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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사람 - '야나기 무네요시'

2007.10.22 20:15 | Korea history | lisa

http://kr.blog.yahoo.com/s27174/9366 주소복사

 
미워할 없는 사람,  야나기 무네요시
 
석굴암 수리를 비판하고 광화문 철거에 저항했던 일본인
 
 

1916년, 야나기 무네요시의 첫 조선방문 때 해인사에서.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본은 우리나라 왕궁을(경복궁)을 무참히 파괴하고 자신들의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드디어 1921년에는 경북궁 정문인 광화문을 해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격분하여 피를 토하듯 ‘광화문 해체’를 반대하며 성토하고 나선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이름을 가진 일본인이다.

 

이듬해, 야나기는 요미우리 신문에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사설을 발표하며 일본의 야만적인 문화파괴 행위를 언론을 통해 알리고 저항했다. 당시의 이 사설은  동아일보에 '아! 광화문'이란 제목으로 번역해서 보도되었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마음은 갈피를 잡고 있다. 무자비한 끌과 매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이제는 멀지 않게 되었다. ... 너를 낳은 너의 친근한 민족은 지금 언론의 자유를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대신해서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자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생전의 너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들을 적어서 공중 앞에 내보내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요미우리 신문에 실었던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 원문과 광화문 사진.

 

야나기는 이에 앞서 1919년에 일어난 3·1 독립운동에서도 일본 정부의 강제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사설을 발표한 바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여, 비록 내 나라의 모든 지식인들이 당신네를 욕하고 또 당신네를 괴롭히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에는 이 글을 쓴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나라가 올바른 인도를 걷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반성이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1919년 5월 11일)

야나기가 쓴 광화문에 대한 사설은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당성이 인정돼 일본 정부는 광화문의 해체 대신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게 되는데, 이 때부터 야나기는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항상 감시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가 작성한 글들은 정치범으로 구속시킬 좋은 미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공식발표 대신 친분이 있는 인물들과 돌려봤다.

 

광화문은 완전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나 오늘날 경복궁 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겨졌다가 후에 다시 자리에 복원되었다. 이때 야나기의 나이 33세의 젊은이였다. 그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선 독립군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어린시절 모습.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3년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나와 유럽에서 종교철학을 연구한 뒤 귀국해 도요(東洋)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었다. 그가 조선을 처음 여행한 것은 그의 나이 27 때인 1916년이었다. 한국 전통도자기와 공예품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의 이름없는 장인들이 만들어 낸 도자기와 민화에 주목하고 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민예(民藝)’라는 이름으로 정의한 인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소개한 책.

 

그는 나무 소반에서부터 마구간의 여물통까지 조선이 가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넉넉한 성품을 새롭게 발견하고 조선만이 가지고있는 독특한 곡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 조선인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고유의 물품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수한 것인지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것들이 일본풍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일부에서는 조선의 것을 무시하고 소멸시켜나가는 것이 훗날 죄악이 되리라고 외쳤다.

 

그는 원래 미술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닌 심미안으로 민중들이 창조해낸 예술에 심취하면서 당시의 누구도 그를 따를 없는 전문가로 만들었다.

 

1920 서울에 온 야나기.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김우영( 뒷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 등

흰 두루마기 입은 조선 지식인들과 소녀들이 같이 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남편이다.

 

야나기는 철학·종교·예술을 아우르는 문예잡지 '시라카바'의 창간을 주도했는데 그는 문예잡지 ‘시라카바'를 통해 '조선 민족 미술관' 설립을 제창하여 1924년 서울 경복궁내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다.

 

1936년에는 도쿄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해 1961년 72세로 생을 마치는 날까지 각지의 공예조사, 수집 여행, 전람회, 집필 활동을 전개했다. 한국 정부는 1984년 외국인 최초로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아비코시 '시라카바 박물관'에는 시라카바 잡지 원본들이 보관돼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 소장, '진사호작문항아리'

 

그는 한국의 미술에 나타난 선적인 요소와 백색에서 ’비애의 미’라는 한민족 특유의 속성을 찾아내 ’조선의 미’를 말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이 같은 그의 초기 조선미학관에 대해서는 시비가 없지 않으나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고 조선, 대만, 오키나와 문화를 나름대로 존중한 민예운동을 펼친 것은 후대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일제의 문화동화정책과 관련해 ’광화문 철거 반대’ ’총독부의 석굴암 수리에 대한 비판의 글’을 썼던 그에게는 “조선사람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다”는 수식어가 늘 붙어다닌다.

 

최근엔 그의 ’평화론’과 ’복합의 미’ 사상 등을 재조명한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이 번역돼 나왔으며, 한일우정의 해를 계기로 지난해 9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야나기 수집품을 전시한 ’반갑다! 우리민화’전이 열리기도 했다.

