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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0,10은만수 만수는 완성이고, 1은 출발이다 만수를 위해서 완성을 위해서 매진하자 그리고 출발의 초심을 잃지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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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1960년대의 우리나라[2](동영상)

2009.10.09 20:30 | 한국사 진행형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8460 주소복사



1960년대 우리나라(2)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협정에 조인, 국교 수립
-1966년 6월 김기수 선수가 판정으로 한국 프로권투 사상 첫 세계챔피언이 됨.
-프로레슬링, 여자들의 경기, 김일 선수의 박치기
-1965년 2월 베트남 파병(비전투 부대인 비둘기 부대)
-청룡, 백호, 백마 전투부대 잇달아 베트남전쟁에 참전, 태권도 시범단
-중동으로 진출한 우리 근로자들
-해외로 떠나는 연예인들
-전통문화 계승발전, 무형문화재 지정
-지하도, 육교, 고가도로를 본격적으로 건설, 여의도 개발, 강변 고속도로 개통
-도시에 대형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함, 삼일빌딩
-슈퍼마켓 등장, 백화점 개점등 유통시장의 변화
-다방, 음악감상실
-학사 주점, 열띠는 토론의 장으로 활용됨.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가 유행, 트위스트 돌풍, 행위예술
-운전자와 통행자를 위해 표지판, 즉심, 교통사고가 사회문제로 대두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공비 31명 서울 침투
-4월 향토예비군을 창설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제도 도입
-석유를 연료로 하는 난방기구 개발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 출처 : 까칠한( http://blog.daum.net/atrhasis/ )]




1960년대 우리나라(1)

-1960년 봄, 제4회 정부통령 대통령 선거
-자유당의 부정, 마산을 시작으로 선거 부정을 규탄함.
-4월 19일 자유당은 정치 깡패를 동원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함.
-경찰들의 발포로 학생들이 다침.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양헌제 채택, 참의원과 민의원 선출, 윤보선 의원을 대통령으로 선출
-미국의 아이스쇼단의 중앙청에서의 공연
-중국의 기예단 묘기, 서독 서커스단 내한 공연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들
-프로 권투, 1960년 한국교향악단 창단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 민주당 내부 각료들 체포, 국회 해산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취임, 송요찬 내각 출범
-1958년 민족예술 경연대회, 봉산탈춤이 대통령상을 수상함.
-군사정부는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울산공업센터 건설을 시작으로 정유, 시멘트, 항만, 조선 등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 작업이 전개됨.
-재건체조, 문맹퇴치, 농어민의 의식개혁
-농민의 소득증대를 위한 부업 활성화
-비닐하우스, 양송이, 양계, 토끼 사육,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전환.
-농어촌, 새로운 전환점 맞게됨.
-김포 국제공항 인수
-창경원


[ 출처 : 까칠한( http://blog.daum.net/atrhasis/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1945년 8월 15일이여 영원하라!


(사진설명) 1945년 8월 15일에 한국인들(공산주의자 비공산주의자 모두)은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공산주의자 사냥도 없었고 반동주의자 사냥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사람이었고 한가족이었습니다.

저는 1935년에 출생한 이래 긴 인생여정에 많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되돌아보면 1945년 8월 15일이 내 생애에 있어 가장 기뻤던 날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의 육십년전의 그 날, 한국은 마침내 자유를 찾았습니다.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은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하나로 단합되었습니다.  
한국 방방곡곡에서 - 남북을 가리지 않고 공산주의자나 비(非)공산주의자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그 당시 저는 10살 무렵이었고 손수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태극기의 정확한 규격이나 괘(卦)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마음대로 태극기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록 집에서 그린 태극기가 정확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애국가를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이라는 외국곡에 맞춰 불렀다 하더라도(지금의 애국가 곡조는 몇 년 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하나가 된 행복한 국가였으며 행복한 가족(모든 한국인은 오빠 언니, 아저씨 아주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였습니다)이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동포들에게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였습니다.  
음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보다 못 한 사람들 - 만주에서 온 집없고 굶주린 많은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 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중국에서 폭도들에게 쫓기며 공포에 사로잡힌 난민들은 압록강을 건너 혜산과 갑산으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 불쌍한 난민들은 축축한 방공호와 종이로 만든 오두막집에서 또는 야외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어떻게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한 그 난민들을 도와 주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서로 도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행복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마지막 한국 총독이었던 아베는 그의 권한을 여운형에게 이양하였고, 그 날 저녁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였는데, 이 건준은 후에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진정한 정부'였던 '(조선)인민공화국'이 됩니다.


(사진설명) 좌측으로부터 1945년 서재필박사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당시의
김규식, 서재필, 여운형.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가 된 첫 한국인입니다.  
그는 독립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서재필은 건강이 나빠져 현저한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된 후에 김규식과 김구는 '국민적 화해'라는 여운형의 과업을 추진합니다.  
김구는 1949년 암살되고 김규식은 1950년 북한으로 가게 됩니다.

여운형은 모든 주한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송환될 때까지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아베 총독에게 확언하였습니다.
일본제국의 급작스러운 붕괴로 인하여, 남한에서는 70만명이 북한에서는 20만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북한에서의 일본인은 거의가 만주에서 넘어온 일본인 난민과 일본군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보호하였을 것이고 일본인들에게는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운형은 아베에게 한국인들은 자신의 약속에 따를 것이라고 확인하여 주었습니다.

