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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게 향기를 내는 듯한 말이 있다 - 프라하의 봄. 이곳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에겐 친숙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웬지 이 말 뒤엔 아직 파악되지 않는 비밀스러움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말이다. 프라하가 어디에 붙어있는 도시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이 말은 한번쯤 그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으리라 여겨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1968년 8월에 일어났던 체코인들의 민주화 투쟁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보도되었고 현대사에서 그 사건이 갖는 의미가 컸던 만큼 또한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지만 이 자리에선 또 하나의 `프라하의 봄' 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매년 5월 12일부터 6월 초까지의 약 3주 간 프라하는 웅장하고 부드러운 음악의 선율 속에 휩싸인다. 북쪽의 로마라고 불리우는 고도(古都) 프라하에서 이같은 음악제가 열린다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봄이라는 계절이 갖는 화사함과 생동감,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이곳 프라하에서 그 봄의 분위기는 음악제라는 모습으로 절정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1946년 처음 시작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올해로 벌써 5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내려온 이 음악제가 힘겹고 우울했던, 그리고 때로는 환희와 영광으로 점철되었던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종전과 해방의 기쁨 속에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창단 50주년을 맞이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의 음악제가 준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의 시작이었다. 음악제가 처음 열리던 그 해 동서유럽과 구미음악인들은 화합을 상징하듯 각국에서 모여들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체코의 음악은 그 작품성을 세계인들에게 과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음악제가 시작되는 날은 체코인들이 가장 아끼는 민족음악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서거 62주년이기도 했다. 5월 11일 포스터(Foester)의 [축제의 서곡 - Festive Overture], 오스트르칠(Ostrcil)의 [십자가의 길 - Krizova cesta], 드보르작(Dvorak) [교향곡 제 7번 - 7th Symphony]으로 축제 전야의 콘서트가 꾸며졌고 다음날인 12일엔 스메타나(Smetana)의 교향시 [나의조국 Ma Vlast]이 체코 지휘자인 `라파엘 꾸벨릭' 에 의해 오전 11시 루돌피눔에서 연주되면서 본격적인 축제의 막이 올랐다(이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개막일인 5월 12일(스메타나의 서거일)에 스메타나의 ‘나의조국’이 연주되는 것은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음악제는 6월 4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안에는 3일 간의 `슬로바키아 음악의 밤'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체코 현대 음악가들의 작품 34편이 연주되었다. 당시 초청되었던 음악인들의 이름만 살펴 보아도 우리는 그 음악제가 얼마나 폭넓은 호응과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친선의 장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Leonard Burnstein과 Eugene List (미국), Charles Munch, Ginette Neveu, Calvet Quartet(프랑스), Adrian Boult, Moura Lympany (영국), Yevgeny Mravinsky, Lev Oborin, David Oistrakh (소련) 그리고 체코의 음악인들인 Jaroslav Krombholic, Rafael Kubelik, Jan Panenka, Frantisek Smetana...
이들 중 Maura Lympany 와 Jan Panenka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24일 간의 음악제는 새로운 음악과 젊은 음악인들로 넘쳐났으며 6월 4일 꾸벨릭의 지휘로 연주된 Janacek의 Sinfonietta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제의 구상은 당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론인이며 작가였던 얀 네루다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와 같은 형식의 음악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1880년대에 프라하에 있는 독일극장의 지휘자 겸 감독이었던 안젤로 뉴만 역시 네루다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로 혼란스러웠던 1940년 바츨라프 탈리흐는 프라하 5월 음악제를 준비하기도 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노력들이 결국 전쟁이 끝난 1946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47년 개최된 제2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첫회 때와 같은 탄탄한 준비 위에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적절한 주제가 제시되지 못했고 음악인들의 초대도 인맥을 통해 이루어졌다(첫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2차세계대전 종전이라는 뜻 깊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이외에도 47년 처음 개최된 영국 에딘버러 축제[Edinburgh festival]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 두 도시의 축제들은 1회 행사로 기획되었다가 성공적인 결과에 고무되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음악으로만 구성되는 축제라면 에딘버러축제는 여러 분야의 예술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1948년 프라하의 봄 재단이 정부 주도하에 설립되어 음악제를 주관하게 되었다. 재정지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정부의 이념을 대변하는 관 주도 행사로 타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봄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리워져 갔다. 1950년 5월 9일 끼릴 꼰드라신[Kiril Kondrashin]의 지휘로 체코 필하모니는 도비야스[Dobias]의 칸타타{스탈린의 명령 작품번호 368 Stalinuv rozkaz c.368}을 연주했고 이듬해인 1951년엔 역시 도비야스의 작품인{조국을 건설하고 평화를 지키자 Buduj vlast, posilis mir}가 까렐 안체를[Karel Ancerl]의 지휘로 연주되었다(`나의 조국'은 연주되지 않았다). 이 작품 뒤엔 쇼스타꼬비치[Shostakovich]의 <숲의 노래 Pisen o lesich>가 이어졌는데 모두 소련의 음악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뒤죽박죽' 프로그램들이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같은 해 6월 12일에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연주된 후 `프요도로브 시스터즈 sestry Fjodorovy'가 무대에 올라와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기묘한 현상도 벌어졌다. 음악제의 절정을 피요도로브 시스터즈가 장식한 것이다. 1953년의 축제는 7월 5일에 막을 내렸는데 소련인들에 의해 진행된 마지막 공연은 모짜르트에서 씬카즈[Cincadze]의 작품에 이르는 12곡의 주제가 메들리로 연주되기도 했다.
1949년에서 1987년까지의 축제는 적절히 배치된 정부와 당의 대표들 아래 공포와 복종의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그 중에는 바츨라프 도비야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39년 동안 총 37번의 공연에서 그의 작품 27개가 연주되었는데 실제로 매년 한 작품씩은 연주된 셈이었다.
1950년대에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루마니아 - 1950년)과 중국(51년, 55년) 몽고(52년)의 예술단이 많이 초청되었고 그들은 군대음악과 민속음악을 합창했는데 실제로는 대중적인 선전가요나 민속음악풍의 이념적 색채가 짙은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의 죽음과 소련지도부의 변화 이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좀더 국제적이고 객관적인 면모를 갖춘 음악제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나 회복은 더디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50년대의 열악했던 상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솜씨없게 짜맞추어진 냉전 이념의 구호들은 때로 코믹한 효과를 연출해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1년엔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걸고 축제를 기념했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50주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설립 50주년, 그리고 뽈지체와 베즈두르지쩨의 크리스토프 하란트의 서거 350주년 기념.”
