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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4/30
 

묵타난다-너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09.10.09 23:21 | 묵타난다 | 야무나

http://kr.blog.yahoo.com/ramanadass/6354 주소복사






여섯 살 때 나는
내가 일곱 살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곱 살이 되자 나는
언제나 학교를 향해서 가고 있었으며,
그것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다기보다
나는 현실적이고 영리한 인간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늘 성공을 향해서,
행복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 나이 쉰이 되고 보니,
때로 나는 내 자신이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참담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순간마다
내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스와미 묵타난다 
 


 

의식의 유희-사랑의 길 / 묵타난다

2009.08.15 16:12 | 묵타난다 | 야무나

http://kr.blog.yahoo.com/ramanadass/6321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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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장 사랑의 길


사랑의 사다나는 매우 수준 높은 사다나이다. 사랑은 또한 박띠 즉 헌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랑이란 역동적이고도 영감을 주는 가슴의 고동이다. 사랑이란 바로 신의 본성이며, 경전의 저자들은 그것을 지고의 황홀경 및 사찌다난다라고 불러왔다. 그것은 완전한 상태로 인간 내면에 존재한다. 비록 인간이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거기에 존재한다. 불빛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맹인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불빛은 없다. 나는 그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빛은 존재한다. 그에게는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경험하든 않든 간에 사랑은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사랑의 길을 따라가 본 적이 없거나 그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사랑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사랑은 넥타이다. 사랑은 불멸이다. 단지 사랑을 통하여 고꿀의 고삐들은 신을 발견하였다. 사랑은 내면에 있는 비밀스러운 동굴을 일견하는 것이다. 내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랑은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하여 흘러나온다. 그것이 눈으로 흘러갈 때, 그것은 형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것이 귀로 흘러갈 때, 그것은 소리를 감미롭게 만든다. 그것이 혀로 올라갈 때, 그것은 미각을 달콤하고 감미롭게 만든다. 사랑은 바깥으로 표현될 때, 감각적인 대상들을 즐겁게 만드는 황홀한 참나이다. 앞에 숫자가 없는 영들은 의미가 없으며 영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이 흘러나오는 사랑의 고동이 멈추게 되면, 감각들은 생명이 없고, 기쁨이 없으며, 쓸모없게 될 것이다.
당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을 배우라. 이 사랑은 순수하고, 집착이 없어야 하며, 사랑 그 자체를 위하여 주어져야 한다. 만약 사랑에 어떤 요구들이 있으면, 그것은 단지 상업적인 교환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사랑의 몸짓이지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어떤 요구도 없고, “나의 것이나 너의 것”도 없으며, 이기심도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다. 슈리 구루 니띠아난다는 바로 그 사랑이다. 그냥 사다구루를 사랑하라. 그에게 해방조차도 요구하지 말라. 인간의 가슴 속에는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도 줄 수 있는 충분한 사랑이 있다. 그러나 갈망과 쓸데없는 사고 때문에, 불운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일단 그가 이들로부터 벗어나면, 그는 순수하고도 불멸의 그리고 완전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당신이 불순하고, 기쁨이 없고, 비실재적이고, 덧없거나 불행하다고 반복함으로 당신 자신을 고문하지 말라. 어떤 종교들, 어떤 지역사회들, 어떤 시 작품들은 몸을 껍데기 이상의 것이 아닌 미천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부당한 말인가! 뚜까람은 브람마부따 호떼 까야 짜 끼르따니, “신의 이름을 반복함으로, 몸이 성스러워진다.”라고 말한다. 신에 대한 기억, 명상, 헌신적인 공경과 구루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신성을 얻게 되는 몸을 당신은 얼마나 부당하게 다루고 있는가!
나는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많은 수행자들을 보아왔다. 그 결과로 그들이 결국 얻은 것은 오직 병이었다.
오, 싯다 수행자들이여! 당신의 살아있는 몸은 여신 찌띠의 사원이다. 순수하고 순결함으로,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음으로, 그리고 아름다고, 소박하고도 깨끗한 옷을 입음으로써, 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다루라.
오, 싯다 수행자들이여! 만약 다른 사람들이 이 몸을 천하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당신은 구원이 바로 이 몸을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신과 구루를 얻고 싶고 그리고 내면에 있는 사랑의 근원을 열어젖히고 싶다면,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오직 사랑만이 당신을 신에게로 데려다 줄 것이다. 당신은 내면의 평화를 갈망하지만, 당신은 몸과 감각을 미워하고 있다. 당신은 내면의 기쁨을 동경하지만, 그 기쁨에 이르는 수단이 되는 몸이 마치 당신의 최대의 적인 것처럼 그 몸을 적대시하고 있다. 먼저 당신의 몸을 완전히 알라. 일단 당신이 당신 내면의 존재를 안다면, 당신은 몸이 환영이 아니라 지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사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몸을 사랑함으로써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사랑의 샘물을 흐르게 할 것이다.
명상 중에 스스로 드러나는 늘 새로운 기쁨이 자유롭고도 영감을 주는 힘으로 가슴 내에 거주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이 사랑을 발달시켜라.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으로부터 타인에게로 흐르게 하라.
사랑은 감각적인 만족을 위한 것이나 혹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그것이 단지 집착이지 신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착은 불순하다. 그러므로 집착은 당신을 신으로 결코 데려다 줄 수는 없다. 사랑은 받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는 것을 통해서 증가된다. “내 것과 너의 것”이라는 느낌은 사랑의 큰 장애물이다. 당신의 사랑은 평등해야 하고, 견줄 나위 없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싯다 수행자들이여! 만약 당신이 사랑을 찾고 싶다면, 당신은 사랑이 거주하는 장소인 몸을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당신은 몸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기능들을 알아야만 한다. 당신의 몸에 대한 태도는 순수하고, 우호적이고, 존경스럽고도 애정이 가득 해야 한다. 몸은 수많은 탄생을 통하여, 고통과 행복이 수반된 수많은 여정들을 통하여, 인간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몸은 사다나를 위하여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해방의 도시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다. 그것은 내면의 참나의 위대한 사원이다. 이 몸으로 된 사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사랑의 주인인 신이 내면의 참나로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묵따난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싯다 수행자가 몸을 이해하고, 몸이 내면의 참나의 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는 결코 몸에 적대적인 어떤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몸을 품위 없는 어떤 것에 연루시키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타락된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몸을 결코 더럽히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클럽이나, 호텔 혹은 극장과 같은 쾌락의 장소로 여기고는, 몸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그들의 힘을 잃게 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몸을 존중하거나 몸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고, 자신들의 몸을 모욕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의 순수하고 우호적인 몸을 잔인하고 부자연스럽게 고문하고 억압하는 어떤 신경증적인 사람들도 있다. 사랑으로 충만 되어야만 할 그들의 가슴들이 비탄으로 채워진다. 그들은 밤낮 자신들의 몸을 해치고 있다. 그들은 신체라는 감옥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신에게 끊임  없이 기도한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자면 몸에는 어떤 잘못도 없다.
몸은 다섯 요소로 만들어져 있으며 참나의 집이다. 그것은 당신이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는 땅이다. 몸은 참나의 하인이다. 그것은 항상 당신에게 봉사하고 있으며, 당신이 그 몸을 데려가려는 곳마다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당신이 몸을 지옥으로 데려가고 싶다면, 그것은 당신이 요구하자마자 거기로 갈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면, 그것은 기꺼이 그곳으로 갈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몸을 코끼리나 말 위에 앉히면, 그것은 기뻐한다. 만약 당신이 몸에다 끼르, 뿌리 및 할바라는 음식을 먹이면, 그것은 기뻐한다. 만약 당신이 몸에다 고추 꼬투리, 처뜨니와 마른 빵을 먹이면, 그것은 역시 기뻐한다. 그것은 모든 것에 행복해 한다. 만약 당신이 보석들로 몸을 장식해주면, 그것은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헤어진 낡은 옷이나 허리에 두르는 간단한 옷으로도 그 만큼 기뻐한다. 몸은 이렇게 대단한 하인이요, 노예요, 친구라서, 이 세상에 그와 같은 자는 그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옛날에 구루에게 헌신적인 하인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안녕하십니까? 당신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나에게 말해주시오. 아쉬람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십니까? 더위와 추위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선생님, 나는 여름의 더위나 겨울의 추위를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는 하인입니다. 나는 단지 봉사하는 방법만을 알 따름입니다. 나의 구루만이 나의 추위와, 나의 더위, 나의 기쁨과 고통을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사람은 구루에 대한 봉사에 완전히 전념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것으로 따로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은 바로 이러 하여야 한다. 사랑에는 항상 결함, 차별, 고뇌와 욕망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랑은 당신을 신으로 안내할 것이며, 당신을 신으로 만들 것이다.
