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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으로서의 보수와 진보가 아닌 개인의 성향으로서의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뢰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느 만큼 믿느냐에 따라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불신으로 현재의 안정과 질수에 안주하느냐로 갈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각종 토론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치고 있는 어느 논객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티조선운동에 몸담기도 했었고, 친노 사이트에서 편집장도 하는 등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의 논객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였다. 그런 그가 왜 지금에 와서 그때 그리도 비판해마지않던 특정 언론과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을 위해 나서고 있는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문제와 이유들로 친노 사이트에서 몰려나듯 떠나 새로운 사이트를 열게 되었을 때, 얼마 안 있어 그는 홈런도 아주 큰 홈런을 제대로 날렸었다. 제목이 뭐였는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내용만큼은 지금도 분명 기억한다.
"모든 판단은 논객이 내린다."
보수논객으로 이름 높은 조갑제씨도 젊었을 적에는 박정희의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사형제에 대해 비판적이며, 5.18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언론인의 표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박정희를 찬양하고 민주화를 부정하며 독재를 옹호하는 듯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이유, 결국 같은 이유다.
개개인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의지와 요구를 인정할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것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을 누가 통제하느냐? 바로 보다 많이 알고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누군가다. 물론 그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품위와 절제를 아는 한 차원 다른 고귀한 존재로서의 자신. 이른바 플라톤의 철인정치다.
플라톤이 철인정치를 주창하게 된 것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아테네의 시민들에 의해 독배를 마시게 되었던 것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지성을 어리석고 무지한 일개 시민들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회의를 품고, 그러한 어리석고 무지한 존재들에게가 아니라 높은 지성과 폭넓은 지식을 쌓은 존재가 그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법가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한비자를 보더라도 인간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읽을 수 있는데, 한비자의 첫머리를 보면 한참 나오는 내용이 인간의 말과 행동과 이성과 판단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나약하고 천박한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나약하고 천박한 인간의 말과 행동과 이성과 판단을 통제하고 이끄는 수단으로서 법과 그 법을 주재하는 군주의 절대권력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살았던 한비의 입장에서 난세를 수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절대권력이란 무척이나 절실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처럼 원래 강력한 권력과 그것으로서 사람들을 이끌고 통제해야 한다고 하는 사고는 철저히 개인 - 그 개인의 집단인 대중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서 시작된다. 아니면 그러한 개인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무력감이거나. 그래서 더욱 강력한 권위를 요구하게 되고, 더욱 엄격한 통제를 원하게 되고, 그것으로써 대중을 지배하려 하게 된다. 물론 그들 자신은 그것을 대중을 바르게 이끌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대중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엄한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 듯 대중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라고. 과거 군사독재정권도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했었다.
앞서 언급한 논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논객으로서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출신학교도 서울대였고, 대자보 시절을 거치며 논객으로서도 명성을 이미 적잖이 얻고 있었다. 그런데 친노 사이트를 관리하면서 그러한 그의 권위는 하잘 것 없는 이용자들에 의해 도전받았다. 많은 비난도 받았고 조롱도 받았다. 논객으로서의 자의식과 그러한 일반의 비난과 비판이 어우러지게 되면 결론은 하나다. 더욱 높은 자의식과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 그가 특정 언론에 글을 기고하고, 지금에 와서 자신이 비판하던 언론과 정당과 정치인을 위해 기꺼이 앞장서게 된 것도 그래서다. 87년 이후 민주화 세력이 보였단 난맥상과 시민사회의 혼란이 조갑제씨로 하여금 어느샌가 대중을 불신하고 혐오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반면 진보논객으로 널리 알려진 진중권씨의 경우를 보더라도 황우석 사태와 디워 사태를 거치며 네티즌들로부터 그렇게 공격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소통의 장으로서의 인터넷의 가능성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스스로 인터넷을 통해 다른 네티즌들과 소통하려 하며, 인터넷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스스로 앞장서 변호하고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신을 공격해 스스로 인정하듯 깊은 상처를 남겼던 네티즌 개인에 대한 원망은 들어있지 않다. 그보다 더 큰 인터넷과 인터넷을 이용하는 더 많은 인간 자신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
박노자씨도 그렇게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가만 읽어 보면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애정과 기대를 느끼게 된다. 진보정치인으로서 노회찬씨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한국의 다수 민중에 대한 애정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정말이지 애잔함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한국과 한국인과 인간에 대한 애정은 절절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는 적을 수록 좋고, 통제와 억압은 없을 수록 좋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더욱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저리 스스로 세상과 부딪히며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반론도 가능하기는 하겠다. 보수 가운데도 자유주의자는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보수와 진보의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진보의 자유주의는 인간의 해방이다. 보수의 자유주의는 자유를 통한 개인의 억압이다. 더 우수한, 더 뛰어난, 더 강한, 특별한 존재가 그러한 자유를 통해 보다 높은 지위와 권위를 획득하고, 그로써 그러한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의 위에서 군림할 수 있도록 하는. 즉 그러한 특권적인 개인을 위한 자유이지 무수한 이름 없는 개인을 위한 자유는 아니다. 자유이되 그들의 자유가 오히려 억압이고 통제인 자유주의인 것이다.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근본적인 차이다.
