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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전의 유럽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자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마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그 속에는 빠져있다는 것을. 바로 부엌이다.
물론 귀족이나 부르주아 이상의 저택에서는 부엌을 찾아 볼 수 있다. 부엌이라기보다는 전용주방이다. 빵을 굽기 위한 화덕도 있고 각종 요리를 할 수 있는 버너도 있는. 그러나 도시노동자나 농민의 집에서 그것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왜? 비싸니까.
밥을 먹는 우리야 물이 끓는 온도까지만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다. 대략 100도 조금 넘는 온도만 유지할 수 있으면 물이 끓고 쌀이 익어 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빵을 굽자면 기본이 180도, 그것도 미리 예열을 해야 하고 또 상당기간 그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심지어 바게뜨 종류는 200도 이상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러자면 도대체 얼마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일까?
지금이야 에너지 과잉이라 집에서 작은 케잌 하나 굽는데도 얼마든지 오븐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값비싼 나무와 석탄을 때서 연료를 삼아야 했던 시절에는 그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나무를 하려 해도 거의 모든 숲은 국왕이나 귀족인 영주의 소유였고 그 숲에서 나무를 할 수 있는 권리도 영주에게 있었다. 물론 농민들은 제한적으로만 나무를 베어 쓸 수 있었고, 도시노동자들은 영주들이 소유한 숲에서 사들인 나무를 비싼 값을 주고 사서 써야 했다. 그런데 과연 그 비싸고 귀한 나무를 빵 하나 굽자고 써야 했을까? 아니 쓸 수 있었을까?
원래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빵을 먹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빵을 굽는 화덕은 공공의 재산이었다.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빵을 구워먹는 사람들의 경우 마을 공동의 소유의 화덕에 모여 모두가 먹을 빵을 한꺼번에 굽는다. 그쪽이 아무래도 연료의 소모가 적으니까. 영주의 소유라서가 아니라 귀중한 연료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덕을 함께 쓰는 것이 유리하다. 다만 중세유럽의 장원의 경우 영주의 봉건적인 특권과 방앗간과 화덕을 짓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영주에게 그 권리가 독점되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생산이 부족하던 시대, 막대한 세금을 내고 나면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건 그나마 밀과 약간의 푸성귀와 가축에게서 나온 생산물이 전부였다. 그 가운데 빵은 앞서 말했듯 마을 공동의 화덕에서 함께 구웠다. 그렇게 빵이 해결되면 남은 식재료들은 기껏해야 한 데 썰어 넣고 물을 부어 끓여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도는 주방 없이도 냄비 하나와 식칼 하나면 충분했다. 즉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부엌의 존재 자체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도시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도시는 나무를 할 수 있는 숲을 갖고 있지 못하니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일단 연료를 쓰자 하면 외부로부터 나무를 사와야 했고 그 비용은 당연하게도 장원의 농민들이 지불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았다. 밀 역시 당시만 해도 밀가루로 파는 것이 아니라 알곡 형태로 사다가 직접 가루를 내어 먹어야 했는데 그 역시 비용이었다.
그래서 도시에서도 어지간히 부유한 경우가 아니라면 빵을 직접 집에서 구워 먹는 일은 드물었다. 아마 당시의 시대상을 다룬 소설등을 떠올려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도 집에서 빵을 구워먹기보다는 큰 화덕을 가지고 한꺼번에 대량의 밀을 사서 가루를 내어 한꺼번에 많은 빵을 구워낼 수 있는 전문적인 업자에게서 사 먹었다. 돈이 남아돌아 굳이 전문 빵집에서 사 먹은 것이 아니라 개인이 부담하기엔 그 비용이 너무 비쌌기에 빵을 사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 당시 유럽의 도시의 주거환경도 큰 몫을 했는데, 당시 유럽의 도시의 집이라는 것이 주방을 따로 둘 만큼 넉넉한 편이 못 되었다. 도시면적은 한정되어 있고, 그런데 사람은 많고, 그렇다고 모두가 넓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대개는 침실 겸 거실 겸 화장실로 쓰이는 한 칸이 전부였다. 물론 그곳에는 빵을 굽는 화덕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따로 요리를 하기 위한 시설도 버거웠고. 이것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 일본 역시 에도와 쿄토를 중심으로 매식문화가 발달하고 있었다. 집은 그저 들어가 자는 용도로,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는 그런 식이다.
