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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파의 시조가 누구인가 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북송 때의 도사 장삼봉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또 남송 때의 도사 장삼풍이라고도 하고, 대만의 저명한 무협소설작가 진융은 자신의 소설 "의천도룡기"에서 원말명초의 도사 장삼봉을 무당파의 시조로 묘사하고 있어 최근 이것이 마치 정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 이렇게 여러 설이 갈리냐면 장삼봉이든 장삼풍이든 중국식 발음으로 모두 쟝산펑이 되기 때문이다. 소림사도 그래서 소령사가 되었다가 소능사가 되었다가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중국의 저명한 무술연구가인 당호의 <소림무당고>에 따르면 이들마저도 모두 전설상의 인물로써 실존여부가 의심스럽다고 하고 있다. 다만 원말명초의 장삼봉의 경우 명사 방기전에 장삼봉의 금단과 부록, 검술, 권술등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 각각 기어, 전기, 남엄, 오룡에게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나마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명대에 영락제가 도사 장삼봉의 행방을 찾으라 한 것도 사실은 남경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건문제를 찾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며 의혹어린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아, 더 정확히는 이미 건문제는 죽었고 단지 조카를 죽였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의혹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전설에 따르면
"양한 균방 부근에 산이 있어 그 둘레가 팔백리에 달하니...산의 이름은 태화였다. 한데 원무신이 이 곳에서 득도하여 이름을 무당이라 고쳤다. 원무신이 아니면 이 산을 당할 수 없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오룡령응만수궁비)
"원천지기의 신이 건원씨 때 정락국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이 되던 해, 그는 요마를 소탕하겠다는 일념으로 부모의 곁을 떠났다. 하여 옥청자원군으로부터 무극상도를 전수받았다. 그후 바다를 건너 중원으로 돌아와 명산을 순례하던 중 어느날 한 산봉오리에 올랐다. 당시 그 산에 는 자소면양이란 요귀가 기거하고 있었으니 원천지기의 신은 검은 낙타의 뿔로 만든 검으로 요귀를 죽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했다. 그 산이 바 로 무당산이다."(무당산오룡령비)
라고 각각 전하고 있으니 무당산이 오래전부터 도교의 성산으로 널리 알려졌음은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원나라 사람 식자홀이 그 전설의 허구를 파해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균주성에 부임했다. 무당산이 복지라는 것을 일찍이 전해 들은 것이 있어 전설에 대한 사실을 파헤쳐 나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애기가 제각기 달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고 하고는 있지만 어차피 민간의 신앙이라는 게 항상 사실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니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도교적인 믿음이 장삼봉이라고 하는 전설적인 도사와 그를 시조로 하는 무당파라고 하는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아무튼 영락제가 장삼봉을 찾기 위해 천하의 명을 내리고, 무당산에 도관을 짓고 토지와 돈을 내린 이후 무당파는 명나라 조정의 관리 아래 있었다. 이를테면 황립도관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무당산의 관리자는 조정의 태감이었다. 무협소설에서 항상 악역으로 등장하는 내시가 무당산이 실질적인 최고책임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선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무술문파로서 무당파가 어떠한 문파였는가는 솔직히 헤아리기 무척 힘들다. 무엇보다 무당파 자체가 이미 멸문한 상태라, 전해지는 무술도 없고, 남아 있는 계승자도 없고, 말 그대로 멸문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다만 무당파의 도사 서본선이 지은 <무당비공>에 따르면 각각 천화포접공, 건곤구공, 태극구공, 면장공, 구궁장공, 야행술공, 태극기공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조금은 그 실체를 짐작하게 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소림곤, 무당검, 아미창 할 때 무당검의 검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20세기 초 중국에서 할거하던 군벌 가운데 텐진의 이성량이 무당검의 계승자로 천하제일검의 칭호를 받은 바 있다는 점에서 아마 누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소림에서 곤법이 먼저 일어나고 권법이 행해진 것처럼 무당에서도 기공이 먼저 있고 나중에 검법이 행해진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문제는 지금 현재 이 가운데 무당파에 전해지는 무술이 하나도 없다는 것인데, 어이없게도 지금 무당파에서 행해지는 무술이라는 것이 무당태극권, 무당팔괘권, 무당형의권이 전부다.
