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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4/30
 
이곳의 글들은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 www.krishnadass.com )의 게시 내용 중에서 본인의 글들을 옮겨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슈리 크리슈나다스 홈페이지와 연계하여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잠이 묵티(mukti:해탈)로 나아가게 하는가?
그냥 활동하지 않는 것이
인간을 묵티로 나아가게 한다는 가정은 잘못이다.







그대가 온 가슴으로 신을 찾고 있다면,
신의 은총도 역시 그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형체가 없다.
마음을 통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찾는 것이다. 



 


그대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망각이
정말로의 죽음이다.
진정한 본성에 대한 기억은
진정한 탄생이다.

진정한 탄생은 계속적인 탄생들을 그치게 한다.
그러면, 그대의 탄생은 영원한 삶이 된다.






신은 현상계가 실재라고 말하는 자에게나
그 반대라고 말하는 자에게나 다 같다.
그들의 관점이 다를 뿐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그런 논쟁에
끼워 넣을 필요가 없다.
목표는 같은 하나이다.
그것만을 보라.






참나는 강력한 숨어 있는 자석이다.
그것은 우리를 점차로
그것에게로 끌어들인다. 







어떤 순례의 길을 떠나
하나로 모아지든 간에
그들은 유일한 통로인
카바 신전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지이다.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더 높은 힘이며,
사람은 단지 그 도구이다.

그가 그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고통을 불러들인다.








Consciousness Strikes

The Gospel of Ramesh

- Shirish S. Murthy

 

 

 

141
Ramana Maharshi says,

"There is no creation, no dissolution,

no path, no goal, no free will, no destiny".

라나마 마하리쉬께서 말씀하셨다.

"그 어떤 창조도 사멸도 없고

가야할 길도, 도달해야 할 목표도 없으며

자유의지도 운명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Once you accept that nothing happens

according to your will, the question

"whose will prevails?" is irrelevant.

일단 당신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누구의 의지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Once I accept that all that happens is God's will

why should I be concerned about God?

In the end there is nothing.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의지라는 것을 이미 받아들였다면

내가 신의 일에 내가 계속 관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

결국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All there is, is the illusion.

Something which does not

exist all the time is an illusion.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환상이다. 

그것은 내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환상이기 때문이다.

The manifestation does not exist in deep sleep.

God's will is concerned only

when there is manifestation, when you are awake.

발현된 것은 깊은 잠 속에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발현된 것이 있고, 당신이 잠에서 깨어있을 때는 

오직 신의 의지 만이 관여할 수 있다.

Ramesh says,

I am not talking of life.

Life is a concept, an illusion

because it does not exist in deep sleep.

라메쉬는 말한다.

나는 일상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개념이고, 환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깊은 잠 속에서는 삶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42

Manifestation does not have

an existence of its own.

드러난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It depends on consciousness

of the person observing it.

드러난 것은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의식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다.  

Manifestation is as you interpret it.

드러난 것은 당신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Each person interprets manifestation

according to his programming.

모든 사람들은 예정된 그 자신만의 학습 계획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한다.

Manifestation is only in the mind.

Manifest and the unmanifest are not two.

드러난 것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은 둘이 아니다. 

I-I and I am are not two.

I-I has not created the 'I AM'.

I-I has become the 'I AM'.

I-I is just a concept.

'나-나'와 내가 존재한다는 둘이 아니다.

'나-나'의 상태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에서 창조되어진 것은 아니다.

'나-나'의 상태는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이 되는 것이다.

'나-나'란 단지 개념일 뿐이다.

역자주:

여기서 '나-나'로 번역한 'I-I'는

'생각하는 나'와 '진정한 나'의 합일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We are only concerned with the 'I AM'.

우리는 오직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에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Buddha says,

Nirvana is samsara.

Nirvana did not create samsara.

Nirvana has become samsara.

부처님께서는 열반은 곧 윤회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열반이 윤회를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열반의 어떤 속성이 윤회가 되었다 하셨다.

