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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조선의 갑주에 대해 올렸을 때 어떤 분이 두정갑의 내부구조에 대해 궁금하다고 하신 것이 생각나 사진이 눈에 띈 김에 집어왔다.
잠깐 이와 비교되는 다른 갑옷을 살펴보자.




위에서부터 차례로 동로마제국에서 쓰이던 스케일아머, 러시아의 러멜러 아머, 일본의 오오요로이, 고구려의 찰갑이다. 이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쇳조각을 이어붙여 만든 갑옷이라는 것이다. 두정갑과 차이라면 사진에 보이는대로 두정갑의 경우 철판이 옷 안쪽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들 갑옷의 경우는 철판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사실 찰갑의 역사는 매우 유구하다. 원래 쇠라는 것이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다루기 어려운 법이라,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일정한 형태의 구리조각을 주물로 떠서 그것을 가죽이나 못으로 연결시키곤 했는데, 바로 아래 나오는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병마용이 바로 그것이다. 진 자체가 전국시대 가장 늦게 청동기를 받아들인 편이라 진시황 시대에도 아직 청동제 무구가 널리 쓰이고 있었는데, 이 갑옷은 그때 쓰이던 갑옷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위 병마용의 사진에서 보이는 쇳조각과 쇳조각 사이에 두드러진 부분이 바로 위와 같은 쇳조각을 이어 붙이던 자국이다. 대개 못이나 가죽끈을 이용해서 고정했는데, 오오요로이의 경우는 색색의 천으로 엮어서 색감이 무척 화려하다. 물론 그것을 일일이 꿰어 엮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어서 매우 비싼 전리품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었다. 구리나 쇠만이 아니라 나무나 짐승의 뼈도 찰갑을 만드는 소재로 쓰였는데, 일본에서는 나무로 만든 찰갑이, 한반도에서는 백제의 유적에서 짐승의 뼈를 엮어 만든 찰갑이 각각 발굴된 바 있다.
당시 찰갑만이 아니라 판갑도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가야의 판갑을 보더라도 통짜로 단조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쇳조각을 쇠못으로 고정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술로는 아무래도 몸 전체를 감싸는 갑옷을 통짜쇠로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이와 같은 방식을 고안해낸 것이다. 하지만 몇 가지 일정한 패턴의 쇳조각만을 일률적으로 만들어 연결하는 찰갑에 비해 그 제작에 드는 비용과 시간, 수고가 너무 커서 결국 찰갑에 밀려 도태되어 사라지고 만다. 12세기나 되어서야 유럽에서도 플레이트 아머가 널이 쓰이기 시작했고 보면 확실히 빠르긴 너무 빨랐다.


결국 가야의 갑주 역시 아래와 같이 5세기 고구려와 격돌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의 그것과 같은 양식으로 바뀌게 된다. 보다시피 찰갑으로 바뀌면서 말을 비롯 더 많은 부분을 감쌀 수 있게 된 것을 알 것이다. 판갑에 비해 찰갑이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렇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찰갑이다 보니 이후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갑옷의 주류로 쓰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남북조시대 나타난 것이 명광개로 이후 수와 당, 송을 거치면서 가장 일반적인 갑옷형태로 자리잡는다. 흔히 무덤 옆에 세워 놓은 석물이나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사천왕상도 이 명광개를 걸치고 있거니와 삼국지를 소재로 한 각종 조각상이나 회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갑옷들도 모두 명광개다.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대표적인 갑옷이었고,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위의 영화 <신서유기 손오공 대전비인(1982)>에서 손오공이 입고 나오는 갑옷이 바로 명광개다. 명광개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예전 보았던 이 영화가 생각나서 한 번 올려본다.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갑옷에 귀까지 가리는 철제투구가 명광개의 기본구조라 하겠다. 물론 고구려와 백제의 명광개는 이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띄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이처럼 송대까지 찰갑이라 하면 철판이 밖으로 드러나는 구조였다. 당말 초기적인 포대갑이 출현하기는 하지만 송대에도 역시 명광개가 주로 쓰이고 있었고, 보다 정교해지고 보다 세련되어졌지만 기본적인 구조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여기에 일대 변화를 부여한 것이 바로 유라시아대륙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이었다. 춥고 또 쇠가 귀한 곳이다 보니 쇠를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비단을 겉감으로 삼아 바깥에 대고 철판을 안쪽에 대는 방식의 갑옷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물론 몽골인들도 흔히 아는 비단갑옷과 함께 일반적인 형태의 찰갑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 가운데 변화가 있었던 것인데, 같은 포대갑인 두석린갑과 쇄자갑, 경번갑등과 함께 고려말 들어와 조선 전기 성종 이후 조선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쇄자갑과 경번갑의 유물이다. 아마 꽤나 생경하겠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꽤 널리 쓰이던 갑옷들이다.


