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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강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 차동엽신부님교리 2008.11.12 23:08 제23강 몸의 부활 ★ 미완성본입니다. 영성생활을 위한 도움말이 보충될 예정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기발한 착상과 물음에 부모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다음 얘기는 연구소 연구원 하나가 점심 식사를 하다가 들려준 것입니다. 예쁜 부활 달걀을 받고 좋아하던 7살짜리 꼬마 아이는 왜 부활절에 달걀을 주느냐고 묻다가 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듣고 나서 자기 식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꼬마에게는 이 부활 교리가 참 멋들어진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 후로는 가뜩이나 불안감이 컸던 터였기에 더 그렇습니다. 아이는 몇 장의 백지를 펴들고 제목을 근사하게 ‘공룡은 아직 살아있다’라고 써놓더니 종이 위에 공룡들을 그려놓고서는 그 옆에 자신의 생각인 양 글도 적어놓습니다. “공룡은 상상력과 생각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젠 공룡들이 죽어서 다시 못 볼거라구요? 걱정마세요. 우리 머리 속에 다 있잖아요.” 그런데 호기심이 그것으로 끝이 난 게 아닙니다. 얼마 후 외할머니 산소에 다녀오고 나서 아이는 엄마에게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아기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아니면 지금 모습대로 부활하는 거야?” 어린이들의 호기심에 엄마는 어떻게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우리가 부활한다면 그 모습은 몇 살 때의 모습일까요? 이 세상에서 불편한 몸으로 살던 이들은 부활할 때 어떤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부활은 과연 있는가?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아이의 물음은 어른들이 덮어두었던 물음들을 파헤치고 들어갑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는 사자 밥이 되어 순교하기 전에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주교님이 피신해야 교회를 지킬 수 있다며 설득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신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사자 밥이 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순교 직전 그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남겼습니다. 다음은 그 일부입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 나에게 깨끗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거기 닿아야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요 오히려 기다림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이냐시오 성인은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죽음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디모 2,11).라는 말씀이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진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함께 부활 믿음에 머물러보겠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부활’을 믿는 반면, 초세기부터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출발부터 ‘육신’을 악의 원천이며 죄덩어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육신’이 부활할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습니다. 대신 참되고 선한 것은 오로지 ‘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사실은 가짜 육신을 취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현설(假現說)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육체가 부활한 것이 아니고 ‘영’이 영광스럽게 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근래에 죽은 영혼이 산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제로 한 영화가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이들 영화도 결국은 ‘육신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재미로 보는 것이요 우스갯거리로 본다지만, 일단 영화라는 것이 보고 나면 그 여운도 남고 이래저래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습니다. 한때, 학생들 사이에서 ‘귀신 영화’ 또는 ‘귀신 시리즈’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자고 아니고 그런 것에 빠지다 보면, 무엇이 진실인지 식별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정말 귀신은 존재하는가? 구천(九天)을 떠도는 영혼들이 있는가? 죽은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육신’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간단하게 답변할 수 없는 물음들입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인가 둘인가? 위에서 던져진 골치 아픈 문제들에 만족할 만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삶의 조건과 특성을 깊이 알아야 죽음을 얘기할 수 있고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부활이 될지, 윤회가 될지, 영계(靈界)로의 회귀가 될지 어느 정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잠깐 인간 문제를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인간?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가? ‘인간’에 대한 물음은 거의 인류의 역사와 비슷한 역정을 밟아왔습니다. 누구고 인간의 정체에 대하여 물음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을 물을 때도 여전히 더 궁금한 물음은 ‘우주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돌아가는가?’라는 물음이나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존재이신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런 물음들이 워낙 시급하지만 큰 물음이라서 이 물음을 주체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물음은 이런 물음들과 연관성 안에서 던져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초엽에 이르러 독일의 막스 셸링에 의하여 ‘인간’이라는 주제가 본격적으로 탐구의 대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인간학’이라는 것이 생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접근법이 있겠습니다마는 가장 대표적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 인간의 개별 현상 곧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단서’로 삼아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풀 듯 인간의 전인적인 특성이나 본질을 유추해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관찰력과 추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도 다음의 예들을 가만히 따라서 더듬어 가다 보면 스스로도 어떤 ‘단서’를 잡아서 인간의 본질을 탐색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헤르더(Herder)는 ‘직립 보행’을 인간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보았습니다. 직립 보행은 첫째로 ‘손이 자유롭다’는 장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손재주, 문명의 발달 등등이 여기서 비롯합니다. 둘째로 ‘머리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땅을 향해 사는 동물들보다 지성과 영성이 발달하게 해주었고 보다 멀리 나아가 미래를 보게 해주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실존적 ‘불안’을 인간의 정체를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보았습니다. 동물들은 눈앞의 현실적인 위협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지만 인간만이 눈앞에 없는 일 또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놓고 ‘불안’해 합니다. 이것이 현실의 삶에 대해 ‘회의’하게 하고 삶의 질을 한 단계 높혀줍니다. 이미 첫 번째 장에서 말한 바 있듯이 단순히 쾌락만을 탐닉하던 ‘심미적’ 인간이 이 ‘불안’ 때문에 ‘도덕적’ 인간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종교적’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면증에 시달릴 수 있는 것도 이 인간의 심벌인 불안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불안은 결국 인간이 끊임없이 발전을 지향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볼로프(Bollow)라는 사람은 ‘놀이’와 ‘축제’를 인간의 정체를 드러내 주는 중요한 단서로 보았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만이 잔치를 벌이고 축제를 즐기며 놀 줄 압니다. 