 

Ramesh says,

'I AM' is present when the "me" is not there.

'I AM' has become the "me"

as part of Divine Hypnosis.

라메쉬는 말한다.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은 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을 때 드러난다.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상태는 나를 신성한 최면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143

If you are satisfied with what is happening or

if you accept 'What Is', there is no problem.

만일 당신이 일어난 모든 일에 만족했다면

주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Problem arises when you want something.

문제란 당신이 무엇인가를 원하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Peace or happiness happens

when you accept 'What Is'.

평화나 행복이란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것이다.

Your wanting disturbs the peace

which is always there.

늘 거기에 있는 당신의 평화를 방해하는 것은 당신의 욕망인 것이다.

The final acceptance can only happen.

The non-happening of the final acceptance

itself has to be accepted.

오직 궁극적인 허용만이 일어날 뿐이다.

궁극적인 허용의 일어나지 않음, 그 자체도 받아들여진 것이다.

Understand that what happens

is not in your control.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당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The ultimate thing to do is

to accept the non-acceptance.

The final acceptance happens

when you truly don't care

whether Enlightenment happens or not.

최종적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어떤 거부함도 없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깨달음이 일어나든 말든

당신이 진정으로 상관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인 허용이 나타날 것이다.  

Ramesh says,

You may call the acceptance of

the inability to accept as

contentment or surrender.

라메쉬는 말한다.

당신은 만족 또는 포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수락하게 될 것이다.

 

144

The experience of just being happens

when the "me" is absent.

지금 이순간에 그냥 존재하는 체험은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These moments occur for everyone.

The feeling arises.

In those few moments one of two things happens.

이러한 존재의 체험 순간이 일어나면

사람들에게는 느낌이 따라 일어나고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둘 중 하나의 생각이 일어난다.

If the programming is to seek spirituality

the thinking mind says,

"That was good. I want more of it".

만일 조건화된 마음이 정신적인 것을 구하고 있었다면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았어, 이런 체험을 조금 더하길 원해." 

If the programming is not to seek spirituality

the thinking mind says,

"Why are you wasting time? Do something".

만일 조건화된 마음이 정신적인 것을 구하고 있지 않았다면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짓에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 다른 일이나 해야지." 

So, what is to be done?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Leave the experience alone.

The "me" wants it again.

'나라는 에고'는 그 체험을 다시 원할 것이다.

그 체험을 홀로 내버려 두라.

If you are able to,

let go of the experience and forget it.

당신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체험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Ramesh says,

If the experience of just being is allowed

to come and go, without taking delivery,

it is likely to happen more frequently.

라메쉬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 그냥 존재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더 자주 일어날 것 같다면

받아들임 없이 

그 체험이 오고 가게 그냥 내버려 두라.

 

145

An individual identifies with the actions

that happen through the bodymind organism

due to Divine Hypnosis.

몸과 마음이라는 유기체를 통해 일어나는

행동을 통한 개인적인 동일시는

신성한 최면에서 기인한 것이다.

God alone can remove the hypnosis

which He was created.

오직 신만이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던 상태로

그 최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All you can do is,

pray to God to remove the hypnosis.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그 최면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일 뿐이다.

But, you don't do that.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You think you can do some sadhana

and ultimately overcome maya.

당신은 어떤 영적인 수행을 함으로써

마침내 마야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Only one in thousands

is seeking the removal of Divine Hypnosis.

오직 천명 중에 한 명만이 신성한 최면을 제거하는 법을 추구한다.

The seeking to remove hypnosis

is itself God's grace.

최면을 재거하기 위한  추구, 그 자체가 신의 은총이다.

Seeking is happening by God's grace.

The process began by the will of God.

It will continue at the pace which God wills.

추구는 신의 은총에 의해 일어난다.

신의 의지에 의해 그 추구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신의 의지를 향한 그 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Ramesh says,

When you pray to God to hasten the process

you accept the fact that hastening the process

is truly not in your hands.

