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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이 있기까지 인류가 보유한 가장 유효한 생산수단은 바로 농경이었다. 목축보다도, 수렵보다도, 어로보다도, 더 생산성이 높았으며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기에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이 있었던 이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보다 고도화되고 거대화된 사회 속에 인류는 문명이라는 것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아무 땅에서나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찾아 정착한 이들과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만큼 다른 생산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평원의 유목민들이나 삼림속의 수렵민족이나 바닷가에 터를 잡고 사는 해양민족과 같은 경우.
문제는 이들이 사회를 유지하기에 이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이 턱없이 생산성이 낮다는 데에 있었다. 가축이 새끼를 낳아 봐야 한 해 몇 마리나 낳으면 대단한 거고 그나마도 다 자랄 때까지 여러 해가 걸린다. 물고기를 잡든 사냥을 하든 그것이 항상 마음먹은 대로 많은 생산을 약속하는 것도 아니고. 축복받은 풍요로운 환경에서라면야 그렇게라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아니라면 다른 수단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원래 초기 농경사회에서도 아직 농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수렵과 목축, 어로를 병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모자르면 약탈을 했다. 고구려만 하더라도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수렵을 하면서도 약탈로서 경제를 유지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온 것이 하호며 좌식자며 하는 것들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고구려는 병영국가로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목축과 수렵을 주로 하는 이들에게는 말이라는 이동수단이 있었다.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배라고 하는 이동수단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멀리 이동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그만큼 그들은 농경민족에 비해 더 먼 거리를 자신의 활동무대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여 그들은 서로 떨어진 두 지점을 연결해주거나, 혹은 그 지점들에서 생산물을 무단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삼았다. 이를테면 무역과 약탈이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아다시피 중근동과 인도, 중국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함으로써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고, 지중해에서도 페니키아 등의 해양민족이 지중해 여러 도시들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하여 번영을 일구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미케네인으로 추정되는 해양민족의 침입에 의해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했고, 중국은 병경을 침범하는 이민족으로 인해 역시 이민족의 왕조인 청이 건국되기까지 끊임없이 곤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이 초원으로, 바다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그들의 척박한 환경 때문이었다. 생산의 부족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세기 그나마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혼란을 수습해가고 있던 서유럽을 한 바탕 뒤집어 놓은 노르만족 - 흔히 바이킹이라 부르는 - 역시 북유럽의 춥고 척박한 환경이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약탈했고, 그러다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정착했다. 그리고는 정착한 곳에서는 농경민족으로 모습을 바꾸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농경민족으로 정착하면서 침략자로서의 노르만족은 점차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어갔다.
우리 역사에 아주 일찍부터 모습을 나타내는 왜구 역시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우리보다 더 생산성이 높은 것이 일본이지만, 워낙 산이 많고 토질 또한 화산재로 이루어진 터라 생산성이 그리 높다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바닷가에 사는 이들의 경우는 상황이 더 열악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약탈자로서 우리와 중국의 역사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 약탈이란 먹고 살자는 생업의 하나였던 것인데, 왜구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도 그래서 일본에서 개간이 이루어지고 농업기술이 발달하면서 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난 것과 관계가 있다.
원래 당시 일본을 무대로 활동하던 왜구의 면면을 보면 사실 근세 유럽에서 나타난 해적과 같은 해적질을 전문으로 하는 전업해적이라기보다는 평소에는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고 하다가 때 되면 칼 한 자루 비껴들고 배를 타고 약탈을 떠나는 생계형 겸업해적들이었다. 당연히 해적질보다야 농사짓는 쪽이 안전하고 편하고, 목숨걸고 약탈에 나서는 것보다야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안정된 수입을 얻는 쪽이 경제적으로 낫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농업생산성이나 일본의 경제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농사나 어로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그들을 보호하거나 최소한 통제할 수 있는 정치권력 역시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기 전이라 그들이 해적으로 나서는 것을 제어할만한 아무런 장치도 없는 상태였다. 말 그대로 해적질 나서라 떠미는 그런 환경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오랜 조상 때부터 해 온 그대로 해적질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크게 바뀌게 된 계기가 바로 전국시대였다. 전국의 혼란기에 각 다이묘들은 최소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 했고, 그로써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개간과 더불어 농업기술에 있어서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다. 부국강병을 꾀하는 다이묘들에 의해 상업도 발전했고, 또한 보다 많은 수입과 병사들을 확보하기 위해 영지 내의 인구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즉 굳이 해적질에 나서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그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작 일본으로서는 가장 극심한 혼란기라 할 수 있는 전국시대에 오히려 왜구의 기록이 일시간 사라지고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왜구는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이전까지 생업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서 생계를 위해 약탈에 나섰던 생계형 해적으로서의 왜구들이 특히 중국에서 중국의 전문적인 해적과 결탁하여 전업해적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전업해적들은 왜구라 불리지만 일본 본토와는 사실상 단절되어 있었고, 그 구성원 면먼에 있어서도 중국인의 비율이 높았다. 말이 왜구지 일본계 중국해적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왜구가 사라지게 되는 과정을 주목해봐야 하는 것은, 왜구가 사라지는 것과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성장과는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에 이르면 일본은 특히 경제적으로 조선을 상당부분 추월하게 되는데,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가 왜구가 일본 안에서 쇠퇴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직 해양민족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던 왜구의 존재를 완전히 흡수해 버릴 수 있었을 정도로 당시 일본의 발전은 눈부셨고, 이로써 약탈자로서의 왜구는 사라지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정복자로서의 새로운 일본 뿐이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그 잠재력을 십분 내보인 일본은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여 근대제국으로 성장 아시아에 군림하게 된다. 그 발전의 토대가 바로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세 이후 나타난 전업해적과 근세 이전의 특히 해양민족에서 나타나는 생계형 해적과는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북방초원의 유목민족에게 있어 풍요로운 농경민족의 땅을 침범해 생산물을 약탈하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경제활동이듯, 고대의 해양민족 역시 그들의 부족한 생산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약탈에 나섰다. 그리고 점차 정착지를 찾아 정착하게 되고, 농업생산성도 높아지면서, 더 이상 약탈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됨에 따라 약탈자로서의 해양민족은 점차 역사속에서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한 것이 근세의 해적들. 물론 그들은 이전의 약탈자들과는 근본부터 전혀 다른 존재들이었다.
아, 진짜 정리가 안 되네. 뭔가 닿을 듯 말 듯 감질거리는데 정작 글로 옮기려니 전혀 정리가 안 된다. 역시 내공의 부족인데... 차라리 개별적인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쓰는 게 낫지 이른 식으로 하나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정리하려니 머리 터진다. 확실히 이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개론서 쓰는 사람들 정말 대단한 것임. 물론 내 수준에서 대단하다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기왕 쓴 거니 일단 저장. 나중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써 봐야겠다. 자료조사도 좀 열심히 해서. 한 번 써 봤으니 그때는 조금은 더 나아지겠지. 그럴 거라고 믿자.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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