당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섯 가지 주요 요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너무나 아름답고, 수많은 종류의 음식의 모태이며, 너무나 많고 다양한 존재들의 어머니인 땅을 생각해 보라. 곡식, 꽃, 과일, 나무들과 식물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고, 사랑이 가득 하여 모든 것의 더러움을 씻어주며, 모든 사람의 친구인, 순수한 물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모든 존재 속에서 살아 있고, 마찬가지로 모두의 친구인 불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인간에게 그것은 소화의 불이 되어 음식을 소화시킨다. 그것은 나무, 돌 그리고 모든 물체 속에서 개개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있다. 그것은 모든 곳에 퍼져있는, 갈망이 없는 사랑의 경이로운 예이다. 인간의 생명 즉 그의 쁘라나인 공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그것은 생명이 있거나 생명이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똑같은 정도로 퍼져있다. 그것은 우주와 그 속의 모든 것의 움직임을 지탱해주고 있다. 일단 쁘라나가 몸을 떠나면 그것은 쓸모없는 시체가 된다. 마지막으로 내면의 참나의 초연함을 상기시켜주고, 그 광대한 공간 내에서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에테르를 생각해 보라. 이들이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들이며, 의식을 갖고 있는 참나가 모든 세포에 퍼져있다. 첫째로 이 아름답고 갈망이 없는 몸을 충분히 묵상하고, 그 다음 그것을 신과 같이 사랑하라.
자, 이 점을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의 눈이 어떤 다른 사람의 부나 아름다움을 보고 분노와 탐욕 그리고 질투로 불탄다면, 그 두 눈에 대해 화를 내며 눈을 해치거나 혹은 눈을 뽑아버린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 아니겠는가? 포기와 고행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죄 없는 눈을 벌하는 것이 바른 일이겠는가? 그 눈은 당신의 성실한 친구들이다. 당신의 눈은 그 어떤 것에도 끌리거나 반감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당신이 형상을 보는 것을 도와주는 친구일 따름이다. 당신이 아무리 당신의 감각 기관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은 단지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무슨 작업을 주더라도 그 작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당신이 몸을 통해 사랑의 요기가 되고 싶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화를 내고자 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이 무엇이 되더라도 당신의 몸은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표현하기를 원할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몸을 바르게 이해하라. 갈망이 없이, 당신의 눈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태양과 달을, 당신의 모든 감각기관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들을, 손과 발과 같은 몸의 여러 부분들을 사랑하라. 그런 다음에 감각의 속성 속에 거주하고 있는 속성 너머의 신을 발견하고 공경하라. 기계적으로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깊고도 갈망이 없는 사랑으로 공경하라. 당신은 억제하는 수행을 해야만 한다. 감각을 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억제나 포기의 이름으로 몸을 고문하거나 병들게 하지 말라.
당신은 감각 기관과, 근육, 신경 및 뇌와 같은 몸 안에 있는 여러 가지의 능력을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그들은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도 불운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초연하다. 그들은 마음과 내면의 경향성에 따라 행동한다. 인간의 내면의 샥띠는 신의 샥띠이다. 똑같은 신성한 샥띠가 때에 따라서 갈망, 분노, 맹목적 정열, 탐욕 등과 같은 형태를 취하며, 그녀의 수단으로서 감각 기관 한두 개를 이용한다. 묵따난다는 이렇게 말한다. 명상하라. 사랑을 소생시켜라. 사랑이 모든 감각을 통해 고동치기 시작하면, 자연스러운 포기, 자연스러운 요가 및 자연스러운 지식이 당신 내면에서 일어날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찾고, 감각을 통해 사랑을 추구하고, 외부 세계에서 쾌락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사랑 그 자체를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으로 알고 사랑한다면, 왜 그가 밖으로 눈길을 돌리겠는가? 도대체 바깥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사랑은 명상을 통해 온다.
방종한 사람은 자신의 몸이 쓸모없게 될 때까지 감각을 계속 충족시켜 갈 것이다. 결국에는 지쳐버린 몸이 그를 괴롭히며, 그는 몸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포기 수행자도 역시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고행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지치게 한다. 그는 몸을 적대시하고 몸에다 고통을 주어 몸을 쓸모없이 만들지만, 해방의 기쁨을 갈망한다. 우선 해방을 향한 여정의 수단이 되는 당신의 몸을 이해하고, 그것을 주의 깊게 돌보고, 그 다음 그것을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보라.
당신의 몸은 신이 창조한 경이로운 예술 작품이며, 지성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창고이며, 비밀스러운 지식의 보고이다. 신의 궁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나, 바이꾼타로 여행하기 위해서나, 까일라사를 보기 위해서나, 혹은 고요함의 도시를 배회하기 위해서, 당신은 몸을 사용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 몸을 버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나에 대한 지식은 명상을 통하여 몸에서 일어난다. 정말이지, 묵따난다여! 이 신성하고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몸을 얻은 후에, 당신이 그 몸을 초월하고자 하는 대신에 그것과 끝없이 싸운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 아니겠는가? 이 몸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포기 수행이란 말인가?
인간은 신의 자비를 통하여 한 몸을 얻었다. 만약 당신이 내적 혹은 외적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사하스라라의 전역에 뿌려진 이 끝없는 사랑의 빛으로 만들어진 넥타를 마시며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에 해롭고, 오염되고, 그리고 감각적인 탐닉이란 치명적인 음료수를 준다면, 그는 미치광이의 왕이 아니겠는가? 체내의 유동체를 바싹 말려버리지 말고, 사랑을 통해 그들을 증가시켜라. 바로 이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신과의 일체를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예전에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항상 명상에 열중했던 한 성자의 죽음사전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때가 오자 그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주위에 모이도록 하고는 그들에게 축복과 용서를 구하고 난 뒤,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그 이후에 그는 네 방향과 다섯 요소들과 그리고 지혜의 수여자인 자신의 구루에게 인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걸어 다니고 움직이고 말하는 신의 사원인, 신이 주신 에 대한 믿을만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몸에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몸을 통하여 그의 영적 여정을 완수하면서 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합장을 하고서는 자신의 몸에게 이렇게 말했다.“내 사랑하는 몸이여! 당신의 은총과 도움으로 나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나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종종 당신에게 불편함과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나는 나 대신에 당신으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고뇌와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내가 무슨 일을 했더라도, 당신은 항상 나를 도와주었다. 정말이지 나는 당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 오, 나의 사랑하는 몸이여! 당신은 나에게 민첩하고 예리한 마음을 주었다. 당신을 통하여 나는 명상의 최고 상태인 니르비깔빠 상태에 도달하였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항상 당신의 은혜를 입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나는 여러 번 당신을 부당하게 취급하였지만, 당신은 항상 나를 도왔으며, 당신이 나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항상 해 주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더라도, 당신은 그 대가로 우정과 동료애 이외의 어떤 것도 나에게 결코 주지 않았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훌륭한 사다나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신의 경지에 이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을 몸에게 하고는, 그 성자는 절대자와 하나가 되었다.  
사랑하는 싯다 수행자들이여! 여러분 역시 몸에 대해서는 이 같은 고귀한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똑 같은 공경하고 존경하는 사랑을 가져라. 성자가 자신의 몸에게 말한 그 사랑스러운 말들을 읽으면서, 나는 엄청난 기쁨이 내 가슴 속에서 고동치는 것을 느낀다. 만약 여러분이 나와 같이 그 말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곧 최고의 행복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나의 사랑하는 싯다 수행자들이여! 당신은 그와 같은 갈망 없는 사랑을 갖고서 당신의 몸을 본적이 있었는가? 당신은 여태껏 순수한 참나-묵상을 하면서, 명상과 찬가와 노래를 하면서, 그리고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따라 소함 만뜨라를 반복하면서 몸을 사랑한 적이 있었는가? 당신은 여태껏 자제를 맹세함으로써, 장수를 가져다주는 음식을 몸에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달콤하고 순수한 주스를 몸에 줌으로써 몸에게 감사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얼마나 배은망덕한 사람이었던가! 얼마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었던가! 당신의 소중한 친구를 이렇게 대하는 것 보다 더 나쁜 일이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랑하는 구도자들이여! 여러분은 몸을 묵상해야 하고, 몸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몸과 갈망 없는 우정을 발전시켜야 하며, 몸을 아주 꼼꼼하고도 규칙적으로 돌보아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몸을 요가, 사랑 및 명상으로 채울 것이다.