라메쉬는 말한다.

추구의 과정을 단축시켜 달라고 당신이 신에게 기도할 때

그 과정을 단축하는 것은

당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당신은 받아들여야 한다.

 

146

Ego is created by God as part of Divine Hypnosis.

에고는 신성한 최면의 일부로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The annihilation of the ego is not

in the seeker's hands.

에고의 소멸은 구도자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You are unhappy when the ego comes back

because you think you should be able

to do something about it.

에고가 복귀하면 당신은 불행해진다.

그것은 당신이 에고의 소멸에 대해

뭔가를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rising of the ego is a natural process.

Let the ego come back.

에고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에고가 복귀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라.

Unhappiness arises when you want to control the ego.

불행은 당신이 에고를 통제하기 원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

When you accept the ego instead of fighting it

where is the unhappiness?

에고와 싸우는 대신 에고를 받아들인다면

어디에 불행이 존재할 있을 수 있을까?  

When you accept the ego you are actually

surrendering to That power

which has created the ego.

에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제로는 에고를 창조한 신성한 그 힘에 대해

당신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It means you have surrendered the ego itself.

이 말은 당신이 에고 그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You say,

Alright God, do whatever you like.

If you want the ego to come again

and again, let it happen.

그럴 때 당신은 말할 것이다.

'신이여, 좋습니다. 뭐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에고가 다시 오게하기를 당신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Ramesh says,

Accept that nothing is in your control.

Until this understanding becomes total

the ego will come up again and again.

라메쉬는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당신의 손에 매인 것.

이러한 이해가 전체적인 것이 되기 전까지 

에고는 거듭 거듭 다시 오리라. 

 

 

147

You are dissatisfied because you do not

truly accept that you can do nothing.

당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You think you can do something.

당신은 당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You want to know what is that

which you can do.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있다.

When you truly accept that

nothing is in your control,

that everything is in God's control,

what will you do?

모든 것은 신의 통제하에 있기에

당신의 통제하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당신이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You accept whatever God does

through the bodymind organism

without saying they are your actions.

그럴 때 당신은

신이 무엇을 행하든

그 일들이 당신의 행위라 말하는 법 없이

몸과 마음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

당신은 받아들이게 된다.

You do not exist as a separate individual.

그리하여 당신은 분리된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The "me" can only die if there is total acceptance

that you do not exist as the doer.

'나라는 에고'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당신이 행위자로 존재하지 않고서 전적인 수락의 상태로 있을 때이다.

What can you do to bring about total understanding?

전적인 이해에 대해 당신이 더이상 무엇을 더할 수 있단 말인가?

Nothing, because you don't exist.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You can only understand the teaching intellectually.

당신은 이 가르침을 오직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To what extent that will help you to live your life

without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is not in your hands.

개인적인 행위자란 느낌없이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신 손에 달린 일은 아니지만

그 무엇이든 대부분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It is God's will. Let Him do whatever He wants.

그것이 신의 의지이다.

신께서 그 무엇이든 그 분이 원하시는 바대로 행하게 허용하라.

You can only wait without expectations.

당신은 오직 기대함이 없이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The final acceptance is the acceptance of

the inability to surrender.

What happens when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disappears totally?

궁극적인 수락은 순복을 통해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개인적인 행위자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Ramesh says,

Whatever happens is merely witnessed

without wanting to change it.

라메쉬는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만 느끼기만 하라.

그 일을 바꾸려는 바램 없이.

 

148

If you accept that manifestation is

Consciousness in action where do you figure in?

만일 당신이 드러난 것은  행위 속의 의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어디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Have you accepted intellectually that

Consciousness is functioning through

the billions of bodymind organisms?

당신은 의식이란

몸과 마음이라는 수십억의 신체기관을 통한

작용이라는 것을 지적으로 받아들였는가?

You are really fictitious.

진정 당신은 가공의 인물인 것이다.

