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해고되고, 생활비는 물론 렌트비는 없고, 추운 겨울날 얼어죽게 생겼습니다." 생활고로 자살한 풀턴카운티 50대 한인 사건을 계기로 애틀랜타 한인사회 '신 빈곤층'이 주목받고 있다. 불경기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 처한 이들을 한인사회가 체계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20일 풀턴카운티에서 자살한 50대 한인 C모씨는 경제적 극한상황에 몰린 대표적 사례다. 4명의 가족을 부양해온 C씨는 생활고에 빠진 가운데 체불 임금을 요구하다 도리어 해고당했다. 게다가 렌트비를 못내 추운 겨울날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C씨는 마지막 가는 길도 편히 가지 못했다. 유족은 화장을 원했으나 장례비용 1,500달러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리장례식장의 도움으로 20일 겨우 장례는 마쳤으나 27일 현재 아직 유골을 안치못하고 있다. C씨의 아내는 "남겨진 세 가족의 생계가 막막한데다, 추운 겨울날 집에서도 당장 쫓겨날 상태"라고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C씨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경제적 어려움이 아닌, 당장 생존의 위기에 처한 한인 사례가 늘고 있다.
# 30대 가장 A씨는 요즘 가족들만 보면 면목이 없다. 개스비 단돈 350달러가 없어 다섯 가족이 냉방에서 벌벌 떨고 있기 때문. A씨는 경기침체로 사업실패후, 집을 차압당하고 임시 거처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전기 및 가스비가 없어 5살짜리 아이를 위해 난방조차 할수 없는 상태다.
#70대 노인 B씨 부부는 집안에 먹을것이 떨어졌다. 경기침체로 수입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신분 때문에 메디케어 등 복지혜택도 신청할수 없고, 타주에 사는 아들 역시 경기침체로 힘든 처지다. 지병에 시달리고 있는 B씨 부부는 렌트비도 못낸채 불안한 하루를 살고 있다.
#30대 한인 D씨 가족은 최근 온가족이 자동차에 살고 있다. 집을 차압당하고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심정으로 자동차에 살면서 버티고 있다. D씨는 "홈리스가 된 사람의 심정을 알겠다"며 "그래도 애들을 위해 끝까지 버티겠다"고 밝혔다.
#50대 한인 E씨는 불효자식이 되어 가슴을 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 그러나 경기 침체로 당장 생활이 어렵고, 설상가상으로 환율이 올라 한국행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다. E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인단체를 찾아 "비행기표 값이라도 달라"고 호소했으나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처럼 빈곤층 한인들은 지난해 경제위기를 계기로 급속히 늘어났다. 아시안 아메리칸 센터 지수예 총무는 "경제위기와 함께 가난한 한인들의 호소가 매일 접수되고 있다"며 "시민,영주권자들은 정부, 민간단체 복지혜택이라도 받을수 있지만, 신분이 미비한 사람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되고 있다"고 밝혔다.
빈곤층 한인들을 위해서는 일회성 기부가 아닌,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도움과 자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공신력있는 한인기관이 건실한 한인기업과 손잡고 투명한 기부관리와 복지혜택 , 기부활동은 물론이고 일자리 제공 등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은종국 한인회장은 "지금 경제상황이 심각하지만, 한인 특유의 정과 상부상조 정신이 있다면 헤쳐나갈수 있다"라며 "한인 신빈곤층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당장의 돈이 아니라, 일할수 있는 직장과 머무를 거처"라고 밝혔다.
최근 주택을 구입한 주택소유주나 주택매입을 위한 에스크로 과정에 있는 바이어들은 전과는 바뀐 절차나 규정들로 인해 당혹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융자은행들이 계속 융자 기준을 강화하고 있는 데다 지난 5월 1일 이후 감정 규정도 바뀌어 시행되고 있는 등 주택 매매과정에 변화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택 매매과정에서 올해 들어 바뀐 여러 규정 중 특히 영향을 크게 미치는 사항들을 정리했다.
