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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멋대로 한국사
이성계 = 이단... 16
2008/07/05 오후 11:36 | 내멋대로 한국사

辛禑十四年戊辰正月。 時, 侍中李仁任用事, 其黨領三司林堅味、左使廉興邦、贊成事都吉敷等分據要途, 賣官?爵, 奪人田丁, 肆其貪虐, 公私?竭。 太祖與崔瑩憤其所爲, 同心協力, 導禑除之, 三韓大悅, 道路歌舞。 堅味等誅, 以太祖守門下侍中。
신우(辛禑) 14년(1388) 무진 정월, 이때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니, 그의 무리 영삼사(領三司) 임견미(林堅味)·좌사(左使) 염흥방(廉興邦)·찬성사(贊成事) 도길부(都吉敷) 등이 요로(要路)에 나누어 점거하여 돈을 받고 관작을 팔며, 남의 전정(田丁)을 빼앗아 그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여, 관청과 민간이 빈곤하여졌다. 태조가 최영과 더불어 그들의 하는 짓을 분히 여겨,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우왕을 인도해서 이들을 제거하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여 길가는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견미(堅味) 등이 참형(斬刑)을 당하매 태조로써 수 문하 시중(守門下侍中)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1장 A면
【영인본】 1책 11면


이인임은 원래 성주지방에서 대대로 호장의 직위를 세습해 오던 향리 출신으로 말하자면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중앙과는 큰 영고가 없는 신진세력이었다. 그런 그가 문음으로 관직에 올라 조정의 요직을 거치고 마침내는 우왕대에 이르러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신돈의 존재가 컸었다.

물론 이인임 자신도 아주 무능하지는 않아서 홍건적이 침입했을 당시 서경존무사가 되어 서경을 지켰으며,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파천했을 때는 개경수복전에도 참가하는 등 나름대로 활약을 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 덕흥군의 난이 있었을 때 서북면도순무사 겸 평양윤이 되어 보급을 담당하면서 덕흥군과 최유를 쫓아 압록강을 건너려던 공민왕을 제지하면서부터였는데, 그때 그 공을 인정받아 삼산우사의 지위에 오르고 순성동덕보리공신에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신돈이 등장하고 신돈에 의해 강력한 개혁정책이 추진되면서 신진세력으로서 전민변정도감의 주무로서 사실상 신돈 일파의 정치적 실무를 장악하게 되니 이로써 이인임은 고려의 중앙정계에서 확고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이인임의 정치적인 재능은 바로 이때부터 그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공민왕이 신돈을 숙청할 때 신돈의 일파 가운데서도 실세였던 이인임은 그러나 보수적인 무신집단 - 최영으로 대표되는 - 과 제휴함으로써 오히려 그 지위와 권력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민왕이 홍륜등에 의해 암살당하고 조정이 일대 혼란에 빠지자 스스로 나서서 주도적으로 우왕을 왕위에 올림으로써 이후 우왕이 즉위하고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

아래는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우왕의 즉위에 대한 기사다.

丁亥,太后及侍中慶復興,欲立宗親,侍中李仁任,欲立禑,議猶豫未決,都堂相視,莫敢發言,判三司事李壽山曰,今日之計,當在宗室永寧君瑜,密直王安德等,希仁任意,大言曰,王,以大君爲後,捨此何求,仁任,率百官,遂立禑,年十歲。
정해일에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은 종친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고, 시중 이인임은 우를 세우고자 하여 의논이 주저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도당에서도 서로 쳐다만 보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마땅히 종실 영녕군(永寧君) 유(瑜)에게 있어야 된다." 하였다. 밀직 왕안덕(王安德) 등이 인임의 뜻에 맞추어 크게 말하기를, “왕이 이미 대군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서 구할 것이냐." 하였다. 인임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禑)를 왕으로 세웠으니, 나이 10세였다.