아무튼 두정갑의 구조는 간단히 위의 사진에 나온 그대로 안쪽에 철판을 대고 그 위에 비단의 겉감을 대서 두정이라 불리우는 둥근머리 못으로 고정시키는 구조였다. 말하자면 여타 찰갑을 뒤집은 형태와 같다고 보면 된다. 다른 찰갑들은 안쪽에 덧옷을 입거나 가죽이나 천을 대어 고정시키는 반면 두정갑은 비단의 겉감을 밖으로 드러내어 둥근 머리못으로써 안쪽의 철판을 고정시키고 있는 형태이다.
당연히 이러한 구조는 수없이 많은 쇳조각을 가죽끈이나 쇠못으로 고정시켜야 했던 두석린갑이나 일일이 쇠사슬을 꿰어 철판을 고정시켜야만 하는 경번갑에 비해 제작상에서도 그 비용이나 수고가 크게 경감되었고, 또 전투중 손상을 입더라도 수리하기 쉬웠다. 또한 앞서 말한 대로 비단의 겉감은 북쪽의 혹한에서도 쇠가 얼어붙어 사람의 살갗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었고, 투사무기에 대해 그 질긴 성질로서 방어력을 높여주었으며, 또한 두정이 있어 비단의 겉감에 철판을 고정시키는 역할 뿐만 아니라, 도드라진 형태의 쇠구조물로 인해 국소적인 방어력을 또한 높여주는 등 전반적인 방어력에서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이처럼 만들기도 쉽고 비용도 저렴하며 수선하기도 쉬운데다 방호력도 나쁘지 않으니 특히 추운 북변에서 여진을 상대로 하는 장수들에겐 이보다 좋은 갑옷은 없다 할 정도였다. 그래서 초기 두석린갑이나 경번갑, 쇄자갑등이 널리 쓰이던 것이 성종 때 두정갑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난 이후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조선 무장들의 가장 일반적인 갑옷의 형태로 정착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갑옷들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조선의 무장들이 가장 신뢰하여 가장 널리 쓴 갑옷은 바로 이 두정갑이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인 18세기에 들어 화약무기가 널리 쓰이게 되면서 더 이상 무겁기만 한 중갑주가 필요치 않게 되자 두정갑 역시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더된다. 바로 두정갑의 안쪽의 편찰이 제거되고 두정과 비단 겉감만이 남는 의장적인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중국의 청나라 역시 마찬가지로 겪은 변화로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진화 아는 도태의 과정이었다. 그래도 편찰을 잃고도 마지막까지 조선의 무장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조선후기 국방에 있어 여전히 그 역할이 작지 않았다 할 것이다.
하여튼 글을 쓰다 보면 항상 샛길로 빠지기 일쑤라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써놓고 한참이 지나서야 기억났다. 원래 쓰고자 했던 것은 두정갑의 구조에 대한 것이었는데, 좋아라 사진을 올리다 보니 어느새 사진에 휩쓸려 엉뚱한 내용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글을 쓴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다듬어 문자로서 나타내는 것일 터인데, 이렇게 자기 머릿속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뒤늦게나마 원래 길로 되돌리기는 했지만 역시...
그리고 바로 이 폴더에 조선의 갑옷에 대해 올려놓은 것이 있으니 나머지는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조선의 갑옷에 대해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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