냉전시대의 논리가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사유의 흐름들을 막아왔던 것이 비단 체코의 상황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 우리는 또한 얼마나 철저히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차압당해 왔으며 정상적 사고 능력을 상실한 정부와 속물적인 자본주의 이념 아래서 빛나는 전통을 상실해 왔던가 - 이러한 행사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쉽게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50여 년 간 이어져 내려오는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의 역사에는 따뜻한 미덕의 순간들도 수없이 많았다. 1968년 소련의 침공이후 소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가운데서도 축제에는 대중들의 진정한 사랑을 받았던 소련 최고의 음악인들이 여전히 초청되었는데 그들 역시 소련의 침공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며 참석을 망설였다. Svjatoslav Richter, David Oistrach, Emil Gilels와 같은 음악인들은 언제나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아왔다. 전율과 감동으로 사로잡히는 순간은 다른 많은 축제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여기서도 하나의 예를 통해 예술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쁨을 던져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체코가 낳은 유명한 지휘자 바츨라프 딸리흐[Vaclav Talich] 는 전후 질병으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일체의 다른 공식적인 음악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어렵게 음반녹음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기술했지만 그는 프라하에서의 음악제 개최를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해 온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첫 두 해(46, 47년) 동안의 행사 이후 54년 무대에 다시 설 때까지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병든 몸으로 그가 다시 개막 연주회에서 체코 필하모닉과 함께 `나의조국'을 연주할 때 연주회장 안은 청중들의 열기로 가득했으며 체코 필의 단원들도 혼신을 다해 그들의 음악을 연주했다. 비셰흐라드[Vysehrad] 블라닉[Blanik]의 마지막 부분을 연주할 때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기록영화 제작을 위해 설치한 라이트가 그의 모습을 강하게 비추었는데 그것은 마치 먹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치는 것과도 같은, 그리고 어쩌면 위대한 예술가의 머리 위로 찬란한 왕관이 씌워지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청중들은 또 한편으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질병의 고통으로 그는 더 이상의 지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거장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은 그토록 진심어린 것이었다.
올해에도 이러한 멋진 장면들이 연출될 수 있을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또 음악과 예술뿐만 아닌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승화시키는 사람들은 늘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던져주었다. 물론 음악 자체로도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겠지만.
올해의 축제로 눈을 돌리자. 클래식 음악 이외에도 발레 오페라 어린이합창 재즈 등 풍성한 프로그램이 우리들의 봄을 장식하기 위해 이미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솔리스트, 연주자들이 금년에도 예외없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고 축제의 한 부분인 국제경쟁부분에서는 또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기량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축제에 공식 초청되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애석해 할 필요는 없다. 프라하의 봄도 봄이지만 서울의 봄이 먼저 가꾸어져야 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욱 절실한 과제이고 - 남북화합을 위해 세계적인 우리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이루려 했던 음악제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 기형적이고 실속 없이 커져버린 서양음악에 대한 짝사랑과 선입견부터 바로잡아 전통음악과 더불어 올바른 음악풍토를 가꾸어 내는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결코 싸지 않은 입장료 때문에 연주회장을 찾을 수 없는 다수의 서민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자신들의 축제를 즐긴다. 급속히 개방 되어가고 있는 오늘 체코의 상황에서 반전과 화합이라는 숭고한 정신을 추구했던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다시금 시장경쟁 체제 아래에서의 천박한 선전성 행사로 타락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겐 서양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 지식을 얻을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번쯤은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우아하고 품위 있게' 콘서트 홀을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하릴없이 시장골목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들른 조용한 찻집에서 자신의 이상형인 어떤 이와 마주친 후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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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시간에는 체코의 맥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체코에는 수많은 관광명소들과 유적지들이 있지만 체코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자욱한 담배연기가 가득한 북적대는 선술집이나 노천까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고 진하고 깊은 맛을 지닌 체코 맥주들의 호박색 빛깔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인당 맥주소비량에 있어서 전세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체코는 맥주에 대한 애착 만큼이나 질좋은 맥주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시판되는 맥주만 해도 수십여종에 이르는데 각 도시의 개인 양조장에서 만들어내는 하우스맥주의 종류까지 더한다면 체코는 그야말로 백여종이 넘는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맥주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체코에 와서 맥주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체코 맥주의 대표적인 상표인 삘즈네르와 부드바르의 역사, 체코의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등을 오늘 소개하려고 한다.
삘즈네르 우르쾰 Pilzner Urquell
보통 필젠Pilsen맥주, 혹은 단순히 '필스Pils'라고 알려져 있는 삘즈네르 우르쾰은 명실공히 체코맥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다. 체코 서부지방, 독일과 가까운 도시인 쁠젠Plzen에서 생산되는 이 맥주는 그 도시의 이름에서 맥주의 이름을 땄는데 뒤에 붙어있는 우르쾰Urquell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원천, 수원, 근원'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원조'라는 의미로 쓰였다. 삘즈네르 우르쾰의 체코식 표현인 '쁠젠스끼 쁘라즈드로이 Plzensky Prazdroj'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고 있다.
쁠젠은 13세기 말인 1295년에 세워진 왕립도시다. 당시 왕이었던 바츨라프 2세는 도시 성벽 안에 거주하는 250명의 쁠젠 시민들에게 맥주 양조권을 부여했는데 이것은 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맥주를 제조하여 판매할 수 있게함으로써 높은 경제적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고 더불어 도시 경제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 맥주가 썩 훌륭한 맥주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질 좋은 맥주들은 독일의 바이에른이나 작센에서 수입된 것들이었고 쁠젠에서는 그보다 질이 낮은 값싼 맥주를 제조했다.
쁠젠에서 맥아 숙성소를 갖춘 대규모 양조장이 쁠젠에 처음 생긴 때는 1307년이다. 맥아 엿기름을 큰 통에 넣고 끓여 만들어진 맥주는 밀로만든 '붉은 맥주'와 보리로 만든 '흰 맥주'로 나뉘었다.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마시고 있는, 홉을 넣은 금빛 맥주는 사실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맥주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맥주는 제조 방법에 따라 몇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하층발효' 공법을 이용한 맥주로 그 이전까지는 주로 상온에서 발효시키는 '상층발효' 공법을 이용한 맥주들이었다고 한다.
상층발효 공법이란 간단히 말해 맥주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거품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성질을 가진 효모를 넣어 약 18-25도의 상온에서 발효시키는 것으로 이렇게 만든 맥주는 알콜농도가 높아지고 쓴맛이 강하게 나는 특징이 있다. 영국이나 독일 북부에서 생산하는 맥주들 중 이렇게 상층발효공법으로 만든 맥주들이 많고 이들은 대부분 짙은 색을 띄는 흑맥주들이다.
반면 하층발효공법은 7-15도의 낮은 온도에서 맥주의 원료를 발효시키는 방법이다. 약 7-10일동안 진행되는 발효기간 동안 효모가 아래로 가라앉기 때문에 하층발효라고 하는데 이렇게 주 발효과정을 거친 미 숙성 맥주를 낮은 온도에서 다시 한 번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이 숙성과정을 라거링 Lagering이라고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를 라거맥주라고 부른다.