그러나 태극권은 아다시피 하남성 정주 진가구의 진왕정이, 팔괘권은 하북성 문안현 주가무 출신의 동해천이, 형의권은 원래 산서에서 심의육합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던 것을 이낙능이 배워 형의권이라 이름하고 다시 정한 것이다. 보다시피 어느 것 하나 무당파와 관계가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태극권의 경우만 진왕정이 무당파에서 배웠다는 장발이라는 이와 교류하며 태극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래도 역시 태극권이 창시자는 진왕정이고 무당파와는 그저 간접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 20세기 초 내가권으로 분류되는 이들 세 무술의 전승자들이 모여 이것을 무당권이라 정의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써 중국공산당 정부에 의해서 외가권은 소림권, 내가권은 무당권이라 분류한 것이 지금에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현재 무당파에서 행해지고 있는 무술 가운데 실제 무당파의 무술은 하나도 없다 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 앞서 말했듯 무당파는 원래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그로부터 지원을 받아 유지하던 도관이었다. 그런데 청말 서세동점의 혼란기에 청조마저 흔들리다 멸망해 버리니 어디 비빌 언덕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더구나 국공내전에 이은 문화대혁명으로 소림사의 고승들이 그러하듯 무당파의 도사들도 모조리 죽이거나 내쫓아 버렸으니. 그나마 소림사는 고승들이 돌아와 명맥이라도 이었지 무당파는 그것조차 없었다. 결국 남아 있는 것은 빈자리를 채우느라 정부에서 임명한 공무원들 뿐인 것이다. 무당파와는 전혀 상관없는. 원래 무당파가 그렇게 일어났으니 원래대로 돌아간 셈이라 하겠다. 무술만 빼고.
아무튼 역시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소림을 비롯 팔극권, 팔괘권, 형의권, 태극권 등의 여러 무술문파들이 그래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나름대로 성세를 유지하는 것에 반해 무당파의 무술이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무당파의 무술이라는 게 흔히 이야기되어지는 것과는 달리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긴 무당파가 주력한 것은 양생술, 앞서 언급한 무당파에서 행해지던 기공들을 보아도 무술이라기보다는 신체단련을 위한 양생술이 대부분이다. 검법이 유명하다 하지만 원래 중국검이라는 자체가 실전용이라기에는 거리가 멀고. 즉 청말의 혼란기에도 나름대로 쓰임이 있던 다른 무술들에 비해 무당파의 무술들은 별로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당파가 한창 쇠퇴하던 20세기 초에 대부분의 무술들이 재정립되고 있었으니 그 시기를 놓친 무당파로서는 살아남기가 거의 불가능했겠지.
또 모르겠다. 중국관광을 갔다가 어느 절벽에 떨어졌더니 무당파의 도사 하나가 남긴 비급이 떡하니 발견될지도. 아니면 어디선가 남모르게 무당파의 무술을 배우고 익히고 전수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러한 상상이 현실화되기 전에는 무당파란 무협소설속에만 등장하는 이름에 불과하다 하겠다. 아니면 관광수입을 노린 광대놀음이거나.
북숭소림, 남존무당, 청대에도 이미 천하의 무술은 소림과 무당에서 모두 나왔다 여겨지고 있었다. 20세기 초 태극권과 팔괘권, 형의권의 수련자들이 모여 이를 두고 무당권이라 명명한 것도 천하의 내가권은 모두 무당에서 나왔다는 세간의 속설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태극권이 무당파에서 나왔다는 설마저 심지어 계승자에 의해서까지 정설처럼 믿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냉엄함이랄까? 그래도 무언가 있었기에 당대의 무술가들 사이에서도 무당파를 높이 여기는 것이 있었을 텐데, 격변하는 시대 속에 무당파만 뒤쳐져 역사의 저편에 이름만 남기고 말았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랄까? 호북성 균현 무당산에 가도 더 이상 사람들이 바라는 무당파는 없다는 것이다. 아쉽지만.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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