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로서는 <화랑세기>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 일단 아직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다, 필사본을 만든 박창화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원본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이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의심스럽기만 하니... 그러나 또 이 <화랑세기>로 말미암아 신라의 역사에서의 모순점들이 다수 해결되는 등 또 믿지 않기도 애매하고... 그래서 모든 판단은 뒤로 미룬 채 다만 미실의 이름이 등장하는 유일한 문헌인 <화랑세기>의 기록을 빌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일단 미실은 <화랑세기>에 대원신통을 이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원신통 - 혹은 대원종통이란 신라의 왕실에 여인을 공급하는 모계혈통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주로 왕비를 공급하던 진골정통과는 아마도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이는 신라의 건국신화와 관계가 있지 않은가 싶은데, 아다시피 박혁거세의 비인 알영은 우물에서 닭의 부리를 하고 태어난다. 사실 박혁거세와 알영은 둘 다 이주집단이었을 터인데, 그것은 곧 신라는 이들 두 집단의 결혼동맹과 토착집단 - 사로 6촌 - 과의 결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원신통이나 진골정통이나 이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진골성통은 주로 왕비를 배출했으니 알영의 씨족에서 이어진 것일 테고, 대원신통은 그에 대해 왕실 밖의 사로6촌과 박혁거세가 결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다른 계통일 것이고, 물론 추측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간에 <화랑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전제할 때 이들 두 모계혈통은 신라왕실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튼 이러한 두 독틀한 모계혈통 가운데 대원신통으로써 가장 역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 눌지왕 때의 보미寶美였는데, 그로부터도 150년이 지나 미실이 태어났을 때는 그녀의 외할머니인 옥진궁주가 그 종통을 맡고 있었다. 옥진궁주는 원래 위화랑의 장녀로 영실랑에게 시집을 갔다가 마침내 얼마 안 있어 법흥왕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기이한 꿈을 꾸고는 미실의 어머니 묘도를 낳게 되었더. <화랑세기> 11대 풍월주 하종조 편에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초에 법흥왕이 영실공과 내정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린 눈과 헝클어진 머리로 다가와 법흥제를 이끌며,
"좋은 꿈을 꾸었는데 이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라고 말하자, 법흥왕이 그를 보고 물었다.
"무슨 꿈인가?"
옥진궁주가 대답하기를,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라고 하니, 법흥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7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이니 빈첩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함께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옥진이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자 법흥왕이 다시 달래니,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니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빈으로 삼겠다."
그제야 옥진은 정막 안으로 들어가 영실과 사랑을 나누었다. 과연 영실과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나니 옥진은 법흥왕이 신통스럽다 여겨 그 이름을 묘도妙道라 하였다.
여기서 묘도가 바로 미실의 어머니다. 법흥왕은 애초에 약속대로 묘도를 부인으로 삼았는데, 그러나 법흥왕의 양기가 너무 센 반면 묘도의 성기가 너무 좁아서 매번 관계를 가질 때마다 괴로워하니 차차 멀리하다가 마침내는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만난 사람이 2세 풍월주인 미진부로 미실의 생부였다.
묘도가 미진부와의 사이에서 미실을 낳는 이야기는 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루는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 가슴 속에서 날아서 묘도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깨었다. 기이하게 여긴 옥진은 어떤 예감에 묘도의 침실을 찾아가 몰래 엿보니, 그때는 마침 묘도와 미진부공이 방사를 나누던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하며 이리 말하니,
"너희 부부는 이제 귀한 여자아이를 낳을 것이다."
마침내 묘도는 이날의 일로 미실을 낳게 되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이리 묘사되고 있었으니,
"용모가 절묘하며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소지왕의 후궁)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가지 꽃의 영검함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름다움의 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미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며 예로 든 이름들이다. 옥진은 미실의 외할머니이고, 오도는 그 옥진의 어머니이고, 벽화는 소지왕의 후궁이다. 옥진이나 묘도나 사실상 법흥왕의 정부였던 점에 비추어 굳이 미실의 아름다움을 그들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은 바로 이들이 하나의 계통을 이루기 때문이리라. <화랑세기>의 내용이 사실임을 전제할 때 아마도 이들이 당시의 대원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아름다움의 극에 이른 용모를 타고난 미실에게 옥진은 어려서부터 모계로써 전해지는 방중술을 가르쳤다. 아마도 정실인 진골정통에 비해 정부 - 혹은 후비로써 성적인 쾌락을 담당했던 대원신통이었던 만큼 그것은 그들의 존재이유였을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그래서,
옥진이
"이 아이는 오도를 부흥시킬만 하다."