몸을 모든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은 끊임없는 사고와 환영으로 채워진 마음이다. 몸은 생각을 따라 움직이며, 생각은 마음을 따라 움직인다. 마음은 몸과 감각 기관에 명령을 내린다.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왜 몸에게 벌을 주는가? 람에게 화를 내면서 왜 당신은 끄리슈나를 벌주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마음이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며 우리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단지 마음을 통제하기 위하여 그토록 수많은 방법들이 고안되었던 것이다. 요기들은 마음을 통제하는 이 기법들을 배우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만과 에고를 추종하고 편한 삶을 신봉하는 자들이 된다. 그들은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며, 또한 가슴으로 내적 만족이나 기쁨을 발견치도 못한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결코 한 곳에 머물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여태껏 마음에게 휴식하기 좋은 장소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치 있는 장소로 데리고 가라. 그러면 마음은 그곳에 머물 것이다. 그것은 이곳저곳으로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스와미가 시골의 자그마하고 소박한 오두막에 살고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가난 속에서도 풍족함을 느끼면서 살았다. 어느 날 가까운 읍의 가장 부유한 상인이 그를 방문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그 스와미가 외출하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 제자가 그에게 앉을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그 상인은 앉지 않고 바깥에 있는 나무 곁을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제자는 상인의 행동을 보고서 놀랐다. 스와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제자는 놀란 어조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다. 그 스와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형제여! 우리는 결국 탁발승이다. 여기에는 그가 앉기에 적합한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가 바깥에서 오르락내리락 한 것은 당연하다.” 당신의 마음은 그 상인과 같다. 오직 마음이 좋은 장소를 얻을 때만, 그것은 방황을 멈출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똑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당신의 마음은 마음이 정말로 좋아하는 어떤 것, 정말로 좋은 어떤 것을 잡고자 늘 노력하고 있다. 오, 마음이여!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봤으며, 어디를 가나 행복과 평화를 추구했으며, 당신을 기쁘게 해 줄 어떤 것을 추구했지만, 당신은 여전히 불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 당신은 지식을 추구했지만 결국 우울하기만 했다. 당신은 요가의 한 분파를 통달하여, 한 동안 생명의 꽃을 피웠으나, 곧 당신은 실패하고 말았다. 당신은 감각적인 쾌락 속에서 탐구하였지만, 사랑을 발견치 못하였다. 당신은 감각적 쾌락의 진창 속을 기어 다니는 한 마리의 지렁이가 되었다. 여전히 어떤 만족도, 어떤 안정도 없었으며, 오직 불안의 악몽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교훈을 배워야만 한다. 모든 사람을 끝없이, 욕망 없이, 유일무이하게 사랑하라. 만약 당신이 어느 누구도 사랑해 본적이 없다면, 당신이 어떻게 평화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형제여! 당신은 순수하고 집착이 없어야 하며,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차별을 보게 만드는 그 나쁜 의향이 없어야 한다. 신의 창조물 내에는 당신에게 반하고, 당신이 나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신은 신의 창조물이 당신에게 친근해지도록 해야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비록 단 한번 뿐일지라도 당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그곳에 머물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위대한 힘을 갖고 있지만, 당신이 먼저 마음을 이해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요기들은 단지 보통의 정신력만으로도 온갖 종류의 기적을 당신에게 보여 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정말로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꾼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은 웅장한 창조적 능력이다.  
마음의 변덕스러움을 묵상하라. 당신으로 하여금 싯다 요가의 위대한 지식에 끌리게 하여 가네쉬뿌리로 오게 한 것은 바로 이 마음의 불안정이다. 마음은 너무나 불안정하여 당신이 마음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줄 때라도 마음은 그들을 적절하게 즐길 수 없다. 하루는 마음이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면, 그 다음 날에는 맛에, 그 다음 날에는 향기에, 또 그 다음 날에는 소리나 혹은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불안과 동요로 말미암아 마음은 끊임없이 좋은 멋진 장소를 찾아간다. 만약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면, 화난 사람은 늘 화를 내게 될 것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매 순간마다 탐욕을 나타낼 것이며, 망상에 잠긴 사람은 자신들의 망상에 빠져 있을 것이고,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색욕을 느낄 것이다. 부자들은 늘 자신들의 부에만 열중할 것이며, 예술가는 오직 자신의 예술에만 몰두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어디를 가나 당신은 평화가 돈이나, 예술, 아름다움, 감각적인 쾌락 혹은 다른 어떤 것에도 있지 않다는 똑 같은 만뜨라를 듣게 될 것이다. 평화가 이러한 것들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방황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 결국 마음의 불안으로 인하여 당신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묵따난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수행자들이여! 마음은 진정한 사랑과, 완전한 평온과 그리고 신과의 결합을 원한다. 마음은 매혹적인 어떤 것을 원하며, 바로 그 때문에 마음은 불안하다. 그것은 불안이라는 한 장소를 떠나 그 다음의 불안한 장소로 나아간다. 마치 꿀벌이 꿀을 모으기 위하여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라 다니듯이, 마음도 이런 저런 이유로 계속해서 방황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안한 마음의 배후에는 마음이 완전한 휴식을 찾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탐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마음이 명상을 통하여 참나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음은 항상 동요할 것이며 결코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 오직 마음이 꾼달리니의 선물로서 명상에 몰입하여 내면의 빛과 하나가 될 때만, 마음은 그 불안정성을 버리고 고요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명상을 통해 참나 속에서 완전히 고요해지고 그리고 사랑에 열중할 때만, 당신은 더할 나위 없는 환희의 화신이 될 것이다. 당신의 방향은 변할 것이며 당신은 변형 될 것이다. 순수한 평화의 샘이 당신 안으로부터 흘러나올 것이다.
마음은 신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도 완전한 휴식을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이 신을 만날 때 당신은 모든 것을 찾으며, 그래서 마음은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면 비록 당신이 노력할지라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당신으로 하여금 진리와 평화를 찾아 나서도록 만든 것은 일시적인 고요함에 한 번도 만족하지 못했던 바로 당신의 불안한 마음이다. 마음은 신을 제외한 그 어디에서도 고요해지지 않는다. 마음으로 하여금 평화를 찾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경향의 마음 때문이다. 당신은 마음의 편에서 볼 때 이것을 위대한 봉사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의 불안한 마음은 당신에게 큰 자산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명상에 대한 당신의 관심을 촉진시켰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싯다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마음의 자비로운 은총을 진심으로 환영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구도자들이여! 만뜨라와 같고, 또한 실제적인 경험으로 채워지기도 한 묵따난다의 말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이“나의 종교가 최고다.”라며 아무리 자랑을 하더라도 마음이 거기에서 휴식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신의 거주지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은 위대하고 진정한 만트라이다.”라며 만뜨라를 칭찬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하더라도 마음이 거기에서 행복해 지지 않으면, 그것은 신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다. 어떤 종파가 아무리 유명하고 어떤 구루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가 훌륭한 기적을 행하거나, 성수를 마시거나, 성스러운 재를 바르거나, 혹은 여러 신과 여신들을 숭배하든지 간에, 마음이 거기에서 휴식을 찾지 못하면, 그곳조차도 신의 거주지가 아니다. 만약 마음이 잠시 동안 한 장소에 머물고는 곧 동요하면서 움직인다면, 그곳에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마음을 멈추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항상 계속 움직이기를 원할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행복을 찾아 움직인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정지시키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사랑 속으로 가라앉히고 참나의 깊은 사랑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평화의 환영이 있는 곳에서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멈출 것이지만, 곧 이어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한 상태로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진정으로 행복한 곳에서는, 마음의 움직임은 멈추고 마음은 평온을 찾는다.  
당신의 마음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은 마음을 잘 인도하여 참나의 황홀경이란 강으로 데려가야 한다. 진정한 사랑의 빛이 빛나고 있는 곳인 참나의 사랑이란 신성한 그늘로 가는 순례의 길로 마음을 데려가라. 만약 당신이 마음을 지고로 황홀한 참나에게로 돌린다면 마음은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기를 원할 것이지만, 만약 당신이 강제적인 힘이나 고행을 통해 마음을 평화롭게 하려고 고집스럽게 노력한다면 그것은 더욱 더 동요하며 당신을 배반할 것이다. 마음을 사랑하라. 그러나 당신이 마음을 사랑하기 전에라도 그것을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라. 그것을 마음으로서 고동치는 여신 찌띠라고 생각하라. 마음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고, 마음과 진정한 우호를 수립한 뒤에 “내면의 참나에게로 가라.”라고 말하라.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명상이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것이 찌띠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사랑하여야만 한다. 당신이 마음을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당신이 마음에게 적개심을 품을 때, 마음은 당신을 정복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마음을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은 승리의 만뜨라이다. 그것은 신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그것은 마음을 취하고 즐겁게 만드는 위대한 야그나이다.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깨어진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당신 스스로를 작고 하찮은 존재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당신 자신을 사랑으로 채워라. 그리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위대함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명상의 요기들이여! 명상을 통하여 당신은 무엇이 당신 내면에 있으며 무엇이 당신 내면에 없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명상이 없다면 당신은 가난하다. 명상이 있으면 당신은 부유하다. 그러므로 먼저 당신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과 함께 명상하라.
