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1913.5.13 - 도산 안창호 주도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
1913년 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다.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일제하에서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을 강조하다 보니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흥사단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을 묵묵히 지켰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두 단체는 이후 수양동우회(1925년)로 통합됐다가 다시 동우회(1929년)로 개칭됐으나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
|
http://kr.blog.yahoo.com/ppis4988/trackback/125/28148
|
|
|
|
|
|
|
|
|
|





3·1운동 [三一運動] 일본 식민지 지배하의 한국에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범민족항일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이래 한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통치하에 놓여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각지에 의병(義兵)을 낳고 널리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일체의 결사(結社)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하였으며,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특히 무력투쟁으로 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선두에 섰다. 한편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 ·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滿洲)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暴壓)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戰後)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이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갑자기 승하(昇遐)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毒殺說)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였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해왔으나 1917년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와 뉴욕의 세계약소민족회의 등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였다. /naver 3·1 운동(三一運動)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장례식날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2개월 가량 전국적인 폭력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일제는 대대적인 학살과 만행으로 탄압했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배경 데라우치 마사타케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으로 계승된 무단통치는 “3.1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만주 지린에서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1918년 말 무오 독립선언을 통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조선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2·8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삼일운동은 고종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조선 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되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시위는 순수한 평화적 시위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폭력화되었다. 준비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으나, 만해 한용운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한문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자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남선의 초안에 춘원 이광수가 교정을 보고 공약 3장을 덧붙였다. 준비 과정에 일어난 신철에 관한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하순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를 급습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은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보는 앞에서 윤전기를 멈추고 〈독립선언서〉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이종일이 최린에게 보고하자 최린이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돈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3월 1일로 앞당겼다. 2월 28일경 손병희의 집에 모여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탑골 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민족대표가 모일 장소는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뀐다. 기미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독립선언서 낭독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현대어역) ---------------------------------------------------------------------------------- 한편 오후 2시에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거사시간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여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전국적인 시위와 폭력 진압 경성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탑골공원 시위 독립선언서가 본래 낭독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하였다.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 일시: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 장소:천안 아우내 장터 - 경과: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만세운동이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 모친 최씨가 총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 일시: 1919년 3월 4일 - 장소: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 경과: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때 사천시장 부근에 있던 사천헌병대에 이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던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사전 적발되어 구금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천헌병주재소의 소장 사토(일본어: 佐藤實五郞)와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참가자 수십명을 살상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시위대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 관련자: 조진탁 (사형), 고지형, 지석용 등 삼진 의거 - 일시: 1919년 3월 28일, 4월 3일 - 장소: 경상남도 창원 - 경과: 제1차와 제2차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삼진의거는 당시 창원에 속하는 현 마산시 일대의 연합 대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연고지에 돌아온 변상태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에서 동조하는 인사들을 모아 모의했다. 단일 시위로는 마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였으며,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연합시위로 기록되었다.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한 주모자들이 태극기를 제작해 제2차 삼진 의거(4·3 삼진의거)를 재차 계획했으며,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서 약 3천여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일본 헌병대와 유혈 충돌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 관련자: 변상태, 변갑섭(사살), 변상복(사살) 등 제암리 학살 사건 - 일시: 1919년 4월 15일 - 장소: 경기도 수원시 - 경과: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맹산 학살 사건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왜병이 도착하여 독립운동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혹혁을 하여 사람들이 격분하여 석방을 요구하러 헌병분견소로 몰려드니 왜병은 이들을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기고 60여명을 사살하였다. 