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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설교: 예수와 한국교회
2008/07/03 오 전 6:53 | 단상

2008년 7월 3일. 구역모임에서

본문: 마가복음 8장 27-33절.

저는 원고가 없으면 거의 설교를 못 합니다. 아마 우리 집사람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말 주변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고 즉석에서 생각나는 말을 하다보면 균형을 잃기가 쉬워 그렇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마 오늘 제 설교를 들으시는 분들은 균형을 많이 잃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게 옳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균형을 잃었습니다.

제 눈에는 사실 한국교회가 균형을 잃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신앙유형을 저는 샤머니즘적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교, 불교와 유교라는 거대한 종교적 초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한국의 문화, 즉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가 오래전부터 불교와 유교, 더 나아가 샤머니즘이라는 무교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불교적, 유교적, 무교적인 심성과 생각, 생활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비빔밥에도 고유의 맛이 있습니다. 비비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져야 합니다. 비록 한국의 기독교가 무교와 불교, 유교라는 기존의 종교문화의 비빔밥 속에 새롭게 첨가되었다 하더라도 기독교 자신의 독특한 맛을 내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교회들은 샤머니즘적 맛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의도적으로 마가복음 8장 27절 이하의 구절로 정했습니다. 첫째는 앞에서 제가 말한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삶과 그 분의 생각을 잘 설교하지 않는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한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을 본문으로 정했습니다.(마가복음의 구조)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상하게 예수님에 ‘관해서는’ 설교하지만, 추상적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믿어라, 그러면 천국간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그 분은 기적을 일으키신다. 이런 식으로 설교한다든가, 아니면 아예 예수님과는 무관한 종교일반의 믿음에 대해 설교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못하실 일이 없다. 기도 열심히 하면 다 이루어진다. 걱정 마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다. 이런 설교가 의미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 신앙과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신앙만의 독특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무엇을 하셨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그 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파악하고 그 분의 삶을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겠다는 사람들이 기독교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택한 이유는 이 본문이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이야기 할 것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걷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27)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항상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당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보다는 이방인의 땅이라고 불렸던 갈릴리 지방을 주 무대로 활동하셨습니다. 의도적인 예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성지라고 오늘날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가는데,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성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마지막생을 불살라야 하는 격전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나는 불을 던지러 왔다’고까지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봐도 예수님이 폭력을 행사한 흔적이 없죠. 그런데 단 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은 채찍을 드셨습니다. 성전이라는 곳이 강도떼의 소굴이 되었다고 예수님은 강도높게 비판을 하셨죠. 그리고 이 사건은 십자가 처형의 결정적인 빌미가 됩니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또 길어지니까, 여기까지만 언급하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거리사역이었습니다. 회당, 집에서 말씀을 전하시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특정장소, 예컨대 교회나 집에서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 신앙을 돈독히 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이나 성전이라고 하는 소위 신성한 장소가 오히려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자리라고 파악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그는 거리로, 광장으로, 군중 속으로 가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길에서 제자들에게 묻고 이야기 하십니다. 특히 이 곳은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이름대로 로마의 황제를 기리는 군사적 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과 권력으로 유대민족을 억압하는 지배자의 이름을 딴 그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소문에 대한 물음입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소문이 범상하지 않습니다. 죽은 세례 요한이 환생했다고들 믿기도 하고, 아합 왕 때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린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의 환생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엘리야 모두 정치적 성격이 강한 예언자입니다. 아합 왕이 악한 일을 하고 바알 신을 섬길 때, 엘리야가 가서 가뭄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잘 아시다시피 바알 신(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갈멜산에서 맞짱을 뜨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 형제의 아내를 취하자 대담하게 그 앞에 가서 헤롯을 꾸짖다가 목이 베여 죽습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인데, 왜 예수님과 관련해서 이런 소문들이 일고 있었을까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만 아무런 연고 없는 소문은 없습니다. 소문이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영 허탕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속담처럼, 예수님의 당시의 행적이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못지않게 정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요한의 환생도 엘리야의 환생도 아니지만, 예수님의 행적이 정치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 몇 줄 앞으로 가서 8장 15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고 헤롯은 당시 갈릴리 지방의 통치자죠. 예수님은 한편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을,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지도자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족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3.1 운동시에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했던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치하에서 선교를 지속하기 위해 외국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그만두게 만듭니다. 기독교와 민족운동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는 마치 영혼만을 다루는 종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 후, 4.19혁명 때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때도 5.18 광주민중항쟁 때도 한국의 대다수의 교회는 침묵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정치지도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일침을 쏘기 보다는 조찬기도회를 만들어 독재자를 축복하고 아량을 베풀었죠. 세례요한,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참된 예언자의 정신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한국교회는 걸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걸어가는 듯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구국기도회를 하면서 기독교 대통령을 만들어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회적 정의나 경제적 평등, 최소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대다수의 교회는 침묵하고 있지 않습니까? 헤롯의 누룩을 조심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다수의 제자들은 헛듣고 딴 짓을 했는데, 아마 한국교회의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마가복음은 누룩 이야기와 오늘 본문 사이에 눈먼 사람의 이야기를 삽입해 놓았습니다. 