옛날에 한 싯다가 숲속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구도자가 그를 찾아와서 그에게 “마하라자! 나는 신을 보고 싶습니다. 어떤 사다나를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를 자세히 살피고 난 뒤에 싯다는 “당신은 누구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었다.
“사랑은 신을 찾아 가는 수행의 길에는 방해물입니다.”라고 그 구도자는 대답했다.
“방해물이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욕망이 방해물이다. 맹목적 정열이 방해물이다. 사랑은 신의 몸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과 친구와 친척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사랑은 사방으로 퍼져나가야 한다. 당신을 람에게로 데려다 주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라고 그 싯다는 말하였다.
당신 몸의 여러 수족들에게 화내지 말라. 만약 당신이 화를 내야 한다면, 몸이 아닌 화에게 화를 내라. 무지한 자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당신의 동료요 친구인 몸을 괴롭히지 말라. 몸을 무자비하게 혹은 교활하게 다루지 말라. 사랑하는 구도자들이여! 당신은 몸을 통하여 모든 행위들의 결실을 얻게 된다. 모든 세계의 고행들은 몸을 통해 겪게 된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몸을 통해 위대하게 되었다. 위대한 현인들, 현자들, 왕들, 영웅들, 시인들, 배우들, 화가들, 운동선수들, 전사들, 대단히 정숙했던 여인들, 예수 그리스도, 부처님, 그리고 기타 모든 뛰어난 사람들은 몸을 통해 살았다. 몸을 순수하게 하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몸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규칙적인 일, 아사나, 쁘라나야마 그리고 명상을 통하여 몸을 단련시켜야 한다. 당신의 몸을 신의 사원처럼 존경하라. 몸에게 올바른 음식과 올바른 이완을 베풀어주는 사제가 되라. 몸을 통하여 오직 하나의 갈망만 있게 하라. 즉 사랑의 갈망만 있게 하라. 또 하나의 소망만 있게 하라. 즉 명상을 통하여 오는 내면의 빛에 대한 비전을 얻으려는 소망만 있게 하라. 또 하나의 희망만 있게 하라. 즉 절제되고 단련된 몸과 내면의 빛을 방사하는 몸에 대한 희망만 있게 하라. 모든 것은 사랑을 통하여 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통하여 신을 볼 수 있으며, 사랑을 통하여 그는 지고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다나도 사랑만큼 쉽지 않다. 이것은 당신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다나를 통하여 밖에서 얻어야만 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랑의 흐름은 이미 내면의 그곳에 있다. 당신은 이 사랑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당신을 채울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더 많이 주면 줄수록, 그것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퍼뜨리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사랑으로 환영받을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탈을 쓴 채 단지 미워만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사랑 속에는 미움이라는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높고 낮음이라는 느낌도 없어야 한다.“우리는 비슈누의 헌신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쉬바 사원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어떤 냉혹하고, 분노에 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사랑 속에서 이러한 분노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랑이겠는가? 그것은 진실로 야만적 행위에 불과하다. 사랑 속에는 계급, 사람 혹은 종교 간의 차별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차별은 사랑이 아닌 협소한 비전에서 비롯된다. 사랑에서부터 비이원성에 대한 몰입이 나온다.  
사랑은 당신의 내면에 있으면서 당신에게 늘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준다. 깊은 수면이 가져다주는 만족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어디에서 이 초감각적인 만족이 오는가? 당신이 처음 친구를 만날 때, 당신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기뻐할 때 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당신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간혹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모든 질문들을 자세히 살펴  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큰 만족의 근원이 당신 내면에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지고로 행복한 것이며, 그것의 이름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공경하라. 당신의 두 눈 뒤에 있는 참 목격자에게 단지 사랑의 장면만을 보여주어라. 당신의 모든 행위들이 사랑으로 가득 차게 하라. 젖소, 나무, 꽃, 그리고 과일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나날이 성장케 하라. 왜냐하면 사랑이 그 모든 것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을 변형시키는 강력한 원자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가슴을 메마르게 하지 말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어리석은 자들이 당신에게 사랑이 당신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키도록 하지 말라.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공정하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고 보통 사람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이 느끼도록 만든다. 나는 옛날에 세 강이 합류하는 알라하바드에 목욕하러 간적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 앉아 있었을 때, 한 사제가 나에게로 와서는 나에게 맹세를 하라고 말하였다. 나는 맹세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자기의 주장만을 했다. 그는 꽃과 물을 갖고 와서는, “스와마지! ‘나는 죄인이다.’라고 반복하라.”라고 말하였다.
“당신이 죄인이지, 나는 죄인이 아니다. 이같이 성스러운 곳에서도 당신은 순례자들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 나는‘덕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선행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욕망이 없다! 라고 말하겠다.’”라며 쏘아 붙였다. 이 말을 듣고서, 그는 가버렸다. 그와 같은 나쁜 친구를 통하여, 인간은 그들에게 기쁨이 없으며, 그들이 실재하지도 않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그리고 썩어 없어지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내면의 사랑을 꽃피울 수 없다.  
사랑하는 구도자들이여! 사랑이 없는 배움은 소용이 없다. 사랑이 없는 요가는 의미가 없다. 사랑이 없는 사다나는 그것이 어떤 사다나이든 간에 당신을 참나의 기쁨 속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 당신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랑을 사람들 사이에 퍼뜨려라. 욕망, 갈망 혹은 집착이 없이 사랑하는 것이 맹목적 정열, 적의 및 망상을 극복케 하는 열쇠이다. 당신은 많은 경전들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각들은 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다.
포기와 수용에 대한 논쟁에 갇혀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논쟁은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참나에 대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요가와 학문과 지식이 이기주의로 가득 차게 되면, 그들은 사랑의 적이 된다. 당신은 이기주의를 완전히 버려야 하며, 이것은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비이기적인 사랑이 가슴으로부터 일어날 때,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깊은 평화를 경험한다. 마음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것을 사랑으로 채워라. 그다음 얼마나 경이로운 황홀이 당신의 내면에 있는지를 보라.  
강압적 힘이나 호흡 통제를 통하여 마음에 고통을 주는 대신에, 단순히 마음을 참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사랑으로 그 마음을 평정하라. 신을 당신의 모든 감각 기관들의 대상으로 하라. 자신의 한 가지 즐거움이 나라야나인 사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당신의 본성 그 자체이다. 그것이 당신의 사다나이며, 당신이 도달할 최고의 경지이다. 사랑은 신이다. 사랑은 우주이다. 신은 우주로서 나타났다. 우주는 신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주는 신성한 샥띠의 나타남이다. 사랑은 신의 실현을 위한 완전한 사다나이다. 사랑이 없이는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랑은 위대한 내적 경험이다. 그것을 내면에서 찾아라. 당신은 신성한 에너지가 전기의 속도로 당신의 전신을 통해, 즉 몸의 모든 유동체, 피, 쁘라나를 통해 돌진해 가는 것을 볼 것이다. 당신이 이러한 힘을 경험하게 될 때,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신 내의 활동은 늘 계속된다.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당신의 신경, 근육, 및 혈구는 끊임없이 그들의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다. 당신이 집에 있든, 아쉬람에 있든, 아니면 다른 어디에 있든지 간에, 당신은 또한 사랑과 열정과 결의를 가지고 당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자신의 참나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는 그 참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사랑은 인간을 행복의 대양으로, 평화의 이미지로, 지혜의 사원으로 변화시킨다. 사랑은 인간의 참나 그 자체이며, 그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며, 인간적 존재의 영광이다. “먼저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그 다음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고 나서 온 세상을 사랑하라.”라고 묵따난다는 말한다. 이것이 박e요, 이것이 냐나의 기쁨으로 가는 길이며, 이것이 요가의 기쁨을 성취하는 것이다. 기타 모든 사다나들은 사랑의 사다나 속에 포함되어 있다. 바가반 니띠아난다는 바로 그 사랑이다. 그는 모든 사다나의 보상인 지고의 행복이다. 그는 구루의 은총을 통하여 공경 받는다.