The fiction is created by Consciousness.

그 소설은 의식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If you think "you" are searching,

"you" are making the effort,

there will be confusion, frustration and unhappiness.

만일 당신이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일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혼란이 있고, 좌절이 있고 불행이 있게 되는 것이다.

If you accept that effort happens,

whatever the consequences,

unhappiness or frustration will not arise.

There is no individual doer.

만일 당신이 그 결과야 어떻든간에

일어나는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면

불행도 혼란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행위자로서의 개체란 존재하지 않기에. 

Ramesh says,

If you accept whatever happens as God's will

life will be simple.

Then, when any question arises

THE ANSWER will follow it.

라메쉬는 말한다.

만일 일어나는 일은 그 무엇이든

신의 의지라 받아들인다면

삶은 단순해 질 것이다.

그때는, 어떤 의문이 일면 그 해답도 곧 따라 올 것이다.

 

149

Observing is done by identified Consciousness.

관찰은 신성한 의식을 확신함에 의해 끝난다.

The one asking questions is the observer.

질문을 하는 자가 관찰자이다.

When impersonal witnessing happens

there is no judging.

객관적인 주시함이 일어나면

거기에는 분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There is no one to be happy or unhappy.

거기에는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없다.

The individual, observing and judging and

being happy or unhappy is part of 'What Is'.

개체라는 것도,

관찰과 판단이라는 것도 그리고 행복하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있는 그대로의 일부분인 것이다. 

Happiness or unhappiness arises when you observe

and say, "I like it or I don't like it".

행복과 불행은

'나는 그것이 좋아, 나는 그것이 싫어' 라고

말하고 보는 데서 일어난다.

The Sage does not see himself or anyone else as the doer.

성자는 그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를 막론하고 행위자로서 보지 않는다.

Whatever anybody does is accepted as God's action.

All that is observed is accepted as the will of God.

누가 무엇을 행하든 신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

Any reaction of the brain is merely witnessed.

The reaction of some other bodymind organism

is also merely witnessed or accepted as the will of God.

그 어떤 두뇌의 반응도 단지 주시된 것에 불과하고

다른 몸과 마음이라는 신체기관의 어떠한 반응도

단지 주시된 것이거나 신의 의지로서 받아들인다.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is the

involvement with the reaction of the brain.

자신이 개인적인 행위자라는 감각은

두뇌의 반응에 휩쓸리는 일인 것이다. 

Ramesh says,

If unhappiness is accepted as God's will

there won't be a "me" to get involved with it.

라메쉬는 말한다.

만일 불행을 신의 의지라고 받아들였다면

불행에 말려들 '나'라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150

 

Enlightenment is just a word.

깨달음이란 단지 말에 불과하다.

What is the human being looking for?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Peace, isn't it?

평화, 바로 그것이 아닌가?

"Why does God give peace and contentment

to some and not to others?"

왜 신은 어떤 이에게는 평화와 만족을 가져다 주고

어떤 이에게는 그렇지 하지 않는가?

You can only accept God's will.

당신은 오직 신의 의지를 받아들 일 수 있을 뿐이다.

The mind cannot understand the will of God.

마음은 신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In the Sage what is absent is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성자 속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자신이 행위자라는 개인적인 감정이다.

What is present is the total acceptance

that what happens through any

bodymind organism is God's action.

현재라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몸과 마음이라는 어떤 신체기관을 통해

신의 행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eace can happen only when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is lost.

평화는 오직 내가 행위자라는 개인적인 감정이 사라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When is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lost?

언제 자신이 행위자라는 개인적인 감정이 사라지가?  

When you truly understand that you have no free will.

그것은 당신에게 자유의지란 전혀 없다는 것을

당신이 진정으로 이해했을 때인 것이다.

Why does the feeling of doership get back?

Because you think you are in control.

왜 행위에 애착하는 감정이 되돌아오는가?

