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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연주
2008/01/28 오후 4:30 | 단상

방학을 이용해 아내와 독일에 왔습니다. 환영해 주는 사람들 때문에 행복합니다. 오랜만에 설교할 기회가 있어 말씀을 나누었는데, 무엇보다도 데트몰트찬양교회의 찬양에 저는 흠뻑 젖었습니다.
시끄럽게 소리만 질러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늘을 향해 자신들의 재능을 절제된 모습으로 드러내는 이들의 찬양은 하늘의 부름처럼 들렸습니다.
비록 채 30명이 안 되는 예배자들이지만, 제 귀에는 하늘을 가득 메운 천상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가와 오르간 연주, 플롯과 피아노.....잊을 수 없습니다.

1월 27일 독일 데트몰트 찬양 교회 주일설교

성경본문: 시편 19편 1-4절

제목: 하나님의 연주(Das Spiel Gottes)

♣ <어거스트 러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만 해도 국내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영화였는데, 이 영화는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란 천재 꼬마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모든 소리가 자기에게는 음악으로 들리고, 이제 들려진 음악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연주하는 음악천재의 이야기.

또 제가 재미있게 본 영화 중 하나는 <호로비츠를 위하여>인데, 피아니스트 윤경민의 이야기를 작품화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꼬마 윤경민은 동물원에 놀러갔다가 거기에서 들은 물 흐르는 소리, 나비의 날개짓, 코끼리의 걸음마 등을 피아노 음악으로 연주합니다.

♣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저는 ‘연주한다’,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음악신동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들이 음악신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음악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지는 것을 다시금 되돌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무대에 홀로 서서 소위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지만, 이미 연주되기 전에 이들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연주한다는 것은 먼저 잘 듣고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 세상은 놀이(연주: Spiel)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카드게임Kartespiel, 축구경기Fussballspiel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게임이고 연주요 놀이입니다. 앞의 영화와 관련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간의 삶이란, 연주자가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듯이, 어떤 삶의 연주에 감동을 받고(Eindruck/Eingebung), 이것을 다시금 자신의 삶 안에서 새로운 연주로 표현해 내는 것(Ausdruck)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표현하고 연주하듯이, 우리 삶에는 다양한 놀이/연주들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연주에 감동받고 함께 즐거워하며 참여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연주는 온 하늘과 땅에 충만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 시인의 고백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을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연주는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온 땅에 통하고 ... 세계 끝까지” 울려퍼진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연주를 우리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듣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연주입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가 동일한 연주를 들어도 그에 대한 감격과 느낌이 다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주/삶의 놀이에 참여한 이들은 각기 다른 감동과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이 표현하는 연주 또한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연주가 비록 다양하지만, 완전히 별개의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동일한 연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의 연주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른 여타의 연주와는 다르며, 동시에 서로는 유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연주가 가지는 주제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동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의 친구로서의 삶을 연주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왜 불행한지, 왜 가난한지, 왜 고난받고 있는지에 대해 그들을 추궁하고 특정한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오히려 부유하다는 이유로 외롭게 된 자들(삭개오)을 포함합니다.

특히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삶의 놀이에 참여하기 보다는 몇 번의 실패 때문에 두려움이 앞서 마음의 문을 일찌감치 닫아버리고 귀를 막고 밖에서 들려오는 연주를 애써 외면하며, 자신만의 방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됩니다.(그물을 깁는 베드로/예수 사후에 방문을 잠그고 웅크리고 있던 제자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을 노크하십니다. “위대한 연주자여, 너의 노래를 불러라~, 나의 삶의 놀이에 함께 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예수의 삶의 연주에 참여하여, 가난한 자로서 위로받고, 동시에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서의 삶을 연주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는 연주의 테마는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연주는 바로 이 희망에 동참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무엇입니까? 막연한 희망, 긍정적 자신감 등이 아닙니다. ‘다 잘 될꺼야’라는 텅빈 위로가 아닙니다. 예수의 희망은, 모든 인간의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죽음과 사망의 심연 가운데서 다시 피어나는 희망입니다. 모두가 다 ‘이제 끝이다.’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의 연주는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연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듯이, 그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땅에 묻힌 지 사흘만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희망이 끊어진 상태, 삶의 연주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모두가 잊어버렸을 때, 바로 그 때, 다시 새로운 삶의 연주소리가 울려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힘들어 눈물 흘리며, 이제 다 끝장이다, 하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에도, 만약 우리가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놓기만 한다면, 반드시 희망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삶의 그늘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희망의 연주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낸 희망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삶에서 흘러나온 그 희망에 동참하는 희망입니다. 동시에 내 자신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또 하나의 희망의 연주를 하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1945년 1월 27일 오늘은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해방을 얻은 날입니다.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진 600만명의 유태인 학살은, 한편에서는 삶은 고난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 처참한 고난 가운데서도 희망은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삶의 연주는 <듣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표현이 아직은 서툴러서 가난한 자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연주하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삶의 연주에 귀를 막아버려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힘들 때에도, 만약 우리가 귀를 열고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를 들을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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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해요 교수님.
08/02/14 (목) 오후 10:17   [박현주] from 117.53.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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