 

 

 

 

 

 

 

 

아버지 대신 문화훈장 받으러 온

 

아들 ‘무네미찌’ 민예관장

 

일본 민예관 전시된 야나기 컬렉션.

 

 

1984년 일본인에게는 최초로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보관문화훈장이 수여됐다. 장남 무네미찌(柳宗理) 민예관장이 대신 받으러 와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미술에 관한 야나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네미찌 씨가 서울에 와서 처음 찾은 곳은 1931년 조선에서 사망해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 묘지에 묻힌 아사까와 다꾸미(1891~1931) 씨의 망우리 묘소였다. "부친의 조선미술에 대한 애정은 아사까와 씨 형제한테서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고 그는 말했다.

 

아사까와 다꾸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임업시험장 기사를 지내면서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미술을 사랑하고 일본을 비판했으며 조선인을 위해 헌신했다. 저작으로 <조선도자명고>, <조선의 소반>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많은 영향을 준

아사까와 다꾸미(淺川巧) .

 

"일본인으로서는 선친께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문화훈장을 받게 됐습니다. 열심히 한국을 위해 애쓴 부분에 대한 답례로 알고 감사드립니다. 선친도 살아계셨다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무네미찌 씨는 현대공예디자인을 전공, 독일에서 교수를 지내고 지금은 일본민예관장을 맡고 있는 산업공예디자이너다. 1984년에 벌써 '컴퓨터를 사용한 최첨단의 현대 디자인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미와 전통을 존경합니다. 옛날에 겪은 문화는 한국이 일본의 선생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의 현대화 과정에 서로 존경과 신뢰가 동반되기 바랍니다. 양국 모두 그 점이 문제 됩니다.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민예관에서 한국미술전을 개최할까 합니다.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나도 물건을 보면 한국 것인지 여부를 금새 알아봅니다. 진열품을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낼 수 있죠. 나라에서 처음 다까마쓰(高松塚) 고분이 발굴됐을 때 벽화의 인물상이 한국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소장 '아기 돌부처(약사보살 형상)'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조선백자'

 

"내 생각에 아버지는 철학자이자 여행가, 이상주의자, 로맨티스트였습니다. 20대에 조선의 미를 발견하고 놀라고 한국의 여러 가지 불행과 그 시대적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이 당신의 이상주의와 상반되어 의분을 가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미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요. 부친이 수집한 한국관계 물건은 대개 민예품들이고 도자기, 가구 등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군국주의가 팽배한 일본사회에서도 관료의 간섭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했던 자유주의자였다. 그가 어느 부분 조선을 옹호한 것, 수집한 물건을 이리저리 거간하지도 않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평가했으며 자신의 민예관 운영에 정부의 지원을 거절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야나기가 설립한 ‘일본 민예관’ , 동경에 있다.

 

무네요시의 부인 가네코(柳兼子)는 성악가로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천도교당, YMCA 등에서 음악회를 열고 수익금을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 기부하는 등 야나기과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나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가네코 부인에 대한 특별한 일화 하나를 1999~2005년 사이 고 최태영 박사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1920년대 메이지대학 법과 학생이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가 그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쳐서 내가 배우댔어. 조선미술을 애호해 조선미술전시회도 열고 서울의 광화문이 헐리는 것을 반대하고 그러니까 일본인 학생들이 '야나기 선생이 자꾸 조선미술 이야기만 한다. 조선인인가 보다'고 배척하려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나서서 '야나기 선생은 진짜 일본인이다' 하고 적극 옹호했어. 배척운동은 더 이상 일지 않았죠."

 

1920년의 야나기 모습(옆은 Mr. Leach).

 

"당시 도쿄의 조선유학생회 경비도 마련할 겸 그의 부인 알토 성악가 가네코의 음악회가 열리면 내가 음악회 표를 팔러 다니기도 했어요. 가네코의 음악회라면 다들 두말 없었어요. 팔린 표값만큼의 돈을 유학생회에서 기부 받았습니다. 그 돈은 조선유학생을 위한 활동비로만 쓰는 겁니다. 그래서 야나기 선생과 친했더랬어. 가네코가 부른 노래 중에 알토 음색에 잘 맞던 노래를 내가 우리말로 옮겨 불렀더랬어.
  
  '은빛 나는 작은 새가 / 바다 밀물 따라 왔다가 / 썰물에 떠나 어디론가 간다.'