의식의 유희-조상들의 세계 / 묵타난다

2009.08.13 11:20 | 묵타난다 | 야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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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7 장 조상들의 세계

나의 경험들을 기술하는 동안에, 나는 반드시 들려줘야 할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즉 내가 조상들의 세계를 방문한 사실을 빠뜨려버렸다. 이 세계는 천국과 싯다로까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고 많은 부류의 조상들을 거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실제로 그들을 보았다. 천국에서 코브라의 세계에서 그리고 달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자들과 덕이 많은 사람들, 보통 부자들, 덕이 더 적은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 같은 종류의 불평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사람들이 이곳 지상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 삐뜨리로까에서 나는 어린 시절에 알았던 몇몇 노인들을 보았다. 그것은 독특한 세계이다. 우리가 조상들에게 올리는 물이나 음식물과 같은 다양한 의식용 제물이 미묘한 형태로 그들에게 실제로 도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우리가 바치는 음식을 먹으며, 우리가 주는 제물을 받으며, 또한 그들의 자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
오, 싯다의 제자들이여!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을 해서는 안 된다. 제물의 미묘한 형태는 우리가 반복하는 만뜨라를 통하여 조상들의 세계에 도달한다. 똑같은 찌띠 샥띠가 만뜨라의 수단을 통하여 그것을 여기서부터 그곳으로 운반해 간다. 오늘날의 생활에서 한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 당신의 친구가 있다고 하자. 미국은 여기서부터 아주 먼 거리에 있지만, 그는 전화로 그가 은행을 통해 당신에게 많은 돈을 보냈으며, 당신은 여기서 그 돈을 찾을 수 있다고 당신에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확실히 그 돈을 찾을 것이다. 이것은 전화상의 물리적 소리를 통하여 물질적인 거래가 이행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제물의 미묘한 형태가 만뜨라를 통하여 조상들의 세계에 전달된다는 것을 왜 의심해야 하는가?
삐뜨리로까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내가 싯다로까를 방문할 때 타고 갔던 똑같은 푸른 별을 타고 거기로 여행하였다. 내가 다시 여러분께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내가 타고 간 그것이 푸른 진주나 혹은 푸른빛이 아니라, 푸른 별이었다는 것이다. 오, 시다의 수행자들이여! 여러분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므리띠유로까, 즉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의 세계이다. 조상들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만큼 실재한다. 나는 그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것은 나에게 엑나쓰 마하라자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 준다. 나는 비록 위대한 성인들의 인격이나 그들의 고상한 성품과 행동을 의심하는 것이 실제로 좋은 것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이 이야기의 진실을 의심했다. 나는 나쁜 친구들로부터 의심을 품었으나 내가 이미 말했듯이, 수행자는 싯다들의 방식과 습관에 대하여는 어떤 의심도 품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행동이 옳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성스러운 의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신의 영감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이다. 슈리 엑나스 마하라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신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지라, 숲과 마을에서, 높고 낮은 곳에서,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서, 죄인과 선인에게서 한결같은 신성한 지고의 참나를 보았다. 왜냐하면 싯다의 눈은 이름과 형태와 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실재만을 보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또 하나의 이야기로써 이것을 예증하겠다.
옛날에 매우 부유한 람자라는 목동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숭배하는 신인 깐도바의 황금 조각상과, 신이 타고 다니는 탈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탈 것이란 말이었는데, 이 상은 신의 상보다도 더 컸다. 위대한 성인들이 말한 것은 정말로 사실이다. 즉, 행운의 여신인 락슈미는 변덕스럽고. 그래서 지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시대는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람자의 상황도 또한 변화했다. 그는 부자였으나 가난하게 되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머니에게 두 자식이 있는데, 한 아이는“부”라고 불리었고, 다른 한 아이는“가난”이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그들은 진짜 형제이다.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 명성과 치욕은 형제처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서로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서로 멀리 떨어져서 살지 않고, 결코 서로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가끔 형이 우리를 맞이하는가 하면, 때로는 동생이 우리를 맞이하기도 한다. 형이 우리를 반가이 맞이할 때, 우리는 부와 권력, 성공 그리고 왕국을 얻게 된다. 동생이 형에게“형님, 잠깐 쉬세요. 이제 제가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결핍과 빈궁, 불운, 그리고 불행을 얻게 된다.
이런 일이 정확하게 람자에게 일어난 것이다. 형은 쉬러 갔고, 동생이 그를 맞으러 온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 연명해 갈 돈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오, 람자여! 왜 그대는 그토록 많은 고통만 받고 있는가?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대의 성소에 보관중인 황금 조각상들을 가져가서 왜 팔지 않는가? 그러면 그대는 더 많은 양들을 사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그대는 돈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대는 새로운 조각상을 구입하여, 그 상들을 자리에 모셔 놓고, 숭배하며, 그리고 브람민들과 사두들, 가난한 자들, 장님들, 그리고 불구자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사업이 잘 진행되면, 그대는 많은 선행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가난해 지면, 그의 생각마저 동생처럼 빈곤해진다. 가난은 부에게 뿐만 아니라, 생각에도 역시 해당된다. 람자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동의하고, 그는 깐도바와 말 조각상을 천으로 싸서, 금세공업자에게 팔러 갔다. 그는 금세공업자의 가게에서 앉아 있었다. 금세공업자는“여보게, 람자! 무슨 일인가?”라고 말했다.
람자는 깐도바 신과 말의 조각상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면서, “나는 이것들을 팔고 싶습니다. 나에겐 살아갈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팔아야만 합니다.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말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금세공업자는 그들의 무게를 달았다. 깐도바 신상의 무게는 1킬로가 나갔으며, 말의 상은 3킬로의 무게가 나갔다. 그 당시에 금 1킬로를 사는데 불과 1천 루피밖에 들지 않았다. 금세공업자는“람자여! 신상에 1천 루피, 말에는 3천 루피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람자는 침착성을 잃고 화를 냈다. “들어보시오! 당신 머리가 있는 것이요?”라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나의 신에게는 1천 루피를, 신이 타고 다니는 말에는 3천 루피를 준다니!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겠소?” 람자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금세공업자는 “잘 들어 보십시오. 람자여! 당신이야 말로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들을 신과 신의 말로서 보지만, 나에게 그들은 단지 금에 불과하오. 그래서 그들은 무게만큼 가치가 나간단 말이오. 그대의 신은 1킬로의 금이므로 1천 루피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대의 말은 3킬로의 금이므로 3천 루피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팔고 싶으면 파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보시오.”
위대한 싯다 엑나쓰 마하라자는 이와 꼭 같은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도 오직 금만을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 세상 도처에 오직 신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더 고상하고 더 저속하다는 인식이나, 계급이나 개인들 사이의, 그리고 크고 작은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신이 바로 우주이다”라는 것이 그가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평등의 정신 속에서 살았다. 어느 날, 불가촉천민인 마하르 계급 출신의 한 소녀가 그를 만나러 와서, 그에게 대단한 사랑과 애정을 쏟으면서 “오, 바바여! 신은 당신의 집에서 당신을 위해 물을 긷습니다. 나는 그 신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나는 그 신을 부를 수도 없습니다. 오, 에크나쓰 바바여! 당신은 나의 신입니다. 부디 저의 오두막으로 오셔서 저의 평범한 마른 빵과 처뜨니를 드십시오.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성인은 신과 꼭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바여! 부디 제 집으로 오셔서 식사하십시오. 저는 당신을 초대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그녀는 매우 겸손하게 그를 초대했고, 그리고 액나쓰 마하라자는 그 초대를 수락했다. 그는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가 마련한 간소한 음식을 먹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았다.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 모두가 거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 엑나쓰를 봐라. 그는 브람민이며 비슈누의 경건한 숭배자가 아닌가? 그런데 그가 불가촉천민의 집에 가서 식사를 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는 신분을 더럽혔다. 어떤 브람민도 자기 계급의 법을 어긴 이 자의 집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마을의 모든 브람민들은 그를 파문했다.
이것이 엑나쓰 마하라자에게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행운과 불운을 똑 같이 맞아들이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온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그에게 온갖 말을 지껄이며, 그를 모욕하고 또한 그가 하는 것은 모조리 비난했다. 그러나 엑나쓰 마하라자는 조금도 고통을 받지 않았다. 비록 그는 세대주였지만 이 성자는 다음과 같은 완전한 평등관을 가지고 있었다.  