여기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겔렌(Gehlen)은 ‘결핍’을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동물 가운데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인간은 털이 없습니다. 인간은 힘도 딸려서 사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 소화 능력이 부족하여 불결하거나 조금만 상한 음식을 먹으면 금세 탈이 납니다. 이러한 ‘결핍’ 자체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의식주 문명을 개척하였고 사회 공동체를 이뤘으며, 첨단 지식 정보 산업을 일궈냈습니다. 박쥐나 고래와 같이 원거리 교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의 첨단 전자통신 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작은 단서 하나에서 출발하여 인간에 관한 많은 정보를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면서 정교한 존재인지 베르나르의 ‘뇌’라는 소설은 그 한 단면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또 최근의 ‘유전자’ 정보 분석의 성과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의 결정적인 비밀들을 파헤쳐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학문의 쾌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 온 존재이며,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원한 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음 자체가 답변을 거부하는 물음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들 인간은 ‘개방된 물음’(open question), 정답이 없는 물음이라고 말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그렇다면 인간 영혼과 육체는 서로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 물음이 인간에 대한 물음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물음이 풀리면 다름 물음도 함께 풀립니다. 서두에서 언급된 ‘영지주의’의 문제도 결국은 이 물음에서 파생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나와 있는 주장들을 구분하여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인간은 결국 ‘물질적인 존재’라고 보는 ‘유물론’(唯物論)의 주장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나 공산주의자 막스 등이 이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 정신, 영혼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물질’이 거듭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봅니다. 단백질 덩어리가 고도로 진화하여 오늘날 인간의 문명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육신 생명이 수명을 다하면 인간의 정신도 함께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실컷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가 이들의 인생관입니다. 둘째, 인간의 영혼만이 영원히 존재하고 육체는 악하고 유한하다는 주장입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설’을 내세우면서 영혼들이 본래 이데아(idea)의 세계에 선재(先在)하다가 그곳에서 죄를 짓고 그 벌로 잠시 이 세상에 와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요 속박이며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이성의 힘으로 육체에 얽매여 있는 욕망을 극복해야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결국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육체관으로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쳐서 고행을 장려하였습니다. ‘영지주의’도 이러한 견해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아우구스티노 역시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영혼 우위로 생각하였습니다. 플라톤처럼 영혼과 육신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로 보는 2원론에 떨어지지는 않아서 영혼만이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이 영혼이 이미 이데아의 세계에 선재(先在)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의 창조 신앙과 관련시켜서 영혼이 창조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영혼은 신이 그 자신을 가장 명백하게 계시한 곳으로서 육체가 이 영혼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기능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이 결합 상태가 태초에는 영육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었으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부조화가 초래되어 사욕편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역시 이 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금욕, 극기, 수행, 제육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셋째,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성서는 인간을 철저하게 영혼과 육체의 통합체로 봅니다. 일원론적 인간관입니다. 물론 성서에서도 ‘영혼’이나 ‘육신’이라는 단어가 따로 분리되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다만 영의 측면과 육의 측면을 별도로 부각시키기 위해 나타날 뿐입니다. 따라서 “내 영혼이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라고 했을 때 여기서 ‘영혼’은 ‘나 자신’ 전체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뼈가 녹아드나이다”는 “내가 심히 괴롭습니다”라는 것을 표현키 위한 수사법일 따름입니다. 토마스 데 아퀴노(1225-1274)는 이러한 성서의 인간관을 기초로 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단일체’라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빌어서 영혼은 인간의 형상이요 육체는 인간의 질료가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인간은 동시에 육신이며, 동시에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육체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살펴본 두 번째 주장인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육체관이 널리 퍼져 있던 중세의 분위기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뤘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신을 죄 덩어리로 보던 종래의 관점이 토마스에 의해서 극복되고 육신이 할 수 있는 선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야 영육의 조화, 심신일여, 적극적 영성(사랑, 베품, 선행)이 비로소 강조될 수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은 이러한 입장을 가톨릭의 공식 입장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을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드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하겠다”(사목헌장 14항).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영혼과 육신은 하나입니다. 이는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죽음도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지 못합니다. 영혼 육신의 합일체가 다른 존재 방식으로 옮아갈 따릅입니다. 죽는다는 것 사람이 흔히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현실 가운데 하나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불시에 갑자기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박상훈의 「내일이 무엇이니? 영생이 무엇이니?」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중년 남자가 해변을 거닐다가 모래사장에 무엇이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꺼내보니 꼭 마법의 주전자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주전자 뚜껑을 열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속에 갇혀 있던 종이 나타났다. 그는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을 말하십시오. 