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禑遜于江華。 太祖欲擇立王氏之後, 敏修以禑舅李琳之族, 欲立禑子昌, 問於李穡, 遂定議立之。 우왕이 왕위를 사양하고 강화(江華)에 있었다. 태조가 왕씨(王氏)의 후손을 골라 왕으로 세우고자 하니, 조민수(曺敏修)가 우왕의 장인(丈人) 이임(李琳)의 인척(姻戚)인 관계로써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우고자 하여, 이색(李穡)에게 묻고 마침내 의논을 정하여 창을 세웠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4장 A면 【영인본】 1책 12면
원래 쿠데타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 마침내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그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올린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와 실록에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그러면 일단 우왕을 폐위시키기까지의 주변상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禑以曺敏修爲左侍中, 以太祖爲右侍中。 典校副令尹紹宗, 因鄭地求見太祖, 懷《?光傳》以獻, 令趙仁沃讀而聽之。 仁沃極陳復立王氏之議。 우왕이 조민수(曺敏修)를 좌시중(左侍中)으로 삼고, 태조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삼았다. 전교 부령(典校副令)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하여 태조 보기를 청하여 곽광전(?光傳)을 가져와서 바치므로,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그것을 읽게 하고 들었다. 인옥이 다시 왕씨(王氏)를 왕으로 세우자는 의논을 남김없이 진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4장 A면 【영인본】 1책 12면
復行洪武年號,襲大明衣服,禁胡服,罷禹玄寶,以曹敏修,爲左侍中,我太祖,爲右侍中,趙浚,簽書密直司事,兼大司憲,諸將,皆復職,時,朝廷,聞本國之變,上疏請征,帝,欲親卜于宗廟,方致齋,適本國使者至,卽罷齋。 다시 홍무(洪武) 연호를 시행하고, 명 나라 의복을 입고, 호복(胡服)을 금하며, 우현보를 파면하고,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으로, 조준을 첨서밀직삼사 겸 대사헌으로 삼고, 여러 장수를 모두 복직시켰다. 이때 명 나라 조정에서 본국에 출병하는 변고를 듣고 황제께 글을 올려 고려를 치기를 청하니, 황제가 종묘에 점을 치려고 재계(齋戒)를 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본국의 사자가 이르니 곧 재계를 그만두었다.
이 부분에서도 고려사절요 쪽이 좀 더 상세하다. 원래 위화도회군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작은 나라인 고려가 큰 나라인 명을 공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명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이미 대세가 명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데 명에 패해 쫓겨난 북원을 믿고 명을 공격한다는 것은 자칫 고려의 안위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더구나 당시 고려는 잦은 외침과 전란으로 말미암아 피폐할대로 피폐해져 요동정벌은 커녕 명이 먼저 공격해 온다고 해도 그것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성공확률도 낮고 실패하면 그야말로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요동정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명의 철령이북 영토에 대한 반환요구도 우왕이 즉위하고 이인임과 친원파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명과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 명과의 관계를 경색시킨 결과였다. 원래 공민왕이 아직 살아 있고, 명과의 관계가 좋았을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 명이 군을 요동에 주둔시키고 철령이북을 요구하며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북원과 연계하려 할 경우 그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물론 홍무제 주원장의 성격상 만만하다 여겨지면 고려를 아예 명의 영토로 흡수하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즉 다시 말해 명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공민왕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굳이 요동으로 원정을 떠나지 않고도 명의 군사적인 압력이나 철령이북에 대한 요구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도 그랬다.
