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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나 (ramanad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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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유희-제 1 부 신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 묵타난다

2009.07.28 15:48 | 묵타난다 | 야무나

http://kr.blog.yahoo.com/ramanadass/6276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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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신에 대한 깨달음의 중요성

신은 모든 곳에 충만해 있으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신은 안과 밖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는 모든 존재에 내재하고 있으며, 가슴이라는 내적 신전에 참나의 모습으로 살아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자는 거의 없다. 현혹된 많은 사람들은 신이 가슴 속이나 아니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에 대한 믿음은 거짓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물론의 철학들은 창조의 기원이 자연에 있으며, 이 우주에는 창조자란 없으며, 이 우주가 단지 원자와 분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이란 멀리 떨어진 곳인 바이꾼따 혹은 까일라사에 거주하거나, 아니면 제 5천국 혹은 제 7천국(최고천)에 거주하지, 가슴 속에 거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또한 현대의 사상가들은 그들이 세상에서 보는 갈등, 고통, 그리고 불행 때문에 신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홍수가 일어나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역에는 기근이 들고, 또 다른 지역에는 먹을 것이 남아돌고 있다. “이 많은 불평등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비는 제 때에 내리지 않는다. 마실 물조차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밖에 없다. 식량으로 곡식은 충분치 않고, 먹을 것이라고는 식물과 나무 잎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 살 집이 없으며, 자신의 몸을 감쌀 옷조차 없다. 왜 이러한 불행이 있는가?” 라고 그들은 의문을 던진다. 이렇게 끝없이 더해만 가는 의심을 품고 있기에, 사람들의 가슴은 메말라, 신앙심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풍부한 식량과 부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불굴의 노력과  끊임없는 근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비옥한 땅이 그리 많지 않은 작은 나라이지만,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 국민들은 농업기술의 개발에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전념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한 속담에는, “비단뱀은 교미하지 않고, 새는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과 같은 근면한 사람들은 그러한 나태함을 좋다고 보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책임감이 전혀 없고 나태함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해 가다가, “만약 신이 있다면, 왜 우리는 배가 고픈가?” 라고 말하면서 신에게 대항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이 그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당신의 삶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슬픈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을 멀리 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전문의 자격을 가진 의사를 일곱 명이나 배출한 한 가문의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가족의 한 소년이 상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아프게 되었다. 처방된 약을 먹기는 하였지만 음식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래서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의 가족의 의사들이 처방한 약이 효과가 없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기가 행한 행위의 결과를 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행한 행위의 본질과 완전히 일치한다.
신을 알고자 한다면, 이론이나 사색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신은 완벽하게 현존해 있다. 그러나 미묘한 모습으로 현존해 있다. 신은 우리의 안과 밖의 모든 행위의 확고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인도에는 경탄을 받을 만한 장소, 즉 시다가 거주하고 있는 곳들이 많다. 우리가 그들 모두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렇다고 그러한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하고 신성한 힘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순진한 합리주의에 불과하다. 신이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만들고 그 다음 그 두 세계에 두루 충만해 있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창조자, 신이다.  만약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곳에 살 수 있을까? 누가 자신의 현세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남과의 관계를 정직하고도 순수하게 하려고 노력하겠는가? 만약 세상이 재미있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신 때문이다. 