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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04/03
 


사비나의 소설
풍혈
風穴 [完]



[영화의 편지]

 올 봄에 풍혈을 다녀가신 두 분께 이 글을 올립니다.

풍혈에서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시던 날 밤에 나도 불현듯 두 분 앞에 나타나서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 놓았던 사연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습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살아왔던 것처럼 그렇게 떠나겠다는 마음을 접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일광굴에서 나누시는 말씀을 듣고 저로서도 최소한의 호의를 표시하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이미 짐작하신대로 이곳 풍혈은 나의 집입니다.

48년 전, 하늘 아래 머리 둘 곳이 없었을 때,
상처받은 짐승이 죽을 곳을 찾는 심정으로 이곳에 숨어들어 왔습니다.

정진사의 목숨을 끊고, 나의 보금자리였던 양지편 집을 불태우고도 죽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요스케에 대한 복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요스케는....그렇게 단칼에 간단하게 처단 할 수 없다고 작정한 내가 그 목표를 위해서 풍혈은 더 없이 좋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깜깜한 지하 땅굴에 요스케를 가두는데 성공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컸는지요?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뒤쫓던 요스케는 거꾸로 갇힌 다음에 나에게 빌고 빌면서 살려달라고 애원 했습니다.
그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어째서 몰랐을까요?
나는 오랫동안 짐승처럼 울부짖는 요스케의 울음소리에 한 치의 동정심도 품지 않고 죽어가는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를 처단한 이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작정했던 제가 그를 결행치 못한 것은, 참으로 질기고 질긴 것이라 또한 사람의 명줄인지라 어떻게든 연명하려는 이율배반을 안고 나는 무작정 이 동굴 속을 헤집고 돌아다녔습니다.

이미 정방사에 머물때부터 솔잎을 씹어가며 생식을 하였던 내게 동굴에서의 삶은 큰 불편함이 없었지만 살아 있을 이유를 찾지못하고 그저 원초적인 본능으로 생을 이어가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짐승처럼 굴속을 돌아다니다가 나는 불현듯 이 굴들이 어느 한 곳을 에워싸고 여러 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의 세월 흐른 후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런 깨달음 이후에 나는 죽으리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목표가 세워지고 활력을 되찾은 나는 풍혈의 지도를 그려가며 고생한 끝에 두 분이 오셨던 일광굴을 찾았지요.
두 분이 그렇게 쉽게 찾으시는 곳을 나는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서야 찾았답니다.



그런데 일광굴에는 놀랍게도 한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겉장은 유지油紙로 싸여 있었고 안에는 질 좋은 한지로 되어 있었는데 천자문 정도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도 힘이 들었습니다.

나는 누가 무엇때문에 책을 이곳에다 두었는지 매우 궁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먼저 이곳에까지 들어왔던 사람이 있었다는 데에 크나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일념에서 옥편을 구하여 한 글자씩 찾아 읽고 그 뜻을 알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읽기는 해도 그 뜻을 헤아리기에는 역시 어려웠지만 그래도 계속 읽고 연구하는 동안에 나는 어느 정도 세상사를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주 삼라만상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자신은 또 거기에 어떻게 감응 하느냐에 대한 폭넓은 혜안을 길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이미 우주와의 교감이 시작되어서 태어나 자라고 생명을 다 할 때까지 끊임없이 우주의 기를 받아 교유하며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미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백두산은 하늘에 닿고 천지는 지심에 뿌리를 두었다.
백두산과 천지의 웅건한 정기가 백두대간을 타고 소백산자락으로 뻗어 내려와 뭉친 이 금수산이야말로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 산이 품고 있는 풍혈에는 온 우주의 기가 뭉쳐있어 여기에 드나드는 바람은 마치 대지의 숨결과도 같다.

풍혈은 우리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이마시는 들숨과 마침내 생을 다하고 토하는 마지막 날숨처럼 끊임없이 우주의 기를 들이마시고 토한다.
이로 인하여 이 땅은 생명력을 이어간다.

천지만물은 누구도 생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되 이곳에서 수련을 하여 이 이치를 통달한 자는 마침내 그 우주의 기와 합일하는 기쁨을 얻을 것이다.
정진하고 맹진하라!
세월이 범접하지 못하는 그 경지에 오를 때까지!'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학문에만 전념한 듯이 보입니다만 그 동안에 헤집고 돌아다닌 것은 풍혈만이 아니었지요.