이인임이 왜 굳이 우를 왕으로 올렸는가는 확실치 않다. 사실 이인임은 국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점에서 간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찌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킬 것을 최영에게 경고하기도 했거니와 임견미 등이 최영을 제거하고자 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기도 했다. 왜구가 개경을 노리자 서울을 철원으로 옮기려 시도했다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그 역시 따지고 보면 고려 왕실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 이해할 수도 있다. 특히 이인임의 우왕에 대한 대우는 남다른 바가 있었는데,

時,仁任,待禑如畜壻
이때에 인임이 우를 데릴사위같이 접대하여,

어쩌면 이 글귀에 그 모든 답이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인임의 공식호칭은 광평부원군으로서 우왕의 비 근비가 이인임의 딸이었다. 더구나 봉가이라고 하는 계집종을 우왕에게 안기면서 더욱 이인임의 집을 찾게 되었으니 우왕이 그의 집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왕이 매번 이인임의 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즐기는 것이나, 이인임이 그것을 맞아 환대하는 것이 그저 장인과 사위, 왕과 총신 사이의 관계라 보기에는 어쩐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이인임이 굳이 출생도 불분명한 우를 왕으로 올리려 한 것은, 첫째 일단 공민왕의 아들로 되어 있고 공민왕이 살았을 적에 이미 후계자로 지목한 바도 있기에 정통성에서 가장 앞서고, 만일 이보다 정통성에서 우위에 있지 못한 이가 왕이 될 경우 그로 인해 혼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우가 원래 신돈의 집에서 신돈의 집에 머물고 있던 반야에게서 태어나 신돈의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당시 이인임이 신돈의 무리로서 신돈의 집에 자주 출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다. 신돈에 대한 의리나, 어린 시절을 지켜 보아 온 우에 대한 연민이나, 물론 권력에 대한 탐욕이 더 크게 작용했겠지만 아마 그런 것들이 있었기에 이인임과 우의 관계가 더욱 각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당연히 개인적인 상상으로 검증된 바는 없다. 그 점 염두에 두도록.

아무튼 이렇게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이인임이 몰락에 이르게 된 것은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禑,聞申雅奪人田,大怒,命囚其子孝溫,壻前三司左尹朴保寧,孝溫,逃,命巡軍圍雅家大索,獲之不獲,皆杖流角山。○前密直副使趙?,斬廉興邦家奴李光于白州,初,光,奪?田,?,乞哀於興邦,興邦歸之,光,又奪其田,陵辱之,?,詣光哀請,光,益縱虐,?,不勝憤,以數十騎,圍斬之,火其家,馳入京,將白興邦,興邦聞之大怒,誣?謀叛,令巡軍執?母妻,遣四百餘騎于白州,捕?,騎至碧瀾渡,舟人云,?以五騎已馳入京矣。
전 밀직부사 조반(趙?)이 염흥방의 집 종 이광(李光)을 백주(白州)에서 베었다. 이전에 이광이 조반의 토지를 빼앗았다. 반이 흥방에게 애걸하여, 흥방이 이를 돌려주었으나, 광이 또 그 밭을 빼앗고 능욕하였다. 반이 광에게 가서 애걸하니, 광이 더욱 포학을 부렸다. 반이 분을 견디지 못하여 수십 기로 광을 포위하여 베고 그 집을 불지르고, 서울로 달려 들어와 흥방에게 고하려 하였다. 흥방이 듣고 크게 노하여, 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고, 순군을 시켜 반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고, 4백여 기를 백주에 보내어 반을 잡게 하였다. 기병이 벽란도(碧瀾渡)에 이르자,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반이 다섯 기병을 데리고 이미 서울로 달려 들어갔다." 하였다.