신의 영광은 끝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 맛과 달콤함을 경험하는 것도 바로 무한한 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고로 행복에 넘치고 있는 신의 지복이 이 세상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감각적 쾌락과 모든 세속적 행동으로부터 약간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음식의 맛에서, 달콤한 물에서, 라가와 라기니의 선율 속에서,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들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그리고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를 통해 신의 더없는 행복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만약 신의 영광이 수많은 색깔을 가진 꽃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그토록 꽃들에게 매혹되며, 왜 꽃들을 그리도 사랑해야 하는가? 만약 망고와, 파인애플과, 귤, 혹은 석류들에 신의 아름다움과, 달콤함과 향기가 없다면, 왜 그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달콤한 맛을 내는가? 그들이 달콤함과 넥타와 같은 향기를 내는 것은 그 신성한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담백하고 순수한 물속에도 달콤한 맛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가! 수많은 색깔의 밝은 광선을 갖고 있는 태양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들 우아한 광선의 손길로, 연꽃은 피어나며, 식물들은 행복에 겨워 살랑이고, 새들의 왕국은 온통 행복에 겨워 노래하기 시작한다. 주의 깊게 바라보라. 정말로 자세하고 섬세하게 바라보라. 이들 태양 광선과 이들 덩굴식물들은 상호간의 사랑과 희생적인 경배의 마음속에서 서로에게 자신을 내맡기며, 침묵의 언어로 서로를 만나고 있다.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 속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신성한 음악이 감추어져 있는가! 얼마나 달콤하고, 시원하고 행복한 촉감을 주는가! 이 모든 것 속에는 현존해 있는 신의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순수 의식의 화신인 이 우주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단지 결점만을 지각하고 있다.
이 세상은 신을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절대자이다.”라고 하는 베단따의 가르침은 궁극의 진리이다. 모든 것이 신이다. 모든 나라와, 모든 성지와, 모든 이름은 신의 것이다. 오직 사람의 눈으로 볼 때만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존재한다. 진실로, 이 지상의 모든 지역은 신의 성스러운 장소이다. 모든 물과 물이 모여 생긴 흐름은 신의 성스러운 강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과 형상 속에는 바로 신의 이름 소리가 들어 있다. 영광은 끝이 없으며, 이름도 끝이 없으며, 무한한 자의 유희도 끝이 없다. 신에게는 어떤 종말도 없다. 당신이 아무리 독서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공부할 것은 언제나 남아 있는 법이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성지를 방문한다하더라도, 가보아야 할 곳은 여전히 남아 있는 법이다.  당신이 아무리 멀리까지 본다하더라도, 그 앞에는 항상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것이 신성한 원리가 두루 충만해 있다는 신성의 광대함이다. 신보다 더 신성한 것이 신의 영광이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짧다. 우리의 몸은 너무나 덧없으며, 이 세상은 너무나 위험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 신을 찾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이르는 길은 매우 어렵다. 인간에게 혈통이 있듯이, 신성의 원리에도 혈통이 있다. 이 세상은 시작도 없는 신의 후손이다. 이것을 의심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의 씨앗은 동일한 다른 씨앗을 낳는다. 앞으로 나타날 것에는 처음의 것과 마찬가지의 성질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브라만은 서서히 브람만에서 태어난다. 모든 인간의 참나는 빠라브람만인 신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이 나온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은 완전함의 형태로 나타나서 그 완전한 본질이 완전한 상태로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법칙일진데, 왜 우리 인간은 불완전함을 경험하게 되는가? 왜 우리는 파멸과 분열을 느끼게 되는가? 왜 우리는 계속해서 소리 지르고 울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착각이기는 하지만, 이 참나의 망각은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친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 지식의 결여, 마야 혹은 불순이라고 불러 왔다. 지고의 신을 한낱 인간으로, 보편적인 영혼을 개인적인 영혼으로, 자유를 구속으로 바꾼 것은 바로 이 무지이다. “나와 나의 것”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그대는 고통스러운 이원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많은 고통이 생겨나게 된다. 그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의 길은 신을 깨닫는 것, 곧 참나의 비전을 가지는 것이다.




야무나 2009.07.28  16:10

의식의 유희는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에서 곧 출간할 예정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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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3choi 2009.07.29  10:19

Play of Consciousness: A Spiritual Autobiography.
묵타난다의 스승 Bhagawan Nityananda 바가반 니티야난다의 얘기가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아쉬람에서 나온다니 반가운 일이군요.

Cheers!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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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나 2009.07.3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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