▷서류양식 4506
서류양식 4506는 융자은행이 융자 신청자의 소득 증명 서류를 국세청 기록과 대조해 확인하겠다는 것을 융자신청자가 동의한다는 서류다.
즉 주택구입 희망자가 융자를 신청할 때 소득을 증명하기 위해 융자은행에 제출하는 서류가 국세청(IRS)에 보고된 소득과 일치하며 융자은행은 이를 국세청에 의뢰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류양식 4506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융자신청 서류에 형식적으로 포함돼 있었으나 실제로 이를 통해 국세청에 확인하는 융자은행은 많지 않았다.
즉 융자신청인이 세금보고한 자료와 현재 직장에서 받고 있는 월급명세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4506을 따로 요구하는 융자은행들이 증가하더니 9월 1일부터는 거의 모든 융자은행이 4506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주택 매매 과정에서 융자 관련 규정이 강화되고 새로운 감정 관련 규정이 시행되는 등 여러 변화가 있어 바이어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현재의 월급명세서는 보충 자료가 될 뿐 소득을 증명하는 주된 서류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올해 취업해 소득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지난해 소득이 없어 세금보고를 못했다면 융자를 받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자영업자가 많은 한인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50만달러 정도의 주택을 구입할 때 20%인 10만달러를 다운 페이먼트하고 40만달러를 융자받으려면 크레딧이 좋다 하더라도 2008년 소득 보고시 적어도 8만달러 이상을 보고했어야 하는데 이런 자영업자 비율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자산 증빙요건 강화
융자를 신청할 때 다운 페이먼트 또는 주택 구입 후 수개월 동안 모기지 페이먼트를 할 만한 자금이 있다는 것도 증명해야 한다. 즉 충분한 자산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자산으로는 은행 계좌에 들어있는 돈 뿐 아니라 주식이나 채권 뮤추얼 펀드 401(k)에 가입돼 있는 자산도 인정을 받는다.
이 때 현금자산 뿐 아니라 주식 채권 뮤추얼 펀드 401(k) 자산도 100% 인정을 받아왔으나 지난 5월 1일부터 주식이나 채권 뮤추얼펀드의 경우 현 시세의 70% 401(k) 개인 은퇴연금은 60%만 인정을 받고 있다.
주식 시장이 불안한 장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운 페이먼트 또는 수개월간 모기지 페이먼트 하기에 충분한 자산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감정
지난 5월 1일부터 새로운 감정(Appraisal) 관련 규정이 시행되면서 이 또한 바이어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4월말까지만 해도 융자 에이전트 또는 융자은행이 직접 감정사에게 의뢰해 해당 주택 감정을 하도록 할 수 있었으나 5월 1일부터는 융자은행이 감정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감정을 의뢰토록 하고 있다.
이는 감정 관련 비리가 주택 거품의 주요 원인중 하나라는 지적에 따른 것으로 이에 따라 융자 에이전트가 감정사와 결탁해 감정가를 올리는 병폐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와 함께 융자은행에서도 감정을 강화하고 있다. 즉 이전에는 융자은행이 감정사의 감정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준으로 융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모든 융자에 있어 '데스크 감정'을 실시하고 있는 것.
특히 집값 변동이 심한 지역은 융자은행에서 직접 나가 다시 감정하는 '필드 감정'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감정사가 책정한 것보다 데스크 감정 또는 필드 감정에서 감정가가 낮게 나와 융자에 애를 먹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파이낸스 프로의 캐티 김 대표는 "최근 감정사는 50만달러로 감정했으나 필드 감정에서 47만달러로 나와 에스크로가 취소될 뻔한 경우도 있었다"며 "전반적으로 주택 구입하는 절차가 더욱 까다로워지는 추세다"고 말했다.
