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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5)
(19)박정희와 박한생 .
박정희 집안에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 박성빈의 3남 박 한생이다. 호적에는 그가 1911년 8월26일에 태어나서 1925년 9월26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정희가 여덟 살 때 한생은 열네 살에 죽은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기억에 한생에 대한 것이 남아 있을 터 인데 한번도 이 형에 대해서 언급한 자료가 없다. 박정희가의 가족들도 한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상모동 주변의 노인들을 상대로 취재 해보니 거의 일치된 증언이 나왔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는 것이다. 한 70대 노인은 익명을 전제로 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진설명 : 박정희 집안의 기둥감이었던 박상희는 아버지 박성빈의 성격을 많이 닮아 호담하고 외향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잘 생긴 외모에 타고난 인간적 매력을 가졌던 그는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신간회 선산지부에서 민족운동을 하며 수차례 일본 경찰에 검속당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지국장 겸 기자도 역임했던 박상희는 해방이후까지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고 재산도 제법 모았다. 현재 박정희 집안의 선산은 1930년대에 박상희가 구입한 것으로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이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박상희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사진은 1930년대 말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나 산이고 들이고 쏘다녔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상하다고 했지. 그 래서 학교도 안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누가 돌보아줄 수도 없 는 시절이라 혼자서 싸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집에 들어오고 그랬지 뭐." .
박정희와 함께 상모교회를 다녔던 한성도(82) 김삼수(83)의 증언도 일 치하고 있다. 김목사는 "박한생은 나무 작대기를 목검삼아 휘두르고 다니 다가 부러지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작대기를 달라고 하곤 했다"고 기억 한다. 박한생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호적 기재일시보다 한 3년이 늦은 1928년경이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또 박 한 생의 정확한 사인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박한생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 때문에 5·16 이후에는 야당정치인들에의해서 박정희 의장 의 형이 월북하여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증거도 없는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어머니 백남의에게는 한생이 가슴속의 그늘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집안의 빛은 셋째 형 상희였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닐 때 이 형은 20대의 건실한 청년으로서 구미면에서는 하나의 '인물'로 기 반을 잡아나가고 있었다. 박상희는 키가 크고 가슴은 뜨거운 청년이었다. 학력은 비록 보통학교 졸업에 그쳤지만 그는 타고난 수완과 인간적 매력 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박상희의 처 조귀분(작고)의 조카딸 조길수(76) 는 박, 조 두 사람이 1929년에 김천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화동으로 들러 리를 섰다.
"다른 사람들은 고모부 옆에 서면 왜소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인물도 훤칠했지만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고모부는 구미역 옆에 살 고 있었는데 놀러가서 마당에서 사람들이 시비를 가리고 있는 것을 몇번 보았습니다. 고모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그건 자네가 잘못 했네'라고 판결을 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원님 재판이었는데 희 안하게도 사람들이 거기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구미시 문화원 부원장 신기도(67)는 당시 구미 일대에서 이런 말이 유 행했다고 기억한다.
"최관호 김상호 박상희 이 세 사람을 두고 일관호,이상호, 삼상희라고 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모이면 그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사람들은 함 부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는 젊은 영웅들이었지요.".
구미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박상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박상희의 성격은 아버지(박성빈)과 비슷하여 호담하 고 외향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내향적이면서도 빈틈이 없고 당돌한 동생 정희와는 대조적이었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니고 있 을 때 상희 형은 구미역으로 나가서 지역언론인으로 자립하고 있었다. 그 는 민족언론을 기반으로 삼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지부와 청년단체를 조직했고 여러 차례 경찰에 구속, 연행, 예비검속되기도 하면서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러한 형을 가까이서 보고 자란 소년 박정희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박상희의 행적을 확인시켜주는 최초의 신문기 사는 1927년 10월14일자 조선일보 4면에 실린 '신간회기사일속'이란 제하 의 5단 기사였다. 맞춤법을 요사이식으로 고쳐 요약해 본다.
'경북선산지회 설립대회 - 경북 선산군 구미에서 전민족적 단일정당 인 신간회 선산 지회 설립을 준비한다는 것은 본보에서 이미 보도하였다. 설립대회는 지난 11일 오후 2시에 개최하려 했으나 엄중한 선산경찰의 간 섭으로 정각에 개최하지 못했다. 자동차로 시내에 '삐라'를 뿌리고 대회 선전을 하려 했으나 '삐라'만을 뿌렸다. 준비위원 박상희군이 경찰에 수 차질문을 하고 교섭하였으나 상부의 명이라며 절대 허가치 않음으로 '식 민지를 타도하자' 등의 글이 실린 집회도구는 모두 압수되고 정각보다 늦 은 오후 3시30분에 개회선언을 했다.'.