그 중 셋 사람이 도망하여 왜병이 추격하였지만 잡지못하였다. 대구 학살 사건 대구에서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왜병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시위의 주모자로 독립선언을 낭독했는데, 김용해는 체포하러온 왜병과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자가 투옥되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합천 학살 사건 3월 16일 합천군 야로면에서 지역사람들과 해인사의 승려가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다. 3월 18일 합천군 강양면의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일본의 군인과 경찰이 쇠몽둥이나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했다. 19일 합천군 대정면에서도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22일 상백,백산,가회,삼가 등 다섯 면의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3만여 명이 모였다. 질서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왜병이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중상하였다. 그날 초계면 유림과 학생들도 시위를 하기 위해 모였는데 8천여명이 되었다. 왜병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명의 중상자를 냈다. 남원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는 4월 3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이기 위해 19개 면장에게 글을 보내어 일제히 사직하게 하고 식목을 핑계로 수 만명을 모아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헌병이 주모자를 체포하였으나 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성을 향해 행진하였는데, 그 행렬이 30리에 뻗쳤다. 일본 헌병이 발포하여 11명이 즉사하였다. 이리장날 만세운동 기독교인이었던 군산의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과 장경춘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12시 쯤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문용기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피해 규모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반응 및 파급 효과 일본 3·1 운동에 대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건 명칭은 “조선만세소요사건”(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기본적 시각은 ‘소요’(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폭행·협박을 함으로써 한 지방의 공공질서(公共秩序)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평가는 다른 점도 있다. 경기도 경찰부 경찰부장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자신의 글 〈조선독립운동비화〉에서 3·1 운동에 대해 “민족 본능의 지하수의 분출” 또는 “천변괴이의 상”이라고 표현하였다. 해외 대한민국의 사학자 사이에선 이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대만의 독립운동과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가 있다.<--과연 이 운동이 해외의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까요? 실제로 영어판 문서 en:March 1st Movement 에는 해외 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으며, 5.4운동의 경우, en:May Fourth Movement 와 zh:五四运动 어디에도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단 이야기가 없습니다.--> 특히 인도의 시성이자 문학가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929년에 지었던 시(詩) 동방의 등불에서 한국을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사실인가요? 사실이라 하더라도, 3.1운동 10년뒤에 나온 시가 그 운동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결과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식민 통치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한 통치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조선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관료들을 키워 조선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며, 초급 학문과 기술 교육만을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삼일운동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독립을 향한 마음이 서로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만주지방에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삼일운동으로 인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세계적으로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 각 국가의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은 이런 한국의 뜻을 받아들여 대한민국의 독립국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함께 보기 - 한국의 독립운동 - 무오 독립선언 - 1919년 2월 1일,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조소앙, 신채호 선생 등 만주와 러시아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추어 조국독립을 요구한 독립선언서이다. 다음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 2·8 독립 선언 -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다음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위키백과
|
http://kr.blog.yahoo.com/ppis4988/trackback/125/28147
|
|
|
|
|
|
|
|
|
|

1937.6.4 - 항일유격대 보천보 급습(보천보 전투) 1937년 6월 4일,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국 공산당 소속의 항일유격대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 병력 1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남 갑산군 내 보천보를 급습했다. 보천보는 일본인 50여명과 조선인 1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시골도시.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파괴하고 관청을 불태운 뒤 밤늦게 떠난 유격대의 뒤를 인근에 있는 일본 경찰이 추격에 나섰지만 7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만 내고 말았다. 이상이 북한이 그들의 영도자 김일성이 주도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다. 이 전투는 당시 국내신문이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 크게 보도됐지만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실제로 지휘했는지,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서 활약한 김일성과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조선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김일성이 이끄는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북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일대를 잠시 점령한 사건. 당시 백두산 일대 조선과 중국 간의 국경지역인 장백을 중심으로 항일투쟁활동을 벌이던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보천보에 침투하였다. 