따라서 당연히 쿠데타가 성공한 이상에는 처음의 명분도 명분이었거니와 당장 요동정벌을 포기한 이상 당면한 명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명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사대관계의 복원이다. 명의 연호를 쓰고, 명의 복식을 입고, 그리고 명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당시 홍무제 주원장 역시 고려에서 요동을 노리고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예 고려를 정벌하려 준비하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종묘에 점을 친다는 것은 단순한 군사원정이 아닌 천자로서 천명을 받아 불의한 제후국을 정벌하려 한다는 것일 텐데 - 원래 정벌이라는 게 그런 뜻이다. - 이렇게 되면 그저 국경에서 한두번 투닥거리는 수준이 아니게 된다. 천자로서 천명을 받아 정벌에 나선 이상 어떻게 해서든 고려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만큼 북원이 아직 건재한 상황에 명에게 있어 북원과 밀착해 있는 고려가 무척이나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뜻으로, 자칫 이대로 고려와 명이 부딪히게 되었다면 조선은 커녕 고려 자신이 역사에서 지워져버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때에 고려로부터 공민왕 때의 우호적인 관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사신이 왔으니, 이로써 주원장은 굳이 고려를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으니 고려로서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래는 창왕이 즉위하고 사신으로 갔던 박의중이 가지고 온 주원장의 답서다. 우황청심환 하나 먼저 먹고서 읽기 시작하자.
朴宜中,還自京師,禮部,奉聖旨,咨曰,表云鐵嶺人戶事,祖宗以來,其文和高定等州,本隷高麗,以王所言,其地合隷高麗,以理勢言之,其數州之地,?爲元統,今合隷遼東,高麗所言,未可輕信,必待詳察然後已,且高麗,隔大海限鴨綠,始古自爲聲敎,然,數被中國中朝征伐者,蓋爲能生?端,昔者,逆臣弑君,朕命絶交,彼遣人請聽約束,數番不允,數請不已,然後,索歲貢以表誠,方許交往,彼雖稱貢歲幣,連歲皆不如約,未幾遣人訴難,准其訴難,將前貢削去,只許歲貢種馬五十匹,決以諸色務純,以此貢比前貢,萬百分之一耳,及其進也,皆非奉上之物,盡皆駑下之獸,此侮之一也,表稱謝恩,以馬爲禮,及其至也,皆?斑雜色,雖行商,亦不以爲用者,侮之二也,時或遣人,?說溫台杭紹蘇松之民,密?事勢,致令發露,侮之三也,朕嘗諭諸來使,毋作是姦,休禁民生理,聽民水陸往來,明白興販,何事不成,何機不得,暗生姦詐,誘引下民,致彼??金帛,妄言事勢,公然被小人之誣,是其愚哉,侮之四也洪武二十年春,朕以匹帛置遼左,與高麗易馬伐胡,彼駑臣等,皆以駑來,易以價,較之本國一馬之價,可得二三,今二三馬價,易一不堪陪馬,終不爲朕用,侮之五也,噫,高麗地,三面環海,一面負山,周數千里,其中豈無賢智哉,凡所交往,此以誠交,彼以,詐合,將欲罷交,彼又卑辭,若此之爲,朕不知其何心,且朕觀累朝征伐高麗者,漢伐四次,爲其數寇邊境故滅之,魏伐二次,爲其陰懷二心,與吳通好故,屠其所都,晉伐一次,爲其侮慢無禮故,焚其宮室,?男女五萬口奴之,隋伐二次,爲其寇遼西闕蕃禮故,討降之,唐伐四次,爲其弑君幷兄弟爭立故,平其地,置爲九都督府,遼伐四次,爲其弑君,幷反覆寇亂故,焚其宮室,斬亂臣康肇等,數萬人,金伐一次,爲其殺使臣故,屠其民,元伐五次,爲其納逋逃殺使者,及朝廷所置官故,興師往討,其王,竄耽羅,捕殺之,原其?端,皆高麗自取之也,非中國帝王,好呑幷而欲土地者也,今鐵嶺之地。 박의중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예부(禮部)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鐵嶺)의 인호(人戶)에 대한 일은 조종(祖宗) 이래로 문주(文州)ㆍ화주(和州)ㆍ고주(高州)ㆍ정주(定州) 등 고을이 본래 고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였으니, 왕의 말대로 하면 그 땅이 고려에 예속되어야 마땅하나, 이치와 사세로 말하면 그 몇 고을의 땅을 지난날에는 원 나라에서 통치하였으니, 지금 요동에 예속되어야 마땅하고, 고려의 말하는 것을 경솔히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끝까지 살피고야 말겠다. 