라고 말하고는 주위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와 가무를 가르쳤다.
라고 적고 있는데, 그야말로 대원신통의 종통을 이을 재목으로써 조기교육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종통으로써 앞날이 순탄할 것만 같았던 미실의 삶은 시작부터 꼬이게 되었으니, 진흥왕의 태후였던 지소태후가 진흥왕의 이부동복의 형제이자 자신의 아들인 세종 전군으로 하여금 공경의 여자들을 궁에 모아놓고 마음에 드는 미녀를 고르게 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다른 미모를 지니고 있던 미실은 세종의 눈에 들었고, 미실은 그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연히 옥진은 이런 전혀 뜻밖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네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는 것이었겠느냐?"
여기서 숙모라 함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로써, 옥진은 처음부터 미실을 그녀의 숙모인 사도왕후를 쫓아 진흥왕의 후궁으로 들일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옥진의 우려섞인 탄식을 들은 미실의 대답은 당찼다.
"빈첩의 도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왕을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즉 옥진이 영실랑의 부인으로 있으며 법흥왕을 모셨듯, 자신도 세종의 아내로 있으면서 진흥왕을 섬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말에 비로소 옥진은 걱정을 덜고 크게 기뻐하게 되었으니,
"이 아니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
말 그대로 대원신통에게 색공色供 - 즉 섹스는 곧 도 -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결국 궁으로 들어간 미실은 얼마지 않아 "깊이 빠져들어 거동을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세종 전군을 깊이 매료시켜 사로잡았고, 이제 남은 것은 왕을 유혹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쉬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때 미실을 크게 곤란에 처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지소태후가 미실의 숙모인 사도왕후를 내몰려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말했듯 진골성통은 주로 왕비를 배출했기에 지소태후는 진골성통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 당시 왕후이던 사도왕후는 미실의 숙모로써 경쟁관계에 있던 대원신통이었다. 당연히 지소태후는 그런 사도왕후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같은 진골성통에 속하는 숙명공주를 옹후로 세우려 일을 꾀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사도왕후를 깊이 사랑하던 진흥왕의 반대로 인해 뜻이 좌절되자 그만 같은 대원신통이던 미실에게로 불똥이 튄 것이었다.
"네게 전군의 의복과 음식을 받들라고 했지 누가 색사로 어지럽히라고 했느냐?"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지소태후는 왕의 어머니였고, 또 사도왕후의 일로 왕 또한 지소태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아직 어리던 미실은 눈물을 흘리고 궁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것은 아직 어리고 미약하던 시절의, 장차 그녀의 일생을 뒤바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첫번째 좌절이었다. 이로써 어쩌면 외할머니인 옥진처럼 왕의 정부로써 만족하고 살았을 미실의 일생은 진흥왕에서 진평왕까지 삼 대를 아우르며 신라의 왕실을 쥐고 흔드는 여걸의 그것으로 완전히 바뀌고 만다.
여기까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고증과는 담을 쌓은 제작자나, 고증을 따지면 미친 놈 취급하는 팬들에 환멸을 느껴 사극을 아예 보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천추태후도, 선덕여왕도 그래서 보지 않고 있는데... 사실 천추태후에 대해 한 번 쓰려 했었다. 그러다 귀찮아서 제끼고, 선덕여왕도 아예 제끼려다가 너무 요즘 글을 안 쓰는 것 같아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책장을 뒤져 대충 긁적인다. 써놓고 보니 완전 야설이지만 워낙에 <화랑세기>의 내용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알아서 걸러읽기를...
근친상간이란 말이 없었음이 아니라.... 예전엔 사람이 많지 않은관계로 또한, 왕족은 왕족의 씨를 대물림하여야한다는 즉: 고유혈통 계승이란...따라서 질부와 조카등등 직접자기새끼 아닌이상은 다 취 할 수 있었음. 즉: 형의 딸, 아우의 딸, 서로서로 나누어 가지니 형부가 작은아버지가 여보당신이요 삼촌이 당신,여보로 등등 그러니 왕의 골통이 아이큐 100이하로 추락하는결과를 초래 함.