그런데 이제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다음 주전자 종에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1년 후의 신문을 내게 갖고 오게.” 주전자의 종은 즉시 1년 후의 신문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그는 신문의 주식란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많은 증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 후의 주식 시세를 미리 알아 가장 좋은 곳에 투자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신문을 읽어가던 그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변하였다. 왜냐하면 신문 부고란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년 후 그 날짜에 죽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1열왕 2,2)입니다. 죽음은 각 사람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며,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천수를 꿈꾸며 온갖 노력을 다 쏟은 이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며 중국의 진시황제 등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합니다. “우리 인생은 짧고 슬프다. 수명이 다하면 별 수 없이 죽는다”(지혜 2,2). 죽음은 끝일까? 인생은 결국 종착역인 허무로 향하는 덧없는 여정일 뿐이란 말인가? 죽음에 대한 표현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표현에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의 ‘죽음’을 가리켜 여러 어휘를 사용합니다만 그중 ‘돌아가다’, ‘별세(別世)하다’, ‘타계(他界)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어휘들은 옛적부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돌아가셨다’는 것은 ‘왔던 곳으로 다시 가셨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고(창세 3,19 참조),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별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선 사람들은 영혼이 육체와 이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또 이 표현은 말 그대로 이 세상과 이별한 뒤 특별한 세상으로 가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죽음은 ‘타계(他界)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요, 새로운 시작입니다. 삶을 관통하고 있는 죽음 심상태 신부의 「죽음」은 죽음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매 순간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끝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 존재하면서 일상 생활 속에서 인간 존재에 깊이 파고듭니다. 죽음은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있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삶 속으로 끊임없이 파고들어 삶을 의문에 처하게 합니다. 질병, 고독, 실패, 방치, 이별, 은퇴나 노화, 실직과 기아, 이 모든 것은 죽음의 표징이나 예고일 뿐 아니라, 삶 자체에 실존하는 죽음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은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규정되는 일회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징표들을 조각조각 죽음에로 건네줌으로써 끝납니다. 이렇게 인간은 여러 형태의 부분적이고 간접적인 죽음을 통하여 마침내 궁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이 인식의 직접적 대상은 아닙니다. 죽음은 직관할 수 없고,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무(無)의 한 국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삶의 끝으로서의 죽음, 삶의 과정 속에 함께 정립되어 있으면서 삶을 에워싸고 있는 구체적 형체로서의 죽음인 것입니다. 죽음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변화시키신 예수님 본래 죽음은 “죄의 대가”(로마 6,23)로 생겨났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죽지 않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죽음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죄의 결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사목헌장 18항).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죽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 엄습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자유로이 순명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순명은 죽음이라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리스도 덕분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디모 2,11). 하느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이며, 지상 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현하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시간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희망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지상에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교회 전례 기도문이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지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마주 대하듯이 바라볼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완전한 상복, 곧 그분의 현존, 행복의 절정, 심오하고 영원한 평화, 우리의 모든 욕망의 충족, 우리의 끝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 사도신경은 분명히 ‘육신의 부활’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우리의 몸이 부활한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토마스의 영육일체설을 올바로 이해할 때 ‘육신의 부활’이라는 신앙 고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 죽음으로써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영육통일체가 부활하게 된다는 교리입니다. 영육통일체란 인격 전체 곧 이 세상에서 살았던 ‘아무개’의 고유성과 특성 전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육신의 부활이란 이 세상에서의 인간성 전체가 그대로 저 세상에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분리되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통째로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체’는 무엇이고 ‘주검’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됩니다. 그것들은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몸의 존재 양식입니다. 저 세상은 3차원보다 훨씬 고차원의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세상이 몇 차원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 물리학계에서 파악된 차원은 11차원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인간은 저 미지의 차원으로 가면서 이미 새로운 육신을 입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고린 15,35-53). 부활하신 예수의 몸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사의 모든 이원적 굴레를 벗어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자의 삶은 생과 사, 성과 속, 사랑과 미움, 천당과 지옥과 같은 이원을 벗어난 자유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미 능동적으로 죽을 때, 곧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선택할 때 이미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 자유의 삶 부활한 몸은 썩지 않는 불멸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갈등과 제한과 굴레를 벗어난 자유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삶은 다름아닌 자유의 삶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정의가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들쭉날쭉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자유’ 자유에 대해서 가장 깊이 있게 사유를 한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먼저 정치적 의미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자유는 억압, 구속, 속박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는 민주화가 덜 된 국가에서 여전히 실현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정치적인 의미의 자유는 자유의 극히 일부분만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점차 철학적 의미로 발전하여 자유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유에 대하여 가장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이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는 “최선의 것을 인지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최선의 것을 실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자유의 목표는 자족(自足)이라고 보았습니다. 