유럽에서 하층발효 제조법을 이용하여 만든 맥주는 16세기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저온에서 장기간 숙성시킨 이러한 맥주는 미생물의 활동을 저하시켜 깨끗하고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발효법으로 만든 맥주들이 지금의 맥주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의 모든 맥주는 상층발효제품이건 하층발효제품이건 대체로 짙은 갈색의 흑맥주들이었는데 그것은 이 맥주들의 원료로 사용된 알칼리성 물과 맥아때문이었다. 맥아의 맛을 유지하면서 밝은색깔을 내는 방법을 당시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고 당연히 맥주는 짙은색인 줄로만 알고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842년 10월 5일 쁠젠의 맥주양조장에서 이제까지의 이러한 인식을 바꾸어버리는 맥주가 탄생했다. 쁠젠의 물은 다른 지역의 물들과 달리 질좋은 흑맥주를 만들기에는 너무 부드럽고 알칼리성분이 낮았는데 맥아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오랜 실험끝에 만들어진 맥주는 기존의 맥주들과는 달리 은은한 황금빛을 띄는 밝은색 맥주였다. 이 맥주는 삽시간에 체코는 물론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되었고 이러한 밝은색의 맥주를 '쁠젠맥주' 라고 부르게 되었다. 삘즈네르 우르쾰이 아닌 다른 많은 맥주들이 그들의 상표 아래 pilsen 혹은 pils라고 표기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 맥주들이 쁠젠맥주와 같은 제조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황금색 맥주는 그 기원을 쁠젠맥주에 두고 있고 쁠젠맥주는 맥주의 역사에 한 기원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삘즈네르 우르쾰은 이 쁠젠맥주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대표맥주다. 삘즈네르 우르쾰의 초록색 병 주둥이 부위에는 로고가 그려져 있는 금박지가 둘러져 있는데 그 로고 옆에 1842라는 연도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바로 쁠젠의 라이트 맥주가 처음 개발된 그 시기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삘즈네르 우르쾰의 맛은 어떨까? 물론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진하고 깊은 맛에 찬사를 보낸다. 우리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맥주와는 약간 다르게 탄산이 섞여있지 않아 톡 쏘는 맛은 없지만 홉의 진한 향과 구수한 맛은 진정한 원조 맥주의 품격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삘즈네르 우르쾰의 병에는 이 맥주의 알콜퍼센테이지와 돗수를 표기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떤사람들은 맥주의 돗수를 알콜농도로 잘못 이해해서 맥주가 10%, 혹은 12%의 높은 알콜 농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체코의 어떤 맥주도 그렇게 독하지는 않다. 일반적인 삘즈네르 우르쾰의 알콜함유량은 4.4% 이다. 아마도 한국맥주보다 맛이 진하고 홉의 쓴맛이 더 강하기 때문에 더욱 독하다고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삘즈네르 우르쾰은 체코 전역에서 맛 볼 수 있다. 다만 체코의 음식점들은 대체로 한 맥주회사와 계약을 맺고 있어 생맥주에 한해서는 한종류의 맥주만을 판매하고 있다. 음식점이나 호프집 밖에는 자신들이 취급하는 맥주의 로고가 크게 붙어있고 그것을 통해 어떤 맥주를 그 집에서 맛볼 수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버드와이저? 부드바르!!
체코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훑어 본 사람이라면 체코가 버드와이저 맥주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미국적인 맥주가 버드와이저인데 이 맥주는 체코의 남부도시인 체스께 부뎨요비쩨에서 생산되었던 체코 버드와이저의 이름만 따 간 것이고 체코의 원조 버드와이저맥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맥주이다. 최근까지도 그 상표권 문제로 국제적인 소송을 벌인 버드와이저. 그 이름을 가지고 왜 두 나라가 그렇게 오랫동안 분쟁을 벌였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버드와이저Budweiser라는 이름은 'Budweis의' 라는 형용사형 이름이다. 그리고 Budweis는 체코의 남부도시 뷰뎨요비쩨Budejovice의 독일식 이름이다. 그러니까 버드와이저는 '(체코 도시) 부뎨요비쩨의 (맥주)'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체스끼 부뎨요비쩨는 체코의 대표적인 왕립도시 중 하나로 1265년 체코 왕 프르제미슬 오따까르2세Premysl Otakar II 때 건설되었다. 쁠젠과 마찬가지로 왕실로부터 양조권을 부여받은 이 도시 시민들은 13세기부터 맥주를 양조했고 그때부터 부뎨요비쩨는 맥주의 고장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뎨요비쩨에서 맥주를 생산했던 작은 양조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큰 회사들로 변모해갔고 이 양조장들이 서로 합병이 되고 소유 이전이 되면서 하나의 회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1795년에 세워진 '부드바이스 양조장'이라는 회사다. 1894년 이 회사가 공식 채택한 회사 이름이 Die Budweiser Bräuberechtigten 인데 보다시피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되어 있다. 이 회사가 체코슬로바키아가 하나의 민족국가로 독립하기 이전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시대에 만들어진 회사로 체코 내에 살던 독일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즉, 체코내에 있는 회사이지만 체코인들의 회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1895년 체코인들만의 새로운 맥주회사가 설립된다. 그 회사가 지금 체코 부드바르사의 모태인 '부드바르 - 체스께 부뎨요비쩨 체코 맥주 양조 주식회사 Budvar – Český akciový pivovar České Budějovice'였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 한 것 처럼 회사가 만들어지던 19세기에 부뎨요비쩨에는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이 섞여 살았다. 도시의 공식 명칭도 지금의 체스끼 부뎨요비쩨 České Budějovice 가 아닌 독일식 부드바이스 Budweis였다.
체코인들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도시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독일인들이었다. 당시의 선거법에 따르면 투표권의 크기는 경제력과 세금에 따라 달라졌는데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은 더 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시 대표나 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독일인들이었고 체코인들은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대표를 공직에 보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체코인들은 경제력을 키워야 정치적인 권력도 획득할 수 있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체코인들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회사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체코 맥주 양조 주식회사였다.
그럼 미국에 있는 버드와이저사는 어떤 회사일까? 이 회사의 정식 명칭은 안호이저-부쉬사Anheuser-Busch Company 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Eberhard Anheuser 와 Adolphus Busch 라는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는데 이 두사람 다 독일계 이민자들로 둘은 장인과 사위관계였다. 이 회사는 1852년에 역시 독일계 미국인이었던 게오르그 슈나이더 George Schneider라는 사람이 세인트루이스에 세운 '바이에른 양조장 Bavarian Brewery' 이라는 회사를 그 모태로 하고 있는데 1860년에 안호이저가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이 맥주회사의 사장이 된다. 이 회사가 처음 상표를 등록하고 시판한 맥주는 A&Eagle이라는 맥주였는데 이때까지는 이 회사와 버드와이저는 아무 연관을 갖지 않는다.
문제는 사위 부쉬의 친구였던 사업가 카알 콘라드 Carl Conrad라는 사람이 1878년 버드와이저라는 문제의 상표를 미국에서 정식 등록하고 사용권을 얻게 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버드와이저라는 이름은 지금처럼 유명한 상표가 아니었는데 콘라드가 그 이름의 사용권을 안호이저 사에 넘기고 1883년 안호이저사가 버드와이저라는 이름으로 맥주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이 맥주는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된다.
부드바이저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체코의 '부드바이스 양조장' 이다. 1802년에 처음으로 시의회로부터 부드바이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는 허가를 얻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Budweiser라는 로고가 들어간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체코인들이 이 맥주를 많이 마셨을까? 과거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1895년 체코인들의 회사인 체코 맥주양조 주식회사가 부뎨요비쩨에 설립되고 그곳에서 맥주를 생산한 이후부터 체코인들이 선호했던 맥주는 바로 체코 맥주양조주식회사의 부드바르였다. Budvar란 Budejovicky Pivovar의 준말로 이름에서 부터 체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 품질도 우수해서 경쟁사였던 '시민 양조장'이나 그밖의 다른 독일계 맥주회사들의 상품들을 제치고 여러 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부뎨요비쩨의 맥주로서는 체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굳히게 된다.