이미 이 전에 우왕은 모든 창고와 궁사와 전민을 - 그러니까 백성과 토지와 국가재산을 함부로 빼앗아 차지한 자를 이름을 적어 아뢰라 명령을 내린 바 있었는데,

禑,謂都堂曰,凡奪占倉庫宮司田民者,具名以聞,都堂自嫌,遂閣不行。
우가 도당에 이르기를, “모든 창고와 궁사(宮司)의 전민(田民)을 빼앗아 차지한 자는 그 이름을 자세히 적어 아뢰어라." 하니, 도당이 스스로 혐의가 있어 드디어 덮어두고 실행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염흥방도 아니고 그 하인이 밀직부사까지 지낸 조반의 땅을 빼앗고 희롱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염흥방은 조반이 자신의 하인을 죽인 것에 분노하여 조반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 무고하고 그를 잡아들이게 하고 있으니 제아무리 권신인 염흥방이라도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은 이미 오래전에 한참 넘어 있었다.

春正月丙子朔,廉興邦,勸禑下令,購捕趙?甚急,鄭子喬,獲?繫巡軍,時,興邦爲巡軍上萬戶,興邦及都萬戶王福海,副萬戶都吉敷,李光甫,委官尹珍,姜淮伯,與臺諫典法雜訊,?曰,六七貪?宰相,縱奴四方,奪人田民,?虐百姓,是大賊也,今斬李光者,唯以輔國家除民賊耳,何云謀叛,?掠竟日不服,興邦,必欲?誣服,治極慘酷,?,罵辱不小屈曰,我欲斬汝國賊,汝與我相訟者也,何鞫我爲興邦,怒益盛,使人亂擊其口,福海,假睡不聞,餘亦無敢如何,獨左司議金若采,以爲不可而止之,庚辰,禑如崔第,?左右與語良久,蓋議?獄也,是日,興邦,復欲鞫?,赴巡軍,請獄官及臺諫,皆不至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염흥방(廉興邦)이 우에게 현상금을 걸고 급히 조반(趙?)을 잡으라는 영을 내리도록 권하였다. 정자교(鄭子喬)가 조반을 붙잡아서 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때에 흥방이 순군 상만호(上萬戶)로 있었는데, 흥방과 도만호 왕복해ㆍ부만호 도길부ㆍ이광보(李光甫)ㆍ위관(委官) 윤진(尹珍)ㆍ강회백(姜淮伯)이 대간(臺諫)ㆍ전법(典法)과 함께 신문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런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풀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을 모질게 해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李光)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도와 인민의 적을 제거하려 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흥방은 기어이 조반을 허위자백시키려고 매우 참혹하게 치죄(治罪)하였다. 조반은 꾸짖고 욕하며 조금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국적인 너희들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고, 너는 나와 서로 송사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흥방은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마구 그 입을 치게 하였다. 복해는 졸면서 듣지 못하는 체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좌사의 김약채(金若采)만이 불가하다 하여 고문을 그치게 하였다.
경진일에 신우가 최영의 집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대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한 것이었다. 이날 흥방은 다시 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이르러 옥간과 대간을 청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壬午,禑,命釋?及其母妻,又賜醫藥與?,下令曰,宰相旣富,可停頒祿,其先頒隊伍之無食者,遂下興邦于巡軍,國人皆喜曰,吾君明矣。
임오일에 우(禑)가 반과 그 어미와 아내를 석방하라고 명하고, 또 의약(醫藥)과 갖옷[?]을 주고, 영을 내리기를, “재상들이 이미 부자가 되었으니 녹을 주는 것을 정지하고 우선 먹을 것이 없는 군대에 나누어 주라." 하고, 드디어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었다. 국인(國人)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은 명철하시다." 하였다.

결국 군의 숙장이자 최고 실력자로서 이인임 만큼이나 신뢰하고 있던 최영과 상의하여 최반과 그 처와 어미를 풀어주고 흥방을 순군옥에 가두게 되니, 이로써 그동안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해 온 이인임을 비롯 염흥방, 임견미 등 그 일파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은 고작 염흥방의 하인이 주인의 권력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고자 한 것이었으니, 주변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야 말로 동서고금을 통해 권력을 보다 오래도록 보존하는 길이라 하겠다.
 
