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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
폭력과 소통...
2008/07/01 오 전 12:01 | 역사와 철학

내 등에는 온통 빨간 피딱지가 앉아 있다. 쭈그리랑 꼬맹이 녀석들이 발톱으로 찍어댄 자리다. 녀석들이 성질이 난폭해서? 아니면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것도 아니면 서로 연적이라 여자를 두고 결투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냥 나의 주의를 돌리고자 한 것 뿐이다. 나더러 돌아봐달라 그리 하는 것 뿐이다.

어차피 사람이 고양이 말을 못 알아먹는다. 고양이도 사람말을 하지 못한다. 고양이가 울면 우는가보다, 냥냥거리며 어슬렁거리면 또 심심한가 보다, 그래서 그렇게 무심히 넘어가기 일쑤다. 문제는 고양이도 일단 살아야 한다는 거다.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싸야 하고, 그런데 그러자면 나의 도움이 필요하고. 밥 달라, 물 달라, 화장실 치워달라, 더불어 심심하면 같이 놀아달라, 그런데 사람의 말을 못하지? 그래서 발톱으로 찍어 나더러 돌아보라 하는 것이다. 고양이 나름의 소통의 방법이랄까?

나는 원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다. 일단 수 틀리면 욕부터 나오고, 때에 따라서는 주먹이 먼저 올라가기도 한다. 워낙 자란 환경이 그런 때문이다.

국민학교 고학년 들어갈 때까지 우리집은 다섯 식구가 조막만한 - 지금 내가 사는 집 방 한 칸 만한 방에서 다닥다닥 붙어 살았었다. 그 시절 그 동네는 대개 그랬다. 방 두 개만 있어도 어마어마한 부자고, 공부방 있다고 하면 그건 무슨 재벌 손자쯤으로 여겨졌다. 지금에야 그저 우스울 뿐이지만, 비가 오면 비가 새는 것이 당연하던 동네에서는 또 그런 게 통했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집어갈 것도 없는 좁은 텅 빈 방만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단 책가방만 던져 놓으면 날이 저물 때까지 즈이들끼리 놀았다. 그리고 아주 느즈막이 집으로 돌아가면 피곤에 지친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불이 꺼지고 나면 잠들었다. 공부하라고 재촉해봐야 공부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부모님과 무슨 대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도 아니고... 그래서 그 무렵 아이들은 말보다 먼저 욕과 주먹질을 배웠다. 말하자면 그것이 그 아이들의 소통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듯 원래 폭력도 소통의 수단이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가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발톱으로 등을 찍는 것처럼, 도저히 말로 어떻게 되지 않을 때 사람은 곧잘 폭력이나 폭언에 의지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야 이 개새끼야!"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 나의 발을 밟고 지나갔다면,

"왜 내 발을 밟고 그래?"

기껏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일당을 떼어 먹으려 들면,

"사람이 그래서 돼? 일을 했으면 돈을 줘야 할 것 아냐? 왜 일을 시켜놓고 돈을 안 줘?"

결국 주먹이 날아가게 되면 또 다른 뜻이 된다.

"아프잖아! 그런데 왜 사과도 않고 지나가냐?"
"돈 줘! 당장 집에 가면 하루 일당 받아 돌아오길 기다리는 처자식이 있다구!"

그러나 그렇게 길게 말을 풀어 말하려 해도 그만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에 익숙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러한 고단한 환경에서는 그러한 대화에 익숙해지기가 힘들다. 아이들부터가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부모님은 일을 나가고 겨우 또래들끼리 고만고만한 어휘들을 가지고 억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이 고작이니까. 부모님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어른과의 진지하고도 차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소통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의 아이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자라고 나서도 하루하루가 빠듯한 환경에 그럴만한 여유는 더욱 줄어든다.

그래서 어린시절 그 동네에는 싸움이 잦았다. 고성이 오가고, 주먹이 날아다니고, 때로는 걸상을 들고 후려치는 사람도 있었다. 피가 튀기도 하고, 어디 찢기고 터지기도 하고, 그런데 또 다음 날 되면 형님아우 하면서 술 한 잔으로 풀어버리고 만다. 아마 그 대부분은 차분히 대화로 풀자면 별 오해 없이 통할 수 있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에 그보다는 주먹과 욕설로서 대신한 것이다. 우리들도 그런 어른들을 통해 다시 욕설과 폭력을 배웠고. 말하자면 욕설과 폭력이란 고급의 언어로서 소통할 주제가 못되는 사람들의 소통의 수단인 셈이다.

