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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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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부시도라 부르지만 전국시대 이전의 부시도와 에도시대의 부시도는 근본부터 다르다. 전국시대 이전의 부시도는 말하자면 자영업자로서의 개인적인 윤리였다.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영지와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가신과 그리고 그것들을 책임질 자신의 주군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주였다.

반면 에도시대의 부시도란 에도막부 체제라고 하는 질서 안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규범이었다. 위로는 주군이 있고, 아래로는 가신이 있고, 고케닌이라든가, 향사라든가, 혹은 햐쿠쇼라든가 쵸닌이라든가 하는 신분이 있었고, 그에 걸맞는 말과 행동과 차림의 양식이 뒤따랐다. 사무라이는 이래서는 안 되고, 쵸닌에게는 여기까지가 허용되고, 주군에 대해서는 어때야 하고, 가신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이 있고, 전국시대의 부시도가 자영업자의 윤리라면 에도시대의 부시도는 샐러리맨의 윤리였다. 물론 그것은 조선으로부터 수입한 성리학에 근거했다.

사실 에도시대에 이르면 사무라이들이 들고 다니는 칼이란 단순히 장식품 이상의 것이 아니게 된다. 여전히 도장에 다니고 검술을 배우고는 있지만 그것을 쓸 일도 없고 써서도 곤란했다.

전란의 시대에야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싸우느냐였다. 얼마나 잘 싸우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느냐 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가치였다. 그러나 전란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 평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더 큰 고민이 된다. 전국을 통일한 새로운 지배자인 쇼군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언제 누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지 모르니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도록 사무라이들에게 고삐를 채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쓰인 것이 바로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성리학, 원래 유교라는 것이 평화시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에도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무장해제 수준으로 성리학적 가치라는 족쇄가 채워진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선비화된다. 여전히 칼을 들고는 있었지만 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유교적 소양이었고, 따라서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과는 달리 이때의 사무라이들은 조선의 선비들 만큼이나 많은 공부를 필요로 했다. 말하자면 칼을 든 선비다.

흔히 에도시대 일본 하면 난학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보다 더 일본사회를 지배한 것이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성리학만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한 양명학이며 고증학이며 도가 등의 여러 사상에 대해 이 시대에 이르러 일본에서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하니 18세기에 이르면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정체되기 시작한 조선의 그것을 능가하는 경우까지 나오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조선의 성리학이 완전히 양식화되면서 문화 및 학문에 있어서도 조선을 앞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는 밑거름이 된다.

지금 책을 찾아보지 않아 일일이 이름을 거명하기는 그렇지만,(나중에 생각나면 추가해 써 보겠다. 장담은 못하지만서도) 18세기 이후 새로이 유입된 여러 학문과 그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공부를 바탕으로 일본의 지식인들은 여러 다양한 일본의 발전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게 되었는데, 지사들로 하여금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고자 하는 존왕양이 운동 역시 이러한 여러 주장 가운데 하나인 국학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사쿠마 쇼잔이나 가츠 가이슈같은 이들이 있어 새로운 시대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했고, 그러한 부분들은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토양 위에 일본의 지식은들은 보다 앞선 서양의 문명을 직시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이른바 탈아입구다.

흔히 탈아입구라 하면 고작해야 유럽을 베끼자는 것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지만, 원래 모든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베끼는 것에서 시작한다. 철학이라는 게 무언가. 인지하고 인식하고 사유하고 판단하여 행동에 옮기는 것 아니던가. 그를 담보하는 합리와 질서와 정의를 일컬어 철학이라 하는 거다. 무슨 대단한 게 아니라 바로 그러한 세계를 보고 인식하고 자기화해가는 과정과 그것을 이루는 일관된 방향성을 두고 철학이라 하는 것이다.

탈아입구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 - 아니 동아시아적인 문명이 갖는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할 다른 가능성의 필요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청처럼 동도서기라 하여 가치는 따로 떼어두고 물질만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아예 빗장을 닫아걸고 일본 안에서 해결할 것을 꾀할까? 그러한 여러 가능성 가운데 유럽이라고 하는 선진문명을 적극적으로 배워 따라잡고자 했던 것이 탈아입구였다. 그러한 이론적 토대를 만든 이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던 것이고.

일본의 근대화의 한계는 사실 이 탈아입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탈아입구를 중간에 그만둔 데에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러일전쟁 직후던가? 아무튼 그럭저럭 메이지 체제가 자리잡고, 근대화도 어느 정도 제대로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자 일본은 바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우리식대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게 문제였다.

원래 근대화라고 하는 게 합리와 보편과 균질성을 전제하다 보니 자연스레 민권운동이라는 것도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일본에서도 그래서 민권신장을 위한 여러 움직임이 있었는데, 당연히 이미 기득권이 되어 버린 유신세력의 입장에서 그것은 받아들여주기 매우 곤란한 문제였던 거다. 그래서 그러한 움직임을 미연에 차단할 겸,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다 공고히 강화할 겸, 또한 러일전쟁으로 인한 자신감도 더해지고 해서 더 이상 유럽을 닮는 것이 아닌 일본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대동아공영권이 나오고 귀축미영이 나온다. 더 이상 유럽과 미국은 그들의 모델이 아닌 그들의 이익을 해치는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유럽을 닮겠다고 해놓고서는 어설프게 닮아 버리고는 어느샌가 기득권을 위해 그것을 포기해버린 어설픔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해 버리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탈아입구가 문제가 아니라 그조차도 제대로 못한 어설픔과 어리석은 오만이 그나마 일구어 놓은 성과마저 모조리 날려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에도시대의 일본은 무식하게 칼이나 휘두르는 무사들에 의한 나라가 아니었다. 이때의 무사들은 유교적인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상당한 문화적인 교양이 요구되는 지식인 집단이었다. 바로 거기에서 유신지사가 나오고 메이지유신이 나왔던 것이고. 일본의 근대화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그 사이 조선은 무얼했느냐?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에서는 성리학마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성리학적인 중요한 논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다른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한 치열한 투쟁도 나타나지 않는다. 실학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응용에 대한 문제일 뿐 새로운 시대를 관통할만한 어떠한 가치는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서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나타났던 것이고, 거기에서 다시 동학이 나왔던 것이고, 그나마도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던 것이 근대화의 방향을 설정하고 추구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다. 당장 무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니 우왕좌왕 허둥지둥하다 그대로 끝날 밖에. 나름대로 한 것이 많아도 실속이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여튼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본의 근대화를 너무 폄하해 보는 것도 문제다. 운도 그만한 바탕이 있어야 실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운이 좋다고 로또를 살 돈조차 없으면 당첨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러한 실력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리 일본이라도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새벽부터 삘은 받았는데 책 찾아 읽기 귀찮아서 진짜 기억에 의지해 끄적여본다. 이렇게 써 본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동안 하여튼 쓸데없는 방어본능으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참고하느라 몇 배나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곤 했었는데. 딱 30분. 아주 좋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써야지. ㅎㅎㅎㅎㅎㅎㅎ 이런 게 바로 실용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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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석 2008.08.19  13:44  [147.6.1.101]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왜 일본이 지금처럼 강대국이어하는지 왜 찬란했던 한민족이 왜놈한테
이리도 월등감을 느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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