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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6/18
 

Tonda 와 새들.

은은하게 향기를 내는 듯한 말이 있다 - 프라하의 봄. 이곳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에겐 친숙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웬지 이 말 뒤엔 아직 파악되지 않는 비밀스러움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말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말이다. 프라하가 어디에 붙어있는 도시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조차 이 말은 한번쯤 그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으리라 여겨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1968년 8월에 일어났던 체코인들의 민주화 투쟁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보도되었고 현대사에서 그 사건이 갖는 의미가 컸던 만큼 또한 자주 언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지만 이 자리에선 또 하나의 `프라하의 봄' 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매년 5월 12일부터 6월 초까지의 약 3주 간 프라하는 웅장하고 부드러운 음악의 선율 속에 휩싸인다. 북쪽의 로마라고 불리우는 고도(古都) 프라하에서 이같은 음악제가 열린다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봄이라는 계절이 갖는 화사함과 생동감, 그리고 냉정하게 판단해도 아름답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이곳 프라하에서 그 봄의 분위기는 음악제라는 모습으로 절정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1946년 처음 시작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올해로 벌써 5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내려온 이 음악제가 힘겹고 우울했던, 그리고 때로는 환희와 영광으로 점철되었던 최근 수십 년 동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 종전과 해방의 기쁨 속에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창단 50주년을 맞이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의 음악제가 준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의 시작이었다. 음악제가 처음 열리던 그 해 동서유럽과 구미음악인들은 화합을 상징하듯 각국에서 모여들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체코의 음악은 그 작품성을 세계인들에게 과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음악제가 시작되는 날은 체코인들이 가장 아끼는 민족음악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서거 62주년이기도 했다. 5월 11일 포스터(Foester)의 [축제의 서곡 - Festive Overture], 오스트르칠(Ostrcil)의 [십자가의 길 - Krizova cesta], 드보르작(Dvorak) [교향곡 제 7번 - 7th Symphony]으로 축제 전야의 콘서트가 꾸며졌고 다음날인 12일엔 스메타나(Smetana)의 교향시 [나의조국 Ma Vlast]이 체코 지휘자인 `라파엘 꾸벨릭' 에 의해 오전 11시 루돌피눔에서 연주되면서 본격적인 축제의 막이 올랐다(이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개막일인 5월 12일(스메타나의 서거일)에 스메타나의 ‘나의조국’이 연주되는 것은 지금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음악제는 6월 4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안에는 3일 간의 `슬로바키아 음악의 밤'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체코 현대 음악가들의 작품 34편이 연주되었다. 당시 초청되었던 음악인들의 이름만 살펴 보아도 우리는 그 음악제가 얼마나 폭넓은 호응과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친선의 장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Leonard Burnstein과 Eugene List (미국), Charles Munch, Ginette Neveu, Calvet Quartet(프랑스), Adrian Boult, Moura Lympany (영국), Yevgeny Mravinsky, Lev Oborin, David Oistrakh (소련) 그리고 체코의 음악인들인 Jaroslav Krombholic, Rafael Kubelik, Jan Panenka, Frantisek Smetana...