그것은 당신이 통제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Ramesh says,

When you truly understand that

you don't live your life,

that your life is being lived by God or Consciousness,

the sense of personal doership is lost forever.

라메쉬는 말한다.

당신의 삶을 당신이 사는 것이 아님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당신의 삶은 신 혹은 신성한 의식에 의해 존재하는 삶이 될 것이며.

자신이 행위자라는 개인적인 감각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Ramesh, The Beautician

미용사, 라메쉬

Have you visited Ramesh's beauty parlour?

If not, please do.

Enter His house and sit in His presence.

You are made beautiful, you have no choice.

How does He do that? God only knows.

God gave Him that job, not me.

The thinking mind poses as the doer.

He is impatient with it and lovingly patient

with the working mind.

So, who wins? The working mind of course.

There is one hitch, friends.

You can't go to His parlour at "your" will.

No amount of money or power can take you there.

It is only God's will that can take you there.

In Divine confusion I asked the Lord to take me.

He said, "go to Ramesh".

I went to Him and said,

"Master, make me your disciple".

He said, "Sure, but the "me" is still there".

I accepted it.

Place the ego at His feet and look the other way.

Don't go to check if it is dead. It'll pretend and fool you.

He neither sells concepts

nor does He promise the Heavens.

He says, nothing is in your hands.

If you accept that totally, and that is not in your hands,

consider the work done.

No stain of guilt or pride,

enmity or frustration remains.

You will then remember the poet's words,

"Beauty lies in the eyes of the beholder."

 

The End





어디에서 영혼을 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라마나스라맘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라마나스라맘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은 항상 당신 안에
그리고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하고서
그것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판두랑가 바잔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바잔은 헌신자들의 발에 
딸랑거리는 종들을 달고
사원 한 가운데 놓여 있는 황동 촛대와 더불어
밤의 첫 부분에 시작됩니다.

헌신자들은 “판다르푸르는 멀리에 있다!
판다르푸르는 멀리에 있다!
우리 어서 가자!”라는 음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면서
촛대 주위를 돌고 돕니다.

하지만 그들이 돌고 돌 때,
그들은 사실상 반 야드조차도 나아가지 않습니다.





밤의 세 번째 부분에 도달할 즈음에
그들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보라! 보라! 판다르푸르가 있다!
판다르푸르가 여기에 있다! 보라, 보라!”
 
밤의 첫 번째 부분 동안에 촛대 주위를 돌았던 것을
세 번째 부분에서도 동일한 촛대 주위를 그들은 돌았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그들은 노래합니다.
“우리는 판다르푸르에 도달했다. 이것이 판다르푸르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촛대에 경의를 표하며 바잔을 끝냅니다.





그것은 이것과 또한 같습니다.
우리는 아트마를 찾아 돌고 또 돕니다.
“마침내 지식의 비전(갸나 드리슈티)이 돋을 때까지
"아트마가 어디에 있는가?
아트마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계속 말한다가
우리는 "이것이 아트마다. 이것이 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파다말라이 중에서...













비베카츄다마니-참나는 마치 태양이 전우주를 비치듯이 사트바를 통해서 빛난다.

2009.08.15 14:50 | 라마나 마하리쉬 | 야무나

http://kr.blog.yahoo.com/ramanadass/6318 주소복사





샥티에는 사트바,라자스,타마스라는 세가지 구나가 있다.

활동성을 띠고 있는 라자스는
투사력 (投射力)이 있으며,
모든 활동의 근본원인이 된다.
이로부터 욕망과 슬픔을 야기하는
마음의 상(相)들이 일어나며
욕정,분노,탐욕,허세,비방,야만,시기,질투 등이 일어난다.

이 투사력은 속박의 원인인데,
왜냐하면 이것에서 외부적,
세간적인 습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타마스에는 은폐력이 있다.
이것은 사물을 그것의 본래 모습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착각하여 보이게 한다.
이것은 투사력과 결합함으로써,
인간의 끊임없는 환생의 근본이 된다.