미국회사인 안호이저 부쉬사와 체코의 시민양조장 그리고 맥주 양조주식회사간의 버드와이저라는 상표권에 대한 복잡한 분쟁과 합의가 반복되고 있는데 워낙 뿌리깊은 논란이 되었던 문제이고 법적으로 미묘한 해석차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것이 진짜 원조 버드와이저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현재로서는 북미대륙에서는 안호이저 부쉬사의 버드와이저가 그리고 유럽에서는 맥주 양조주식회사의 부드바르가 부드바이저라는 상표를 쓸 수 있도록 판결이 나 있는 상태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안호이저 사가 체코 맥주양조 주식회사의 부드바르를 수입,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아마도 이것은 두 회사간의 법정소송에서 안호이저사가 패소하면서 강제적으로 체코의 완제품을 수입하게 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체코 맥주양조 주식회사의 부드바르가 미국에서는 부드바르가 아닌 체크바르Chechvar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 둘 만 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사실 체코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이런 복잡한 것 까지 생각하면서 맥주를 마실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미국 맥주 버드와이저외에도 그 이름의 진짜 고향인 체코에 버드와이저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프라하 시내에서 삘즈네르나 부드바르를 맛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반 수퍼마켓에서 병이나 캔맥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뿐더러 웬만한 음식점에서는 생맥주로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두 제품 외에도 프라하 스미호프의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스따로쁘라멘Staroprmen이나 끄루쇼비쩨Krusovice같은 맥주들이 있고 삘즈네르 우르쾰과 같은 회사 제품들인 감브리누스Gambrinus나 꼬젤Kozel같은 맥주들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맥주들이다.
정상적인 음식점에서의 맥주 가격은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0.5리터를 기준으로 40-50꼬룬 정도다. 물론 구도시광장같은 관광지에 있는 음식점들에서는 그 가격의 두배나 그 이상을 받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프라하에서 특이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들러봐야 할 맥주집이 몇 군데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규모 맥주 양조장 우 플레꾸 U Fleku 이다. 1499년에 설립되어 흑맥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 양조장은 지금껏 변함없이 옛 방식 그대로 맥주를 제조하고 있으며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전통적인 체코 맥주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흑맥주 0.4리터 한잔에 59꼬룬이고 선물용으로 사가지고 갈 수 있도록 병맥주도 판매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곳은 바츨라프 광장과 가까운 신도시 맥주양조장 Novomestsky Pivovar이다. 이 양조장 역시 1434년 부터 이어져 오는 맥주 양조장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곳이며 우 플레꾸와 마찬가지로 체코 전통 음식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대규모의 업소이다. 0.5리터 생맥주가 38꼬룬으로 저렴한 편이며 여러 종류의 체코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체코 소설가 야로슬라브 하셰ㄱ의 '착한 병사 슈베이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할 맥주집이 있는데 신도시에 있는 우 깔리하 U Kalicha 이다. 1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어리숙한 체코 병사 슈베이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있는 유명한 소설로 그 이야기 속 무대가 바로 맥주집 우 깔리하다. 초록색 군복을 입고 바보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통통한 슈베이크가 이 집의 마스코트이며 슈베이크 복장을 한 악사가 흥겨운 음악을 선보이기도 하는 넉넉한 분위기의 음식점이다.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은 이들 외에도 물론 많이 있다. 맥주는 와인처럼 고급스럽거나 비싸지 않고 보드카처럼 독하지도, 칵테일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어떻게 보면 체코인들과 참 많이 닮은 음료라는 생각이 든다. 옛날부터 체코 도시들의 시청 옆에는 항상 맥주집이 붙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시청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던 사람들이 회의를 끝낸 후 맥주를 마시며 다시 화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구수하고 시원한 맥주의 맛을 즐기며 친구가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맥주의 본고장 체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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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프라하성을 둘러보는 마지막 시간이다. 화약탑으로 불리는 미훌까와 성 이르지 바실리카, 현재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성 이르지 수녀원, 너무도 유명한 황금 골목 등이 오늘 둘러보게 될 장소들이다.
화약탑 (미훌까)
구 왕궁을 둘러본 후 성 비뜨 대성당의 뒷부분을 볼 수 있는 성 이르지 광장으로 나와 성 비뜨대 성당과 북쪽 성벽 사이의 그늘진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미훌까를 만나게 된다.
미훌까는 15세기 말, 건축가 베네딕트 레이트가 프라하성의 북쪽 성벽을 새로이 건축할 당시 함께 제작된 방어용 탑이다. 프라하 성 중에서도 조금 외진 곳에 있고 또 큰 코스 입장권을 사야 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프라하 군사역사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중세 무기와 모형 등의 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는 곳이다.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긴 대포와 투척기, 투구, 총기류 등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그 설명들은 무기와 전쟁 등에 관한 상식을 넓혀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훌까라는 이름은 칠성장어를 뜻하는 체코어 'mihule'에서 왔는데 이 탑의 모양이 칠성장어의 몸통처럼 둥글기 때문이었다. 중세시대에는 이런 둥근 모양의 탑을 종종 미훌까라고 불르기도 하는데 이 탑은 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우 견고하게 제작되었으나 실제로 전쟁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될 기회는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 탑은 종을 만드는 장인들의 작업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왕실정원에 있는 ‘노래하는 분수대’와 성비뜨 대성당의 ‘지그문트 종’이 바로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또한 이 탑은 루돌프2세 때 연금술사들의 작업실로도 사용되었다. 화약탑이라는 이름은 30년 전쟁 때 이곳에 화약을 저장해 놓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
미훌까를 보고 다시 이르지 광장 쪽으로 나와 성 이르지 바실리카를 둘러보도록 하자.
먼저 이르지(Jiri)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텐데 이것은 영어이름 조지(George)의 체코식 이름이다. 그러니까 영어로는 ‘성 조지 바실리카’ 인 것이다.
광장에서 보면 겉모습이 깨끗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건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프라하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속한다.
성당의 정면에 보면 가장 위쪽에 용과 싸우는 성 이르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쪽 양 옆에 어떤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왼편에 있는 여자는 성 이르지 수녀원의 건립자이자 초대 원장이었던 믈라다(Mlada)이고 오른편에 있는 남자는 이 성당을 세운 대공 브라띠슬라브 1세이다. 그가 이 성당을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이 921년이니 성당의 기원이 무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세워진 부분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고 지금의 건물은 1142년 개축된 것으로 이 역시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친 결과물이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성 바쯜라프의 할머니이자 체코의 수호성인 중 한 사람인 성 루드밀라의 묘가 있는 곳이다. 실내로 들어가 보면 그다지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 없이 둘러보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내부에 있는 유물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 느낌은 물론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르지 바실리카의 내부
성당의 동쪽부분에는 체코 왕족들의 묘가 있는데 회중석과 성가대석 사이에 있는 세 개의 묘 중 오른편에 있는 오두막 모양의 묘가 이 성당을 세운 브라띠슬라브1세의 것이다. 그 뒤편으로 멋스럽게 생긴 계단들이 있고 그 위에 성가대석이 있다. 성가대석 위의 색 바랜 프레스코는 ‘천상의 예루살렘’이라는 작품으로 부분적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아 그 원형을 볼 수는 없으나 다 떨어져 나간 얼룩덜룩한 무늬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이 성당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성가대석 아래의 오른쪽, 그러니까 남쪽 부분에 성가대석과 맞닿아 있는 작은 채플이 있는데 이곳이 성 루드밀라의 채플이며 그 안에 성 루드밀라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대공 보르지보이의 아내였던 루드밀라는 922년 며느리인 드라호미라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후 3년 뒤인 925년 그녀의 시신이 현재 위치에 안치되었다.
