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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의 삶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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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11
 

현대신학산책
신학방법론?
2008/01/16 오후 2:34 | 현대신학산책

 

박영식


신학방법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 보면 막막하다. 딱히 신학에 어떤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신학은 하나의 방법론을 미리 선정하고 그 방법 안에서 생산되었는가? 신학의 방법론 자체는 과연 신학적인가? 방법없는 신학은 가능한가? 만약, 불가능하다면 신학에서 '방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방법(methodos)이란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고 기획해 본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여행노선은 여행 후에야 드러나지, 그 전에는 실제하지 않는 셈이다. 사람들이 걸어가니 길이 생겼지, 길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신학이라는 학문의 방법론도 마찬가지다.

신학에는 어떤 방법론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학자들이 각자 자기 나름의 길들을 걸어간 것이고, 이것을 명료화하고 보니 방법'론'이 된 것이다.

 

내게도 나름의 신학방법과 관련된 고민이 있다. 다름 아닌, 성서를 신학함에서 어떤 위치에 둘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전통적으로는 성서를 신학의 유일한 자료로 생각하는 보수적인 신학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생각만 그렇게 했지, 실제로 성서 이외에 다른 많은 자료들을 신학형성에 활용하고 있다. 또 다른 보수적인 사람들은 성서외에 다른 자료들, 예컨대 교리적 전통들을 신학의 자료로 수용하면서, 성서를 다른 모든 자료들의 중심기준으로 설정한다. 소위 성서적 신학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일견 타당한 듯 보인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성서가 신학의 잣대요, 기준이다, 라는 말은 한편에서는 타당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자칫 잘못하면, 성서에 대한 문자적 이해, 즉 성서에 대한 무시간적, 무역사적 이해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오늘날의 시간과 공간적 지평과는 무관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제약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가 신학함의 잣대라고 하지만, 신학함은 단순히 성서인용 이상이어야 한다. 단순히 성서를 인용해서 자기 논리의 근거로 삼는 식의 수법은 학문적으로 정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무의미하다. 현대인이 2000년 전의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 없듯이, 2000년 전의 시공간을 액면 그대로 가져와 오늘날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폐기처분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 신학함은 어떻게 가능할까?

결국은 신학은 두 지평, 성서의 정신과 시대의 정신이라는 두 지평의 만남 안에서만 가능하다. 성서의 빛에서 시대를 읽고, 시대의 빛에서 성서를 읽는 상호교차적인 또는 상호비판적인 해석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성서를 시대의 빛으로 비판한다고? 그렇다.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성서에 나와 있는 내용 모두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참된 신앙일 수는 없다.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라, 자신의 아들을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성서를 오늘날의 시대정신적 빛에서 '비판적'으로 읽지 못한 무지하고 무식한 막무가내식의 종교행태일 뿐,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성서의 지평과 오늘날의 지평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사적 거리와 더불어, 공간적, 문화적 거리가 놓여 있다. 이 거리감이 신학을 가능케 하고 필요로 한다.

문제는 이 거리감을 느끼지 못하니까 신학이 불가능하고, 의미없는 듯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점차 무능해지고 불필요한 것 처럼 여겨지거나 단지 과거적 정보를 우리말로 옮겨놓는 번역학이나 문헌학 정도로 전락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신학무용론이나 무미건조한 신학은 이 '실제하는 거리감'을 인위적으로 감추어두거나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학함은 단순한 번역도, 앵무새처럼 성서에 적힌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도 아니다. 신학함은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사유이면서, 동시에 오늘날의 살아있는 정신들과 대화하면서, 이를 이해하고, 함께 느끼고 동참하면서 동시에 비판적으로 되물어보는 사유이다. 동시에, 교회와 사회의 미래를 앞서 내다보며 그 방향을 정위하는 선취적 사유이다. 따라서 신학은 과거에 대한 되돌아보는 사유이며, 현재와 함께 숨쉬며 참여하는 사유이며, 미래를 향해 그 방향을 지시하는 예언자적 사유이다. 이럴 때, 신학은 단순히 문헌학이나 번역학과는 달리, 살아있는 신앙적 사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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