북태평양의 동쪽에 있는 하와이 제도(별칭 샌드위치 제도)로 구성된 군도로, 지상 최후의 낙원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50번째 주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하와이는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하며 ‘알로하 스테이트(Aloha State)’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하와이(Hawaii)라는 단어는 하와이어로는 ‘작은 고향’이라는 뜻이지만 폴리네시아어로는 ‘신이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하와이는 약 2천 8백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섬으로, 섬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화산 덩어리입니다. 한편 빅 아일랜드(하와이 섬의 다른 말)에 있는
마우나 케아(Mauna Kea) 산은 해저와 해발 높이를 합치면 총 10,203.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됩니다. 하와이 제도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미 본토로부터 약 3,862.5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주도(州都)인 호놀룰루는 지리적으로 북위 21:18:25, 서경 157:51:30에 위치합니다. 하와이 제도는 총 137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요 섬은 니이하우, 오아후, 하와이, 마우이, 몰로카이, 라나이, 카우아이, 카호올라웨 등 8개입니다. 이러한 섬들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총연장 600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하와이 주 전체 면적은 16,729제곱 킬로미터로, 제주도 면적의 9배, 남한 면적의 1/6에 이릅니다. 비행소요시간은 서울-호놀룰루가 약 7시간 40분, 호놀룰루-서울이 약 10시간 40분으로, 이 시간 차이는 태평양에 부는 역풍 때문입니다.
2000년에 집계한 하와이의 총 인구는 121만 1,537명이며, 방문객을 포함한 실제 인구는 133만 4,023명입니다. 이는 1980년 이래로 약 25.6% 증가한 수치입니다. 인구밀도는 1 평방 킬로미터당 약 73명 정도입니다. 빈곤층은 10.7%, 고졸 이상의 고학력자 비율은 84.6%입니다. 인구의 약 80퍼센트인 87만 6,156명이 오아후 섬에 살고 있으며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은 라나이 섬(약 2,800명)입니다. 카호올라웨 섬과 니이하우 섬에는 장기 거주자가 없습니다. 인종별로는 아시아계가 41.6%에 이르고 백인은 24.3%, 하와이 원주민은 18%에 불과합니다.
하와이는 미국의 일부이므로, 주로 영어가 통용됩니다. 하지만 아시아, 유럽 및 남아메리카 등의 다양한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하와이에서는 원주민어를 비롯, 한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 여러 가지 언어가 들릴 것입니다. 하와이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하와이어입니다. 음률감이 강한 하와이어는 말레이폴리네시아 어족(語族) 폴리네시아 어파(語派)에 속합니다. 음절이 모두 모음으로 끝나며 자음의 연속이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와이어는 단 13개의 알파벳(A/E/H/I/K/L/M/N/O/P/U/W)과 '오키나(')'라고 하는 모음을 분류하는 말쉼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예: Hawai'i). 하와이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알로하(안녕하세요)”, “마할로 누이로아(대단히 감사합니다)” 정도의 인사말과 몇 개의 단어만 사용합니다.
주화(州花)는 노란색을 띠고 있는 무궁화의 일종으로, 일리마(Ilima)라고 부릅니다.
하와이주의 새는 네네(Nene)라고 불리는 거위의 일종입니다.
UA MAU KE EA O KA AINA I KA PONO(우아 마우 케 에아 오 아이나 이카 포노; The life of the land is perpetuated in righteousness; 대지의 생명은 정의 가운데 영원히 존재한다)
유래: 1843년 카메하메하 3세 때 호놀룰루 주재 영국 영사와의 사이에 토지문제와 부채문제로 분쟁이 있었음 당시 영국의 조지 포레트(George Paulet) 경이 군함으로 내항하여 카메하메하 3세를 굴복시키고 하와이 왕조국기를 내리게 한 후 영국기를 게양하여 하와이를 영국령이라고 선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843년 2월)
그 후 5개월 후인 1843년 7월에 영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리처드 토마스(Richard Thomas)경이 와서 카메하메하 3세의 복위를 인정할 때까지 5개월간 하와이는 비공식적이었지만 영국령이 되어 영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1843년 7월 31일 하와이 왕조가 복원되었을 때 카메하메하 3세가 "대지의 생명은 정의에 의해 보존된다"는 말을 했고 이 말이 바로 하와이 왕국, 하와이 공화국, 하와이주(州)의 표어로서 계승되어 온 것입니다.