성당의 남쪽 벽을 따라 출구 쪽으로 다시 나가는 길엔 20세기 초에 이루어 진 프라하 성 유물 발굴작업에 대한 기록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 이르지 광장과 그 주변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작업을 통해 옛 왕족들의 유해와 유물들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 중 일부가 상설전시 ‘프라하 성 이야기’와 프라하성의 건물 곳곳에 전시되고 있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는 현재 미사를 드리는 성당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 대신 매일 저녁 콘서트가 열리는데 큰 규모의 콘서트는 아니지만 저녁 무렵 고즈넉한 시간에 조용한 프라하성에서 클래식 음악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여행자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성 이르지 바실리카와 붙어있는 성 이르 지 수녀원은 현재 체코 민족갤러리로 쓰이고 있다. 이 수녀원은 체코에서 최초로 세워진 수녀원으로서 대공 볼레슬라브2세의 누이였던 믈라다가 외교적인 목적으로 로마를 방문한 후 교황청으로부터 프라하에 주교청과 수녀원을 세울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가지고 와서 973년에 건립한 것이다.
수녀원 안에는 건물들로 둘러싸인 사각의 궁정이 있는데 ‘낙원의 궁정’ 이라는 이름의 이 궁정 아래서는 지금도 중세 유적들을 발굴하고 있다. 민족갤러리로 쓰이고 있는 수녀원의 내부는 여느 미술관처럼 매우 조용하다. 주로 바로크시대의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곳의 작품들은 예술을 사랑했던 황제 루돌프2세 때 수집된 것들이며 17, 18세기 체코 미술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진귀한 미술작품들이다.
성 이르지는 누구인가?
성 이르지는 3세기 후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파도키아 사람이었는데 로마군대의 장교였고 그의 어머니는 현재의 이스라엘인 리다 출신이었다고 한다. 성 이르지가 아직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군에 입대하여 성실히 군복무를 했고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에 군 사령관 'Tribune'이 되었다. 그리고 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의 근위병으로서 니코메디아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성 이르지의 전기를 보면 당시 황제였던 디오클레시아누스와 그의 후계자였던 황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도들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을 계획했는데 이때 기독교인이었던 성 이르지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탄압에 동참할 것을 명령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서운 고문을 견디다 끝내 참수당했는데 그것이 서기 303년 4월23일의 일이다. 그가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고문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고 황후 알렉산드리아와 이교의 사제였던 아다나시우스가 개종을 했고 그들도 성 이르지의 순교에 동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과 싸웠다는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 때 동방원정을 다녀온 십자군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전설 속 이야기는 이렇다. 성 이르지의 어머니가 살았던 리다라는 마을에는 그곳 주민들이 이용했던 샘물이 있었는데 어떤 용 한 마리가 그곳에 자신의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 샘물을 사용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용을 그 둥지에서 쫓아내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사람을 제물로 삼아 용에게 바쳤고 매번 제비를 뽑아 제물이 될 사람을 골랐다. 한번은 그 마을 영주의 딸이 제비에 뽑혔는데 영주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용의 제물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녀가 용의 제물이 되려는 순간 그곳을 지나던 성 이르지가 용을 발견하고 용과 싸워 이긴 후에 공주를 구했는데 이를 본 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이교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성 이르지의 전설은 고대 그리스, 로마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추측되는데 어쨌든 유럽에서는 매우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교회 내에서 포교를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설화이다. 이야기 속에서의 용은 악한 세상과 우상숭배를 상징하고 성 이르지는 물론 기독교를 대표한다.
황금골목
황금골목은 프라하성의 북쪽 성벽의 안쪽에 형성된 작은 거리다. 동화 속에 나올듯한 색색의 작은 집들이 성벽의 통로 사이사이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 더욱이 프란츠 카프카가 올라와 글을 쓰곤 했던 22번지 집이 남아있어 신비한 느낌을 더해주는 곳이 황금골목이다.
황금골목의 입구
황금골목을 형성하고 있는 현재의 북쪽 방어벽은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브왕 때인 1484년에 건립되기 시작했다. 바쯜라프 4세 이후 후스전쟁이 일어나면서 왕들은 그때까지의 자신들의 거주지였던 프라하 성을 버리고 구도시의 왕궁에서 거처했는데 야겔론가의 블라디슬라브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대대적인 성 개축공사가 필요했다.
성의 바깥쪽, 브루스니쩨 강이 흐르는 사슴해자의 위쪽 언덕일 뿐이었던 이곳에 성의 방어체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성벽건설 사업으로 건축가 베네딕트 레이트에 의해 세 개의 탑 (화약탑: 미훌까, 백탑과 달리보르까)과 함께 현재의 성벽이 건립되었다. 당시 최고수준의 성벽건축기술로 만들어진 이 방어벽은 두께가 3미터가 넘었다. 두 층으로 되어있는 성벽 안쪽 통로는 지붕으로 덮여있었고 통로의 아래층은 2.8미터에서 3.4미터 두께의 기둥을 가진 아치가 이어져 있어 그 사이로 6-6.6미터의 넓이와 1.2미터 깊이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1541년 대 화재가 일어나기 전부터도 분명 이곳은 사람들의 거처로 이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1560년대에 이르러서야 발견되는데 그때 이곳이 '금세공업자들의 작은 거리 (Zlatnicka ulicka)'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살던 금세공업자들은 영세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큰 도시였던 구도시, 소도시 그리고 신도시의 길드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 작은 지역에 모여 살며 그들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루돌프 2세의 치세인 1591-94년에 성벽은 다시 개축된다. 그때 한층 더 쌓이게 된 성벽의 높이가 지금의 높이인데 현재 우리가 둘러볼 수 있는 통로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금세공업자들이 살던 남루한 집들은 이때 모두 철거되었다. 성벽이 개축된 이후 백탑과 달리보르까 사이에는 21개의 아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 아치들은 4미터 넓이 2.2미터 깊이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이 공간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거처로 쓰이게 된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번에는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었다.
1597년, 프라하성의 성문을 지키던 수비병들은 루돌프 2세에게 이곳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 수 있도록 요청하였고 1597년 9월 16일 루돌프2세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 법령에서 루돌프2세는 성을 지키는 병사로서 복무하는 기간 동안 병사들은 각각 하나의 아치를 소유할 수 있고 그들 소유의 집을 아치 안에 세울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그리하여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병사들은 집을 짓는 경비까지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재산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아담한 집들이 이때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집들도 남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은 입구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면 화덕이 있고 작은 창문이 있는 방으로 바로 이어지며 가구라고 해야 조악한 탁자와 의자, 침대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우물도 없었기 때문에 물을 쓰기 위해서는 제3궁정의 성 이르지 수녀원 앞의 우물까지 가야 했다.
이토록 열악한 환경을 가진 이 집들은 병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우리가 재미 삼아 둘러보고 또 예쁘고 낭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 집들이 당시의 병사들에겐 힘겨운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1784년 황제 요세프 2세에 의해 '붉은 성 수비대'로 불리던 이 군 조직이 해체되면서 병사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병사들이 떠난 뒤에도 이곳은 계속 사람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오히려 기존의 집들 반대편에도 집들이 생겨나면서 황금골목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빈민가가 되었다. 1864년에야 성벽 집들의 반대편에 있던 판자집들이 철거되었고 성벽의 원래 집들은 약간의 보수를 거쳐 점차 살만한 장소로 바뀌어 갔다.
