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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a (s2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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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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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시안의 서부 개척사 -한국인 유학생-

2009.11.06 14:36 | Korea history | lisa

http://kr.blog.yahoo.com/s27174/10588 주소복사

1882년 조선은 구미 제국 중에 최초로 미국과 수호 조약을 체결 한 후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탈피하고 신생 자주 독립국가로 세계 사회에 일원이 되어
국호를 대 조선국(
大朝鮮國) 이라 선포하였다

미국과 상호 수도에 전권 공사를 상주 시킨다는 협약에 따라 미국은 서울 정동에 상주
공사관을 세웠으나 조선은 청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문제였지만 워싱턴에 상주 공사관을 
운영할 재정적 능력이 없어 미국 수도 워싱턴에 사절단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워싱턴에 간 보빙사는 한국 전통의 의식으로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였는데 서양인의
눈에는 색다른 모습으로 비춰지었다


이 사절단을 보빙 사절단이라고 하는데
단장은 당시 조정 안에 실세였던 민영익이 되었고 그를 따라 간 수행원들 중에 첫번째
미국 유학생이 태어 난 것이다


미국으로 떠날 때 일본에 들려 기념 사진을 찍었다
뒤에 좌측 부터 현홍택 ,궁강 항차랑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앞줄 좌측 부터 퍼시발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오례당


개화파로 지칭되는 이들은 이렇게 함께 미국길을 떠났으나 급진 개화를 원하는
젊은 층과  후에 청나라로 기운 단장 민영익과  정치 색갈이 서로 달라 일년 뒤
갑신 정변이라는 서로 목숨을 앗아가는 참극을 벌이게 된다 
뒷줄 왼쪽 네번째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

유학길을 떠날 때는 조선의 국민으로 떠나 왔으나 국호는 대한 제국으로 바뀌었고
대한 제국의 국민으로 떠난 유학생들의 귀국길에는 돌아 올 내나라가 없어 진 것이다

유학생 일부는 없어진 나라에 돌아 와 일본인들의 통치 속에 적당히 어울려 살았지만   
대다수의 신 문물을 접하고 배운 유학생들은 조국을 잃은 무지한 한국인 미국 이주
노동자들을 깨우쳐주고 이끌며 함께 조국을 찾기 위한 험하고 긴 여정의 애국의
길을 걸었다 


유길준
(1856-1914)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
(1856-1914)


1882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유길준은 민영익을 수행하여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여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훗날 유럽을 방문하고 서유 견문이라는 책을 썼다


보스턴 대학


변수

변수의 묘비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행으로 미국으로 간 변수(1861-1891) 갑신 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91
년에 매릴랜드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졸업자가 되었지만 안타갑게 졸업 4개월 후 1891년 교통(열차)사고로
숨졌다
.


메릴랜드 대학



이강

1900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 이강은 2명의 시종을 대동하여 버지니아주의
로아노크대학에서 수학중 의친왕에 책봉되고 1905년 귀국하여 적십자총재를 역임하였다



버지니아 로아노크 대학의 옛사진


하워드 대학의 유학생들 1896년


가운데 뒷줄에 여학생도 보인다

임병구, 이범수, 김현식, 안정식, 여병현 등이
서광범 공사의 도움으로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학에 유학.

하워드 대학

서광범

서광범은 보빙사절단 종사관 신분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유럽등지를 시찰한 후
돌아가 개화파에 가담하여 주동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다 계속된 정부의 추적을 피해 1885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 정부
기관지에서 글을 쓰며 어렵게 살았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받고 연방정부 공무원이되어  교육국 인종 학과에 번역관으로
일하기도 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연루자 사면령이 내려지고 그의 능력을 인정한 조정에
발탁되어 법무대신이 된 그는 박영효와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에 밀려 미국
워싱턴 주재  전권공사로 나오게 되었다
결국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 앉아 망명생활로 일생을 마치었다

윤치호



윤치호 는 일본에 유학 중 영어를 배워 초대 미국 주한 공사 후트의 통역으로 1883
귀국하였다가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도미 유학하여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
년간 수학하였다


에모리 대학

밴더빌트 대학


서재필
1884년 김옥균과 시도한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1885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9년 워싱톤대학에 입학하고 1892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의사

되었고 1890
년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 독립운동가


조지 워싱턴 대학


김규식

1896
년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버지니아의
로아노크대학(BA) 1904년 프린스톤대학원(MA)을 마치고 귀국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프린스턴 대학


안창호

오랜지 농장에서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미국 선교사 밀러의 주례로 결혼하고 다음 날 부인 이혜련과
같이 1902년 도미유학
.
도산 선생의 학력은 특이 하다
미국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고 성년의 나이에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무지한 한국 이민 노동자들 속에 직접 들어가 정신적인 교육을 시켰다