癸未,禑,命崔及我太祖,陳兵宿衛,下領三司事林堅味,贊成事都吉敷于獄,使者,至堅味第,堅味拒命,?聲謂使者曰,七日頒祿,古制也,今無故而廢之,豈爲君之道乎,自古人主之非,臣下有正之者,遂欲爲亂,使人奔告其黨,甲騎已遮路不得出,歸告堅味,堅味家在男山北,旣而仰見男山,騎已成列,堅味膽落就擒,嘆曰,廣平君,誤我矣,先是,堅味,興邦,忌瑩淸直,且握重兵,常欲加害,李仁任,固止之故云,巡軍,不窮治興邦等罪,禑,大怒,以前評理王安德,爲都萬戶,知門下李居仁,爲上萬戶,我恭靖王,爲副萬戶,命更鞫之,密直副使林?,勒歸私家,贊成事王禑海,賜姓爲子故不以爲疑,使領兵,與崔瑩等宿衛,是夜,福海,有異志,以突騎數十,詐稱?巡宮城,馳入瑩軍,瑩,方被甲踞胡床,指揮偏裨,目不交睫,福海,不得爲害,乙酉,下右侍中李成林,大司憲廉廷秀,知密直金永珍,及福海,?于巡軍,丙戌,興邦,堅味,吉敷,成林,廷秀,福海,永珍,?,伏誅,又斬其族黨,贊成事金用輝,三司右使李存性,判開城林齊味,密直洪徵,任獻,朴仁貴,潘德海,李希蕃,開城尹鄭?,典法判書李?,右侍中潘益淳,右司議辛權,大護軍辛鳳生,執義李美生,佐郞洪尙淵,判內府寺事金萬興等,遂籍堅味等家,於是,分遣諸道察訪,推刷所奪田民,還其主,存性,仁任從孫,初效仁任所爲,後頗悔悟,其尹西京,治爲第一,民追慕之,獻,家無擔石之儲,獄官欲免之,,以獻藉興邦勢,爲大司憲,未嘗發一直言,遂斬之,時人悲之,萬興,堅味家臣,貪暴姦?,專摠田民之簿,初,仁任謀竊國柄,援立辛禑,一國威福在其掌握,支黨根據,而堅味爲其腹心,疾惡文臣,放黜甚衆,興邦亦在其中,後,堅味,以興邦世家大族,請與爲婚,興邦,亦懲前日流貶,謀欲全身,惟仁任堅味之言是從,於是,以興邦同母兄李成林,爲侍中,權姦親黨,布列兩府,中外要職,無非私人,秉權自恣,賣官?爵,奪人土田,籠山絡野,奪人奴婢,千百爲群,州縣津驛陵寢宮庫之田,皆被攘取,背主之隷,逃賦之民,歸之如市,廉使守令,莫敢徵發,民散寇熾,公私?竭,及我太祖,憤其所爲,同心協力,導禑除之,國人大悅,道路歌舞。
계미일에 우가 최영과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영삼사사 임견미와 찬성사 도길부를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사자가 견미에 집에 이르니, 견미는 명을 거역하고 노한 목소리로 사자에게 말하기를, “7일마다 녹을 주는 것은 옛 제도이다. 지금 까닭없이 폐지하니 어찌 임금의 도리인가. 옛날부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은 신하가 있다." 하고, 드디어 난을 일으키려고 사람을 시켜 달려가 그 무리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말을 탄 갑사(甲士)들이 이미 길을 막아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와서 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의 집이 남산(男山) 북쪽에 있었는데 조금 뒤에 남산을 쳐다보니 기병(騎兵)이 이미 대열을 이루었다. 견미는 매우 놀라 저항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는데 탄식하기를, “광평군(廣平君)이 나를 그르치었다." 하였다. 이에 앞서 견미의 흥방이 최영이 맑고 정직하며, 또 중요한 병권을 쥐고 있음을 꺼리어 항상 해치려 하였으나, 이인임이 굳이 말렸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순군이 흥방 등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니, 우가 크게 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을 도만호로, 지문하(知門下) 이거인(李居仁)을 상만호로, 우리 공정왕(恭靖王)을 부만호로 삼아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밀직부사 임치(林?)는 강제로 자기 집에 돌려보내고, 찬성사 왕복해는 성(姓)을 주어 아들을 삼았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최영과 함께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복해가 다른 뜻이 있어서 돌격 기마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최영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이 갑옷을 입고 호상에 걸터앉아 부하 장수들을 지휘하여 눈을 부치지 않으니 복해가 해치지 못하였다.
