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기: 글을 쓰다 보니 산만해 졌다. 글 쓰는 중간에 할 일이 생겨서도 그렇고, 할 말이 많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차분해 져야 한다....
종종 신앙인은 묻는다. 주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내가 유학가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아니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왜 허공에 대고 던지는 것일까? 가능성에 흔들리며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심산인가? 현실적인 것에 도전하기에는 너무 심약해서가 아닐까? 기독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성서의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과는 무관한 신앙유형을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설교에서 '책임'이라는 단어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듯하다. 씁쓸하다. 그런데, 성서를 펼쳐보면, 하나님은 종종 질문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아담아 어디있느냐?"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가서 전하라!" 등등의 말씀은 인간존재를 책임적 존재로 만드는 말씀이다.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대답"을 요구하시는데, 대답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 던져진 질문 앞에 내 삶과 인격 전체가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을 어떻게 피해갈 길은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를 몰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존재가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걸머지지 않으려고 할 때, 각종 미신과 우상이 발생한다. 이때, 종교는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떠 넘기는 수단이 된다. 예컨대, 종교의 희생양 제도가 그렇다. 자신들의 책임을 제물에 떠넘겨서 불을 지핀다. 그리고서 자신들은 삶의 책임으로 부터 도피할 구실을 찾은 셈이다. 재미난 것은 오늘날 비종교적인 듯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조차 이런 '희생양 제의'는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책임회피의 사회는 늘 희생양을 먹고 살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어린 양으로, 생명의 떡으로 규정하신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온 세상의 짐을 짊어지는 책임적 존재가 되신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책임적인 삶보다는 어린양, 희생양 도그마를 먹고 산다고나 할까? 글이 좀 산만해 졌는데.... 독일어로 대답한다는 말은 antworten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동시에 verantworten, 즉 책임진다,는 단어와 연관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response는 responsible/ responsibility와 연결된다. 그런데, 우리 말에는 책임과 대답이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대답 따로, 책임 따로 일 때가 많다. 아니, 아예 아무런 대답도 책임도 없을 때가 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들은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응답을 기다릴 뿐, 자신이 응답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 맡길 뿐,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지 않는다. 책임도, 대답도 없다. 모든 책임과 대답을 하나님께 떠맡겨 버리고 홀가분해지려고 기도하는 듯하다. "주여~~이것 해 주십시오... 주여 나는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길을 보여주십시오~~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도무지 이런 기도를 나는 기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내려 놓는 일이다. 하나님의 질문 앞에, 하나님의 존재 앞에 자신의 삶을 책임있게 떠맡는 결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인의 신앙심, 종교심에는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고 다만 기복적인 행태만이 주를 이루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신앙인들은 "은혜"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도, 생각도, 주체적인 결단도, 책임도, 응답도 아닌 그저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렇게 한다고....무책임한 소리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내팽게쳐버리는 얄팍하고 소인배적인 처사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내 삶은 내가 걸머 져야 한다. 누구에게 내 맡겨서는 안 된다. 내 삶을 누구에게 내 맡겨 버릴 때, 그 대상은 바로 우리에게 우상이 된다. 그것이 바로 악한 영이다. 거라사인의 광인처럼, 자기 힘으로, 자기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자기 삶을 내던져 버려 끌려 다니는 삶이 바로 귀신들린 삶이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나 "정신이 온전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제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보다는 또 다시 예수께 엉겨붙어 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예수께 빌붙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신앙형태에는 책임의식이 참으로 결핍되어 있다. 기독신앙이전에 전통적인 종교문화 속에서 우리는 걸핏하면, 조상탓이다. 전생이 어떻다, 하는 식의 핑계거리를 찾아왔는데, 이제 기독신앙에서는 "은혜다" "주님의 뜻"이다, 하는 식으로 핑계를 둘러 댄다. 그 나라의 종교는 그 나라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한다. 그런데, 예수의 정신 -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는 십자가의 정신 -은 한국교회에서 찾아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매주 듣는 설교는 고작해야 '하나님께 기도하면 복받는다...하나님께 매달리면 그 분이 성공케 하신다...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정도다. 이런 메시지를 365일 듣고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의식'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성공시대의 마케팅 전략으로 삼고서 예수의 무력하게 되심, 함께 아파하심은 도외시하는 듯하다. 그 분의 책임의식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성장할 지는 모르지만 - 왜? 사람들에게 부담을 안 주니까. 교회는 성장한다. - 그 성장의 비대함 때문에 아둔하고 멍청해 질 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아멘 소리에 도취되어 성서적 정신을 망각하고, 성도들은 얄팍한 상술같은 설교에 자신의 삶을 내던져 버린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과는 무관하게, 십자가도, 삶도, 책임도 다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숭례문 방화사건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 졌다. 70세 된 노인에게서 아무런 배울 점이 없다. 70년간 살아온 그의 정신세계가 바로 우리의 천박한 정신세계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분노를 엉뚱한데 쏫아붓는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도무지 생각도 없이. 천박한 자본의 세상에서 성공낙원을 지상과업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 그들에게 기독교 역시 아무런 대안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가슴이 아프다. 소방당국도, 문화관리당국도, 인수위도, 대통령 당선인도 모두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빨리 빨리 새 건물 짓고, 몇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몰아세우고, 새로운 사건으로 잊혀지게 하면 다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2월 10일을 기점으로 매년 2월 10일을 문화의 날로 삼고 온 국민이 역사와 민족, 문화전통을 회상하며 1분간이라도 묵념하는 날로 삼았으면 좋겠다. 숭례문 방화 이후, 이번 주일이 첫번째 주일인데, 교회 목사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다. 한국문화와 기독교 신앙은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가슴이 아프다. 교회는 크지만, 도량은 좁다. 목소리는 높지만, 민족을 생각하는 정신은 너무나 얕다. 오늘도 설교는 오직 성공,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었다. 기도하라고, 그러면 주신다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댈 뿐이 아닌가?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전능하게 해 주십시오,만이 기도의 내용은 아닌가?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마치 송장처럼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지십시오, 이런 기도. 정말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