또 고려는 큰 바다로 막히고 압록강으로 한계하여, 일찍이 옛날에는 따로 나라를 이루었으나, 중국의 역대 조정의 정벌을 자주 입은 것은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날에 역신(逆臣)이 왕을 죽였으므로 짐이 절교를 명하였는데, 저들이 사람을 보내 약속을 따르기를 청하였다. 여러 번을 윤허하지 않고, 자주 청하여 마지않은 뒤에야 세공을 요구하여 성의를 표하게 하고, 교통을 허락하였다. 저들이 조공한다고 하였으나 해마다 올리는 공물이 약속과 같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사람을 보내서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그 어렵다고 호소하는 것을 받아들여, 전일에 정한 공물을 깎아버리고 다만 해마다 종마(種馬) 50필을 바치되 모두 순종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조공물은 그전 공물에 비교하면 만분, 백분의 일뿐인데, 그 가져오는 것을 보면 모두 윗사람에게 바치는 물건이 못 되며, 모두가 노둔하고 저급한 짐승이었다. 이것이 상국을 첫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표문에 사은(謝恩)한다 하면서 예물로 보낸 말이 왔는데 모두 얼룩진 잡색이어서 행상하는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이니, 두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때로는 간혹 사람을 보내어 몰래 온(溫)ㆍ태(台)ㆍ항(杭)ㆍ소(蘇)ㆍ송(松) 등 제주의 백성들을 꾀어 비밀리에 사세를 엿보다가 발각되었으니, 세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짐이 일찍이 여러 사신에게 이르기를, '이런 간계를 꾸미지 말고 백성의 생업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백성들이 수륙으로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으니 무슨 일인들 되지 않으며, 무슨 기밀인들 얻지 못하겠는가. 몰래 간사한 꾀를 내어 백성을 유인하여, 그들이 금백(金帛)에 속아 망령되이 사세를 말하게 함으로써 공연히 소인에게 속임을 당했으니 이는 어리석은 짓이니 네 번째로 무시한 것이요, 홍무 20년 봄에 짐이 면포와 비단을 요동(遼東)에 가져다 두고 고려와 말을 무역하여 오랑캐를 치게 하였는데, 저 배신(陪臣)들이 모두 나쁜 말을 가지고 와서 바꾸었다. 값으로 치면 본국의 말 한 마리 값으로 두세 마리는 살 수 있는데, 이제 본국 말 두세 마리의 값으로 한 마리를 바꾸어도 너무 노둔하여 마침내 짐에게 소용이 되지 않았으니, 다섯 번째로 무시한 것이다. 아아, 고려의 땅이 삼면은 바다로 싸이고, 일면은 산을 지고 있어 주위가 수천리니, 그 가운데 어찌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없으랴. 서로 왕래하는 데 있어서 이편에서 성의로 사귀면 저편에서 거짓으로 합하고, 장차 국교를 파하려고 하면 저들이 또 공손한 말로 청하니, 이러한 행위가 짐은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도다. 또 짐이 역대의 조정이 고려를 정벌한 것을 보면, 한(漢) 나라는 네 차례를 쳤는데, 자주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쳐서 멸하였고, 위(魏)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은밀히 두 마음을 품고 오(吳) 나라와 우호를 통하기 때문에 그 도성을 도륙하였고, 진(晉)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모욕하고 교만하여 예가 없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남녀 5만을 사로잡아 노예를 만들었고, 수(隋) 나라는 두 차례를 쳤는데 요서(遼西)를 침범하고 속국으로서의 예를 빠뜨렸기 때문에 쳐서 항복을 받았고, 당 나라는 네 차례를 정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형제가 서로 왕위를 다투기 때문에 그 땅을 평정하여 아홉군데의 도독부(都督府)를 두었고, 요(遼) 나라는 네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왕을 죽이고 아울러 반복이 많으며 침범하여 난을 꾸몄기 때문에 그 궁실을 불사르고, 난신 강조(康兆) 등 수만 명을 베었고, 금(金) 나라는 한 차례를 쳤는데 사신을 죽였기 때문에 그 백성을 도륙하였고, 원 나라는 다섯 차례를 토벌하였는데 도망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자와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죽였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쳤으며, 그 왕이 탐라(耽羅)로 도망갔으므로 잡아 죽였다. 