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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의 삶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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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정신
2008/01/20 오후 8:51 | 단상

나는 오늘 소사제일교회에서 목사님의 배려로 계획에 없던 설교를 하게 되었다. 갑자기 맡은 일이라 준비가 부족했지만, 나름대로 평소에 하던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고 본다.

설교의 제목은 "예수님의 정신" 본문은 마가복음 2장 13절-17절이었다.
마침 교회표어가 "성령으로 부흥하는 교회"였기에, 나는 먼저 "성령"에 대해 말을 꺼냈다.

성령은 어떤 이름이 아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라는 뜻이다. 거룩한 영이 있다면, 그 반대로 더러운 영, 사악한 영도 있다. 아니 오히려 거룩한 영 때문에 더러운 영, 사악한 영은 그 모습을 고발당하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이란 무엇인가? 영은 귀신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비물질적이며, 우리 삶과는 무관한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을 우리는 단순히 '정신'으로 옮겨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때, 정신이란 단지 인간에게 귀속되는 어떤 생각이나 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보다 더 크고 넓은 폭을 지닌 거대한 정신적 힘의 총체를 우리는 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어떤 정신적 토대 위에서 살아간다. 자본주의, 공산주의라는 영적 기초, 정신적 토대가 그것이며, 쾌락주의, 허무주의, 귀차니즘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정신, 이러한 영적 힘의 장 안에 인간은 포섭되어 그 안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자기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듯 하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해 보면, 이런 거대한 영적 힘, 정신적 힘의 장력에 이끌려 살아간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성경이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정신을 의미한다. 동시에 예수의 정신이란 예수 자신에게 귀속되는 영적인 차원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참여하고 있는 거룩한 영적인 차원인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은 예수의 정신이며, 예수의 정신은 성령이다. 거룩한 영적 차원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현실화된 것이 바로 예수의 정신이며, 예수의 삶이다.

본문은 이런 예수의 영적 차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예수께서는 사역초기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삶과 사역의 중심축으로 설정해 두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 반대편에서 사탄의 나라를 전제하고 있다. 사탄은 성경에서는 이간질 하는 자, 분리시키는 자, 거짓말하는 자 등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되고 이간질 된, 즉 인위적인 조작으로 틈새가 벌어진 영역, 분쟁의 영역을 하나로 통합하는 나라, 화해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인위적으로 갈라선 곳, 분리되어 서로 넘어갈 수 없이 담장으로 막힌 인간의 세계를 거룩한 영의 힘으로 넘어서고, 화해시키는 영적 차원의 세계이다. 즉, 예수님은 분리되고 상쟁하는 곳을 서로 감싸안고 화해, 상생하는 세계로 만드신다. 예수의 정신에는 인위적인 경계설정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세리와 죄인"으로 설정된 종교적 경계선상들이 예수에게서는 무너져 내린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식탁공동체로 부르신다. 한 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는 이들에게 더 이상 나뉨과 분리, 구분과 틈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을 끊임없이 자신들에게서 분리시키고, 이런 분리를 고착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바로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종교적 이유로,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인간적인 시각에서 이들은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 놓았다. 자신들처럼 의인과 자신과는 다른 죄인들로.
그러나 예수에게서, 그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의 영적 공동체의 비젼에서는 이러한 경계는 사라져버린다. 거기에는 의인과 죄인이 아니라, 다만 함께 식탁에 앉아 즐겁게 밥을 나누는 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예수의 다른 사역을 보면, 예수는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부자는 가난한 자가 되기 싫어한다. 물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고 싶다. 부자는 인간의 이상향이 되고, 가난한 자는 인간이 회피해야 할, 벗어던져야 할 저주스런 군상으로 여겨진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곁에 다가가지만,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 곁을 떠나고자 한다. 부자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자들과는 분리되어야 할 자로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자로 고정시킨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계는 이렇게 설정되고 고착되어 버린다. 예수는 이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부자는 화가 있다."

기존의 가치체계에서는 부자가 인간의 지향점이고, 가난한 자는 저주받은 인간의 군상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이런 가치체계를 고착화시키려는 부자들의 세계는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를 통해 두 세계의 분리를 고착화시키고 영구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런 인위적이고 사탄적인 분리와 경계를 거룩한 영의 힘으로 무너뜨린다. 그것이 예수의 정신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거룩한 영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외면을 청결케 함으로써 다른 공동체와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내면을 거룩한 기운으로 새롭게 함으로써 인위조작적인 구분과 경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선생님이 외면적인 구분인 할례를 내면적인 할례로 바꾼 것은 예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이제 외적인 경계, 인위적인 구분은 힘을 잃어버린다.

거룩한 정신, 성령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다 질그릇이며,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티끌, 질그릇이기에는 마찬가지다. 모두가 다 아다마(흙)로 빚어진 아담(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아다마로 빚어진 연약한 존재인 아담은 동시에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이다. 질그릇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곧 띠끌인 이 역설은 모든 외부적인 경계설정과 차별을 넘어 자기자신을 향해 있다. 더 이상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너는 띠끌일 뿐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예수의 정신, 그것은 모든 인위조작적인 구분과 차별, 경계를 고착화시키려는 사탄의 나라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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