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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인 리처드 라자러스Richard Lazarus는 감정은 “상황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평가”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는 특정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 상황이 경험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에 의해 따라서 똑같은 상황이라도 전혀 다른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즉, 동일한 소재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공포나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마음껏 웃기 위해서는 안도감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점에서 이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려서 웃음을 주는 코미디 영화가 관객들을 웃기기 위해서는 그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황이 관객들이 처한 상황과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동떨어져 있어야 한다. 만약 관객들이 실제로 겪어본 적이 있는 곤경에 영화 속 주인공들이 빠져버리면 관객들은 그 주인공을 보며 마음 놓고 웃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겪었던 안 좋은 추억과 함께 그때 겪었던 고통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조건을 고려해 볼 때, 주성치의 영화는 코미디를 표방하되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늘 어떤 비루함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데 이게 종종 남의 것 같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이제 홍콩에서 진정 성공한 영화인이다. 그의 영화는 이제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라는 헐리웃 배급사를 통해서 전 세계에 배급될 만큼 흥행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제 배우로도 감독으로도 자신의 영화를 훌륭하게 장악하고 있으며, 장우기와 같은 신인을 키워서 자기 영화에 출연시킬 정도의 권한도 누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변함없이 비루한 향기를 잃지 않는다.

주성치가 키우고 변신까지 시켜준 장우기. 참고로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던 것으로...
이번 영화 <장강7호>도 여전하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밑바닥 정서는 지나치게 극화된 덕분에 어두운 분위기를 살짝 걷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루함이 철철 넘친다. 주인공인 주성치 부자는 말 그대로 ‘철거된 집’에서 바퀴벌레를 벗 삼아 살아간다. 아버지는 부자를 위한 아파트를 짓는 공사장 인부지만, 그의 경제력과 지적능력으로는 아들을 위해 열대야의 더위를 쫒아줄 선풍기 하나 구비하기도 벅차다. 그래도 자기 자식만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부자들만 다니는 사립초등학교에 보낸 상황이지만, 과연 그런 노력이 기대한 결과를 얻어낼지는 막막하다. 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벌써부터 학교 교과 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데 앞으로 한참 남은 중ㆍ고등학교 과정은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아버지는 매일같이 공사장에서 퍽퍽한 도시락을 삼켜가며 일을 하지만 그 일이 힘겨워진지 오래다. 공사반장의 무뚝뚝한 배려라도 없었더라면 진작에 쫒겨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전의 주성치 영화들과는 달리, 이번 영화를 보며 나는 마음이 조금 더 불편했다. 주성치 혼자 비루한 진흙탕에서 뒹구는 꼴을 보는 것과 그가 어린 아이를 끼고 비루함을 견뎌내는 것을 보는 것의 차이였다고나 할까. 내가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무자식 상팔자를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살 일이 막연하던 시절의 나로서는 나 혼자 비루해지는 것은 충분히 견딜 수 있지만 내 가족, 특히 내 자식이 나로 인해 같이 비루해지는 것을 참아낼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루함으로부터는 꽤 벗어나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자신은 없다는... 친구 하나가 내가 그런 소릴 할 자격있냐고 비웃었다는...뭐 나도 인정은 한다는...)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음
어쨌거나,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작 <이웃의 토토로>를 떠올렸다. 둘은 많이 닮았다. 특히 이 영화가 주인공의 생존의 문제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웃의 토토로>를 보신 분들이라면 그 아름다운 만화영화가 생존의 문제를 소재로 한다는 주장이 의아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시라. <이웃의 토토로>에 등장한 주인공 자매, 사츠키와 메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던가.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막내 메이가 언니와 싸운 후 엄마가 계시는 병원으로 가겠다며 혼자 집을 나간 상황을 보자. 메이는 숲에서 혼자 길을 잃고, 뒤늦게 사츠키와 마을 사람들이 메이를 찾아다니지만 찾아낸 것은 저수지에 떠오른 (메이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한 짝뿐이다. 가슴이 철렁한다. 만약 여기서 토토로가 나타나 고양이버스를 태워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메이는 정말로 저수지의 신발 한 짝만 남기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상황이 더더욱 절절했던 것은 아버지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웃의 토토로>에 특별히 갈등이나 악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영화에 묘사된 기묘한 요괴나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이 두 자매가 처한 상황의 아슬아슬함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아슬아슬한 생활을 하던 사츠키와 메이 자매에게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가 찾아온 것처럼, 역시 간당간당한 주성치 부자에게는 ‘장강7호’가 찾아온다. 이들이 하는 역할도 똑같다.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당연히 처할, 지극히 현실적인 위기에 빠진 주인공들을 구해주고 약간의 환상을 추가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이 영화 <장강7호>를 아시아판 [ET]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양극화 시대의 동화라고 부르고 싶다. 영화는 양극화가 심화된 세상에서 그 양극의 아래쪽으로 밀려난 삶의 먹먹함을 직시하면서도 거기에 약간의 희망을 덧붙여 보려 노력한다. 이 세상에는 못사는 집 아이가 손댄 만년필조차 들어올리기를 두려워하는 정신병자도 있지만, 그런 아이도 차별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는 멀쩡한 선생님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은 백날 일 해봤자 밑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경제적 계층이 뚜렷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에 대한 약간의 배려도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걸핏하면 주성치를 무식하고 미련하다고 구박하면서도 홀애비로 자식 키우는 어려움을 인정해주는 공사장 감독처럼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 묘사된 현실적인 요소들은 너무도 단단한데 그것에 덧씌워진 희망이나 환상은 그만큼 단단하지 못하다. 숲의 시간과 공간마저도 장악한 토토로와는 달리 장강7호에겐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영화는 장강7호의 활약을 신나게 보여주지만 여전히 그들이 살아야할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주성치의 영화는 보고 기억할 가치가 있다.

- 무비위크 200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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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바람의 생각 [rifflewind's me2DAY] 2008.09.2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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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인 리처드 라자러스Richard Lazarus는 감정은 “상황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개인적 의미와 평가”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한다._ 이 말이 떠오른다. 분노는 '상황'이 아니라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에 의해 만든 산물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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