모양: 기의 좌상부에 유니온 잭(Union Jack, 영국기)이 들어 있고 기타 부분에는 위로부터 백색, 적색, 청색의 3색이 여덟 줄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래: 1816년(하와이 초대 왕 카메하메하 대왕 시절) 하와이 왕조국기로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 하와이공화국 국기(1894-1900), 하와이주 주기(1900-1959)로 사용하다가 1959년에 하와이가 정식으로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되면서 그대로 주기로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기(州旗)에 얽힌 일화: 하와이 주기에 유니온 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카메하메하 대왕이 영국의 보호를 청한 당시 하와이를 방문 중이었던 영국인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라는 선장의 배려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영국기를 그대로 게양하면 미국인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오고 미국기를 게양하면 영국인이 항의를 하여 결국 양국 국기를 섞어 만들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최초 게양은 1816년 하와이 섬 코나(Kona)에서였다고 전해집니다.
하와이의 알로하 정신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하와이의 전통입니다. 전세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알로하 정신은 하와이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하와이인들은 알로하 정신이 시키는 대로 따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와이인들은 항상 외지 사람들에게 관대해야 하며,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지어야 하며, 하와이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만약 거리에서 혹은 식당에서 비록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알로하!” 하고 인사하게 된다면, 이미 당신은 알로하 정신을 배웠다는 증거입니다. 하와이를 관광하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알로하 정신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와이 제도는 약 2천 8백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났으며 8개의 큰 섬들을 포함한 그림같이 아름다운 13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과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78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상륙하여 비로소 세계에 알려진 하와이 제도는, 당시만 해도 여러 왕들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와이 섬의 한 추장이었던 카메하메하(Kamehameha)가 여러 섬을 평정하고 1795년 이후, 약 백 년간 8대에 걸친 왕조의 틀을 세웠습니다. 그 후 850년대부터 시작한 이민정책으로 점차 쇠퇴해진 하와이 왕조는 189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가 1898년에 미국과의 합병 조약을 체결, 1959년 미국의 50번째 주로 흡수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기나긴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된 세계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던 하와이. 그러나 오늘의 하와이는 가히 지상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일년 내내 서늘한 무역풍이 에메랄드 빛 바다를 타고 불어와 습도가 없는 쾌적한 날씨를 제공하고, 맑다 못해 투명한 하늘과 따뜻한 햇살로 인한 청명함은 하와이가 아니고는 맛보기 힘듭니다. 현란한 알로하 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자유로움, 빨간색 하이비스커스(hibiscus)를 머리에 꽂고 해변을 거니는 낭만, 오염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로운 폴리네시안 문화, 활기 넘치는 다양한 해상 스포츠와 완벽한 레저시설 등은 오늘의 하와이를 지상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손꼽게 하는 매력입니다.
1778년 1월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은 두 탐험선 리졸루션(Resolution)과 디스커버리(Discovery) 등 두 척의 탐험선을 지휘하고 호주, 뉴질랜드 연안 탐험과 금성 관측, 남극대륙의 유무를 확인하는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가는 수로의 유무를 탐색하기 위하여 타히티 섬에서 북미 쪽으로 항해하다가 우연히 하와이를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탐험 원정을 후원한 영국 해군성의 샌드위치백작 이름을 따서 하와이를 ‘샌드위치 제도’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하와이가 세계에 알려진 시초였습니다.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를 발견하기 전까지 하와이는 문자가 없는 구전전승 문화였기 때문에 하와이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다만 서기 300-600년 또는 그 이전에 같은 태평양상의 섬인 말퀴사스 제도와 그 후 950-1200년 경 타히티에서 수많은 사람이 카누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왔다는 설이 가장 믿을만한 가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쿡 선장이 하와이 제도를 발견했을 당시는 적동색의 피부색을 가진 건장한 사람들이 각 섬을 중심으로 서로 패권을 다투는 군웅할거(群雄割據)가 계속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하와이섬에 왕족 출신으로 수완과 지략이 뛰어난 청년이 나타나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세력을 넓혀 나갔는데 그가 바로 하와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킨 카메하메하 대왕(Kamehameha the Great)입니다.