황금골목의 집들은 현재 기념품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계를 파는 가게, 악기점, 유리제품을 파는 가게 등 저마다 특정 종목의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고 가장 유명한 집인 22번지 카프카의 집은 카프카의 작품들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쓰이고 있다.
황금골목을 효과적으로 둘러보기 위해서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가 옛 성벽의 통로를 먼저 살펴보는 게 좋다. 중세 성벽의 방어 시스템들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는 이 통로에는 중세 기사들의 갑옷이 복도를 따라 전시되어 있고 가장 안쪽 막다른 부분에는 석궁을 쏴볼 수 있는 사격장이 있어 중세군인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층 통로는 백탑과 연결되어 있어 탑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데 백탑 안에는 상점들 외에도 고문실과 무기 전시실 등이 있다. 2층의 통로와 백탑까지 둘러본 후 다시 내려와 황금골목의 작은 집들을 구경하면서 이동하다 보면 12번지 아래의 작은 통로 쪽으로 가게 된다. 황금골목은 이곳에서 끝나고 통로를 나오면 왼편으로 달리보르까라는 이름의 지하 감옥을 보게 된다. 중세시대에 귀족출신의 죄수들을 가두었던 곳 달리보르까를 둘러보자.
달리보르까
달리보르까라는 탑의 이름은 이곳에 수감되었었던 죄수 달리보르의 이름에서 나왔다. 1496년에 세워진 이 탑은 원래 감옥이라기 보다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인데 처음 제작될 당시의 달리보르까는 지금보다 약 두 층 정도 더 높았으며 서쪽의 백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달리보르까는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으나 몇 년 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달리보르는 체코의 한 귀족이었다. 그는 이웃 마을에서 악랄한 영주의 폭정에 못이긴 농노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그들을 돕고 자신의 성으로 도피시켰다는 죄목으로 이곳에 갇히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를 했고 그 음악소리를 들은 농민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감옥안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물론 꾸며진 이야기다.
그가 감옥에 갇혔던 15세기에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없었을 뿐 더러 죄수가 감옥 속에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죄수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이런 이야기가 생겨난 이유는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고문을 받았는데 그 고문기구 중 스크르지뻬쯔 (몸을 뒤트는 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고문하던 간수들이 ‘달리보르가 이제 스크르지뻬쯔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그가 그 고문을 받는데 조금 익숙해졌다는 의미였다. 체코어로 바이올린은 호우슬레'housle'라고 하는데 또 다른 말로는 스크르지쁘끼라고도 한다. 아마도 스크르지뻬쯔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스크르지쁘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말로 와전되어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달리보르까 안에는 보기에도 살벌한 고문기구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보기에 별로 유쾌하진 않지만 이것들 보다 달리보르까의 성격을 더 잘 보여주는 전시물은 없을 것이다.
달리보르까 앞 작은 마당에서 서쪽 돌문을 통과해서 나오면 탁 트인 궁정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총리 궁정이다. 궁정 한가운데는 벌거벗은 소년의 동상이 있고 그 주변으로 카페와 기념품가게, 화장실과 장난감박물관 그리고 흑탑이 배치되어 있다.
또 프라하 성을 둘러보느라 지친 다리를 쉬어가라는 의미인지 돌 문 옆에는 낮은 계단이 있는 무대 같은 곳이 있는데 실제로 여름철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공연하는 야외 무대로 쓰이는 곳이다.
궁정 한쪽에 있는 흑탑은 육중한 사각뿔 모양을 하고 있는데 로마네스크 시대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13세기 까지는 이 흑탑 아래의 문이 곧 성문으로 이용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성벽이 건축됨에 따라 성의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흑탑은 한때 채무자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었는데 이 감옥의 수감자들은 매우 좋은 조건 속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 갇혔던 죄수들은 ‘신분이 높은’ 죄수들로서 자신들의 이불이나 그 밖의 생필품들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었고 면회가 허용되었으며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흑탑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지만 그 1층이 카페로 사용되고 있으니 분위기를 대충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총리 궁정을 나와 왼쪽 아래로 내려가면 프라하 성의 동쪽 문이 나온다. 이 문을 빠져 나가면 프라하 성을 벗어나게 되는데 문 앞 옛 성벽의 잔해가 있는 곳에 전망대가 있어 시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대략 프라하 성을 둘러보았다. 설명을 못 한 부분이 많지만 실제로 성을 둘러보면서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부분이 개방되어 있는 곳이지만 좀 더 많은 장소들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다음 시간에는 프라하의 유적이 아닌 다른 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프라하 성 이야기를 들어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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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품을 쉬었다면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 프라하 성을 둘러보자. 예고한 대로 이제는 성 비뜨 대성당을 볼 차례다.
까렐4세가 체코의 왕으로 등극하기 2년전인 1344년 11월 21일에 공사를 시작한 비뜨 대성당은 프라하가 대주교청의 소재지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 그에 걸맞는 대성당을 짓기 위한 목적으로 건축된 것이다. 고딕시대의 작품이기 때문에 하늘을 찌르는 수많은 첨탑들이 장식되어 있고 뾰족아치모양의 문과 창문들을 볼 수 있다.
성당의 가장 높은 지점은 지상으로 부터 96미터. 프라하성의 정문이나 북문쪽에서 들어가면 성당의 정문이 있는 서쪽부분을 보게되는데 두개의 큰 첨탑이 세워져 있는 이 부분은 비뜨성당에서는 나중에 만들어진 부분인 19세기와 20세기의 작품이다.
성당이 완공된 해가 1929년인데 이 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대 성당이 세워지기 전, 그자리에는 바쯜라프공(후에 성인이 되어 성 바쯜라프라고 불리는)이 세운 성 비뜨 로툰다가 세워져 있었다. 바쯜라프공이 동생 볼레슬라브에 의해 살해된 후 그의 시신은 이 성 비뜨로툰다의 측랑부분에 안치되었는데 그 해가 929년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즉 비뜨 대성당은 성 바쯜라프의 죽음 이후 1000년이 되는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완공된 것이다. 하지만 후에 이루어진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바쯜라프의 죽음은 929년이 아닌 935년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성 비뜨성당 역시 제단은 정 동쪽에 위치한다. 성지 예루살렘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성당의 제단은 항상 동쪽이다.
건축가 '아라스의 마띠아쉬'에 의해 이 동쪽 제단이 있는 곳 부터 시작되었던 성당공사는 그의 사후(1352년) 약간의 공백기를 지나 새로운 건축가의 손에 넘겨지게 되는데 그가 바로 까렐4세 시대의 궁정 건축가로 이름을 날렸던 뻬뜨르 빠를레르쥬이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
이 약관의 젊은이도 상당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겠지만 이 젊은 건축가를 거대한 성당 건축의 책임자로 발탁한 까렐4세의 안목도 대단하다. 뻬뜨르 빠를레르쥬의 손에 의해 성당은 점차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제단이 있는 동쪽에서 부터 남쪽 큰 탑까지, 그러니까 현재 볼 수 있는 성당의 뒷쪽 반이 이 때 완성되었다.
성당의 내부는 현재 일반인들에게 모두 개방되어 있는데 바로크시대에 제작된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성당의 중간 부분 뒷쪽 부터가 바로 아라스의 마띠아쉬와 뻬뜨르 빠를레르쥬가 만든 옛날 부분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당의 공사가 조금 진척되긴 했지만 본격적인 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진 것은 19세기의 일이고 위에서 말한 것 처럼 1929년에 비로소 현재의 성당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성당의 내부를 둘러보기 전, 먼저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바깥 부분을 먼저 살펴보는 게 좋겠다.