이들 중 Maura Lympany 와 Jan Panenka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24일 간의 음악제는 새로운 음악과 젊은 음악인들로 넘쳐났으며 6월 4일 꾸벨릭의 지휘로 연주된 Janacek의 Sinfonietta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제의 구상은 당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론인이며 작가였던 얀 네루다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와 같은 형식의 음악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1880년대에 프라하에 있는 독일극장의 지휘자 겸 감독이었던 안젤로 뉴만 역시 네루다와 유사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로 혼란스러웠던 1940년 바츨라프 탈리흐는 프라하 5월 음악제를 준비하기도 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노력들이 결국 전쟁이 끝난 1946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47년 개최된 제2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첫회 때와 같은 탄탄한 준비 위에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적절한 주제가 제시되지 못했고 음악인들의 초대도 인맥을 통해 이루어졌다(첫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2차세계대전 종전이라는 뜻 깊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이외에도 47년 처음 개최된 영국 에딘버러 축제[Edinburgh festival]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 두 도시의 축제들은 1회 행사로 기획되었다가 성공적인 결과에 고무되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음악으로만 구성되는 축제라면 에딘버러축제는 여러 분야의 예술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1948년 프라하의 봄 재단이 정부 주도하에 설립되어 음악제를 주관하게 되었다. 재정지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나 정부의 이념을 대변하는 관 주도 행사로 타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봄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리워져 갔다. 1950년 5월 9일 끼릴 꼰드라신[Kiril Kondrashin]의 지휘로 체코 필하모니는 도비야스[Dobias]의 칸타타{스탈린의 명령 작품번호 368 Stalinuv rozkaz c.368}을 연주했고 이듬해인 1951년엔 역시 도비야스의 작품인{조국을 건설하고 평화를 지키자 Buduj vlast, posilis mir}가 까렐 안체를[Karel Ancerl]의 지휘로 연주되었다(`나의 조국'은 연주되지 않았다). 이 작품 뒤엔 쇼스타꼬비치[Shostakovich]의 <숲의 노래 Pisen o lesich>가 이어졌는데 모두 소련의 음악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뒤죽박죽' 프로그램들이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같은 해 6월 12일에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연주된 후 `프요도로브 시스터즈 sestry Fjodorovy'가 무대에 올라와 아코디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기묘한 현상도 벌어졌다. 음악제의 절정을 피요도로브 시스터즈가 장식한 것이다. 1953년의 축제는 7월 5일에 막을 내렸는데 소련인들에 의해 진행된 마지막 공연은 모짜르트에서 씬카즈[Cincadze]의 작품에 이르는 12곡의 주제가 메들리로 연주되기도 했다.

1949년에서 1987년까지의 축제는 적절히 배치된 정부와 당의 대표들 아래 공포와 복종의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그 중에는 바츨라프 도비야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39년 동안 총 37번의 공연에서 그의 작품 27개가 연주되었는데 실제로 매년 한 작품씩은 연주된 셈이었다.

1950년대에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루마니아 - 1950년)과 중국(51년, 55년) 몽고(52년)의 예술단이 많이 초청되었고 그들은 군대음악과 민속음악을 합창했는데 실제로는 대중적인 선전가요나 민속음악풍의 이념적 색채가 짙은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탈린의 죽음과 소련지도부의 변화 이후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는 좀더 국제적이고 객관적인 면모를 갖춘 음악제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나 회복은 더디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50년대의 열악했던 상태를 벗어나려는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솜씨없게 짜맞추어진 냉전 이념의 구호들은 때로 코믹한 효과를 연출해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1년엔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걸고 축제를 기념했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50주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설립 50주년, 그리고 뽈지체와 베즈두르지쩨의 크리스토프 하란트의 서거 350주년 기념.”

냉전시대의 논리가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사유의 흐름들을 막아왔던 것이 비단 체코의 상황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 우리는 또한 얼마나 철저히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차압당해 왔으며 정상적 사고 능력을 상실한 정부와 속물적인 자본주의 이념 아래서 빛나는 전통을 상실해 왔던가 - 이러한 행사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분위기를 쉽게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50여 년 간 이어져 내려오는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의 역사에는 따뜻한 미덕의 순간들도 수없이 많았다. 1968년 소련의 침공이후 소련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가운데서도 축제에는 대중들의 진정한 사랑을 받았던 소련 최고의 음악인들이 여전히 초청되었는데 그들 역시 소련의 침공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며 참석을 망설였다. Svjatoslav Richter, David Oistrach, Emil Gilels와 같은 음악인들은 언제나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로부터 열렬한 갈채를 받아왔다. 전율과 감동으로 사로잡히는 순간은 다른 많은 축제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여기서도 하나의 예를 통해 예술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쁨을 던져주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체코가 낳은 유명한 지휘자 바츨라프 딸리흐[Vaclav Talich] 는 전후 질병으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일체의 다른 공식적인 음악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어렵게 음반녹음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기술했지만 그는 프라하에서의 음악제 개최를 위해서도 부단히 노력해 온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첫 두 해(46, 47년) 동안의 행사 이후 54년 무대에 다시 설 때까지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병든 몸으로 그가 다시 개막 연주회에서 체코 필하모닉과 함께 `나의조국'을 연주할 때 연주회장 안은 청중들의 열기로 가득했으며 체코 필의 단원들도 혼신을 다해 그들의 음악을 연주했다. 비셰흐라드[Vysehrad] 블라닉[Blanik]의 마지막 부분을 연주할 때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기록영화 제작을 위해 설치한 라이트가 그의 모습을 강하게 비추었는데 그것은 마치 먹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치는 것과도 같은, 그리고 어쩌면 위대한 예술가의 머리 위로 찬란한 왕관이 씌워지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청중들은 또 한편으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질병의 고통으로 그는 더 이상의 지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거장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은 그토록 진심어린 것이었다.