이 기사 아래에 연이어 보도된 내용은 박상희가 소환되었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경찰서에서 박씨를 소환 - 신간 선산 지회 설립 대회에 선산 경찰의 간섭이 심하다 함은 앞서 보도하였거니와 이 대회에 구산 구락부(균산구 락부)에서 축문을 보냈는데 그 축문 중 불온한 문구가 있다고 축문을 앞 수하고 구산 구락부 위원이요 설립대회준비위원인 박상희군을 대회일인 지난 11일 오후 1시경 현지 주재소에서 소환하여 서장이 취조실로 데리고 가서 장시간 요령부득의 말을 하고 같은 날 2시반 경에 돌려 보냈는데 일 반의 비난이 많다더라(선산)'.
1927년 1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전국에 1백50여 개 지 회를 두었고 회원수는 4만여명에 이르렀다. 일제치하에서 가장 큰 항일 사회운동단체였던 신간회는 1920년대의 조선에서 양대 항일운동세력이었 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민족협동전선론'으로 뭉친 조직이 었다.
신간회 창립 때 51명의 간부진 중에서는 조선일보계가 회장 이상재(조 선일보 사장)를 필두로 하여 안재홍(조선일보 주필) 신석우(조선일보 부 사장) 등 9명으로 가장 많았다. 기독교계가 조만식 등 7명, 불교계가 한 용운 1명, 천도교계가 권동진 등 3명, 유림계가 김명동 등 3명, 학계가 조병옥 등 4명, 조선공산당계가 김준연 홍명희 등 5명. 조선일보는 '신간 회의 결성을 적극 지원하여 그 대변지 구실을 하였다'(이균영의 '신간회 연구'). 조선일보는 1926년 12월16일부터 연4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신간 회의 방향을 제시했다. 타협론자들이 조선 자치운동에 동조할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민족해방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신간 회 준비 모임도 주로 조선일보사에서 열렸다.
조선일보가 신간회 선산지회 박상희의 소환사건 등 일제의 탄압을 집 요하게 보도한 것도 조선일보와 신간회의 깊은 관계를 반영한다. 1927년 11월14일자 조선일보의 신간회간부 검거 기사에도 박상희의 이름이 등장 한다. 이 기사에는 박상희가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로 기재되어 있다. '경북 경찰부원이 돌연 신간회원 검거 -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치 어 - 불안에 싸인 구미(균미) 일대'라는 제하의 대구발 기사를 읽어보자.
'강북 경찰부 고등과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중에 최석현 경부보는 형사 세명을 데리고 구미(균미)까지 가서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 박상희, 구산구락부원(균산구락부원) 윤재우 김정술 3씨를 검거한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3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십일 오후 열시경에 대구로 압송 하여 대구서 유치장에다가 유치한 후에 방금 극비리에 취조하는 중인 바 모처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방금 구미(균미)에서는 조금만 수상한 사 람이 지나가면 즉시 불문곡직하고 검속함으로 인하여 현재 구미 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싸여 있는 모양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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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4)
(18) 의형제 김삼수목사 .
1979년 10월25일 오전8시경 청와대 출입문에는 63세 된 노인 한 사람이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야간열차로 올라와 대통령을 만나려 다 정문에서 제지당해 끝내 돌아서야 했던 길이었다. 이 노인은 소년 박정희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의형제를 맺었던 김삼수(당시 경북 금릉군 송천교회 목사·현재83세)였다. 김목사는 대구로 내려온 다음 날밤 두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사진설명 : 앞에서 둘째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박정희와 결의형제를 맺은 김삼수. 구미 보통학교 제9회 졸업생으로 박정희보다 2년 앞선 1930년에 졸업했다. 키가 작고 몸도 약했던 김삼수는 '그래도 박정희보다 튼튼하고 큰 편이었다'고 회고한다. 상모리에서 박정희와 함께 통학했던 한해수는 앞에서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에 보인다.