흔히 비폭력이라고 말한다. 폭력을 쓰지 말라고. 꽃으로라도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고. 욕설도 하지 말라고. 그래서 대화를 한다. 말로서 이해시키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이 안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다. 신문 보다 보면 가끔 어디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쓴 칼럼을 보게 되는데, 이게 무슨 도무지 알아먹지 못할 소리들로만 가득차 있다. 그런 걸 바로 앞에서 떠들어댄다면 과연 나는 그와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더구나 상대가 대학교수라면? 정치인이라면? 고위공무원이라면? 아무튼 높은 사람이라면? 상대가 말하는 소리를 나야 주의를 기울여 듣겠지만 상대가 듣지 않겠다고 하면 도리가 없는 거다. 내가 인터넷상에서 유난히 공격을 많이 받는 이유도 내가 쓰는 언어가 "천해서"라고 하는데 - 실제 어느 인간이 내게 한 말이다. - 이미 쓰는 언어의 수준이 맞지 않으면 내 의사를 전달하는 것조차 상대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거다. 그런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듣지도 않는 말을 계속해 떠들어야 할까?

나는 윤리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각자 처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 그 윤리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보다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사람에게는 보다 엄격한 잣대가,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는 사람에게는 그래봐야 다른 수가 없으므로 보다 관대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지위가 높고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이 많을수록 더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적용해야 하고, 지위가 낮고 가진 것도 누리는 것도 없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유연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왜? 전자의 경우는 그 행동이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것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가능성일 테니까. 그것을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폭력에 대해서도 나는 기준을 달리해 본다.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폭력은 전혀 다르다고. 강자는 굳이 폭력을 쓰지 않아도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다. 말로서 살짝 얼러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굴복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이끌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약자는 아니다. 약자는 설사 폭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결코 강자를 누르지도 강자를 굴복시키지도 못한다. 물론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학교에서의 왕따를 예로 들어보면 알 것이다. 왕따를 하는 아이들은 굳이 험하게 주먹을 쓸 필요가 없다. 그냥 모여서 머릿수로 상대를 압박하여 누르고서는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그러나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아무리 주먹을 휘두르고, 몽둥이를 휘드르며 저항해도 이미 수에서 밀리고 있기에 돌아오는 것은 몰매 뿐이다. 그런데도 두 경우 모두에 비폭력을 적용한다면, 왕따를 하는 녀석들이야 하던 대로 때리지 않고 가지고 놀면 그만이지만,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그나마 저항할 수 있는 수단마저 잃게 된다. 그럼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과연 그것은 공평한 정의일까?

물론 법이 있다. 교칙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왕따를 하는 아이들은 굳이 폭력을 쓸 필요가 없다. 때리고 싶으면 때리겠지만 굳이 때리거나 하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법이나 교칙이란 무엇일까? 오히려 그에 저항하고자 할 때 왕따를 당하는 아이에게 더 가혹한 처벌이 가해지기 십상이다. 뉴스에도 몇 번 나오지 않았는가? 왕따를 당하다 못해 보복을 가한 아이가 입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마 법이 용서해도 학교에 그대로 남아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거다. 어차피 정부는 일반 국민들보다 한참 위에 있다. 선거 때야 아쉬운 소리를 하지만, 일단 선거가 끝나고 권력을 손에 쥐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감히 우러로 보지도 못할 그런 구름 위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방송이며 언론을 동원해 얼마든지 듣지 않을 수 없도록 할 수 있지만, 이쪽에서 하는 말은 듣거나 말거나 자기 마음이다. 소통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리 말로 떠들어도 들어먹지 않았을 때 그러면 어떤 수단을 써야 할까? 아예 들을 생각도 없이 아주 무시해 버릴 때 거기에 대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더구나 전경을 동원해 그나마 지금 내고 있는 목소리마저 막아버리려 한다면?