올해에도 이러한 멋진 장면들이 연출될 수 있을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 또 음악과 예술뿐만 아닌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자신의 재능을 승화시키는 사람들은 늘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던져주었다. 물론 음악 자체로도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겠지만.

올해의 축제로 눈을 돌리자. 클래식 음악 이외에도 발레 오페라 어린이합창 재즈 등 풍성한 프로그램이 우리들의 봄을 장식하기 위해 이미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솔리스트, 연주자들이 금년에도 예외없이 이곳을 찾아올 것이고 축제의 한 부분인 국제경쟁부분에서는 또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기량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축제에 공식 초청되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애석해 할 필요는 없다. 프라하의 봄도 봄이지만 서울의 봄이 먼저 가꾸어져야 하는 것이 우리에겐 더욱 절실한 과제이고 - 남북화합을 위해 세계적인 우리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이루려 했던 음악제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 기형적이고 실속 없이 커져버린 서양음악에 대한 짝사랑과 선입견부터 바로잡아 전통음악과 더불어 올바른 음악풍토를 가꾸어 내는 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결코 싸지 않은 입장료 때문에 연주회장을 찾을 수 없는 다수의 서민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자신들의 축제를 즐긴다. 급속히 개방 되어가고 있는 오늘 체코의 상황에서 반전과 화합이라는 숭고한 정신을 추구했던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가 다시금 시장경쟁 체제 아래에서의 천박한 선전성 행사로 타락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겐 서양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체계적 지식을 얻을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번쯤은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우아하고 품위 있게' 콘서트 홀을 찾아가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하릴없이 시장골목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들른 조용한 찻집에서 자신의 이상형인 어떤 이와 마주친 후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

영화이야기-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2008.03.21 19:15 | 생각들.. | racek21

http://kr.blog.yahoo.com/racek21/1229670 주소복사

이란의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는 전문 배우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은 이란 북부의 `코케'라고 하는 한 작은 시골 마을이고 실제로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영화 속의 인물들이며 당연히 실제 촬영도 모두 그곳 현지에서 이루어졌다. 특별한 세트나 화려한 의상도 없고 카메라 특수 효과나 컴퓨터 그래픽 따위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그러면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치밀한 구조의 스토리가 전개되는가? 역시 그것도 아니다.

한 아이가 시종일관 공책 하나를 들고 뜀박질을 한다. 친구의 공책인데 실수로 자기가 집으로 가져와 버렸고 (공책 표지그림이 똑같다) 이 공책을 오늘 돌려주지 않으면 친구는 또 다시 낱장으로 된 다른 종이에다 숙제를 해 오게 될텐데 그러면 선생님께 심한 꾸중을 듣게 된다.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는 소년의 안타까운 달리기. 그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한 이야기다. 보기에 따라 무척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영화는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 영화 속의 아이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시골 마을의 생활은 풍요롭지도 못하고, 다니는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결코 상냥하거나 아이들을 배려해 줄 만한 인물같지 않다. 먼 곳에서부터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 가사노동으로 허리가 아픈 그의 친구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집에선 엄마의 빨래도 도와야 하고 어린 동생에게 우유도 줘야 하고 할머니의 잔소리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토록 피곤한 일상에서 아이는 힘찬 달리기를 시작한다. 찾아야 할 곳은 확실하지 않고 주위엔 그 아이를 격려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애들에겐 매를 들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할아버지, 몇몇 사람에게서 얻은 정보도 확실하지 않고.. 그저 친구를 염려하는 절박한 마음뿐. 그러나 바로 그 이유가 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든다. 아이는 친구에게 공책을 무사히 돌려 줄까. 천천히 아이의 발걸음을 뒤쫓아가기 바란다. 그리고 아이의 눈에 비치는 시골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 주기 바란다. 이 작은 이야기에 수많은 삶의 질문들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던져지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진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아주 짧은 순간에 감독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생각하는 희망에 또한 공감할 수 있는지.

