의 고장이라 안카나..글레가 있음 기둥 서방도 있는기고.기둥하모 근달 아이긋나. 고로 근달.글레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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