카메하메하 대왕은 서양의 진보된 과학을 재빨리 흡수해 하와이 왕국의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총명한 두뇌를 지녔던 그는 백인 선원이었던 존 영(John Young)과 아이작 데이빗(Isaac David)등을 수하에 두고 서구의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여 먼저 자기 출생지인 하와이섬의 패권을 장악한 데 이어 마우이, 몰로카이, 그리고 오아후의 누우아누 팔리(Nuuanu Pali, 바람산)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통일의 기초를 확립하였습니다. (1795년 하와이 왕국 잠정 통일, 1810년 완전 통일)
1819년 카메하메하 1세가 죽자 그의 장남인 카메하메하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하와이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음으로써 혼란의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메하메하 1세의 애첩이자 거구에 명석한 두뇌를 소유한, 하와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걸 카아후마누(Kaahumanu)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주도하에 카푸(kapu, 금기제)를 폐지하였으며 때마침(1820년 4월) 보스턴으로부터 도착한 선교사들로부터 왕실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불과 20여 년 만에 기독교국가로 인정될 정도의 교세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카메하메하 2세가 런던 외유 중 병사함으로써 1824년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여 카메하메하 3세가 되었으며 그의 치하 30여 년이 왕조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입니다.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문화 예술도 발전시켰으며 1840년에는 신헌법 발표에 따라 입헌군주국으로 승인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도를 마우이섬의 라하이나(Lahaina)에서 호놀룰루로 옮기고 사회제도도 점차로 정비해 나갔습니다.
카메하메하 3세 때까지 하와이의 최대 수입원은 포경업(捕鯨業)이었습니다. 고래잡이 시기인 봄과 가을이 오면 연간 500여 척의 포경선이 호놀룰루, 라하이나, 힐로, 코나항에 출입하였고 이 도시들은 선박의 수리와 공급품, 술, 도박, 숙박 등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포경업은 고래의 부족과 석유의 등장으로 쇠퇴기에 들어갔으나 다행히 본토는 골드러시(Gold Rush) 시대로 접어들어 서부(LA 및 샌프란시스코)의 해안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하와이가 사탕 공급의 원천지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탕수수 농장은 급성장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 했습니다. 이에 백인 농장주들은 노동자를 해외로부터 수급하게 되고 그 첫 번째로 중국(1852), 이어서 일본(1868)으로부터 계약 노동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와이의 정치적 균열은 공교롭게도 하와이를 문명의 세계로 이끈 선교사의 후예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들은 하와이왕조가 방매하는 토지를 사들여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기 시작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인 사탕수수를 제일 많이 소비하는 국가인 미국과의 결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실 측과 백인세력 사이에 서서히 권력투쟁이 일어났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시대였고 카메하메하 5세의 통치시대가 1872년 막을 내리면서 카메하메하 직계는 단절되고 왕족 중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6대왕 루날리오(Lunalio)는 병약하여 1년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유쾌한 군주라는 별명을 가진 제7대 칼라카우아 왕(King Kalakaua)은 하와이인에 의한 왕권회복을 부르짖으며 이올라니 궁전(Iolani Palace)을 세우고 문화예술 진흥에 힘쓰며 미국과 호혜조약을 맺어 하와이 농산물을 무관세로 미 본토에 수출하는 등 제 2의 하와이 왕조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했으나 기득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백인세력의 압력으로 왕권을 크게 제약하는 신헌법을 공포해야 했고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져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양하던 중 사망했습니다.