을유일에 우시중(右侍中) 이성림(李成林), 대사헌 염정수(廉廷秀), 지밀직(知密直) 김영진(金永珍)ㆍ복해ㆍ치(치)를 순군옥에 가두었다.
병술일에 흥방ㆍ견미ㆍ길부ㆍ성림ㆍ정수ㆍ복해ㆍ영진ㆍ치를 처형하고, 또 그 족당(族黨) 찬성사 김용휘(金用輝), 삼사우사 이존성(李存性), 판개성(判開城) 임제미(林齊味), 밀직 홍징(洪徵)ㆍ임헌(任憲)ㆍ박인귀(朴仁貴)ㆍ반덕해(潘德海)ㆍ이희번(李希蕃), 개성 윤 정각(鄭慤), 전법판서 이송(李?), 우시중 반익순(潘益淳), 우사의 신권(辛權), 대호군 신봉생(辛鳳生), 집의 이미생(李美生), 좌랑 홍상연(洪尙淵),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김만흥(金萬興) 등을 베고, 드디어 견미 등의 집을 적몰하였다. 이에 여러 도에 찰방(察訪)을 나누어 보내어 빼앗겼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존성은 인임의 종손으로 처음에는 인임의 하는 짓을 본받았으나 뒤에는 자못 뉘우쳤다. 서경 윤(西京尹)으로 있을 때에는 치적이 제일이어서 백성들이 추모(追慕)하였다. 임헌은 집에는 한 섬의 저축도 없으므로 옥관이 면죄시키려 하였으나, 영이 임헌이 흥방의 세력을 빙자하여 대사헌이 되어도 곧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여, 드디어 베니, 당시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만흥은 견미의 가신(家臣)으로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간사하고 교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였다. 과거에 인임이 정권을 잡으려고 꾀하여 신우를 세우니, 한 나라의 권세가 그 손아귀 안에 있었고, 그 도당들이 이리저리 엉켰는데 견미는 그 심복이 되었다. 문신들을 미워하여 추방한 것이 매우 많았으니 흥방도 역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뒤에 견미는 흥방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이라 하여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흥방도 역시 전날 귀양갔던 것을 징계하여 몸을 보존하려고 꾀하여 오직 인임과 견미의 말만을 좇았다. 이에 흥방의 동모형(同母兄) 이성림(李成林)을 시중(侍中)으로 삼으니 권간(權奸)의 도당이 양부(兩府)에 깔려 있고, 안팎의 요직은 그들의 사당(私黨) 아닌 것이 없어서 권세를 잡아 마음대로 방자하게 관작을 팔고, 남의 전토를 빼앗아 산과 들을 모두 점령하며, 남의 노비를 뺏은 것이 천 백으로 떼를 이루었으니, 주현(州縣)ㆍ진역(津驛)ㆍ능침(陵寢)ㆍ궁고(宮庫)의 밭이 모두 침탈을 당하였다. 주인을 배반한 노예와 부세(賦稅)를 도피한 백성들이 저자같이 모여 들어서 안렴사와 수령이 감히 징발하지 못하였다. 백성은 이산하고, 도적은 성하여 공(公)과 사(私)의 재물이 고갈되었다. 그러나 최영과 우리 태조가 그들의 행위에 분격하여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우(禑)를 인도하여 그들을 제거하니, 국인(國人)이 크게 기뻐하여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한 번 기세를 타기 시작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임견미가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의 세력을 동원해 대항하고자 했을 때는 군부의 두 실력자 최영과 이성계가 각각 군을 이끌고 개경과 일대를 완벽히 장악함으로써 그토록 권세를 누리고 부와 세력을 쌓았음에도 임견미는 제대로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제압될 수밖에 없었다.