이 영화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이나 황홀한 사랑 이야기도 없고 대단한 볼거리나 유명한 배우의 빼어난 연기도 없지만 삶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졸지 않고 끝까지 이 영화를 세 번쯤 보고 나면 우리가 거장들이라고 말하는 세계의 모든 감독들이 왜 이 영화에 대해 `천상의 영화가 지상으로 내려 온 것'이라고까지 극찬할 수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 이해할 수 없고 또 내 마음에 깊고 깊은 상처가 남아도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다. 하루에도 수십번 씩 용서와 증오가 교차한다. 나를 철저하게 이용한 것인지, 나를 하찮게 여긴 것인지, 아니면 나를 사랑함에도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그 감정에 충실한 결과였는지..
증오하고 저주할 수 있는 타당성은 내게 얼마든지 있다. 내가 뭐라 비난하고 욕을 해도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변명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도 안다.
문제는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맞는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철저하게 내게 남겨진 몫의 선택.
내 안에 있는 수많은 기준들 사이에 지금의 태도를 결정해줄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작업임을 깨닫는다.
주위의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겪었던 경험과 그들이 가진 기준에 의해 조언하고 충고한다.
그들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스스로 세워야 할 기준은 나만의 것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

용서,, 혹은 증오. 아직 그 해답은 확연해 지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재임 중 나라는 좋아졌는데 서민이 힘들었던 이유

노무현 재임 중 4년 동안의 무역흑자가 800억불이 넘고, 세계 3대 신용평가 기관의 국가신용등급 모조리 상승 ( 피치 A→ A+ , S&P A- →A ,무디스 A3 → A2), 세계 10대 경제대국 진입. 세계 국가경쟁력 11위 평가(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10101031724072004), 주가지수 상승이 취임 초에 비래 무려 3배 ...

나라 전체는 굉장히 좋아졌는데 서민이 힘들었던 것은 취임 직후 붕괴된 카드 거품으로 380만이 넘는 신용불량자와 그에 따른 300조가 넘는 신용카드 빚으로 내수가 극도로 침체 했기 때문이고, 이제야 겨우 극복 정상수준으로 돌아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5% 성장 예상. 사람들이 '거품 붕괴' 라는 경제적 충격 의미를 잘 모르는 데 , 비유해서 말하면 비가 많이 오는데 도로가 침수되고 논이 잠기고 축대가 무너지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댐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노무현의 진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극심한 내수 침체로 80%의 국민들이 생살이 찢기는 고통을 겪고 , 국민적 원망으로 노통과 열린당의 지지율은 바닥 모르고 떨어지며 온갖 욕을 먹었지만 (원래 국민은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대통령 욕하기 마련이고, 정부여당의 모든게 미워 보이고 싫어진다) 노통은 이를 모면하기 위해 결코 뒷날에 부담이 될 거품 정책을 쓰지 않고 바른길을 걸었다. 이것은 친노나 반노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바다.

★참여정부 정책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나라 빚 증가 , 공무원 증가, 기업도시 혁신도시 개발 등 3가지만 지적 하고자 한다..

1).노무현 정권 5년 동안 나라 빚이 133조에서 301 조로 증가 됐다고 비난하는데 (08년 4월을 기준으로 추정치)그 중 53조는 IMF 때 투입된 공적 자금 상환 분이고 (바로 한나라당이 만들어 놓은 빚), 또 69조는 환율 방어를 위한 "외국환 평형 기금 괸리 체권(외평채)' 발행 때문이다 ( 발행한 빚으로 외화를 사서 보유하고 있으니 빚이 아니다) ,즉 증가분의 168조 중 122조는 사실상 빚이 아니거나 참여정부와 무관한 것이다. 또한 , 융자금 회수로 자체 상환이 예정 돼 있는 국민주택채권 9.3조도 형식만 빚이지 빚이 아니다.