이 은폐력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설사 지혜롭고 학식이 있거나, 영리하고,
경전들의 의미에 정통하고,
놀라운 초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스승이나 현자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참나에 대해 말하더라도, 진리를 깨닫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 은폐력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망상과 무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런것들을 얻을려고만 할 것이다. 
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타마스에 휩싸인 사람은 
분명한 앎과 이해를 가지지 못하는데, 
이러한 앎과 이해가 없이는 은폐력을 제거할 수 없다.

그는 항상 의심 속에 있으면서
진리와는 반대되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투사력은 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무지, 나태함,무력함, 잠에 빠짐, 책임전가,
그리고 우둔함이 타마스의 특징들이다.

이러한 특질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마치 잠자는 사람이나
무감각한 기둥처럼 어리석게 살아간다.



이제 사트바를 말해보자.
이것은 순수한 물과 같이 아주 맑은 것이지만,
만약 라자스나 타마스가 섞이면
혼탁해져서 속박의 원인이 된다.

참나는 마치 태양이 전우주를 비치듯이
사트바를 통해서 빛난다.
혼합된 사트바를 통해서도
겸허함, 믿음, 헌신, 해탈에 대한 열망,
신적인 성품, 비실재를 멀리하는 등의
신성한 자질들이 나온다.

순수한 사트바의 명료함으로부터는
참나 깨달음, 지고의 평안, 결코 감하지 않는 만족,
완전한 행복과 영원한 지복의 원천인 참나에 안주하게 된다.

세가지 구나의 복합이라고 불리는
"구분되지 않는 힘"이 영혼의 근원적인 몸이다.
그것은 모든 감각기관과 마음의 기능들이
휴식하는 깊은 잠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지각이 멈추고
마음은 미묘한 씨앗같은 형상으로
지고의 지복을 경험한다.
이것은 "나는 푹 잤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보편적 경험에서 입증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假我에 대한 묘사이다.
참나에 속하지 않은 것들이다
.

즉, 감각기관, 마음, 에고를 비롯한 의식의 變相들,
감각대상에서 오는 행복, 지수화풍공의 원소들,
그리고 전체 세계로부터 구분되지 않은 마야와 
그것의 효과인 의식에서부터 거친 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假我들은
사막의 신기루같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





Om Namah ShivaYa


슈리 라마나 파라비디우파니샤드 2장, 3장

2009.08.15 13:44 | 라마나 마하리쉬 | 야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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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라비디우파니샤드는 참자각으로 알려진
참나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상태는 만두키야 우파니샤드를 비롯하여
모든 우파니샤드에서 말하고 있으며

“이제”이 상태를 직접 체험하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가진
“동일한 신성한 구루”께서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고대 우파니샤드와 파라비디우파니샤드는
“동일한 구루”를 통해 전수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현자들과
구루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참나인,
지고의 존재와 동일하다.

모든 영적 구도자들의 목표인 해방의 상태가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불리는 것에 주목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모두는 이미 그 상태에 있으며,
우리가 다른 상태에 있는 것 같이 느끼는 것은 “환영” 이다.

우리의 구루 바가반은 인간의 형상으로,
그분의 체험으로 우리를 가르칠 수 있도록
사다나(수행)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어떻게 해야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이제 간단히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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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속적인 삶은 욕망과 두려움이 만연하며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닫게 된 사람은
그러한 사악한 힘으로부터 해방된 현자인 구루에게 다가가,
그의 신성한 두발에 경의를 표한 후에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그에게 물어야 한다.


세속적인 삶은 비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굴복은
그 형상만 변할 뿐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참되고 영원한 행복은
이런 세속적인 삶에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러한 집착들이 약화된 사람만이
제자의 신분으로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그가 벗어나고자하는 속박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에 항상 거주하고 있는 현자,
자격 있는 구루를 찾아야 한다.

구루에게 복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모든 악의 씨앗인 자아는 
채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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