이대위


1903년 도미하여 오래곤의 포트랜드학교와 UC Berkeley, 태평양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로서 안창호와 같이 친목회, 공립협회, 흥사단, 국민회 창설에 이바지하고
상항감리교회 목사, 신한민보 편집국장 역임, 한글 인터타입식자기 발명,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청원하여 한일합방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한국 망명객 451명을 미국에
망명 유학생 자격으로 여권도 없이 오도록 하였다. (미주 100년 주년 발자취에서 발췌)

UC Berkeley

이승만
특별히 설명이 필요 없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1904년 유학, 1907년 죠지와싱톤대 졸업 1910년 하바드대 석사, 1910
프린스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화려한 경력을 소유하였다
두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승만 박사의 정치 철학이 서로 다른 것 처럼 
학력도 정 반대이다


하버드 대학

박용만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이 세운 상동교회의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5년 도미하여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군사학(BA)을 전공하고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시키며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북경에서 암살 당했다 


네브라스카 대학 옛 건물



신흥우

신흥우는1904 USC재학 중 LA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졸업 후 귀국하여 배재교장 역임.


남가주 대학USC


 
당시 유학생들은 유학을 떠나고 나니 을사 보호 조약과 뒤이어  한일 합방등 
급변하는 세월 속에 내 나라가 없었졌다 그들에게는 그저 태어 난 강산 만 있었을
뿐이었다



갑신 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을 떠난 젊은이 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그들의 모습은 무슨 비밀 결사대 같이 보인다)


대한제국의 여권과  나라가 없어진 후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한 여권

노무현 대통령 별이 지다...

2009.05.28 10:25 | Korea history | lisa

http://kr.blog.yahoo.com/s27174/10169 주소복사




조선 건국이래로 600년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자손들까지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패가망신 했습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셨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당신에게 투표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편히 가시길 바랍니다...









































유서를 작성하시면서도 주변 사람들에 도움받은 것들을 먼저 떠 올리시고


제일 첫줄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작성하신듯 합니다.


 유서의 내용만 봐도 그가 겪었을 힘듬과 외로움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누구도 원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작은 비석하나만 남겨달라고 하시는 모습이.. 


사람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됩니다.


편히 눈 감으셨으면 좋겠네요...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스크랩] 재치있는 유머, 맛깔난 촛불시위

2008.07.08 09:59 | Korea history | lisa

http://kr.blog.yahoo.com/s27174/9756 주소복사

얼핏 보기에도 십만명이 넘는 규모로 운집한 6월 10일 저녁의 촛불시위의 광경은 20년전 내가 대학생 시절에 참가했던 거리의 6. 10 항쟁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연일 계속된 시위에 당시의 거리는 온통 최류탄 연기로 자욱했고 거리의 보도블록을 깨뜨려 군사정권의 하수인들에게 던지는 통에 주먹만한 시멘트 덩어리가 도로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당시에 비하면 금번 촛불시위는 대단히 성숙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평화적으로 치루어 졌다. 촛불시위 초기에 물대포와 같은 경찰의 강경진압이나 극히 일부 시민의 폭력성 행동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뚜렷한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 모여든 10만명이 넘는 엄청난 수의 대중들이 특히할만한 불상사없이 10일 넘도록 평화적으로 시위를 진행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이제는 어느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수준의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뉴스를 읽다가 발견한 감칠 맛나는 시민들의 유머는 촛불시위의 격을 한층 높여 주는 것 같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게 좋겠단 생각이 들어 오마이 뉴스에서 타전한 사진들을 허락없이 싣는다. 오마이뉴스 관계자분께서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기 바라며 만일 이의가 있으면 알려주시길 ..










덕수궁의 꽃 으로 왔다 간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

2008.03.23 18:32 | Korea history | lisa

http://kr.blog.yahoo.com/s27174/9651 주소복사

1912년 5월 25일 덕수궁.

이 날,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탄생합니다.


덕혜옹주의 돌 사진입니다

아버지 고종황제를 쏙 빼어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요.

일제 강점기 하에서 우울하게 지내던 고종황제는 덕혜옹주를 굉장히 사랑하여

그녀를 낳은 궁녀 양씨에게 즉시 복녕당 당호를 내리고

태어난 다음날 아기를 보기 위해 복녕당으로 친림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행차했을때 덕혜옹주에게 젖을 먹이던 유모 변복동이

황제 앞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1916년에 고종황제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함녕전 옆의 즉조당을 개조해 만든 유치원인데,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 중 가운데 앉아 있는 소녀가 바로 덕혜옹주입니다.