그럼 나는 뭐냐? 나는 보수다. 왜?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지 않거든. 나는 인간이란 한없이 무지하고 어리석고 그저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만 해서 언젠가는 그로 인해 스스로를 해치고 말 것이라 믿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란 그래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다. 그런데도 나는 일반적인 보수와는 또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진보에 더 가까울 정도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집착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왜일까? 언젠가 말한 비관적 낙관론자인 때문이다.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도, 인간의 자유의지도, 그 인간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해서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불신에는 한 가지가 더 전제된다. 바로 모든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망치거나 파괴할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살할 자유다. 도저히 살아가기 힘들다 하면 그대로 죽음으로써 도피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당장의 쾌락을 위해 도박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일을 않고 놀기만 하는 것도 자유다. 단지 그로 인한 책임은 자기 자신이 지는 거다. 그 책임을 스스로 진다고 하는 전제 아래, 그 자유의지로서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그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거다.
다시 말해 일반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나는 인간이 반드시 옳아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항상 바라야 하고 항상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해야 하고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거야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거다. 반드시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필요도 없고 단지 지금 당장의 어떠한 다른 선택으로서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항상 옳을 수도 없고, 항상 바를 수도 없고, 모든 인간이 성공할 수도, 더 나은 삶과 가치를 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실패도 할 수 있고, 때로는 타락도 하며, 어긋난 길을 가기도 하다가, 끝내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스스로를 파괴하려 들 수도 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현상이며 그것을 굳이 강제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려 하는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무의미한 헛된 발버둥이다. 도대체가 그것을 올바른 길로 가르치고 이끈다고 하는 자신들조차 그러한 무지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인간에 불과할 터인데, 도대체 무엇으로 누가 그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이끈다 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또한 전체주의적인 어떠한 경향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경멸과 혐오를 아끼지 않는다. 도대체 자기들은 뭐가 그리 잘났길래 남 하는 일에 저리 간섭일까 하는 불신이고 냉소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는 비관적인 낙관주의다.
일반적으로 낙관주의라 하면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 자유의지가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어떠한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게는 그런 것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다. 어차피 인간따위, 인간의 자유의지며 그 인간이 만들어갈 미래 따위 그저 어둡고 우울하기만 할 뿐이기에 그러한 어둡고 우울한 인간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긍정해 버릴 수 있다. 스스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는 자유와 권리마저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얼핏 낙관주의자이기는 낙관주의자인데 그 전제가 너무나도 암울한, 그래서 비관적이 붙어 비관적인 낙관주의다. 어째 사상 자체가 너무 암울한가? 하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이 결국 그런 것들이라.
어찌 보면 나는 진보와 보수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진보와 보수의 양쪽 극단에 있을 수도 있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처음부터 진보이고자 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보수이고자 해서 지금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아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겪은 것들이 어느샌가 자연스레 이러한 구체적인 형태를 띄게 되었을 뿐. 어차피 진보든 보수든 그러한 무수한 개인개인의 사고의 집합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거다. 단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내가 또 무척 싫어하는 것이 뭐라도 되는 양 대중의 위에서 군림하며 그들을 비웃고 가르려 드는 어떤 것들이다. 기껏해야 자신들도 한 개인에 불과한 주제에 개인 이상이고자 하는 자들. 가짜 언론, 가짜 정치인, 가짜 지식인... 도대체 그런 주제들이 누구더러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마치 똥배를 드러낸 채 으스대고 있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는 느낌이다. 아마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겠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고.
내가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한 개인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다른 개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그들을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이들 뿐이다.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다. 그 지위나 신분 역할도 상관없다. 이들이야 말로 진짜다. 이들만이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지성이고 양심이다. 말했듯 나는 보수다. 그래서 그들을 기꺼이 존경한다. 언제든. 어느때든.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