실상이 이러한 데도 반 노무현 정치언론세력들은 증가액만 말하며 무능한 노무현 좌파 정부가 국가 재정을 파탄 냈다고 비난할 뿐 그 내막은 보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가 내역을 알고 있는 국민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2).참여정부 5년 동안 공무원이 5만 7천명이 증가했다. 물론 많은 증가다.

그러나 그것까지 포함해서 총인구 대비 공무원 비율이 우리나라는 2.8%로 미국(7.0%), 프랑스 (7.8%), 영국(7.9%) 등 선진국의 1/2∼1/3 수준이다. 작은 정부라고 반 노무현 언론이 추켜세우는 일본(3.5%)과 비교해도 훨씬 작다.(http://www.president.go.kr/cwd/kr/policy_and_issue/policy_issues/index.php?id=53d7ea929ba042a808b12d98)

다른 나라들은 한국의 두 배 세 배에 달하는데, 복지 과잉인 그런 나라들이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을 줄인다고 같은 상황을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없다

복지 국가로 나아갈수록 정부의 대국민 서비스가 늘어나고 공무원 증가는 필연이다. OECD 선진국들이 할 일 없어서 우리의 두 배 세 배 되는 공무원 조직을 유지하겠는가.

몇 몇 반 참여정부 신문들이 선진국은 공무원을 줄이는데 참여정부는 늘인다고 여러 날에 걸쳐 수 십 개의 사설, 기사, 칼럼을 통해 거듭 비난 하면서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각국의 공무원 수의 비율 등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국민을 속일 수 없기 때문 이다.

이명박 후보는 반 공무원증가 정서에 기대 공무원 현수준 동결을 공약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11601030223082002) 이것이야 말로 오직 표를 위해 공약을 하는 인기영합공약 아닌가!


3) 지방 곳곳에 기업도시 혁신도시 추구로 전국을 투기장 만들었다는 데..한국의 수도권인구 비율이 48.6%로 절반에 육박하고 (http://sports.hankooki.com/lpage/newstopic/200711/sp2007111820054758770.htm) 몇 년 있으면 50%를 넘는다. 세계 어느 나라도 30%를 넘는 나라가 없다 . 나라의 인권 물적 자원이 수도권 하나로 집중하는 수도권 과밀화는 정치 경제 교육 의료 교통 주택 환경 ..등등 전방위적으로 나라에 악 영향을 끼친다, 간단한 예로 믿을 만한 병원을 가려고 해도 서울로 와야 되고 하다못해 변변한 학원을 다니려 해도 서울로 와야 되는 게 현실이다.

역대 정권 수 십 년 동안 당장의 곶감만 생각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수도권에만 자원을 풀어준 대가이다. 여기에 본격적 매스를 들이댄 것이 노무현의 지역균형 발전 정책이고 행정수도 기업도시 혁신도시 ..다 이러한 정책에서 나온 것 이다.

반 노무현 정치 언론세력들은 도시개발에 따른 투기 우려를 비난하면서도 50%에 이르는 수도권 과밀화의 대책은 결코 언급하지 않음은 물론, 심지어 수도권의 규제를 풀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내가 동아일보에서만 3번 이상의 사설 기사 칼럼을 봤다) 이를 시행하지 않는 참여정부를 반 기업 반 시장 정책을 펴는 좌파 정부라 지칭하며 비난한다.

인위적인 도시개발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문제점이 따른다 , 그러나 지금 목표는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수 십 년 간 누적 돼 온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려움과 문제점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오래 전부터 자연스런 균형발전이 유도됐어야 했는데 정 반대로 지방은 공동화, 몰려드는 수도권은 과밀화의 악순환에 빠져들었고 역대 어느 정권도 여기에 효과 있는 대책을 실행하지 못했으나 , 노무현 정권이 행정수도를 필두로 한 과감한 지역 도시 건설 정책을 세우고 실현에 옮기는 것이다.//

대추나라 (dlehdgk33)님의 글을 퍼온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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