황실 가족사진 - 고종을 중심으로 순종과 순정효황후, 영친왕, 덕혜옹주를 담고 있는 이 사진은 1918년 1월21일 촬영된 것이다.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는 이 사진에 대해 모두 모여 함께 일본 요리로 식사를 한 후 찍은 사진이라고 전한다. 즉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는 가족사진인 것이다. 사진은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세부 장식까지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당의 차림의 덕혜옹주.

이 흑백 사진을 바탕으로 동강 권오창 화백이 아래의 진영을 그렸습니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일출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송별회 장에 전시된 덕혜옹주의 작품으로 , 자수와 서화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덕혜옹주와 동급생, 선생님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덕혜옹주(오른쪽)가 다른 학생들보다 높은 좌석에 앉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서울대박물관 '마지막 황실, 고종의 막내딸로 비운의 일생을 살았던 덕혜 옹주가 경성 일출 심상소학교에서 일본 급우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쪽에 학교 교사들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 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5년 3월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정중앙에 있는 흰 얼굴의 앳된 소녀가 덕혜 옹주다. 얼굴에 애잔한 기색이 감돈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교과서에 쓰여진 ‘국어’란 명칭은 일본어를 뜻한다. 1925년 3월께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보고 있다. 일출 심상소학교는 서울 충무로 현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전용 학교였다. (1925년)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교문을 나와 마차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었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양식 모자를 쓴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시종이 겉옷을 들고 따르고 있다. (1925년 촬영)

 

 

조선 내의 일본 거류민들을 위한 학교라서 덕혜옹주도 때때로 일본옷을 입곤 했습니다.


 


소녀 시절의 덕혜옹주.

명목상으로는 유학이었지만 반강제로 일본에 온 덕혜옹주는

오빠인 이은 황태자 부부의 거처에서 지내며 우울함을 달래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순종황제가 붕어할 때마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괴로워했고

이게 훗날 그녀를 정신병으로 몰고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얻은 스트레스도 그것에 일조했겠지만요


결혼식날의 덕혜옹주.

1931년 5월 8일에 덕혜옹주는 대마도주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식을 합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모두 양친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 다케유키는 그의 후견인인 구죠 공작(다이쇼 국왕의 왕비 사다코의 친정 오빠입니다.) 부부,

덕혜옹주는 이은 황태자 부부, 이런식으로 결혼식을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결혼은 일본에서 주도해 억지로 맺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남편 소 다케유키(종무지)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속 두 사람은 다정해 보입니다.

항간에는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못살게 굴어서 그녀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금슬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을 마사에라고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양쪽의 이름을 합한 의미를 지니는 이름이 바로 마사에(정혜)...)

하지만 대체 이렇듯 행복해보이는 부부가 왜 종국에 가서는 파경에 치달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아무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덕혜옹주는 정신병이 발병해 도쿄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되고,

남편과의 관계도 끝납니다.

1951년 경에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서 처음 만난 김을한 기자는

(이 사람은 훗날 이은 황태자 부부와 덕혜옹주의 한국 귀국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웁니다.)

큰 충격을 받습니다.


 

감옥 모양으로 쇠창살이 쳐진, 아무도 없는 독방에, 11월인데도 맨발로 앉아 있는

중년의 여인이 되어버린 덕혜옹주.


 

나중에 김을한 기자가 동분서주하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도움으로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서울에 도착합니다.

그때까지 생존해있던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은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고,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린 덕혜옹주를 본 모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풀각시처럼 아름답던 소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신 상태에서 아래 사진을 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가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부축을 받으며 창덕궁 낙선재로 들어가는 덕혜옹주.

이 때 순정효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린 덕혜옹주는

정신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상황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궁중 예법대로 절을 올려 주변을 놀라게 했습니다.

마치 정상인이 행동하는 듯이 그랬으니까요.


덕혜옹주의 회갑날.

가장 왼쪽은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그녀 옆에 앉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저 할머니가... 바로...

'덕수궁의 꽃'이라고 불리던...

덕혜옹주...


왼쪽에서 두번째가 덕혜옹주입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과 왕진 치료를 번갈아 하며 지내던 덕혜옹주.

그녀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며

상궁들의 도움을 받아 나들이를 하거나, 상궁들과 화투를 치기도 했습니다.

노년의 덕혜옹주는 생전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구 씨가 보고 싶다"  (얼마 전에 훙서한 회은황태손 이구, 이은 황태자의 아들.)