그 분쟁의 단서를 따져 보면 모두 고려가 자초한 것이요, 중국의 제왕이 병탄을 좋아하고 토지를 욕심낸 것은 아니다. 지금 철령의 땅은 왕의 나라에서 할말이 있겠지마는, 탐라의 섬은 옛적에 원 세조가 말을 기르던 장소이다. 지금 원 나라 자손으로 짐에게 귀순한 자가 매우 많으니, 짐이 반드시 원 나라의 자손을 끊지 않으려 한다. 여러 왕을 섬 가운데 두고 군사 수만으로 지키면서, 양절(兩浙)에서 양식을 공급해 주어 원 나라의 후사를 보존하여 원 나라 자손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에서 편안히 살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민왕 때부터 사신으로 가는 자가 금은과 토산물을 많이 싸가지고 가서 채색 비단과 가벼운 보화를 샀다. 비록 유식한 자라도 권세있는 자의 부탁을 못 이겨 개인의 짐이 조공으로 바치는 물건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말하기를, “고려 사람들은 사대(事大)를 빙자하여 무역을 하려고 온다." 하였다. 임견미와 염흥방이 집권하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나 박의중(朴宜中)의 행장에는 한 물건도 없었다. 요동에서 호송하는 진무(鎭撫) 서현(徐顯)이 베를 요구하자 의중이 주머니를 털어 보이고 입고 있던 모시 옷을 벗어 주었다. 현이 그 청렴을 칭찬하고 예부에 보고하자 황제가 불러 보고 후하게 대접하였고, 또 예부에 명하여 회동관(會同館)에서 잔치하는데 전원(前元)의 평장원사(平章院使)의 위에 앉게 하고, 드디어 철령에 위(衛)를 설치하는 의논을 중지하였다.
참으로 구구절절 사람 성질 돋우는 적반하장격의 내용들이다. 아무튼 중국에서 고려 - 즉 고구려로부터 한반도를 침략했던 것이 오로지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이 잘못하여 그 죄를 벌하려 군사를 보냈다는 것이니 혈압이 오르다 못해 쓰러질 소리들이다. 그러나 이게 또 천자라는 거다. 중화라는 것이고. 권력을 쥔다는 것이 또 그런 거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천자의 행위이기에 옳은 것이고, 천자의 중화이기에 정당한 것이고,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정의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야 어찌되었든 말이야 열받지만 기왕에 굽히고 들어가기로 한 이상 말이야 어떻든 철령이북에 대한 고려의 권리가 인정되고 명에서 위를 설치하고자 했던 논의가 중단되었으니 고려로서는 일단 하나는 얻은 셈이라 하겠다. 이것이 또 외교다. 굴욕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이익을 얻어내는 것. 이로써 고려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목적 하나를 달성했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명과의 관계개선과 더불어 너무나도 당연한 쿠데타의 성공에 따른 논공행상도 있었으니 결국 쿠데타에 가장 공이 컸던 이성계와 조민수가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으로서 조정의 권력을 나누어가지게 된다. 물론 모든 공과 모든 힘은 이성계에게 있었다. 그러나 역시 역대의 모든 쿠데타가 그러하듯 명분상 조민수를 이성계와 같은 항렬에 세웠을 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해임된 우현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쿠데타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우왕에 의해 해임당한 것이었다..