마마따 나비 수타다라 메 나비 데하 메 아비마나 하이
닌다 쁘라샨샤 에까 시 사마 마나 아루 아빠마나 하이
조 보가 아떼 보가따 호따 나 비샤야삭따 하이
나리브사나 니르드반드바 소 잇짜 비나 히 묵따 하이
사하 니쉬바 아빠나 자나따 야 꾸짜 나 아빠나 마나따
끼야 미뜨라 호 하이 박뜨라 죠 사바 비쉬바 지스까 박따 하이
니르헤뚜 삽까 하흐리드 소 잇짜 히나 비 묵따 하이
마야 나히 까야 나히 루빠히 끄루발라 에까 이샤히 빠리뿌르나 하이
나히 나마히 하이 바히 지바 하이 사하 자가 끼 빠람마뜨마 땃뜨비 하이
조 이쉬바라 하이 바히 지바 하이 바히 사하 자가 까 빠람마뜨마 땃뜨비 하이
아이샤 자이 니쉬짜야 후아 바하 빈드 히 묵따 항리  

자기 아내와 자식들에게 집착하지 않고
몸에 대한 과대평가도 없이
칭찬이나 비난, 명예나 모욕을 똑 같이 받아들이며
기쁨이 오는 대로 기쁨을 즐기지만, 거기에 탐닉치 아니하고,
갈망이나 갈등이 없고, 욕망이 없기에 그는 해방을 얻었노라.
전 우주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친구나 적, 모든 사람을 마찬가지로 존경하고
전 우주를 공경하며, 전 우주의 공경을 받고
아무런 이기적인 동기도 없이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며
아무런 욕망이 없기에, 그는 해방을 얻었노라.
마야도, 몸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불임 여성의 자식처럼 실재가 아니도다.
이름과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만이 충만함 속에 완전하도다.
개인의 참나는 우주의 참나와 꼭 같다.
신은 이 세계의 신성한 본질이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서, 욕망이 없다면, 그는 해방을 얻었노라.