기독교 신자이며 온건한 성격의 여자로, 백인들이 호락호락하리라 믿고 뒤를 봐 준 제7대왕의 여동생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가 제8대 여왕에 오르자 예상과 달리 도리어 왕권회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미국과의 합병을 주장했던 백인 기득권층은 이에 놀라 1893년 미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왕궁을 포위하고 압력을 가하여 여왕으로부터 왕권포기 서명을 받아냄으로써 하와이왕조는 막을 내리고 샌포드 돌(Sanford Ballard Dole)을 수반으로 하는 백인 주류의 하와이 공화국(1894-1898)이 탄생하였습니다.
친미 백인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하와이는 1898년 스페인 미국전쟁의 발발로 그 군사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같은 해 8월 21일 합병안이 미의회를 통과했으며 그 후 1900년에 정식 영토가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와이가 더욱 유명해지고 관광의 중심지로 급속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드디어 1959년 8월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하와이는 관광산업뿐 아니라 태평양 지역의 중심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 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들은 처음에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별로 여의치 않자 아시아에서 노동자를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왔고 1880년대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그 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계속 접촉을 갖고 드디어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함으로써 한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광고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습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들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최초 모집된 한인 이민단은 통역관 2명을 포함하여 총 121명이었습니다.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개릭(Gaelic) 호를 타고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납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없어 일본 고베 항(神戶港)을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실시된 종합 신체검사로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 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호놀룰루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 추가로 15명이 탈락하여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최초의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입니다.
이들 한인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남자들로,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으나 한인 여성이 거의 없어 결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과도 결혼할 수 없었고, 결혼하러 한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거리와 비용 탓에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사진 결혼입니다.
서로가 사진을 중매쟁이를 통해 주고받고, 이 사진을 들고 아가씨가 남자를 만나러 하와이로 건너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습니다.
최초의 ‘사진 신부’는 ‘사라 최’라는 여성으로 1910년 11월 28일(혹은 12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하와이 국민 총회장을 지낸 이래수씨였습니다. 사진 결혼 2호는 신랑 백만국(당시 39세)씨와 의주 처녀 유명선(당시 23세)양 부부.
기록에 의하면 1910년에 시작된 사진 결혼으로 1924년까지 하와이에 951명, 미국 본토에 115명의 한인 사진 신부가 입국했다고 합니다. 사진만 보고 결혼하다 보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가 참으로 많았고 문제도 적지 않았습니다. 노동이민을 온 총각들은 결혼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10~15년 동안 부지런히 일해서 저축을 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늙은 신랑과 어린 신부가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평균 나이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건너온 아가씨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분홍빛 희망보다는 척박하고 힘든 고생의 나날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며 오로지 자식과 자식교육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1905년 하와이 마우이 섬으로 이민을 온 최용운 할머니가 읊었던 시에는 그들의 답답함과 슬픔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남에 노든 속에 봄바람 소식 실은 배 만리나 떨어져 있으니 친척들과 이별하고 조상님의 묘 버린 슬픔을 뉘 알리요. 새 울어 눈물 보지 못하고 꽃 웃어도 소리 듣지 못하니 좋은 것 뉘가 알고 슬픔인들 뉘가 알리.
힘들고 고단하고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을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지만,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조국을 위해 쌈짓돈을 모아 해방 전까지 고국에 무려 300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보냈다고 하니 그 애국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1914년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부터 무력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은, 미국 유학 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합니다. 이들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외교를 통해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으며 이승만 본인이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은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동지회는 미주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습니다. 한편 동지회는 1953년 한인 기독학원을 폐교하고 그 건물을 매각하여 남은 돈 18만 달러를 하와이와 인연이 깊은 인천에 기증, 인천과 하와이의 첫 자를 각각 따서 만든 인하대학교 설립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등에 업고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됩니다. 이승만은 이 후 사사오입 등의 수단으로 독재를 이어가려 했으나 4/19 혁명을 통해 그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결국 다시 하와이로 망명, 1965년 7월 별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