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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전환.
글쓴이: 박영식
사상사적으로 볼 때, 현대 또는 근대사회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7, 18세기에 절정에 도달하여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중심주의’는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인류사를 크게 구분하면, 우주(자연)중심주의, 신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로 나눌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자연이 거룩한 존재로 파악되었다. 여기서 거룩하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보다 우월하고 광대한 존재로 파악되었다는 의미다. 자연은 인간에게 신비스러운 존재로 다가왔다. 자연은 때로는 인간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연만물은 죽은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는 인간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다. 탈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가 “만물은 신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자연의 신비로움과 생명, 성스러움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 세상 모두를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의 원리를 천(天), 천리(天理), 도(道)라고 표현했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흥하고 하늘에 역행하는 자는 망한다)는 말은 이러한 거대한 생명의 원리에 인간도 순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고대시대에 자연은 인간의 지배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은 인간이 순응해야 하는 거대한 생명의 원리를 경청해야 하는 자리이다. 고대사회의 세계관을 우리는 ‘우주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세계는 거대한 생명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질서체계이며, 거기에 인간도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인간과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일부로 이해되었다.
거대한 생명의 원리를 서양의 중세시대에는 “신”이라고 불렀고,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다. 신이라는 절대자가 인간 뿐 아니라 세상만물을 창조했고 세상을 다스린다고 보았다. 신이 세계의 중심이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신의 뜻(섭리) 아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시대를 ‘신(神) 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세계는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질서잡힌 세계라고 생각했다. 또한 신의 뜻을 파악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바람직한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성당에 들어가 보면 아름다운 장식의 모자이크를 보게 되는데, 모자이크는 부분들이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움과 질서를 구성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온 세상은 부분적으로는 다양할 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신의 섭리와 계획 아래에서 아름다움과 질서를 연출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신의 뜻은 누가 알고 있는가? 신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었다고 생각했고,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종교 지도자들(교황, 사제, 수사 등등)이 신의 대변인이었다. 그런데, 신의 뜻은 단지 성경에만 계시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를 자신의 뜻 안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자연세계도 신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자연의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신의 의중에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연구하는 종교지도자들만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도 신의 뜻을 파악하고 이에 봉사하는 자들이었다.
근대 또는 현대세계는 바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신의 뜻이 자연 속에 계시되었고 인간은 지성을 통해 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은 자연의 법칙을 스스로 위배하는 모순을 범할 수가 없다. 자연의 법칙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면, 이를 창조한 신은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이기에 스스로 정한 법칙을 범하는 모순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제 신은 마치 시계제작자처럼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에 법칙을 정해 놓았지만, 이 법칙을 스스로 변경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 세계는 이제 잘 만들어진 시계처럼 제 스스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신은 세계와 역사의 운동에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존재로 밀려나게 된다. 스스로 운동하는 세계의 법칙성을 파악하는 존재는 이제 인간 자신이며, 특히 과학자들이다. 이제 세계의 중심에는 인간의 이성이 자리하게 되었다. 인간은 세계를 자신의 이성적 능력에 따라 파악하고 예측하고 계산한다. 인간 문명의 건축을 위해 자연은 이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계의 건축물을 위한 도구와 재료로서 자연세계는 활용될 뿐이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개의 무기를 통해 인간은 자연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게 된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도 아니며, 인간이 숭배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자연은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인간중심적 사회의 물질적 도구(material)일 뿐이다. 자연에는 생명과 영혼이 있다는 고대의 사고는 폐기되어 버렸다. 자연은 단순히 물질일 뿐이다. 땅과 흙, 강과 산은 생명체의 터전과 젖줄로 이해되지 않았고 인간이 자신의 의도대로 개발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재구성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얻게 되었다. 인간은 이제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의 지배자이며 만물의 영장으로 여겨졌다. 이런 인간중심적 사고 아래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과 과학을 앞세워 자연과 인간 외의 살아있는 생명체를 인간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오염, 각종 신종 바이러스 생성, 반생명적인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온 생명체가 함께 소멸해 갈 위기에 처해 있으며, 점점 그 심각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은 ‘인간중심주의’의 대안으로 ‘그물망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구조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생명체 모두가 거대한 유기체적 그물망 속에 놓여 있어, 상호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생명체 없이 자신이 존재할 수가 없다. ‘작은 나비의 날개짓 하나가 지구 반대편에 기상이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에드워드 토렌트의 기상관측에서 발전한 소위 나비효과인 카오스 이론은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한다. 각각의 부분들은 독립적으로 존속하지 않고 서로 연관되어 있어 존재한다. 하나의 현상은 복잡한 다양한 원인들에 의해 구성되어 일어난다. 지구 생명체의 존속을 위해서는 사소한 개별적 생명체라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다. 1970년대 초기의 로마클럽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금과 같은 실용성 위주의 성장이 계속된다면 지구는 2100년쯤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렵다고 예측하고 있다. 전(全)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모든 생명체가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세계관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데, 이런 그물망적 세계관, 관계중심적 세계관을 우리는 세계종교의 전통들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유교의 가르침의 핵심인 인(仁)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시한다. 유교에서는 천명(天命)이 곧 성(性)이라고 함으로써 하늘의 뜻이 인간의 본성 속에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바를 구현하고 실현하는 것은 곧 하늘의 명을 따르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유교에서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한다. 즉,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원리인 예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유교의 가르침이 비록 관계를 중시하였지만, 아직까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을 중시하였다고 한다면, 이에 반해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은 인간중심주의를 훨씬 넘어간다. 불교의 가르침 중에는 무아(無我)론이라는 것이 있다. 고통의 근원적인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아집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부정(否定)하는 무아론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인연생기(因緣生起-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발생한다)의 법칙 아래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존재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아집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가 찰나적이고 일시적이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의 일시적인 조합임을 깨달음으로써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무애(無碍 - 거침이 없음)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도교에서도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을 통해 인간 중심적인 유용성이 다른 생명체에는 오히려 무용한 것이며, 다른 생명체에 유용한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는 무용한 것이라는 통찰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기독교에서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도 역시 피조물의 하나이며, 다만 하나님의 예술작품인 온 세상의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청지기이다. 인간이 자연의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 생명의 주인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거역한 것이 인간의 범죄이며, 이 범죄로 인해 자연세계도 파괴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을,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드러난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생하는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