2궁정을 지나 성당 앞으로 나오면 먼저 성당의 거대함과 높이에 압도 당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입구의 윗쪽에 있는 커다란 동그라미 (직경 10.4미터)의 로제타창.
고딕성당의 특징인 로제타창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이지만 바깥쪽에서는 그 화려한 색채가 보이진 않는다. 창의 양 옆에는 두개의 성인상이 있는데 보기에 왼쪽에 있는 것이 성 비뜨, 오른편에 있는것이 성 바쯜라프다.
로제타 창의 아랫쪽 테두리 5시 방향과 7시 방향에는 각각 두사람씩 네사람의 흉상이 살짝 들어가 있는것을 볼 수 있는데 양복을 입고있는 이 네 사람은 19세기와 20세기에 성당을 건축했던 건축가들이며 그 아래에 건물의 바깥쪽으로 입을 벌린채 불쑥불쑥 튀어나온 괴물 조각들은 빗물을 건물 밖으로 배출하기 위한 배수구들이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풍성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육중한 청동문들은 성당의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부조로 장식되어 있고 큰 그림들 옆에는 왕이나 고위 성직자, 건축가들의 얼굴들이 조각되어 있다.
내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성당의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그 웅장함에 다시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19세기와20세기의 건축가들이 14세기에 만들어진 성당의 옛 부분과 같은 고딕스타일로 성당을 증축했기 때문에 건물이 그토록 오랜 시간적 격차를 두고 세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않다.
높이 솟아있는 본당의 내부 높이는 33미터, 그물모양으로 얽힌 지붕의 뼈대가 자연스럽게 기둥으로 이어져 흘러내려오는 것은 단순히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딕시대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건축역학의 기술이다.
천정의 하중을 기둥으로 분산시키는 이러한 기술과 건물 외부에 설치한 벽날개 시스템을 이용하여 고딕시대에는 이처럼 웅장하고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
성당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많은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다.
오색찬란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거쳐 들어오는 신비한 빛에 누구나 한동안을 넋을 잃게 된다. 성당을 들어가면 벽면을 따라 이어져 있는 채플을 볼 수 있는데 이 채플들 창문마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유명하고 특이한 작품은 '신 대주교 채플'을 장식하고 있는 알폰스 무하의 작품. 이 작품은 성 찌릴과 성 메또뎨이라는 두 형제 선교사의 업적과 슬라브 민족을 축복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제일 꼭대기에 묘사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 그 아래에 있는 세명의 여성은 각각슬라브 민족을 상징한다.
창문의 오른쪽에는 성 찌릴(콘스탄틴)이 그의 동생 메또뎨이와 함께 대 모라비아제국에서 선교하는 장면과 로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왼편에는 메또뎨이가 슬라브인들의 언어로 설교하는 장면,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옥에 갇히는 장면, 그리고 모라비아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 그림은 두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는 보헤미아의 제후 보르지보이 그리고 그의 아내였던 성인 루드밀라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무릎에서 기도하고 있는 소년 바쯜라프이다. ??
성당의 중앙으로 와서 뒤를 돌아보면 로제타창을 볼 수 있다.
1920년 안또닌 뽀들라하Antonin Podlaha에 의해 제작된 이 작품은 27000개의 유리조각으로 천지창조의 하루하루를 묘사하고 있다. 창문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모습으로 천지창조의 하루하루를 묘사했는지 자세히 관찰할 수 없는게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그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이 창을 통해 은은히 비쳐 들어오는 모습만으로도 작품이 주는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
성당 내부 바닥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제단이 있는 동쪽과 입구와 로제타창이 있는 서쪽을 긴 축으로 하고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하모니움의 북쪽, 그리고 왕들의 출입구였던 황금문의 서쪽을 짧은 축으로 하여 십자가 모양을 이루는 성당에는 또한 각 꼭지점 마다 가장 중요한 성인들의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동쪽끝에는 성 비뜨 성인, 북쪽에는 성 지그문트, 남쪽에 성 바쯜라프, 그리고 원래 서쪽에는 성 보이뗴흐 (성 아달베르트)의 유해가 있는데 단, 성 보이뗴흐의 유해만은 성당의 증축과정에서 동남쪽 채플로 옮겨져 있고 원래 유해가 있던 자리는 다른 부분보다 높게 상승시킨 바닥으로 옛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성당 내부의 큰 기둥들에 이들 성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들은 위에 말한 네사람의 성인들 외에 성 루드밀라, 성 노르베르뜨, 성 프로코피우스, 성 얀 네뽀무쯔끼의 네사람으로 여덟명 모두가 체코 수호성인들이다. ??
하모니움 앞을 지나면 성당의 북쪽 날개부분에 위치한 성 지그문트의 채플 앞에 서게된다. 채플을 등지고 섰을 때 볼 수 있는 대리석 무덤은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1세와 그의 아내였던 야겔론가의 안나, 아들 막시밀리안 2세의 것이다. 그 아래쪽 지하에도 왕들의 무덤이 있는데 동서남북으로 배치된 성인들의 묘를 각 끝으로 하는 십자가를 그었을때 그 교차점이 되는 지점에 왕들의 묘가 있다는 사실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묘자리에 꽤나 신경들을 썼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그문트 채플 옆에는 구 성물실이 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 안나의 채플이다.
채플의 맞은편에 1630년에 제작된 목판 부조가 있는데 이 작품은 1620년에 있었던 빌라호라전투 이후 승리한 캐톨릭 군대가 프라하로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의 프라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이 목판부조를 보면 지금의 까렐다리와 비뜨성당, 구시청사탑과 틴성당이 옛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목판화 옆에 세워져 있는 슈바젠베르그 추기경 동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 비뜨의 제단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성당의 이름이기도 한 성 비뜨는 4세기경에 살았던 이탈리아 사람이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후 성인이 된 분이다.
춤추는 무희들의 수호성인이자 까렐다리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성 비뜨의 작은 조각상이 제단위에 세워져 있는데 성비트의 축일에 해가 질때 바로 이 조각상의 그림자를 쭉 이어보면 현재의 까렐다리 동쪽 교탑과 만난다. 유디틴다리가 유실된 후 까렐다리를 새로 건축할때 동쪽편 교탑의 자리를 약간 남쪽으로 내려 현재의 위치에 세운 이유는 바로 이 그림자가 마치 성 비트 성인이 손을 내민 것 처럼 다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뜨 성인의 작은 석상 맞은편에 있는 채플은 성모마리아 채플이다.
갈보리 언덕위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는 이 채플에는 체코의 왕이었던 브르제띠슬라브1세와 스삐띠흐녜브 2세의 무덤이 있다. 성모마리아 채플을 지나 성당의 남쪽 부분으로 이동하다보면 거대한 은 무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성 얀 네뽀무쯔끼의 무덤이다.