그들은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조선민중에게 알린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 등의 포고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일경 7명이 죽었으며 여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탄압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크게 보도되어 조선인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naver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약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부대가 국내진공하여 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보천보)(해방전 명칭:혜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배경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독립군과 중국공산당을 비롯한 항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던 독립군의 자취는 거의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던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일본의 탄압과 회유에 속속 전향하여 일본에 협력함으로서 점차 광복에 대한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지휘관이었던 김일성은 비록 작더라도 선전효과를 극대화하여 이런 패배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전투경과 보천보 내의 지하조직으로부터 소수의 경찰병력이 느슨한 경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은 100여명의 병력으로 급습했다. 보천보에 진입한 유격대는 일본의 각종 행정기관과 경찰 주재소에 방화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식당과 부자집을 돌며 군자금을 강탈했다. 일본경찰은 모두 도주해서 쌍방의 피해는 없었고, 민간인 사상자로 일본인 요리사 한명과 유탄에 맞아 숨진 갓난아기 한명이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항일유격대는 토벌대가 출동하기 전에 보천보를 빠져나와 만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과와 영향 보천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단순 소동에 지나지 않았으나, 김일성이 의도한 바와 같이 일제의 지배력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 확산되어가고 있던 패배주의를 저지하는데는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러한 김일성의 의도는 이 사건에 대해 두번이나 호외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도한《동아일보》에 의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26살에 불과하던 김일성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김일성 전설"이 생겨날 정도로 신화화 되었다. 중도파 여운형뿐만 아니라 김일성과는 노선이 달랐던 임시정부의 김구도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고무되었다고 한다. [2] 일제 또한 김일성을 주시하게 되어 만주지역에 산재하던 항일유격대의 뿌리를 뽑기위해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국내에 잠입해 있던 김일성 세포조직을 일제검거했다. 1938-1939년에 일제의 토벌전은 절정에 달해서 김일성을 비롯한 많은 항일유격대들은 결국 만주지역을 포기하고 소련령 연해주로 도피하게 되었다. 북조선에서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신화의 절정으로 학습되고 있으며 정권의 정통성의 토대가 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한동안 보천보전투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고,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이 주도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위키백과
|
http://kr.blog.yahoo.com/ppis4988/trackback/125/28146
|
|
|
|
|
|
|
|
|
|

- 6.10 만세운동 70주년 기념 (1996.6.10. 발행) 
- 6.10 만세운동 75주년 기념 (2001.6.10. 발행) 6·10 만세운동 [六十萬歲運動]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융희(隆熙) 순종 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출상일)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 병인(丙寅)만세운동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전문의 이병립(李炳立), 박하균(朴河鈞), 경성대학의 이천진(李天鎭), 천도교의 박내원(朴來源), 권동진(權東鎭), 양재식(楊在植), 손재기(孫在基), 박내홍(朴來弘), 백명천(白明天), YMCA의 박두종(朴斗鍾), 중앙고보의 이선호(李先鎬), 이광호(李光鎬), 이황희(李晃熙), 사회주의 측의 권오설(權五卨), 김단야(金丹冶), 이지탁(李智鐸), 박민영(朴民英), 인쇄직공으로 민창식(閔昌植), 이용재(李用宰), 김항준(金恒俊) 등이었다. 권오설은 자금을 조달하였고, 박내원은 전단지 살포와 연락을 담당하였다. 양재식, 이용재, 백명천 등은 안국동 감고당(感古堂) 민창식의 집에서 10만매의 전단지를 인쇄하였고, 태극기도 준비하였다. 전단의 내용은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겨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라, 토지는 농민에게 돌리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시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황제 국장일을 거사일로 택하였다.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과거 3·1운동의 일을 거울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조선총독부 산하 전경찰과 일본군 5000여명이 경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8시 30분경 황제의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중앙고보생이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든 민중이 호응하여 관수교, 황금정 3정목(3가), 훈련원, 동대문 동묘(東廟), 청량리에 이르는 상여통과 예상 연도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은 그 후 전국으로 전파 확산되어, 순창, 군산(이상 전라북도), 정주(定州 평안북도), 홍성, 공주(이상 충청남도)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 박내원, 민창식 등은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呂運亨)과 연락하여,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전단 10만 매를 인쇄하며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이병립, 박하균 등 200여명이 체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 동모자 또는 관련자로 체포, 투옥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3·1 독립운동만큼 전국적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우리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민족운동이었다. /naver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창식, 이용재,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 권동진 등으로, 이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6월 10일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000여 명이었다.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영의 조직약화, 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6·10 만세운동은 실패하였다. 이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천여 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을 비롯한 다수의 공산당원이 체포됨으로써 제2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27년 신간회·근우회·신정회 등의 조직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위키백과
|
http://kr.blog.yahoo.com/ppis4988/trackback/125/28145
|
|
|
|
|
|
|
|
|
|

- 청산리전투(1920.10.21~26)
봉오동전투 [鳳梧洞戰鬪]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독립군의 연합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끈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무(安武, 1883~1924)가 이끈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 ?~1945)이 이끈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한경세(韓景世)가 이끈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였다.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北間島)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더 강력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군의 사기가
|
http://kr.blog.yahoo.com/ppis4988/trackback/125/28144
-
니기미 2009.06.29 10:10 [125.245.211.2]
-
한인애국단은 김구가 조직하고 이봉창 윤봉길 등이 활약하였다
답글쓰기
-
|
|
|
|
|
|
|
|
오늘 |
전체 |
|
| 방문자 |
98 |
1443680 |
|
| 구독자 |
0 |
704 |
|
| 댓글 |
0 |
13513 |
|
| 참조글 |
0 |
18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