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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글을 쓸 때 기억을 더듬으면, 오히려 한참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더 선명히 떠오른다. 최근에 읽은 책일수록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유는 역시 수용성의 차이 때문이다.
어려서야 뭣도 모르니까 그냥 책을 읽으면 그런가보다 한다. 그러나 나이 들면 그게 아니다. 머리도 굳고 그동안 쌓아 온 지식이며 경험이며 자기 세계도 굳건하기에 책을 읽는다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무척 힘들다. 그래서 항상 시비를 건다.
"오호, 그래?" "그래서?" "그래서 뭐?" "요건 아닌 것 같은데?" "훗! 헛소리는!"
대학교수고 뭐고 소용없다. 인류의 고전이고 뭐고 다 쥐뿔이다. 이미 형성된 자아를 허물기엔 그들의 이름값이라는 건 정말 하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그 내용으로서 나를 설득해야 하는데, 이미 자기 고집이 만들어진 나이에 그게 쉬울 리 있나.
그래서 어린 시절 읽은 책들은 고스란히 기억나는 반면, 나이 들어서 읽은 책들은 온통 뒤섞여 있다. 기존에 알던 것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 비판하고 반박하고 조롱하고 비웃던 기억들, 그래서 나더러 출전 이야기하라면 못하는 거다. 도대체 생각이 나야 말이지. 아예 모르는 분야면 조금 나은데 조금이라도 알면 항상 같은 반복이다.
그나마 요즘 들어 그런 걸 조금 깨닫고 나니 편견을 지우고 읽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조금의 틈만 보이면 저자를 비웃고 조롱하고 딴지걸고 내 멋대로 편집하기가 일쑤지만 그나마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느낌이다.
배운다는 게 그렇다. 배운다는 건 먼저 자신을 백지로 돌리는 거다. 백지로 돌리고 부르는 바를 받아쓰는 거다. 아니 아예 복사하는 거다. 온전히, 그가 말하는 바, 생각하는 바, 행동하는 바, 주장하는 바, 그 모든 것을 백지가 된 내게 옮겨 적는 거다.
가르침에 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래서다. 사람이 자기를 지우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된다. 자아라 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부수기에도 버거운 것이다. 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나로써 지배되지 않는 또 하나가 자아인 것이다. 그저 부수려 한다고 부수고 다시 지으려 한다고 다시 지을 수 있다면 부처고 신선이고 다 필요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자아를 부수기 위한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필요하다. 임제가 사미의 손가락을 잘라 그의 깨달음을 도왔듯 외부로부터의 어떤 충격을 통해 자아를 부수고 그 빈 자리에 새로운 자아를 쌓는 거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권위, 카리스마라 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를 짓누르고 지배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 그리고 그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 그로써 사람은 자신을 지우고 백지에서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그 극치가 바로 종교이고 이데올로기고 사상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제대로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상대를 존경해야 한다. 존경하고 우러러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한다. 낮추고 또 낮추어 백지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배워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공자를 일컬어 무슨 봉건적 신분질서의 옹호자처럼 여기지만, 공자는 논어에서도 말했듯 사람을 쓰는데는 귀천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 가운데 반드시 한 사람은 스승이 있다는 것도 빈부와 귀천을 떠난 인간 자체에 대한 존경이며 존중의 의미다. 하긴 어느 종교지도자가 인간을 차별하라 가르쳤겠는가만...
공자가 주나라의 종묘에 가서 거기 관리자들에게 예를 물은 것도 그래서다. 예에 대해서야 당대에 공자 이상의 권위자는 없었다. 그러나 주나라 종묘에서의 예란 그들 관리자들이 전문가이고 권위자였다. 그러면 어찌해야겠는가? 그곳은 주나라의 종묘다. 공자의 권위가 아닌 그 관리자들의 권위가 더 통용되는 곳이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을 지우고 물어 배움으로써 그 배움의 깊이를 더했다. 그게 배운다는 거다.
가까운 예로 자식과 어울려 같이 게임을 한다고 해 보자. 아무래도 나이 든 늙다리보다야 어린아이들 쪽이 훨씬 게임을 잘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자식이! 어른이 말씀하시면 좀 들어!"
이럴까?"
"여기 이거 말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가르쳐 주겠니?"
이럴까?
하물며 아이를 대하는데도 이런데 선생을 대하는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가르쳐주는 선생을 대하면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담탱이! 한 번 가르쳐 보시지?"