까렐다리 위에도 세워져 있는 이분의 동상은 까를다리를 지나는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만지고 지나가 녹슬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동판화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커다란 무덤이 모두 은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성 얀 네뽀무쯔끼의 무덤은 1736년에 완성된 것으로 1729년 3월 9일 그가 캐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된지 7년만에 제작된 것이다. 신기한 사실은 그가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는 공식 행사가 비뜨 대성당에서 열렸을 때 그의 무덤이 개봉되었는데 (물론 지금 현재의 은무덤은 아니다) 그 안에 있던 그의 해골 안쪽에 썩지 않은 신체기관의 한 덩어리가 붉은 색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다 순교한 얀 네뽀무쯔끼의 혀가 기적적으로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뇌의 일부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이 후에도 이러한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고있다.
그의 무덤 맞은편에 있는 방이 바로 이 성 얀 네뽀무쯔끼에게 봉헌된 채플이며 이 채플 안에는 프라하의 대주교였던 얀 오츠꼬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얀 오츠꼬는 까렐4세와 매우 가까왔던 체코출신의 인물로 처음으로 추기경까지 올랐던 인물인데 애석하게도 두달만에 추기경직에서 해직된 인물이다. 오츠꼬라는 이름은 체코어로 '눈'이라는 뜻인데 그가 한쪽 눈을 실명한 이후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성 얀 네뽀무쯔끼의 채플 옆에는 막달라 마리아 채플(혹은 발트슈테인 채플)이 있는데 이 방에는 성 비뜨 대성당의 건축을 맡았던 아라스의 마띠아쉬와 뻬뜨르 빠를레르쥬가 잠들어있다.
막달라 마리아 채플 옆에 있는 방은 왕실 오라토리움이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있는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채플들에 비해 눈에 띄는 곳인데 폴란드 출신의 체코 왕이었던 블라디슬라브 왕 때 만들어진 이 방에는 구 왕궁으로 직접 통하는 문이 있다.본당쪽으로 나와있는 발코니 아랫쪽에 블라디슬라브 왕의 상징인 W 표시가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라토리움의 왼편과 본당쪽 맞은편에 등잔불을 받들고 있는 두 사람은 당시 은광 산업으로 번영을 누리던 도시 꾸뜨나 호라의 광부들이다.
오라토리움 앞을 지나 다시 성당의 중간 부분으로 나오면 성 비뜨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성 바쯜라프 채플을 만나게 된다.
다른 채플들에 비해 크고 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채플은 성 바쯜라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 외에도 체코 왕가의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로 그 중요성을 더 높이고 있다.
성 바쯜라프의 유해는 현재의 성 비뜨 성당이 세워지기 훨씬 전 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935년 그가 살해된 후 그의 유해는 프라하 성의 성 비뜨 로툰다에 안치되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 그의 묘가 서 있는 자리다. 성 비뜨 로툰다는 사라졌고 그 후에 세워졌던 성 비뜨 바실리카도 대성당의 건축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의 묘는 다른곳으로 이장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채플의 상단 벽면은 성 바쯜라프의 일생을 묘사한 31개의 장면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랫부분은 예수의 수난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은 화려한 금과 보석들로 꾸며져 있는데 보라색의 자수정과 붉은색의 벽옥, 초록색의 녹옥수등이 십자가 모양의 패턴을 이루며 벽면을 장식하고 있고 그 사이사이로 성인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채플의 윗층에 체코 왕가의 보물들을 보관해놓은 방이 있다. 그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성 바쯜라프 채플에 있는데 이 문은 일곱개의 자물쇠로 잠겨있으며 이 문을 열 수 있는 일곱개의 열쇠는 일곱명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분산되어 보관되고 있다.
성 바쯜라프 채플은 성당의 벽날개 부분과 맞닿아있기 때문에 북쪽과 서쪽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채플의 북쪽 문에는 사자머리 모양의 문고리가 있는데 이것은 바쯜라프를 살해한 그의 동생 볼레슬라브의 성이 있었던 스따라 볼레슬라브 성에서 가져온 것인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쯜라프가 자객에게 살해되던 순간 그가 이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정말로 그 문고리를 잡고 있었는지 여부는 성당의 서쪽 정문에 성 바쯜라프의 생애를 묘사한 청동 부조 작품 속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성당을 나가면서 한 번 확인들 해 보시길.
성 바쯜라프의 채플을 지나면 성당의 남쪽 벽날개 부분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유리로 덮여있는 문은 옛날 왕들이 출입했던 '황금 문'이며 그 위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 '최후의 심판'이 있다.
서쪽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어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보게된다. 그 앞에는 VELKA JIZNI VEZ KATEDRALY SV. VITA POSLEDNI VSTUP V 16.15 POZOR! 287 SCHODU! 라고 적힌 안내문이 있는데 이 말은 - 성 비뜨 대성당의 큰 남쪽 탑 마지막 입장 16시15분 주의! 287계단! - 이다.
즉 이곳은 성당의 가장 높은 부분인 남쪽 탑의 전망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얘기다. 남쪽 탑 전망대는 예전엔 입장료를 따로 받았지만 현재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되어 있는데 시간과 정력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 봐도 괜찮을 것 같다. 287개의 계단이 있으니 올라가는 길이 그리 녹녹하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데 계단의 수도 수려니와 이 계단들이 좁다란 나선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중간에 쉬는 곳도 없어 노약자나 어린이, 임산부에게는 그리 추천하고 싶진 않다. 단, 올라간 이후 종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의 풍경은... 상상에 맡기겠다.
성당의 종탑을 내려오면 이제 천천히 성당을 나갈 때가 된다. 튠 채플, 그리스도의 무덤 채플, 성 루드밀라 채플을 지나 출구쪽으로 나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커다란 동판에 어떤 건물들의 평면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건물들은 현재의 성 비뜨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 이 자리에 먼저 있었던 건물들로 각각 성 비뜨 로툰다와 성 비뜨 바실리카이다. 작은 원형의 건물이 성 비뜨 로툰다인데 성 바쯜라프가 보헤미아를 통치하던 92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부터 성 비뜨의 유해 (어깨 뼈)를 선물로 받아 와 그것을 모시기 위해 지은 성당으로 바쯜라프가 살해된 이후 그의 유해가 바로 이 성당에 묻혔었다.직사각형의 좀 더 큰 건물은 1060년 같은 자리에 세워졌던 성 비뜨 바실리카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성당은 직경이 13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로툰다에 많은 사람이 미사를 드릴 수 없고 또 성인들의 묘를 안치할 공간이 부족해지자 대공 스삐띠흐녜브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했던 성당이다. 현재의 성 비뜨 대성당 지하에 이 바실리카의 잔해가 남아있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제 대성당을 모두 둘러보고 나왔다. 중요한 문화유산을 감상하고 나온 뒤 뿌듯함이 느껴질 것이다.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이 곳에서 실제로 미사를 한 번 드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미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7시에, 금요일은 아침7시와 저녁 6시에, 일요일은 아침 8시와 9시30분, 그리고 11시에 있다. 주의할 것은 일요일 오전에 세번의 미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들은 성당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미사에 참석할 사람들, 즉 미사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면 성당 입구에 계신 신부님께 이야기 하고 미사에 참석 할 수 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워낙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다 보니 설명할게 많았는데 독자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수 많은 중세 성당들을 보면서 그 안에 잔뜩 들어가 있는 무덤이며 장식들, 동상들의 정체가 도대체 뭐였는지 알고싶었던 독자들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 수 있었다면 좋겠다.
다음 시간은 성의 다른 부분들, 왕궁과 성 이르지 바실리카, 황금골목등을 둘러보겠다.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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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깔이 안예쁘긴 하지만 아쉬운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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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잡이 2009.01.3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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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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