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 시집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 중에서
"싼 것이나 사 입혀야죠" 추석 한산한 시장에 나온 어머니. (동대문시장. 1962년9월10일)
귀성객으로 붐비는 서울역.(1967년 9월16일)
초만원을 이룬 귀성열차. (1968년 10월5일)
콩나물 시루 같은 객차에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라도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거의 필사적이다. 기적이 울리는 가운데 기관차에 매달린 두아낙네의 몸부림이 안타깝다. (1969년 9월24일)
정원87명의 3등객차 안에 2백30여명씩이나 들어 찬 객차 안은 이젠 더 앉지도 서지도 못해 짐 얹는 선반이 인기있는 침대(?)로 변하기도. (1969년 9월24일)
추석을 이틀 앞둔 24일 서울역은 추석 귀성객들로 붐벼 8만1천여명이 서울역을 거쳐 나갔다.(1969년 9월24일)
8만 귀성객이 몰린 서울역엔 철도 직원외에도 사고를 막기위해 4백80여명의 기동경찰관까지 동원, 귀성객들을 정리하느라 대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데모 진압 장면을 방불케했다.(1969년 9월24일)
추석 보름달 (1969년 9월26일)
귀성객이 버스 창문으로 오르는등 고속버스정류장 대혼잡 (광주고속버스정류장. 1970년 9월14일)
삼륜차까지 동원되어 1인당 1백원에 성묘객을 나르고 있다. 홍제동. (1970년 9월15일)
60~70년대에 선보였던 대표적인 추석 인기 선물 - 설탕세트.
잔뜩 찌푸렸던 추석날씨가 오후부터 차차 개자 고궁에는 알록달록한 명절옷을 차려입은 아가씨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득찼다. (경복궁. 1976년 9월11일)
꿈속에 달려간 고향. 지하도에서 새벽을 기다리며 새우잠을 자는 귀성객들. (서울역앞에서. 1978년 9월16일 새벽2시)
추석 전날 시골 풍경 (1980년 9월)
한복정장차림으로 추석제례를 올리고 있는 4대째의 일가족. 올해 1백살난 姜敬燮할머니가 시부모의 묘에 절을 할때 80세된 며느리 呂判敎할머니와 손자 손부 증손자 증손부와 문중일가 20여명이 지켜보고 있다. (慶北 金陵군. 1980년 9월24일)
추석 귀성객 (1980년)
추석 귀성객은 돌아오기도 고달프다. 통금이 넘어 14일 새벽 0시20분에 도착한 연무대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객들이 야간통행증을 발급받고 있다. (1981년 9월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