뒷처리도 빨랐다. 계미일에 최영과 이성계가 왕명을 받고 군을 이끌고 출동했으니 을유일이면 그로부터 이틀 뒤, 병술일이면 을유일 바로 다음이다. 원래 이런 일은 속도가 생명이라 - 자칫 여유를 두게 되면 반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 - 불과 사흘만에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왕복해 등 핵심인사를 모조리 도륙하고, 그 재산을 압수하여 원래 주인이 있을 경우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니 상황은 어느새 마무리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癸巳,斬瑞城君廉國寶,同知密直廉致中,前知密直全彬,密直副使安思祖,密直提學朴仲容,典法判書金乙鼎,大護軍金涵,辛靖,成均祭酒尹瑞,司憲掌令金肇,護軍崔遲,林孟陽,司僕正甘成旦,前江陵府使都希慶,宦者趙元吉等,五十餘人,皆被誅者族黨也。
계사일에 서성군(瑞城君) 염국보(廉國寶), 동지밀직 염치중(廉致中), 전 지밀직 전빈(全彬), 밀직부사 안사조(安思祖), 밀직제학 박중용(朴仲容), 전 법판서 김을정(金乙鼎), 대호군 김함(金涵)ㆍ신정(辛靖), 성균좨주(成均祭酒) 윤전(尹琠), 사헌장령 김조(金肇), 호군 최지(崔遲)ㆍ임맹양(林孟陽), 사복정 감성단(甘成旦), 전 강릉 부사 도희경(都希慶), 환자 조원길(趙元吉) 등 50여 명을 베었는데, 이는 모두 처형당한 임견미 등의 족당(族黨)이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십 수 년을 고려의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해 온 세력이 고작 이것이 전부일 리 없으니까. 그래서 단 사흘만에 거의 모든 것을 마무리지은 것이었고, 다시 일주일이 지난 뒤 나머지 잔당들을 철저히 잡아들여 처형하고 있다. 거의 번개불에 콩 구워먹는 수준인데, 그만큼 그렇게 서둘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로 임견미 등의 세력이 고려의 각 부분에 깊숙이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한 순간에 처리해낸 것이야 말로 최영과 이성계의 정치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하긴 어지간한 수준이었다면 임견미 등이 그렇게 손도 못 써보고 당하지는 않았겠지. 