아마 이번 촛불시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도 들어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무력감을. 이쪽에서는 무어라 해도 들을 생각도 않는데 저쪽에서 하는 소리는 가감없이 들려오고 있다고 하는 허무함을. 그로써 사실이 정해지고 시시비비가 갈리고 어느샌가 이쪽이 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은 채 저들이 하는 소리만이 남아 있게 되는 억울함을. 그런 때 결국 사람들의 의지하게 되는 것은 보다 과격한 형태의 소통이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그 소리를 육체에 실어 물리력으로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불법폭력시위의 메커니즘이다.

사실 일반인이 아무리 대단하게 무장해봐야 공권력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이쪽이 한 가지로 무장하면 저쪽은 그 몇 배로 무장할 수 있다. 이쪽이 한 가지 수단을 장만하면 저쪽은 그것을 무력화시키고 역습을 가할 그 몇 배의 수단을 장만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동등한 존재로서 그 폭력을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소통의 주도권을 저쪽이 쥐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현실적인 힘도 저쪽이 더 우세한데. 그래서 폭력시위라고 해도 항상 깨져나가는 것은 시위대들이다. 아무리 과격한 폭력시위에서도 시위대는 공권력 앞에 패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전 국민이 일어나 혁명이라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러나 그러기도 쉽지 않지? 그런데도 폭력을 끝내 선택하고 마는 것.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발버둥이다. 그 이외의 다른 수단은 생각할 수도 없는 서글픈 발버둥인 것이다. 그래서 그 폭력마저 없다면 도대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상대가 마주 폭력으로 나오게 되면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는 한없이 나약한 주제들에게.

잔인하다는 것은 그만큼 슬픔을 머금고 있다는 것이다. 난폭하다는 것은 그만큼 아픔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위에 선 입장에서 오로지 그 우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면, 약자의 폭력은 그래서 항상 애잔함이 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하는 애잔함이다. 그럼에도 일상의 소통수단을 통하지 않기에 전혀 누구도 이해시키지 못한다는, 그래서 도리어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자신을 상처입힐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폭력은 물론 나쁘다. 나도 많이 맞아 본 입장에서 누구를 때린다고 하는 행위를 좋다고 하기란 솔직히 무리다. 그러나 때로 어쩔 수 없이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음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폭력을 무작정 비난만 하지도 못한다. 나 역시 그런 무력한 개인인 때문이다. 욕설에 의지해 폭력에 의지해 부족한 어휘력을, 소통능력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그런 무수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비판적이면서도 폭력에 관대한 모순은 거기서 나온다. 말 그대로 모순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나라는 인간의 기저에서 비롯된 모순이다.

하여튼 폭력이라도 쓰지 않으면 아예 관심도 갖지 않을 사람들이, 그 폭력으로 인해 겨우 관심을 갖게 되고서는 "폭력이 아니어도 되지 않느냐? 할 때는 나 역시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오른다. 폭력이 아니어도 되면 폭력을 굳이 휘두르지도 않는다. 폭력이 좋아서 휘두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말한 대로 표현을 해야 하는데 그 능력이 되지 않아 폭력으로써 그것을 대신할 뿐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냈었다고. 아주 대단하신 비폭력이라고나 할까? 그냥 웃긴다. 아주 제대로.

말하지만 나는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다. 평화주의자도 아니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쓸 수 있으며 전쟁도 할 수 있다는 오히려 보다 과격한 사고의 소유자다. 말했듯 폭력이란 소통의 수단이고, 전쟁이란 정치와 외교와 경제의 연장인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통의 수단으로서, 혹은 현실적인 어떠한 첨예하고 급박한 이유들로 인한 폭력과 전쟁에 대해서는 용인하는 편이다. 단지 그런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 대부분의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도록 만드는 이유다. 워낙 사상이 불순한 터라. 불순하다. 내가.

아무튼 중요한 것은 폭력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 폭력이 왜 나왔으며 그 폭력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세상에는 소통에 능숙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그들의 언어로서, 그들과의 소통을 위한 창구로서 폭력과 욕설이라고 하는 별로 보기에 좋지 못한 수단들에 대해서까지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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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01 (화) 오후 10:28   [주송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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