이와 같이, 엑나쓰 마하라자는 항상 자유롭고 즐거웠다. 매일 그의 집에서는 종교적인 토론과 예배의 노래와 신에 대한 명상이 있었다. 그는 앉아 있을 때나, 일어설 때, 그리고 잠을 잘 때 항상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속에 있었다. 신은 희열이다. 신이 만든 이 세계는 신 자신처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희열로 가득 찬 이 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은 구루의 은총의 선물이다. 엑나쓰 마하라자는 이처럼 영혼의 희열과 자유 속에서 살았다.
엑나쓰 마하라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지 며칠 뒤에, 조상들을 섬기는 신성한 2주일 기념제가 돌아왔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제물들은 삐뜨리로까에 있는 우리의 조상들에게 실제로 도달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우리는 그들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그들의 생명의 유동체와 그들의 피,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음식까지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음식 주는 것을 생각한다. 그들은 잠자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식들을 재울 생각을 한다. 그들의 손에 들어오는 특별한 먹을 것을 모두 자식들에게 주고, 그들은 자식들이 먹다 남은 것을 먹는다.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어떤 일을 못하겠는가?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상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덕이 많은 아들은 조상들에게 여러 제물을 바치는 것이 필수적이다. 종교적인 전통에 따르면, 브람민들과 산야시들과 기타 손님들이 이 특별한 2주간의 기념제에 초대받아 친절하게 음식을 대접받는다. 그래서 조상들에게 여러 가지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엑나쓰 마하라자도 또한 모든 브람민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엑나쓰가 불가촉천민인 소녀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이유로, 어떤 브람민도 오지 않았다. 따라서 엑나쓰 마하라자는 조상들을 불렀고, 그래서 빠이딴 마을에서 살다 돌아가신 모든 브람민들의 죽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그의 집으로 식사하러 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삐뜨로까에서 내 자신의 조상들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이야기가 전혀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쁘뜨리로까는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상을 통하여 나는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며, 많은 세계들을 방문하였다. 나의 마음이 푸른 진주 속에서 안정을 찾게 되자, 목격자 겸 의식이 나에게 나타났다. 이러한 종류의 명상을 사마디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은 완전한 의식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호흡 동작이 매우 부드럽고 느려진다. 그러나 완전한 꿈바까에서처럼 호흡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는다. 이것이 싯다 수행의 사마디이며, 이때 목격자 겸 의식은 완전한 활동 상태로 들어간다. 그것은 인식이 전혀 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공백 상태의 사마디가 아니다. 의식의 영역은 지식의 영역이며, 따라서 목격자 겸 의식은 진정한 사마디 속에서도 현존해 있어야 한다.
나는 명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신성한 황홀감에 빠져 떠다녔다. 명상이 끝났을 때, 나는 바깥의 세상을 의식하였다. 나는 자세를 풀고서는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산책을 나갔다. 내가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할 때마다, 나는 먼저 사방을 향해 절하면서, 사방이 구루와 빠라샥띠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명상을 위해 자리에 앉기 전에, 항상 그 앉는 자리를 구루의 자리며, 샥띠의 자리로 보았다. 나는 그 앉는 자리를 단순한 매트나 벨벳 천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찌띠가 상하 모든 곳에 충만해 있다고 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모든 존재들에게 절을 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명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도, 내 앉은 자리를 만지면서 절을 했다.
그날 명상이 끝나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명상 중에 7,200백만 개의 모든 나디들을 통하여 흘러갔던 사랑의 물결을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완전히 도취한 기분이었다. 나의 모든 혈구들은 이와 같이 소용돌이치며 넘실거리는 힘차고도 기뻐 날뛰는 물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사랑으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전에처럼 미치지는 않았다. 이번에 그것은 사랑의 광기였다. 내 몸을 뚫고 밀려들어온 이 사랑의 물결은 내가 빠라샥띠의 축복을 받았다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매일 나는 이와 같이 명상을 계속 해 나갔다. 나는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에 명상하였다. 뚜까람의 노래들 가운데 하나가 머리에 떠오른다. 즉 “밤낮 이것이 나의 일이었다고 뚜까람은 말한다.” 기업인, 사무원 혹은 근로자는 판에 박은 일과를 따라간다. 아침에 그는 일어나서 목욕하고,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들고 직장으로 가고, 직장에서 일하고, 업무가 끝난 뒤에 사무실을 닫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같은 일을 매일 하지요. 가고 오고, 먹고 마시고, 밤에 잠을 자지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스와미 묵따난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전과 저녁에 명상하고, 명상이 끝나면 정원에서 일하고, 물을 뿌려준다. 밤이 되면 다시 명상을 하고, 잠을 자는 것이다.




헌정

  나의 어머니는 나를 대단히 사랑하셨다. 왜냐하면 내가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쉬바 신의 헌신자였으며, 신이 은총을 베푸시어 나를 그녀에게 주신 것은 그녀가 빠라쉬바 샥띠를 숭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게 어떤 행복도 줄 수 없었으며, 또한 어머니를 만족시켜드릴 수도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어려서 집을 떠났고, 그래서 어머니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슬픔으로 여위어갔으며, 결국 돌아가셨지만, 나를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자식들은 그들의 어머니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어머니들은 그들 자식들에게 자신의 생명의 젖을 먹여 키운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그 행복을 자식들의 행복에서 찾는다. 나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녀는 나를 위해 어떤 구상과 계획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나의 행복을 위하여 수많은 신들과 여신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녀는 모든 점성가들을 찾아가, “나의 아들은 어떤 아내를 맞이할 것입니까? 자식들은 얼마나 두고요? 유명한 인물은 되겠습니까? 다른 나라에도 가겠습니까? 공장은 몇 개나 가질 것입니까? 그의 어미는 그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약 점성가가 불길한 어떤 것이라도 말하는 날이면, 그녀는 당장 모든 신들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할 것이다. 그녀는 매 목요일, 금요일, 일요일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매일 단식을 계속할 것이다. 그녀의 자식이 학교에 갈 때는, “언제 집에 돌아오지? 왜 아직 안 왔지?”라고 그녀는 계속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계속 반복적으로 집 안팎을 살피며, 벽시계를 쳐다보고, 차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다린다. “내 아들은 왜 아직 안 왔지?” 자식은 어머니의 무한한 보살핌에 은혜를 입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정한 자식은 어머니 곁을 떠나,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타격을 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머니의 모정에 심한 타격을 준다.
  나의 처지도 이와 유사했다. 내 나이 열다섯이 약간 넘었던 어느 날, 나는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뒤로 하고 그들 곁을 떠났다. 내가 그런 짓을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토록 무정하게 행동하게끔 운명 지어져 있었다. 그것은 일어나기로 되어 있었고,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머니를 기억했다. 이때가 나의 사다나 기간 중이었는데, 그때 나는 명상 요가를 수행하는 파끼르로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영적인 길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올라에서부터, 짤리스가온, 까사라, 꼬까마딴, 바즈레쉬바리 및 여타 장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나에게 음식과 마실 것, 의복, 날마다 있는 나의 목욕에 필요한 것, 그리고 기타 필수품을 주면서 나를 돌보아 주었던가! 그들은 나의 기분에 꼭 맞는 식으로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많은 고난을 겪었다. 왜냐하면 내 성질이 약간 불과 같았고, 인내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11시에 음식을 가져와야 할 것을 11시 15분에 가져온다면, 나는 “왜 늦었어요?”라고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화를 내곤 했다. 음식이 5분 일찍 도착해도, “왜 이렇게 일찍 가져왔어요?”라고 소리 지르며 화를 내곤 했다. 나의 사다나 기간 중에, 나의 기질은 극도로 특이하고 오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들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던가! 나를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했던 그들은 정말로 내가 존경하는 어머니들이시다. 순수하고 이기심 없는, 헌신으로 가득 찬 애정을 가지고, 그들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며, 나의 성질을 참아냈던 것이다. 만약 음식의 간이 조금이라도 너무 많이 되어 있거나 혹은 너무 적게 되어 있었다면, 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음식이 너무 뜨겁거나 혹은 너무 차가우면,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심지어 나는 그때 사소한 실수조차 왜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무자비했다. 나는 결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한 죄책감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어머니들이 그들 자신의 비용과 노역을 나에게 제공하면서 봉사하느라 심지어 나 때문에 그들 자식의 뒷바라지조차 소홀히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측은히 여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 신이시여! 왜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오만한 성격을 주셨는지 나는 모릅니다.    
  델리와 봄베이 출신의 상냥하고 애정이 넘치는 사랑스런 어머니들을 포함해서, 이 모든 어머니들은 여전히 나를 성미가 까다로운 아이로 여기고, 신앙과 헌신과 사랑을 다해 나에게 어머니다운 애정을 쏟고 있다. 내가 여행을 갈 때면, 그들은 나와 함께 간다. 그 이유는 바바의 음식을 요리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델리에 갈 때 그들은 왜 나와 함께 갈까? 바바의 음식을 요리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내가 인도 전역을 여행 중이라 하더라도, 나는 항상 11시 30분에 식사한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나의 음식을 준비하고, 차 안에 실어 놓는다. 나는 계획된 출발 시간을 엄수하는 것을 엄격한 규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은 아주 빨리 준비해야만 한다. 그 다음 우리가 길을 나선 동안에는 음식을 따뜻하게 보관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온병들을 사용한다. 오후 3시에는 차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동 중에도 정시에 차를 끓일 수 있도록 그들은 스토브와 우유를 차에 싣고 간다.
  그들은 그러한 고초를 겪음으로써 나의 효심을 살아있게 했다. 그들은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의 특이한 기질을 참아냈고, 나의 까다로운 버릇을 견디어 냈다. 나의 실제 어머니의 일부분이 그들 속에 없었다면, 이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어머니들과 그들의 남편들은 많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내가 그들을 회상할 때, 나는 그들에게 나를 관대하게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한다. 어머니들이시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나 자신의 어머니, 즉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로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모든 마음을 바쳐 여러분께 절을 올린다. 나는 바가반 니띠아난다에게 내가 항상 당신 속에서 그 똑같은 어머니를, 즉 내가 그토록 사랑한 여신 치띠 꾼달리니를 볼 수 있도록 기도드린다.
   나의 여정에서 자기 아들처럼 나를 돌보면서 많은 고난을 견디어 낸 어머니가 여기 한 분 계신다. 그녀는 튼튼하지 않았으나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의 건강도 좋지 않았으나, 그녀는 나태하거나 태만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정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아들과 딸들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애착을 갖지 않았다. 그녀는 누가 그녀의 가정을 돌볼 것인지 혹은 그녀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타는 더위와 매서운 추위, 그리고 폭풍우 치는 우기 중에도 한 번에 한 달, 두 달, 혹은 세 달 동안 바바의 음식과 복지를 보살펴 주었다. 나는 나 자신의 거룩하신 어머니 꾸수메슈바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머니만큼 나에게 소중한 슈리마띠 샤르다 암마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