"나는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비전하는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를 가리킵니다)

"나는 낙선재 살고 싶어요"

덕혜옹주를 간병했던 이방자 여사는 병상의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77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덕수궁의 꽃으로 불리던 황녀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홍유릉 뒷편에 모셔집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그녀 스스로도 정말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황제와 오빠 부부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의 곁으로...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

40년전 그 시절 추석 ...이미지

2007.10.31 18:42 | Korea history | lisa

http://kr.blog.yahoo.com/s27174/9389 주소복사

 

<40년전 그 시절 추석을 기억하시나요?> 
 
[도깨비 뉴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제


- 정 일 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 중에서




"싼 것이나 사 입혀야죠" 추석 한산한 시장에 나온 어머니.
(
동대문시장. 1962년9월10일)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1967년 9월16일)


초만원을 이룬 귀성열차. (1968년 10월5일)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에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거의 필사적이다.
기적이 울리는 가운데 기관차에 매달린 두아낙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
(1969년 9월24일)



정원87명의 3등객차 안에 2백30여명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있는 침대(?)로 변하기도.
(1969년 9월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24일 서울역은 추석 귀성객들로 붐벼
8만1천여명이 서울역을 거쳐 나갔다.(1969년 9월24일)



8만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엔 철도 직원외에도 사고를 막기위해
4백80여명의 기동경찰관까지 동원, 귀성객들을 정리하느라 대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데모 진압 장면을 방불케했다.(1969년 9월24일)



추석 보름달 (1969년 9월26일)


귀성객이 버스 창문으로 오르는등 고속버스정류장 대혼잡
(광주고속버스정류장. 1970년 9월14일)



삼륜차까지 동원되어 1인당 1백원에 성묘객을 나르고 있다.
홍제동. (1970년 9월15일)



60~70년대에 선보였던 대표적인 추석 인기 선물 - 설탕세트.



잔뜩 찌푸렸던 추석날씨가 오후부터 차차 개자 고궁에는 알록달록한
명절옷을 차려입은 아가씨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득찼다.
(
경복궁. 1976년 9월11일)



꿈속에 달려간 고향. 지하도에서 새벽을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는 귀성객들. (서울역앞에서. 1978년 9월16일 새벽2시)



추석 전날 시골 풍경 (1980년 9월)



한복정장차림으로 추석제례를 올리고 있는 4대째의 일가족.
올해 1백살난 姜敬燮할머니가 시부모의 묘에 절을 할때
80세된 며느리 呂判敎할머니와 손자 손부 증손자 증손부와
문중일가 20여명이 지켜보고 있다. (慶北 金陵군. 1980년 9월24일)



추석 귀성객 (1980년)



추석 귀성객은 돌아오기도 고달프다.
통금이 넘어 14일 새벽 0시20분에 도착한 연무대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받고 있다. (1981년 9월14일)



광주행 고속버스표를 예매한 여의도광장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삽시간에 표가 동나버렸다. (1982년 9월19일 정오)



짐인지 사람인지...귀성버스도 북새통.
연휴 마지막날인 3일 한꺼번에 몰린 귀성객들로 짐짝처럼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관광버스 짐싣는 곳에 승객이 앉아 있다.
(1982년 10월3일)



고향으로 달리는 마음
추석귀성을 위한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행렬이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끝이없이 늘어서 있다. (여의도광장. 1983년 9월10일)



빗속의 귀성예매 대열
추석 귀성객을 위한 고속버스승차권 예매가 15일 서울여의도에서 시작되자
3분의1일인 1만5천6백여장이 팔렸다. (1985년 9월15일)



추석 고향길은 멀고도 불편한 고생길. 서울역 광장은 요즘 귀성객들이
하루 10여만명이나 몰려들어 민족대이동의 인파로 붐비고 있다.
(1985년 9월29일)



이번 추석 귀성길에는 고속도로 국도마다 차량홍수를 이루면서
중앙선 침범, 끼어 들기등 무질서한 운행으로 교통체증과 혼란을 빚었다.
(벽제국도.1987년 10월7일)



24일 서울역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귀성객이 몰려 큰 혼잡을 빚었다.
(1988년 9월24일)



추석 귀성열차표를 사기위해 서울 용산역광장에 몰려든 예매객들.
(1989년 8월27일)



가다가 쉬다가...
추석인 14일오전도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에는 귀성객과 성묘객들의 차량이 몰려
평소보다 2~3배나 시간이 더 걸리는 심한 정체현상을 빚었다. (1989년 9월14일)



멀고 먼 귀성길
5일부터 추석귀성 열차표 예매가 시작되자 6일 발매되는 호남선 열차표를
사려는 시민들이 앞자리를 뺏기지 않기위해 텐트와 돗자리까지 동원,
새우잠을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역. 1992년8월6일)



한가위 가족나들이 (동작대교.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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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불쌍한옹주마마~! ㅠㅠ..
좋은 블로그 감상 잘하..
좋네여..^^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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