이럴까?
"이 부분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아마 실수하신 거겠지..."
이럴까?
부모를 존경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형제를 존경하고, 주위의 어른들을 존경하고, 그리고 나보다 어린 현명한 친구들을 존경하고, 세상엔 참 존경할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그만큼 도저히 용납 못할 쓰레기들도 널렸지만 둘러보면 배워야 할 사람도, 가르침을 청해야 할 사람도, 그래서 자신을 낮추고 존경해야 할 사람들이 참으로 널렸다.
물론 존경한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존경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생활이 지저분해도 음악이 좋으면 음악을 존경하는 것이고, 다른 것 아무것도 못해도 구두수선 하나에 있어 남다른 경지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존경할 가치는 있는 것이다. 어차피 완벽한 인간이란 없기에 그 장점 하나만으로도 배울 것이 있으면 존경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 가운데 그나마 인정해 줄만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면서 또한 유교 자신의 모순으로 인해 잊혀진 것이 또 이것이다. 가르침을 청할 때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라. 그러나 어떤가, 현실에서는?
"어른이 말씀하시는 데 감히!" "어허! 어린 녀석이 돼먹지 못해서는!" "무슨 버르장머리냐?"
이런 인간들을 두고 나이 헛먹었다고 그런다. 평생 그러다 죽을 살아있는 화석들이다. 머리는 굳고 배울 의지는 없고 앞으로 나아갈 희망도 없고, 그냥 그대로 평생 살다 죽고 말 썩은 인생들이다.
문제는 어린 녀석들까지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뭐라? 선생이 뭐 어떻다? 부모는 또 뭐 어떻고? 하긴 선생같지 않은 선생도 많고 부모같지 않은 부모도 많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판단하는가? 누가 그것을 판단하고 결정짓는가? 그럴만한 주제가 되는가? 그들의 자아는 그런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내릴 만큼 성숙해 있는가?
내가 감히 얼라들이 선생을 평가하겠다는 소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아무리 병신같고, 아무리 쓰레기같고, 아무리 개새끼같고 좆밥같은 선생이라도 일단은 선생이다. 그리고 그 병신같고 쓰레기같고 개새끼에 좆밥이라 해도 그것을 판단할 주제가 얼라들은 아직 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아는가?
사실 우리나라 공교육 붕괴하고 선생들 질이 떨어진 데는 이런 부분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이 존경받고 그래서 선생 스스로 존경에 응하려 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부모부터 선생을 존경하지 않는다. 촌지를 갖다바치고 이런저런 선물을 보내는 것도 선생을 아이를 대학보낼 도구로 여겨서지 존경해서가 아니다. 돈 갖다 바치고 뒤에서 비웃고, 선물 갖다 바치고 뒤에서 욕하고, 그것을 또 아이들은 듣고, 설마 선생들은 모를까?
물론 선생들도 바뀌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 학생은 제자이면서 또한 스승이다. 가르친다고 온전히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것도 많다. 가르치느라 지나쳤던 부분들에 대해 학생들로부터 지적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의 부족함이 학생의 눈을 통해 드러날 수도 있다. 어찌해야겠는가? 배우는 거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는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스승이란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바꾸고 발전시키고...
그러나 어떻게 해도 일단 완성된 자아는 다시 되돌리기 힘들다. 일단 자아가 완성되어 굳어지고 나면 어지간한 외적 충격으로도 그것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때로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인격 자체가 부서지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는 어려서 하라는 거다. 특히 독서는 어려서 하는 쪽이 좋다. 공부야 일단 필요해서 하는 거니 목적성도 있고, 권위가 동반되어 가르치지 싫어도 쫓아갈 수밖에 없지만, 독서는 오로지 자신의 자유의지가 시켜서 하는 것이기에 더욱 어려서 할 필요가 있다. 선입견 없이, 편견 없이, 그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가리지 않는 편이 좋다. 무슨 입시대비 논술용으로 나온 그런 다이제스트가 아니라, 별의 별 헛소리 뻘소리 개소리까지 일단은 다 읽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소화하는 것은 이후의 몫이고.
하여튼 지나고 나면 생각나는 건 아주 어려서 읽은 책들이다. 아주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 읽었던 책들, 지금 돌이켜 보면 결코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전부였던 것들. 자라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보물들이다. 평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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