아직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의 상태를 우회적으로 고발하고 이제 서서히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복선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소문이 아니라, 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해봐라는 것이죠. 예수에 관한 것 말고 너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예수에 대해 말해봐라는 것입니다. 이때, 언제나 용감한 베드로가 큰 소리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언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고백을 베드로는 지금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역에서 내뱉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예언자 정도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완전히 뒤엎고 민족의 독립을 일구어 낼 새로운 왕, 메시야가 바로 당신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마태복음은 이 베드로의 고백을 치켜세우고 있지만, 마가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뒤따르는 예수님의 말씀은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였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자신을 ‘인자’라는 용어에 빚대어“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께 화를 벌컥 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얌전하게 표현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한판 싸움이 벌어진 것이죠.(에피티마오) 베드로가 예수께 화를 내면서 고함을 치고 저주를 퍼붓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왜 싸움이 벌어졌을까? 베드로의 고백이 잘못되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가 다른 것이죠. 제가 우리 아들에게 ‘이 똥강아지 같은 놈’ 하고 말하는 것과, 혹시 길에서 어떤 사람에게 ‘이 똥강아지 같은 놈’하고 말하는 것은 같은 말이지만 전혀 다른 뜻이 되지요.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지방에서 “예수, 당신이 바로 메시야요”라고 말한 것은 오랫동안 로마의 압제밑에 있던 우리가 당신의 거대한 힘에 의지해서 여기서 한판 싸움을 벌이자는 말입니다. 여기서 독립투쟁을 하자는 말이죠. 예수님은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자 오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과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 상이 그대로 예수에게 투영된 것이죠.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를 한 후, 메시야 상을 수정해 놓습니다. 메시야란 먼저 죽음을 당해야 한다. 죽기 전에는 고난을 당하고, 그 후에는 버림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부활이 있다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구원자 상을 예수님께 투영해 놓고 예수님께 이렇게 해야 한다고 베드로처럼 호통을 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무슨 무당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 화를 물리치고 복을 받고자 한다든가, 예수를 통해 먼 미래를 예언하고자 한다든가, 남들이 할 수 없는 신령한 체험을 하고자 한다든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겠다고 한다든가 하는 일들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대해서는 초연한 도사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든가, 선비처럼 점잖은 빼는 분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화도 내고 채찍도 들고 때로는 욕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또 창녀가 와서 자기 발을 씻기는 것도 허락하셨고, 먹기를 탐하는 사람이라는 지적까지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여기 보셨듯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자기 친구하고도 대판 싸우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존재도 아니고 도덕군자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의 삶,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메시야 예수는 먼저 종교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아부하면서 기득권의 시녀구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가복음 3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 초반부터 종교지도자들은 정치 권력자들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모의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선전해 주고, 정치권력은 이들의 뒤를 봐주는 이른바 종교와 정치의 야합 속에서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습니다. 하루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당시의 민중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율법도 어기는 놈들이라고 종교적인 낙인이 찍힙니다. 살기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라고 하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과 같이 밥을 먹습니다. 길거리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끌어 안으셨습니다. 죄가 많아 하나님께 벌 받고 저주받았다는 병자들에게 다가가서 병을 고쳐줍니다. 무엇보다도 대리석으로 번들하게 43년간 지어놓고 종교와 정치의 중심역할을 하던 성전을 예수님은 오히려 저주합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 중 누가 과연, 예수님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를 죽이고자 하는 힘에 예수님은 힘으로 대항하기 보다는 약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오히려 내어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위 ‘첫번째 수난예고’라고 하는데, ‘두번째 수난예고’(마가복음 9장 30절이하)에는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그저 내어준다는 뜻입니다. 메시야 예수는 베드로가 생각했던 환생한 메시야 다윗과는 달리 아무런 힘없는 존재로, 힘없는 존재들과 함께, 힘없는 존재처럼 종교권력의 희생자가 되겠다는 강한 결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메시야의 길, 하나님의 길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설교가 길어져서 이제 서툴지만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힘’을 강조합니다. 특히 ‘파괴적인 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힘을 강조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 분은 믿으면 마치 나도 전능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힘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강한 힘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아부를, 약한 자들에게는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힘없는 자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권력을 맛보고 거기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세 번째 수난예고(마가 10, 32이하)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너희가 아는대로 이방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 10, 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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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목사님(설교를하셨으니 이렇게불러야하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특히 호도스에 대한 해석은 인상깊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엔 너무 한국교회를 싸잡아 비난 하시는 듯 해서
좀 불편한 점도 있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한국의 한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담임목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무리가 좀...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졌는데
좀 식상한 결론으로 끝난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느낀 첫 째 이유는 저의 신앙양심이 무디기 때문이고
둘째는 짧은 설교시간 때문인 듯합니다.
08/07/31 (목) 오후 6:21   [남기은] from 203.171.178.221
한국교회를 싸잡아 비난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교회 하나하나를 열거하면서 비판할 수도 없고, 다만 자기비판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미흡하죠...그러나 설교하는 당일 주변사람들의 표정과 질문으로 혼줄이 났습니다.
08/08/01 (금) 오후 6:24   [spero]
비판에서 우리교회를 빼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을 들어 마땅하기 때문에 불편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표정들과 질문들이 박목사님을 혼줄나게 했는지 무척궁금합니다. 나중에 동기모임에 오시면 그 예기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08/08/02 (토) 오후 2:43   [남기은] from 203.171.178.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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