어느 때는 사흘이 멀다 하고 양지편을 찾아가기도 했으니까요.

그곳에서 지금은 타고 없어진 집터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재명의 집 뒷산에 앉아서 기약도 없는 그를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양지편을 찾아 갈 때에는 딱 한번만은 만나보리라 작정을 하고 떠났지만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자랑고개를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쁜 처녀를 아내로 맞아하던 날 밤에는 ....나는 뒷동산 굴참나무 아래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울었지만 그러나 나는 재명이 양지편에서 다복하게 사는 모습을 항상 지켜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재명 마저도 보국대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양지편도 더 이상 찾아 갈 이유가 없어졌을 때.... 그 때에 나는 정말 죽고 싶다는 마음에서 얼음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전에도 몇 번 들어가기는 했었던 터라 얼음에 묻혀서 죽으리라 하고 들어갔지만 웬일인지 전과는 달리 얼음이 모두 녹아버리고 없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이 신기해서 계속 걸어 들어갔는데 불도 없이 들어갔지만 들어갈수록 조금씩 밝아졌지요.

그리고 막다른 곳에는 토방이 있었습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모두 불그스레한 황토 흙으로 둘러싸인 그 방에 드는 순간 나는 이곳이야말로 내 한목숨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갈하고 따뜻한 그곳에서......, 나는 모든 원한도 애증도 모두 내려놓고 죽으려고 누웠습니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나는 잠자듯 죽으리라 하였으므로 저승인지 이승인지 분간치 못하고 눈을 뜨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다시 되돌아 나오다가 깜짝 놀랐지요.
나가는 통로가 얼음으로 막혀버렸던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얼음굴은 봄에서 가을까지는 얼어있고 동지에서 입춘 까지만 녹아서 황토방에 길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갇힌 것에 감사하고 다시 황토방으로 돌아와서 누었지요.
그 황토방이야 말로 풍혈의 가장 중심에 있는 심장이었습니다.

나는 죽으려고 그곳에 누웠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죽지 않았습니다.
봄에서 시작해서 여름과 가을을 지나 다음 해의 동지가 될 때까지 나는 그 방에서 겨울잠을 자듯이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짓날 잠에서 깨어 그 방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털고 다시 태어났음을 알았지요.


살아 있음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내가 비록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은자隱者로 살아가지만 정다운 산천은 조금도 내게 낯가림을 하지 않고 항상 내게 따뜻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 산하의 아주 은밀한 모습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기러기와 청둥오리 떼가 몰려와 날갯짓을 하며 사랑을 나누는 강변이 어디인지, 겨울이 되어 꽁꽁 언 강물 밑에 빙어氷魚를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얼음이 쩡쩡 소리를 내며 결속을 다질 때도 그들의 숨구멍은 어디로 뚫리는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계곡에 맨살의 가지를 들고 서 있는 나무들이 어떻게 봄을 준비하는지, 사근사근 속살거리며 얼음장 아래로 흐르는 냇물은 어디에서 제일 먼저 풀리는지, 버들강아지는 어느 개울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뜨는지, 철쭉은 어느 도랑에서 가장 흐드러지게 피는지, 용담은 어느 산등성이에서 그 푸른 미소를 보내주는지, 꿈결 같이 흐르는 밤안개는 어느 강변이 가장 멋있는지, ......그리고, 산사의 종소리는 어느 절이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지....,

나는 이 생활 속에서 세월을 잊었습니다.
구태여 흐르는 세월을 계산 해 볼 까닭조차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느닷없이 충주댐이 착공 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나의 마지막 사랑 마저도 물에 잠긴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또 다시 나를 변하게 하였습니다.

풍혈과 함께 생을 하직하는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을 때에 나는 다시 양지편을 서성이게 되었고, 그동안에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재명에 대한 간절함에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만날 수 있었을 때에 그처럼 망설였던 자신이 한없이 미웠지요.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마침내 재명을 찾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은 무어라 하던, 제게는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인 재명과의 만남으로 나는 이제 아무런 원도 한도 없이 기쁘게 풍혈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정방사에서 도연스님이 기르던 아기가 구철입니다.
그 아이가 열살 때에 도연스님이 입적을 하셔서 제가 맡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풍혈에 들이지 않고 보육시설에 두었었고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운명을 감정하는 일을 하였지요.

한길도소장의 죽음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창우소장의 죽음은 내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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