다시 말해 당시까지만 해도 가정요리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가정요리라는 것이 가능한 계층이란 집에 주방을 만들 수 있는 매우 부유한 특권계층에 한정되었다. 그나마 중산층에서 집에 주방을 만들고 요리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이후부터, 석탄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생산기술의 향상과 제국주의침략의 결과로 막대한 부와 물자가 유럽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실상 유럽의 가정요리란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나마도 대부분의 경우 삶은 감자나 감자를 넣은 스튜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근대사회에서도 에너지의 확보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당시 연료로 쓰이던 나무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연료로만 쓰기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전략물자였다. 나무 정도는 풍족하게 썼을 것이라 여기기 쉬운 것과는 달리 결코 나무는 그렇게 흔하거나 쉽게 쓸 수 있는 자원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밥이 아닌 빵을 주식으로 삼은 탓에 그래서 당시 유럽 사람들은 더 높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빵을 먹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내야 했다. 나무의 소비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 무엇보다 비싸니까 - 그러면서 빵은 먹어야 하는. 그런 과정에서 전문적인 빵집이 등장하고 그러한 필요에 의해 빵을 기점으로 외식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가정요리이든 전문외식문화든 거기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앞서 말했지 않은가. 볏짚이나 삭정이만 있어도 밥은 지을 수 있다고. 밥 지으면서 뚝배기 하나 아궁이에 얹으면 찌개도 끓인다. 물론 덕분에 19세기 말에 이르면 한양 인근의 산이 완전히 헐벗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같은 도시이면서도 한양에서는 부뚜막을 짓고 직접 밥을 짓는 것이 가능했던 탓이다.
참고로 중국의 경우는 이미 11세기, 북송 무렵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가 여럿 생겨나면서 심각한 나무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시인구가 늘고 에너지사용이 덩달아 높아지면서 더 이상 나무로만 에너지를 쓰기에는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석탄을 중요한 연료로 사용하게 되었고, 석탄을 사용하면서 불의 요리라 일컬어지는 지금 중국 요리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인구의 밀집으로 인한 주거환경의 열화와 에너지 효율과 비용의 문제가 중국에서도 매식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었던 셈이다.
아무튼 에너지과잉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지금은 혼자 먹기 위한 아주 적은 양의 과자를 굽는데도 태연히 오븐을 쓰고 있다. 하긴 오븐만이 문제인가? 한겨울에도 난방 제대로 된 건물에 들어가면 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하는데. 한여름에도 추워서 덜덜 떨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확실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인데...
어찌되었거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데 있어 가장 중대한 문제는 먹는 것과 그리고 태우는 것의 문제라 하겠다. 굶고는 못살고 불 없이도 못 사니까. 그런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이야 뭐... 석유 다 떨어지면 한 번 생각해 볼까? 옛날 얘기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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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롯 2008.08.10 11:12 [119.20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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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태양열 오븐 같은 것으로 며칠 분 음식을 날씨좋을 때 한꺼번에 익히게 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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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leads 2008.08.11 11:13 [222.107.249.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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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미국살때 했던 생각인데... 우리는 밥을 해먹는데 그사람들은 이상하게 빵을 거의 사다가 먹더라구요. 우리처럼 매일 빵을 굽지는 않아요.. 빵이 주식인데 다 사다먹는다는.. 참 이상했어요. 그리고 주부들이 쇼핑할때보면 냉동식품을 카트에 산같이 싸가지고 사더라구요.. 우리는 반찬만들거리를 사는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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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08.08.11 15:20 [61.105.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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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싸 3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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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2008.08.11 15:21 [61.105.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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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티를 꼭 내요...
어쨋든 잘 보고 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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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2008.08.12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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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가 우리의 쌀가게 아닌감! 우리가 더 힘들지! 가서 밥해야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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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 2008.08.12 05:03 [86.15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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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주식은 빵보다는 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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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u33 2008.08.12 15:13 [122.128.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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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 잘 봤습니다.
