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그 분처럼 생사를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이 땅의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 분은 엄청난 독서와 집필을 통해 사상적 깊이를 드러내 왔음에도, 서푼어치 지성도 없는 양아치 정치꾼들로부터 '치매 걸린 노인네'라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국내에서는 가장 박해받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치인으로 어느 정도의 술책과 실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경제적 성과를 이루고 독재에 항거해 싸운 인물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풍요와 자유의 상당량은 그 분의 업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며 초.중학교에서 다시금 반공교육을 실시하고자 시도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력감과 상실감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자유의 힘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지금 철저하게 세뇌되어 로봇처럼 움직이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충동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세뇌와 무지가 아무리 깊어도 그 불씨마저 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독재적 군사통치가 판을 칠 때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외면했다. '나는 야당도 아니고, 여당도 아니다. 나는 정치와 관계없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봐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인 양 점잔을 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선을 선이라고 격려하지 않겠다는 자들이다.
스스로는 황희 정승의 처세훈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얼핏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비판을 함으로써 입게 될 손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다.
이것이 결국 악을 조장하고 지금껏 선을 좌절시켜왔다. 지금까지 군사독재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이렇듯 비판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악한 자들을 가장 크게 도와준 사람들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