禑夜與宦竪八十餘人, 被甲馳至太祖及曺敏修、邊安烈第, 以皆屯軍門外不在家, 故不得害而還。 우왕이 밤에 환자(宦者) 80여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태조 및 조민수·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달려왔으나, 이들이 모두 전문(殿門) 밖에서 군사를 둔치고 집에 있지 아니한 까닭으로 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4장 A면 【영인본】 1책 12면
戊申,禑,夜與宦?八十餘人皆甲,馳至我太祖及曹敏修,邊安烈第,皆屯軍門外,不在家故,不得害而還,己酉,諸將,會議崇仁門,使李和,趙仁璧,沈德符,王安德,詣闕,請悉出宮中兵仗鞍馬,庚戌,放禑于江華,初,諸將,請出寧妃,禑曰,若出此妃,子當偕出,於是諸元帥,領兵守闕,請出江華,禑,不得已乃出,執鞭據鞍曰,日已暮矣,左右俯伏泣下,無應之者,遂與寧妃及燕雙飛,出會賓門,向江華百官奉傳國寶,獻于定妃。 史臣曰,秦政,晉睿,事涉疑似,至於呂氏,立他人子爲惠帝後,朱文公,直筆特書,略無假借,其所以爲天下後世戒嚴矣,恭愍王,嘗以無子爲憂,宜求宗室之賢者嗣之,乃取旽子,陰養宮中,以爲身後之計,卒不能保其身,禑亦荒淫暴虐,身亡家敗,鳴편009 呼,禑固不足論,恭愍,亦獨何心哉。 辛亥,曹敏修,以定妃敎,立禑子昌,太祖,於回軍之時,與敏修,議復立王後,敏修,亦以爲然,及是日,太祖,欲擇立王氏,敏修,念仁任薦拔之恩,謀立仁任外兄弟李琳之女謹妃之子昌,恐諸將違己意立王氏,以韓山君李穡,爲時名儒,欲藉其言,密問於穡,穡,亦欲立昌,乃曰,當立前王之子,太祖,謂敏修曰,其如回軍時所言何,敏修作色曰,元子之立,韓山君已定策矣,何可違也,遂立昌,年九歲。 무신일에 우가 환자 80여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와 조민수ㆍ변안열의 집에 달려 갔으나 모두 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집에 있지 않으므로 해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기유일에 제장들이 숭인문에서 회의하고, 이화(李和)ㆍ조인벽(趙仁璧)ㆍ심덕부ㆍ왕안덕을 시켜 대궐에 나아가 궁중의 병기와 안장 달린 말을 모조리 내어 놓기를 청하였다. 경술일에 우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처음에 모든 장수들이 영비를 내쫓기를 청하니 우가 이르기를, “만일 영비를 내쫓는다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우가 할 수 없이 나와서 채찍을 잡고 안장에 걸터앉으며 이르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하니, 측근들이 꿇어 엎드려 울면서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ㆍ연쌍비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을 나와서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百官)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定妃)에게 바쳤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진(秦) 나라의 정(政)과 진(晋) 나라의 예(睿)에 대한 일은 애매모호하지만, 여씨(呂氏)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서 혜제(惠帝)의 후사(後嗣)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주문공(朱文公)이 곧은 붓으로 특별히 써서 조금도 용서가 없었으니, 그 천하 후세의 경계를 삼은 것이 엄하였다. 공민왕이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마땅히 종실의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後嗣)를 삼아야 할 것인데, 신돈의 자식을 취하여 몰래 궁중에서 길러 죽은 뒤의 계책을 하였다가 마침내 자기 몸도 보전하지 못하였고, 우도 음란하고 포학하여 몸이 망하고 왕실이 무너졌으니, 우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공민왕은 또한 홀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하였다. 신해일에 조민수가 정비의 전교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태조가 회군할 때에 민수와 의논하기를,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 하였다. 민수 또한 그렇게 여겼었는데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왕씨를 가려 세우려 하니, 민수가 인임이 자기를 천거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인임의 외형제(外兄弟)인 이임(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인 창을 세우기를 꾀하나, 장수들이 자기 뜻을 어기고 왕씨를 세울까 두려워하여 한산군 이색(李穡)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 말을 빙자하고자 비밀리에 색에게 물었다. 색 또한 창을 세우고자 하여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태조가 민수에게 말하기를, “회군할 때에 한 말은 어찌 된 것인가." 하니, 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원자를 세우는 것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계책을 정하였으니 어떻게 어길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창을 세었는데 나이 9세였다. <고려사절요 우왕 14년 무진년>
바로 이 부분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절요의 차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은 조선이 건국되고 불과 20여 년만에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아직 고려에 대한 향수가 많이 남아 있었고, 곳곳에 고려의 유신들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조선조정의 권위와 지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태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사실여부보다는 조선의 건국과 지배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반면 고려사절요는 이미 조선의 지배가 어느 정도 확고해진 조선 문종 때에 편찬된 책이다. 이때는 고려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지고 있었고, 조선의 지배는 기층민중에게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다. 굳이 조선조정이 나서서 조선의 건국과 지배에 대해 그 정당성을 말하지 않아도 조선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현재였다. 따라서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고려보다는 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태조실록과 고려사절요가 같은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전혀 다르게 쓰고 있는 이유였다.