동료, 친구라는 뜻의 company, companion의 어원이 com(같이)+pan(빵)+@로
빵을 같이 나누어 먹는 사이라는 것과 유사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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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성 2008.08.12 22:35 [71.242.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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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나라 음식이건 다잘먹고 생각나것은 인종사정없이 사다먹는 잡식 북극성,,,생각나는 추억에 음식들... 오늘은 한국식 내일은 일본식...그리고 또는 중국식.... 다음끼들은 미국식 아메리카스타일.... 각국음식 먹고사는맛에 산다 *(^;^)*아무리 좋음식을 내앞에놔봐라????????? 배부르면 맛없는것...배고플때 붕어빵 5개로 진수성찬맛에,,,,식객.... 성찬맛을보는... 맛은 최강 먹꺼리들... 배고파야 무엇이든 맛좋은 음식에 식사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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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석이 2008.09.23 12:12 [121.188.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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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이런 공동부엌 문화가 있엇어니 전염병이 돌아도 속수무첵으로 당할수밖에 없었겠어요. 공동 부엌을 담당하던 사람이 걸림 그마을은 쑥대밭이 된다는 것인대... 아무턴 글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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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해 2008.09.23 19:49 [120.143.16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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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해오늘교회서마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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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니 2008.11.23 22:09 [123.98.2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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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있어서 빵의 역사는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주로 그들은 호밀이나 귀리같은 것을 죽쑤어 먹었는데, 아랍인들이 쌀을 알려주었던 시기쯤에 둥근 화덕을 알려주면서 바삭바삭한 빵맛을 알게 된 것이죠. 물론 이후에 면발도 알게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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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니 2008.11.23 22:10 [123.98.2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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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시대만 해도 이들은 중국인들이 먹는 기다랗고 하얀 음식물에 호기심을 보였답니다. 고기음식이 발달한 요인에는 이런 먹거리의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은 척박한 땅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대 로마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멸치젓 같은 것을 가룸(Garum)이라 부르며 항상 식탁위에 놓아두면서 누워서 음식을 먹었답니다. 물론 포크는 르네상스 이후에 아랍에서 도입되었고, 그들은 오로지 손과 칼로써 말 그대로 야만 스럽게 뜯어먹고 뼈다귀를 버리는 것이 자랑스런 족속들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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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gp123 2009.05.1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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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오해군요!
이스트를 넣은 빵이 사용된것은 언제부터라 생각하싶니까? 서양의 빵이 오늘날의 것처럼 화려하다 생각하나요?
서양의 옛빵은 오늘날의 크래커와 별다를바가 없던 물건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첸을 보면 더욱 이해가 쉬운데 효모를 거의 쓰지않고 번철에 지져내듯이 구운게 바로 고대의
빵입니다. 그리고 이들중 효모를 듬뿍써서만들다가 실패가 되어버린 빵에서 맥주가 아오고요.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맥주를 뺑드-비(마시는 빵)이라고 부르는거죠.
이러한 고대의 빵은 바삭하고 물기가 적은데다가 소금을 함유하고 잇어 오랫동안 먹을수 있었습니다.
어떤것은 고기까지 갈아넣어 물에 넣고 끓이면 훌륭한 수프가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말이죠. 빵은 주식으로서 그리 큰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인의 식탁은 보리나 귀리를 빻아 만든죽과 조금의 채소가 거의 전부였지요.
우럽인들은 빵을 먹는다라는 환상. 무서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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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gp123 2009.05.1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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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꾸 환타지게임의 도시와 실제 중세도시를 헷갈리시는데 도시라고 해서
모조리 돌바닥으로 포장하고 벽돌로 집지은것 아닙니다.
왕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이엉을 엮어 하늘을 가린집이 대부분이 었지요.
이들은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길을 잃을지경인 숲에서 하루하루 나무를 스스로해오거나
영지의 장사(관리인)가 고용한 사람들로부터 가져온 나무를 사서 썼습니다.
이것은 중요한것으로 동서양을 불문합니다. 오죽하면 고려의 전시과에서 시柴는 땔감을 뜻하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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