여운형은 한국의 13개 도 각각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위원회는 일본으로부터 지방행정 및 치안 기능을 넘겨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여운형의 사실상의 정부가 한 최초의 활동은, 한국에서 발이 묶인 일본인들을 보호하고 공공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시민군(치안대, 보안대)를 조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로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치안대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한국인 교사들이 즉시 학교를 접수하였으며, 한글로 된 교재가 즉시 발행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이 발전소, 상하수도 시설, 전화, 도로정비, 소방서, 라디오 방송국, 보건소 등을 인계받았으며, 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정말로 하룻밤 사이에, 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떠나는 일본인들과 완벽하고 완전한 협력을 하여 일본으로부터 모든 정부기능을 인계 받았습니다.
권력의 이양이 그보다 더 순조로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 그리고 어떤 정치적 이념을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한국의 이익을 위하여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루며 일을 했습니다.
그 짧은 기간동안에 한국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들 자신이 자신의 나라를 통치할 능력이 충분함을 증명하였습니다.

1945년 9월 6일, 한국 각지의 인민위원회의 대표자들이 서울에서 회동하여 '조선인민공화국'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은 이승만(주석), 여운형(부주석), 허헌(국무총리), 김구(내무부장), 김병로(사법부장), 김규식(외무부장), 하필원(경제부장), 조만식(재무부장), 신익희(체신부장), 김일성(군사부장), 김성수(문교부장)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은 그 시대 한국의 정치적 다양성을 가진 진정한 대의기관이었습니다.
그 내각에는 이승만 김구 신익희와 같은 반(反)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또는 좌파에 속하는 김일성 여운형 조만식 김규식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상하이에 있던 한국임시정부 역시도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에 의한 연립정부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운형은 한국임시정부의 결성에도 역시 참여했었습니다.

인민공화국은 얼마나 유능하였는가?
1945년 12월 12일 한국내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였기 때문에 남한의 지방정부들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군정은 (한국민의 의지와는 무관하게)한국민에게 강요된 것이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북위 38°선을 따라 정확히 중앙에서 나뉘어졌습니다.
아무도 한국인에게 나라의 분할에 대해 미리 묻지 않았고, 한국인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출처 : Korea Web Weekly( http://www.kimsoft.com/korea.htm ) ]

우키시마호(浮島號事件) 사건(1945년)

2009.10.08 21:01 | 한국사 진행형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8444 주소복사


2003년 9월 29일 우키시마호 평양토론회

일제는 패전 사흘 뒤인 1945년 8월 18일, 일본 전범의 재판과 관련해 일어날지도 모를 재일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하여 한국인 노동자를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명령을 일본 해군을 통해 예하부대에 내렸다.
이러한 명령에 따라 강제 징용되었던 7,000여 명의 한국인을 태운 4,740t급 일본 해군 군함 우키시마호는 8월 21일,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오미나토항[大溱港]을 떠났다.
그러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우키시마호는 24일,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舞鶴港]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갑자기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 두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고의 원인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만내(灣內)에 부설한 미군의 기뢰와 충돌해 우연히 침몰했다는 일본측의 주장과, 함께 탄 일본 해군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있을지도 모를 보복이 두려워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자폭설 등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지만, 현재로서는 자폭설이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당국은 배가 방향을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정선(停船) 명령에 따른 것이며, 배가 침몰한 것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 때문이라고 지금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또 조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 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사망자만도 1,000명이 넘으며, 배에 탔던 한국인도 생존자의 말을 빌리면 7,0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총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 배에 승선하였고, 최소한 5,000명이 사망하였다는 자료도 있다.

이들 대부분은 홋카이도[北海道]·아오모리현 등 일본 도호쿠[東北]지방으로 끌려가 일제의 강제 노역으로 노예처럼 연명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서,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즐거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사건 후 이들을 위한 추도회가 계속 열려왔으며, 1994년에도 이른바 '우키시마호사건'의 추도회가 도쿄[東京]에 있는 사찰 유텐사[祐天寺]에서 열렸다.
특히 이때는 대전 후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B·C급 전범으로 구속되었던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들도 참석, 일본의 전후 보상문제를 추궁하기도 하였다.

1995년 7월 28일, 도쿄에서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아시안 블루-우키시마호 사건》이라는 영화 시사회를 가졌으며, 그 해 8월 개봉,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잔학상의 한 단면을 고발하였다.
또 1999년에는 북한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을 제작하였고, 2001년 8월 23일에는 교토[京都] 지방법원이 이 사건과 관련된 한국인 생존자 15명에게 일본 정부가 300만엔씩 총 4500만엔을 배상하라는 국가배상명령 판결을 내림으로써 처음으로 원고측 주장을 일부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소송에서 '당시 국가가 징용자에 대한 수송책임이 없었으며, 폭침은 미국이 부설한 기뢰로 인한 것으로 불가항력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아직까지도 진상 조사나 공식 사과는커녕 관련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는 등 어처구니 없는 책임 회피 행각을 계속하고 있다.



[ 출처 : 네이버 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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