以崔 ,爲門下侍中,我太祖守門下侍中,李穡,判三司事,禹玄寶,尹珍,安宗源,爲門下贊成事,文達漢,宋光美,安沼,爲門下評理,成石璘,爲政堂文學,王興,知門下事,印原寶,判密直司事。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수문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우현보ㆍ윤진ㆍ안종원을 문하찬성사로, 문달한(文達漢)ㆍ송광미(宋光美)ㆍ안소(安沼)를 문하평리로, 성석린(成石璘)을 정당문학으로, 왕흥을 지문하사로, 인원보(印原寶)를 판밀직사사로 삼았다.

당연히 난을 정리했으니 논공행상이 있다. 최영이 문하시중으로 그 공을 가장 높이 인정받았으니, 사실상 임견미 일파의 제거에 있어 최영이 모든 것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서열에 이성계가 있고 그 다음에 이색이 있다.

다만 이후 이인임과 그 일족을 처벌하고,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약간의 서로간의 입장의 차이가 드러났는데,

安置廣平府院君李仁任于京山府,竄前門下評理李仁敏于?林府,配烽卒,杖流大護軍李?,進士都兪于邊地,仁任,秉權日久,以柔?悅人,門客滿庭,各自以爲待己尤厚,誣陷忠良,殺戮無辜,時人,比之李猫,崔瑩,德仁任右己,乃白禑曰,仁任,決謀事大,鎭定國家,功可掩過,遂幷其子弟皆宥之,國人嘆曰,林廉之師,大賊漏網,又曰,正直崔公,私活老賊,?,仁任之孼子,而堅味之壻,兪,吉敷之子,而禹仁烈之壻,瑩,素與仁烈厚故,兪亦得免,又流前贊成事朴形于角山戍,知申事權執經于安東,右代言李稷于全州,形,仲容之父,執經,仁任之妾壻,稷,仁敏之子也,初,李仁復,惡仁任,仁敏之爲人曰,敗國亡宗者必是二弟也,其孫存性,果連坐。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을 경산부(京山府)에 안치하고, 전 문하평리 이인민(李仁敏)을 계림부(?林府)에 귀양보내어 봉화대(烽火臺) 군사에 배치하고, 대호군 이환(李?)과 진사 도유(都兪)를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냈다. 인임이 권세를 잡은 지가 오래되었고, 부드러운 태도로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니, 문객들이 뜰에 가득하여 각각 자신을 특별히 후대한다고 여겼다. 충성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고양이[李猫]'에 비유하였다. 최영은 인임이 자기를 두둔하여 준 것을 은덕으로 생각하여 우에게 아뢰기를 "인임이 계책을 결정하고 대국을 섬기어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공이 허물을 덮을 만합니다." 하여 마침내 그 자제까지 모두 용서하였다. 국인(國人)이 탄식하기를, “임(林)ㆍ염(廉)의 옥사에 큰 도적이 그물에서 빠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렸다." 하였다. 환(?)은 인임의 얼자(?子)인데 임견미의 사위였으며, 유(兪)는 도길부의 아들로서 우인열(禹仁烈)의 사위였다. 최영은 본래 인열과 친하였으므로 유도 죽음을 면하였다. 또 전 찬성사 박형(朴形)을 각산수(角山戍)로, 지신사 권집경(權執經)을 안동(安東)으로, 우대언 이직(李稷)을 전주로 귀양보냈다. 형은 중용의 아비이고, 집경은 인임의 첩의 사위이며, 직은 인민(仁敏)의 아들이었다. 과거에 이인복(李仁復)이 인임과 인민의 사람됨이 미워서 말하기를, “나라를 결딴내고 집안을 망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아우다." 하였는데, 그 손자 존성(存性)이 과연 연좌되었다.

封安叔老女爲賢妃,妓小梅香爲和順翁主,燕雙飛爲明順翁主,是日,我太祖及崔瑩,入政房,瑩,盡黜林廉所用之人,太祖曰,林廉執政久,凡士大夫皆其所擧,今當問才之賢否耳,惡咎其旣往,瑩不聽。
안숙노(安叔老)의 딸을 봉하여 현비(賢妃)로, 소매향(小梅香)을 화순옹주(和順翁主)로, 연쌍비(燕雙飛)를 명순옹주(明順翁主)로 삼았다. 이날 우리 태조와 최영이 정방에 들어갔다. 영이 임견미ㆍ염흥방이 쓴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ㆍ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들이 모두 그들이 등용한 사람이니, 이제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따질 뿐이다. 어찌 그 과거를 허물할 수 있는가." 하였으나 영이 듣지 않았다.