이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태조실록에 이미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당시 조민수와 이색 등과 우왕을 폐하고 왕씨 가운데 새로운 왕을 세우겠노라 결정을 내렸다는 내용을 싣기란 무리였을 것이다. 고려사절요에서도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왕의 폐위는 어디까지나 명분을 갖춘 것이어야 했다.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거나,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암우한 군주였다거나, 그리고 쿠데타군에 환관을 이끌고 공격해 오고, 죄인인 최영의 딸인 영비를 감싸 폐출시키라는 신하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를 강화도로 보냈다, - 그나마 태조실록에서는 우왕이 스스로 왕위를 사양하고 강화도로 물러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사실은 그런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이미 위화도에서 이성계와 조민수와 이색이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같은 창을 왕으로 세우고자 합의를 했으면서도 이들 세 사람의 입장은 서로 각각 달랐는데, 이색은 유학자로서 전왕의 아들인 창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조민수는 이인임과의 인연때문에라도 장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창이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이성계로서서는 누가 되었든 다루기 쉬운 자가 왕이 되는 것이 편했을 것이었으니 9살 난 창이 더없이 적합해 보였을 것이었다. 특히 조민수의 경우 군사력에서도 정치력에서도 이미 고려의 모든 군권을 장악하고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성계와 겨루기에 한참 그 힘이 부족했기에 비록 모든 권력을 잃고 귀양까지 가 있지만 구세력에 대한 이인임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창왕이 즉위하고 조민수가 이인임의 복권을 추진했을 때는 이미 귀양지에서 죽어 있어 아무런 역할도 하지는 못했지만.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여러 이유들로 말미암아 위화도회군 이후 고려의 국정을 주도하게 된 이성계와 이색, 조민수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창을 왕위에 올리게 되니, 고려의 마지막왕도 되지 못하는 창왕이 그이다. 아니 채 1년도 재위하지 못한 채 창왕조차도 되지 못하고 조선왕조 내내 신돈의 손자 신창이라 멸시어린 대접을 받던 불우한 존재. 역사는 바야흐로 고려의 멸망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기 시작한다.
쿠데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교체를 그 목적으로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서자면 먼저 기존의 권력부터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바로 무너뜨리려 하면 반드시 반발이 일어난다. 비록 당장은 내가 우위에 있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장차 큰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중간단계로서 기존의 권력을 해체하고 권위를 떨어뜨리는 권력의 교체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가 보인 모습도 그러한 쿠데타의 기본을 철저히 준수하는 모범적인 것이었다. 조민수를 대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 책임과 비난을 분산하고, 우왕을 왕에서 내몰고 창왕을 세움으로써 최소한의 명분은 지키면서도 왕권을 추락시켜 자신의 아래로 만들고, 그리고 나서 하나하나 제거해간다. 조민수도, 우왕도, 창왕도, 그리고 그 끝에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과 이성계 - 이단 자신의 즉위. 쿠데타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 그린 듯 보여준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당시 고려는 수명을 다 해 가고 있었던 터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엉망이 되어버린 가운데 무모한 요동정벌까지 시도하고 있으니, 조선이 아니더라도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선이 고려를 대신함으로써 고려의 역사와 정체성이 끊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철령이북에 대한 명의 계획을 철회시킨 그 자체만으로도 위화도회군은 당시 시대적 필요에 따른 봉기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평가야 어디까지나 쿠데타이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슬슬 끝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