달리 말하여 자유를 얼마나 누렸는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자족입니다. 가령, “나는 맛있는 수박을 내 ‘자유껏’(마음대로) 사고 싶다”고 했을 때 자유를 향유케 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 선행 조건은 맛있는 것(최선의 것)을 아는 것이요, 그리고 그 다음 요건은 살 수 있는 여건(재정 능력)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부족함 없이 달성될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를 이런 의미로 본다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는 ‘신’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야훼’라는 이름이 바로 이 자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훼는 “I will be who(what) I will be”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지난 번에 배웠습니다. 이를 자유(후반부 who(what) I will be)자재(전반부 I will be)로 번역하면 딱 맞아떨어진다고 배웠습니다. 곧 스스로 유래해서(自由) 스스로 존재하는(自在) 분이 야훼이십니다. 야훼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의미에서 봤을 때에도 완전한 자유자입니다. 곧 최선을 인식하고 최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야훼를 요셉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못한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지 않았습니까?”(창세 50,20) 사도 바울로는 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이 자유의 섭리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아시고 가장 좋은 것을 이루시는 섭리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자유 성서는 자유를 창조주-피조물의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동산의 과일을 네 마음대로 다 따먹어도 괜잖다” ( )하고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만은 따먹지 마라”( )하고 조건이 따라왔습니다. 이 조건에 대해서 우리는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무리 가까워지고 민주적으로 된다고 하드라도 “부모의 자리는 넘보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 하도록 허용되지만 자식이 부모를 친구 정도로 여기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으로 남자는 것이 선악과의 취지입니다. 이 선악과는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이라는 조건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에게는 ‘물’이 생존의 조건입니다. 물 속은 갑갑하니까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하여 물 밖으로 나오겠다고 고집하면 물고기는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욥기는 그 선, 그 경계의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나는 명령을 내렸다.‘여기까지는 와도 좋지만 그 이상은 넘어 오지 말아라.” (욥기 38,1)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얘기는 ‘피조물’로서 존재 조건을 깨트렸다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피조물로서의 존재성을 거부하여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죽음에 추락하여 죄의 노예상태에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 부자유를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의 종이 되게 합니다.”(로마 7,17-23) 사도 바울로는 이처럼 죄에 시달려온 자신을 비참한 인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자유 속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자유를 되찾을 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자유에 우리의 속박을 위탁하는 길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8) 예수님은 최선을 알고 최선을 이끄는 분이기에 우리의 '고생'과 '짐'을 '영혼의 안식'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서 진리 안에 머무는 길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요한 8,33) 소크라테스가 말한 ‘최선의 인식’이 곧 진리이기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의 절반을 담보받게 되고 그것을 실행함으로써 나머지절반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선택을 하라고 있습니다. 이 선택을 잘해야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결단을 잘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중간하게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를 완전히 누리는 길은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히 자유롭습니다.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는 자유로운 것 같으나 영원히 노예가 됩니다. 후회의 노예, 악의 노예, 죽음의 노예가 됩니다. 사도 요한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1요한 2,15) 예수께서는 버림받은 자, 죄인들과 함께하셨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문화적인 죄에도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거룩함’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과 오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분리'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유가 가야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증오가 그대를 얽매이는가? 용서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기심이 그대를 속박하는가? 사랑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죄와 죄책감이 괴롭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부활의 삶을 꿈꾸며 예수님은 종말을 두 가지로, 즉 우리의 재산을 훔치러 오는 도둑과 신부를 구하러 오는 신랑에 비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이미 결정해 놨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 애착을 갖고 지상의 재물과 소유물에만 집착하며 살고 있다면, 그때 죽음은 우리에게서 이모든 것을 강탈해 가는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 때 죽음은 우리의 꽉 쥔 손을 비틀어서 움켜쥐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밤도둑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와 반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을, 그것이 재물이건 재능이건, 그냥 우리 마음의 재물로서만 땅에 묻어 두지 않고 그것을 일생 동안 나누고 베풀며 살고 있다면,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처럼 올 것입니다. 그 때 죽음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펼친 손으로 신랑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도둑처럼 오는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신랑처럼 오는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부자유의 삶을 살 것인가 자유의 삶을 살 것인가, 죽음의 숙명을 삶을 살 것인가 부활의 삶을 살 것인가, 이는 결국 같은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선택의 문제입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wjksg69/8139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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