일단 최영은 대대로 고려에서 관리를 지내 온 명문의 후손에, 군부의 숙장으로서 여러 요직을 거치며 기득권세력과도 적잖은 관계를 맺어 온 입장이었다. 신돈이 집권하고 있을 때도 신권의 개혁에 반대하던 기득권세력과 입장을 같이 하다가 공격을 받기도 했거니와, 사실상 우왕이 즉위한 뒤에도 이인임과도 적잖은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 그로서는 차라리 그 밑에서 일했을 뿐인 사족들을 처벌하더라도 이인임과 그 가족에 대해서는 온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 사실 이 부분이 내가 이인임이 그저 단순한 간신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영의 인품을 믿는달까? -

반면 이성계는 고려의 주류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토호 출신의 신흥세력으로서 주류의 견제를 받으며 어렵사리 조정에 출사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려 하고 있던 신진사류들과 입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성계 자신이 이인임과 임견미 등이 장악하고 있던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하고 공을 세웠듯 그들 역시 같은 입장이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두 사람의 일처리에도 차이가 발생했다.

한 사람은 오히려 핵심이랄 수 있는 이인임과 그 가족에 대해 온정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그 밑에서 있던 사류들에 대해 동정적었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 때문에 최영은 충신으로서 죽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서 - 혹은 자신이 충성을 바치던 왕조를 무너뜨린 반역자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리라. 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최영과 비주류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있던 이성계와의.


어찌되었든간에 이로써 그동안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해왔던 이인임과 그 일파들이 정리됨으로써 고려의 내정은 정상을 찾게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때가 늦어도 너무 늦어 있었다. 이인임이 제거되고 바로 명으로부터 철령 이북을 내놓으라는 압박이 들어왔고, 그로 인해 명과의 갈등이 빚어지고 최영의 주도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었으니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의 여유를 두고 그동안 누적되어 온 혼란과 모순등을 수습하고 내정을 다잡았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요동정벌이라고 하는 무모한 원정에 허비해 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성계가 정권을 잡고 마침내는 고려를 멸망시키게 되었으니,

아마 이인임의 제거가 몇 년만 더 빨랐거나, 아니면 명으로부터의 압력이 몇 년 만 늦게 시작되었어도 한반도의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당시 고려로서는 더 이상 버틴다는 자체가 무의미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우리가 아는 방식과는 다른 형태로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의미가 없기는 하다. 어떠한 형태로 왕조가 교체되든 그 주류는 신진사대부일 것이며 그 결과는 성리학적인 이상국가 조선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 밖에 다른 대안이 있던가?

참, 한 가지 본문 가운데 보면 유독 눈이 가는 단어가 하나 있다. 염흥방과 임견미 등의 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부만호로 임명되어 참가하고 있는 공정왕(恭靖王)이라는 호칭이다. 공정왕은 아다시피 정종이 숙종 때 정종이라고 하는 묘호를 받기 전에 불리던 왕호다. 흔히 우유부단하고 나약하게만 여기는 정종 이방과지만, 의외로 왜구와의 싸움에서도 그렇고 여러 부분에서 이성계를 따라 적잖이 활약하고 있다. 하긴 우유부단하고 나약하다고 하는 것은 드라마나 소설 등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아무려면 아무런 능력도 없이 이성계의 아들이라고 다른 아들들을 제치고 부만호가 되어 죄인들을 심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을까? 단지 정치적으로 이방원과 같은 야심이나 추진력이 부족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실제 어떠했는가는 지금으로선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말이다. 하긴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아무튼 이로써 이성계는 최영과 더불어 이인임과 그 일파를 제거하고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으니, 여전히 주류로서 기득권을 대변하고자 하는 최영과, 철저히 비주류로서 새로이 자신의 뜻과 야망을 펼치려 하는 신진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던 이성계와, 어쩌면 서로 대립하고 화합하며 고려의 역사를 조금은 더 연장시킬 수 있었던 두 사람의 공존은 그러나 너무나도 짧았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파국은 이미 그들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바로 앞에.


오늘은 여기까지.

별 내용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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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읍니다.이성계나 전두환이나 살다보니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진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08/07/07 (월) 오후 7:56   [순천자] from 121.150.5.53
그렇다고 결코 그 죄악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죠...
08/07/10 (목) 오후 7:27   [오늘도] from 211.193.19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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