그런데 그때 표를 팔러 다니다 한 교회에 가보니까 무슨 박사 무슨 박사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 있습디다. 그들이 바로 한일합방을 반대한 유명한 7박사라고 지금 생각하지요. 당시엔 박사가 아주 귀했거든. 일본에서는 7박사가 한일합방 반대성명을 낸 사실을 애써 덮어두려고 했지요. 박사가 귀하니까 처벌도 하지 못했고. 구마모도(熊本)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의 법과 선생 우끼다 가즈오(浮田和民)가 7박사의 선두에 있던 사람이었소."
  
이 사실은 최 박사의 역사회고록 '인간단군을 찾아서'와 2004년 12월호 학술원통신에 발표한 '한일합방을 반대한 일본의 7박사' 글에 7박사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설명으로 조금씩 언급됐었다.

 

아들 무네미찌 씨도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고 가정적인 문제가 없진 않았으나 아버지가 하는 일에 이해가 많았고 한국에 기부하는 일이 자연스러웠습니다"고 했다. 그는 또 "아버지가 친한파로 공격받던 당시의 신문 기사를 모아 출판했으면 합니다"라고 희망을 피력했다.

 

 

발췌 /

http://www.pressian.com/

 

http://joongang.ca/bbs/board.php?bo_table=T1001&wr_id=1913&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5B%C3%A5%C0%CC+%C0%D6%B4%C2+%C3%A2%B0%A1&sop=and

 

http://www.ddc.re.kr/etc/notice/viewMS.jsp?mark=17848&go=81&maxrows=10&where=&key=

 

 

 

 

 

 

 

 

 

 

정지용 시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제자였다

 

 

정지용 가족사진. 

 

 

’향수’의 시인 정지용(鄭芝溶ㆍ1902-?)이 조선민예 연구가인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ㆍ1889-1961)의 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학평론가 박태상 방송대 국문학과 교수는 3일 “지난달 18일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東志社) 대학 교정에서 열린 정지용 시비 제막식에 참석했다가 하타 에이지(八田英二) 학장이 이런 사실을 언급했다”면서 “귀국 후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정지용이 유학했던 시기와 야나기 교수가 강의했던 시기가 일치했다”고 말했다.

 

정지용 시인은 섬세한 언어구사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며 ’향수’ ’압천’ ’바다’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1930년대 말부터 이태준 이병기 등과 함께 잡지 ’문장’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청록파를 등단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근대시의 뿌리를 구축했던 그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일제시대 한국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일본의 민예운동가이자 종교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제자였고, 미학적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 동안 국내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맨 왼쪽은 야나기 무네요시, 다음은 순서대로

Bernard Leach, Rudy Autio, Peter Voulkos, and Shoji Hamada.

 

박 교수는 “하타 에이지 학장은 시비제막식에서 ’정지용 시인이 도시샤 대학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구자로 저명했던 야나기 교수의 영문학 강의를 수강했고, 블레이크를 주제로 졸업눈문을 썼다’고 소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당시 조선의 전통공예를 일본에 소개했던 야나기 교수는 한편으로는 조선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배려를 보였다”며 “기독교주의, 국제주의, 자유주의를 교육의 중심이념으로 삼은 도시샤 대학의 학풍을 배경으로 정지용 시인은 야나기 교수와 기타하라 하쿠슈(1885-1942) 시인과 만남을 통해 작품세계의 숭고함을 높여갔을 것”이라고 하타 학장의 기념식 축사를 전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

 

박 교수는 “정지용 시인의 유학기간에 야나기 교수는 도시샤 대학의 정식 교수가 아니라 출강자 신분이어서 그 동안 두 사람의 상관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라며 “정지용이 유학했던 1924-29년에 야나기 교수는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출강하며 휘트먼과 블레이크의 강의를 담당한 사실을 일본학자 사나다 히로코(眞田博子)의 최근 정지용 관련 박사논문에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정지용은 블레이크 시 5편과 휘트먼의 시 12편을 번역 소개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정지용의 졸업논문 ’The Imagination in the Poetry of William Blake’도 야나기 교수의 권유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정지용 시집.

 

박 교수는 “정지용은 번역시와 동시까지 포함해 모두 140여 편 가운데 ’압천’ ’향수’ ’Dahlia’ ’바다’ ’말’ ’카페 프란스’ 등 빼어난 작품 20여편을 도시샤 대학 재학중에 창작했을 정도로 일본유학시절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초기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쓴 정지용이 상고주의, 정신주의의 전통으로 회귀하고 산수시, 자연시를 썼을 뿐 아니라 다수의 시론을 발표한 것은 야나기 교수의 미학이론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번에 정지용이 야나기 교수의 제자였다는 것이 확인된 만큼 향후 미학적 연관성 등에 대한 본격적 연구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01/2006010300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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