옛날에 근친혼이란 자체가 단어가 없지 않았나 싶내요. 조선시대들면서 성리학이 나오고 족보가 활성화되고 질서가 생기면서 근친혼이 무시되고 짐승처럼 되어버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생명"이 아니었나 싶고요. 고조선이나 고구려 부여 등을 보면 친족은 모두 가족형제이고 살아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숙명처럼 얼혀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윤리는 당시엔 진리나 절대가 아닌 삶에 아니면 존재의 연속성과 얼마나 부합니 되느냐에 따라 결정이 되지 않았나 싶고요.
근친상간이란 말이 없었음이 아니라.... 예전엔 사람이 많지 않은관계로 또한, 왕족은 왕족의 씨를 대물림하여야한다는 즉: 고유혈통 계승이란...따라서 질부와 조카등등 직접자기새끼 아닌이상은 다 취 할 수 있었음. 즉: 형의 딸, 아우의 딸, 서로서로 나누어 가지니 형부가 작은아버지가 여보당신이요 삼촌이 당신,여보로 등등 그러니 왕의 골통이 아이큐 100이하로 추락하는결과를 초래 함.
흉노족 박,석,김.... 이 흉노족의 풍습을 그나마 잘 기록한 게 화랑세기라고 보는데.... 주인장 말대로 화랑세기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또 필사본의 내용을 전면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도 없고... 하여간, 유물로만 본다면, 문무왕 비석대로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
사로 6촌을 정복 또는 제휴하면서 세력을 다진 흉노족의 왕조였슴..
배만 다르면 같은 애비아래의 형제들도 결혼했었슴....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니고 이집트나 유럽등도 다 신라나 마찬가지여슴...일례로 크레오파트랃 형제들도 같은 부모밑의 남매간 결혼했다는거 알런지들 몰라?...신라도 당시의 일반적인 룰에 따랐을 뿐이지 지금의 잣대로 궁시렁거릴 일은 아니다.
화랑세기는 백퍼센트 위작입나다
박창화는 일본왕실도서관에 근무했는데 많은 음란 역사소설을 썼고 주몽에 대한 위서를 만들려 한 전력도 있습니다
위서로 만들어 발표는 못하고 죽었는데 몇십년 뒤 1989년 발표된 것입니다
혹시 일본의 개입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학계 대부분이 위서라고 단정지었는데 이영훈교수느 이종욱교수등이 진서라 주장하는데 이영훈-일본과 연관 있는 것 아시죠?
우리나라는 흉노족 국가이다. 흉노국가였던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신라가 흉노국이라는 증거는 역사기록과 신라고분의 유물등에서 객관적 평가를 하면 움직일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화랑세기는 진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관습이 흉노족관습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 받치고 있는 것은 문무왕비문과 여러 중국사료.. 거기에 신라고분에서 춮토되는 금관, 동복, 로마유물, 적곽목곽분인 흉노식분묘등이 있다. 멀리 이집트에서 유래한 편두라는 신라의 풍습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흉노족 국가라는 많은 관련사실을 알고 싶으면 아래를 클릭하시길..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uid=195449&cline=12&board_id=ht_defence:001006
편두는 남방 해양계 풍습입니다. 이집트,마야,가야, 폴리네시아 제부족 등이죠. 흉노는 아닙니다.
그리고 금관 동복든은 흉노의 유물이 아니라 스키타이의 양식이죠.
로마의 문물은 이때 이미 인도및 중국과의 교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단지 고구려나 백제에서 발견 안된것은 무덤 양식이 도굴에 약한 방식 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석'목곽분이 흉노식이란데는 이의 없습니다.
시대상황을 잘 받아들입시다. 유교가 이나라를 점령하기전까지는 모계중심사회였던것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입니다. 유교가 이나라를 발전시겼을지는 몰라도 남성중심사회로 폐허를 낳은것도 무시는못하겠지요 ㅠ.ㅠ 잘나든 못나든 그사회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라는것을 인정을 하면 좋지않을까요??? 유교사상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