의식의 유희-제 1 부 신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 묵타난다

2009.07.28 15:48 | 묵타난다 | 야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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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신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

신은 모든 곳에 충만해 있으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신은 안과 밖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모든 존재에 내재하고 있으며, 가슴이라는 내적 신전에 참나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현혹된 많은 사람들은 신이 가슴 속이나 아니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에 대한 믿음은 거짓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물론의 철학들은 창조의 기원이 자연에 있으며, 이 우주에는 창조자란 없으며, 이 우주가 단지 원자와 분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이란 멀리 떨어진 곳인 바이꾼따 혹은 까일라사에 거주하거나, 아니면 제 5천국 혹은 제 7천국(최고천)에 거주하지, 가슴 속에 거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또한 현대의 사상가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보는 갈등, 고통, 그리고 불행 때문에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홍수가 일어나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역에는 기근이 들고, 또 다른 지역에는 먹을 것이 남아돌고 있다. “이 많은 불평등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비는 제 때에 내리지 않는다. 마실 물조차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밖에 없다. 식량으로 곡식은 충분치 않고, 먹을 것이라고는 식물과 나무 잎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 살 집이 없으며, 자신의 몸을 감쌀 옷조차 없다. 왜 이러한 불행이 있는가?” 라고 그들은 의문을 던진다. 이렇게 끝없이 더해만 가는 의심을 품고 있기에, 사람들의 가슴은 메말라, 신앙심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풍부한 식량과 부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불굴의 노력과  끊임없는 근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비옥한 땅이 그리 많지 않은 작은 나라이지만,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 국민들은 농업기술의 개발에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전념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한 속담에는, “비단뱀은 교미하지 않고, 새는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과 같은 근면한 사람들은 그러한 나태함을 좋다고 보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책임감이 전혀 없고 나태함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해 가다가, “만약 신이 있다면, 왜 우리는 배가 고픈가?” 라고 말하면서 신에게 대항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그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당신의 삶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슬픈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을 멀리 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전문의 자격을 가진 의사를 일곱 명이나 배출한 한 가문의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가족의 한 소년이 상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아프게 되었다. 처방된 약을 먹기는 하였지만 음식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래서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의 가족의 의사들이 처방한 약이 효과가 없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기가 행한 행위의 결과를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행한 행위의 본질과 완전히 일치한다.
신을 알고자 한다면, 이론이나 사색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은 완벽하게 현존해 있다. 그러나 미묘한 모습으로 현존해 있다. 신은 우리의 안과 밖의 모든 행위의 확고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인도에는 경탄을 받을 만한 장소, 즉 시다가 거주하고 있는 곳들이 많다. 우리가 그들 모두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렇다고 그러한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하고 신성한 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순진한 합리주의에 불과하다. 신이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만들고 그 다음 그 두 세계에 두루 충만해 있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창조자, 신이다.  만약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곳에 살 수 있을까? 누가 자신의 현세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남과의 관계를 정직하고도 순수하게 하려고 노력하겠는가? 만약 세상이 재미있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신 때문이다. 신의 영광은 끝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 맛과 달콤함을 경험하는 것도 바로 무한한 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고로 행복에 넘치고 있는 신의 지복이 이 세상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감각적 쾌락과 모든 세속적 행동으로부터 약간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음식의 맛에서, 달콤한 물에서, 라가와 라기니의 선율 속에서,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들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그리고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를 통해 신의 더없는 행복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만약 신의 영광이 수많은 색깔을 가진 꽃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그토록 꽃들에게 매혹되며, 왜 꽃들을 그리도 사랑해야 하는가? 만약 망고와, 파인애플과, 귤, 혹은 석류들에 신의 아름다움과, 달콤함과 향기가 없다면, 왜 그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달콤한 맛을 내는가? 그들이 달콤함과 넥타와 같은 향기를 내는 것은 그 신성한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담백하고 순수한 물속에도 달콤한 맛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가! 수많은 색깔의 밝은 광선을 갖고 있는 태양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들 우아한 광선의 손길로, 연꽃은 피어나며, 식물들은 행복에 겨워 살랑이고, 새들의 왕국은 온통 행복에 겨워 노래하기 시작한다. 주의 깊게 바라보라. 정말로 자세하고 섬세하게 바라보라. 이들 태양 광선과 이들 덩굴식물들은 상호간의 사랑과 희생적인 경배의 마음속에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기며, 침묵의 언어로 서로를 만나고 있다.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 속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신성한 음악이 감추어져 있는가! 얼마나 달콤하고, 시원하고 행복한 촉감을 주는가! 이 모든 것 속에는 현존해 있는 신의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순수 의식의 화신인 이 우주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단지 결점만을 지각하고 있다.
이 세상은 신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절대자이다.”라고 하는 베단따의 가르침은 궁극의 진리이다. 모든 것이 신이다. 모든 나라와, 모든 성지와, 모든 이름은 신의 것이다. 오직 사람의 눈으로 볼 때만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존재한다. 진실로, 이 지상의 모든 지역은 신의 성스러운 장소이다. 모든 물과 물이 모여 생긴 흐름은 신의 성스러운 강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과 형상 속에는 바로 신의 이름 소리가 들어 있다. 영광은 끝이 없으며, 이름도 끝이 없으며, 무한한 자의 유희도 끝이 없다. 신에게는 어떤 종말도 없다. 당신이 아무리 독서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공부할 것은 언제나 남아 있는 법이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성지를 방문한다하더라도, 가보아야 할 곳은 여전히 남아 있는 법이다.  당신이 아무리 멀리까지 본다하더라도, 그 앞에는 항상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것이 신성한 원리가 두루 충만해 있다는 신성의 광대함이다. 신보다 더 신성한 것이 신의 영광이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짧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 덧없으며, 이 세상은 너무나 위험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 신을 찾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이르는 길은 매우 어렵다. 인간에게 혈통이 있듯이, 신성의 원리에도 혈통이 있다. 이 세상은 시작도 없는 신의 후손이다. 이것을 의심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의 씨앗은 동일한 다른 씨앗을 낳는다. 앞으로 나타날 것에는 처음의 것과 마찬가지의 성질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브라만은 서서히 브람만에서 태어난다. 모든 인간의 참나는 빠라브람만인 신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이 나온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은 완전함의 형태로 나타나서 그 완전한 본질이 완전한 상태로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법칙일진데, 왜 우리 인간은 불완전함을 경험하게 되는가? 왜 우리는 파멸과 분열을 느끼게 되는가? 왜 우리는 계속해서 소리 지르고 울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착각이기는 하지만, 이 참나의 망각은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 지식의 결여, 마야 혹은 불순이라고 불러 왔다. 지고의 신을 한낱 인간으로, 보편적인 영혼을 개인적인 영혼으로, 자유를 구속으로 바꾼 것은 바로 이 무지이다. “나와 나의 것”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그대는 고통스러운 이원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많은 고통이 생겨나게 된다.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의 길은 신을 깨닫는 것, 곧 참나의 비전을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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