10월27일 아침에 편지를 부치려던 김목사는 방송을 통해 대통령 의 서거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기자는 지난 1월7일 저녁에 대구에서 김 목사(현재 기독교 장로회 경북 노회 공로목사)를 만나 보았다. 김목사는 상모리에서 소년 박정 희와 함께 상모교회와 보통학교를 다녔던 친구였다.
"교회는 여름방학때마다 '하계학교'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요, 동화, 율동, 설교, 성경 암송 등을 배웠어요. 그때 칠곡군이나 선산군에서 연합 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일본 경찰도 와서 참관했습 니다. 박정희는 노래나 동화구연을 아주 재치있게 잘했어요. 상모 교 회에서는 나와 정희 그리고 정규만 이렇게 셋이서 출전해 1등을 했지 요.".
박정희 소년은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구약의 장면 을 특히 좋아했다. 박정희가 보통학교 4학년 때였다.박정희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김삼수와 놀다가 의형제를 맺는 의식을 치른다.
"그때 결의형제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먹물 먹인 실을 바늘에 달고 팔뚝에 약간 꿰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되지요.우리는 서 로 오른팔에 문신을 새기고 팔을 걸고 맹세를 했지요.".
김목사가 걷어 붙인 오른 팔목에는 쌀알 크기의 푸른 문신이 남아 있었다. 김목사는 어린시절부터 박정희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박정희 의 셋째 형 박상희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랑방에 가면 박상희 형님이 우리들에게 그렇게 후덕하고 인자 하게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우리들에게 공부하는데 격려를 해 주 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 분이 우리들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해 주시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목사는 소년시절부터 박정희를 남들과 다른 친구로 기억하여 왔 다.
"저와 정희는 둘 다 체구가 작아 유난히 어른들로부터 걱정을 많 이 샀는데, 박정희는 나보다 더 작았어요. 둘이 팔씨름을 하면 비슷 했지요. 그런데 박정희는 지더라도 끝내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이길 때까지 계속하자는 겁니다. 학교에서도 온갖 장난을 다 쳤지요. 그럴 때마다 정희는 매우기민하고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겁 니다.".
박정희는 누구와 씨름을 하다 지게 되어 섭섭하고 분할 때면 새끼 손가락만을 편 오른 주먹을 쑥 내 보이며 상대방에게 흔들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내 새끼 손가락보다 못하다'는 뜻 이었습니다. 야망이 있는 아이였어요.앞산에 오르면 제게 이순신, 나 폴레옹, 링컨…그는 늘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 나 교과서에서 나오는 일본 영웅들을 숭배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너는 앞으로 군인이되면 위대하고 기개있는 장군이 되어 성공할거야'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김삼수는 구미 공립보통학교를 9회로 졸업했고 박정희는 11회로 졸업했다. 김삼수는 와세다 중학과정을 통신강좌로 마친 뒤 과수원을 가꾸다 해방을 맞았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신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에 들어 간 그가 박정희를 다시 만난 것은 1946년 여름 서울 남대문에서였다. 박 정희가 먼저 알아 보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어이, 친구. 여기 어찌 왔노." "정희구나. 나는 여기 신학교에 왔네." "그럼 힘써 하세!".
박정희가 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 왔던 때로 추정된다.
"우리 세대의 소망은 '힘써 하세'란 말 속에 다 들어 있었습니 다. 그는 언제나 '우리는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1961년 5월16일에는 김삼수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되어 대 구 성락교회에서 봉직할 때였다.
"신문을 보니 군사혁명이란 글자 아래로 박정희란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닙니까. 그때서야 박정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던 모습이 떠 올 랐지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1963년 10월 그는 기쁨에 찬 편지를 통 해 이렇게 썼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하나님이 만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민족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폭압정치에서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도록 합시다.'.
그는 "설교같이 편지를 썼지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김목사는 그 후 매년 한 두 차례씩 장문의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박대통령은 답장 을 보내왔다. 박대통령의 감동적인 답장은 1965년 경에 있었다고 기 억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도'라는 제목의 긴 글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너무 겸허하게 답장을 보내 주셨더군요. '친구의 충고를 정말 고 맙게 받는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을 생각한 바대로 쓴 글 이었습니다.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런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감 사하다고 기도를 했지요.".
김목사는 그때부터 동료 목사나 교인들에게 '이런 대통령이 어디 있냐'며 자랑했다. 쿠데타를 했다고 친구를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그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젊은 목사가 찾아와 박대통령을 비판하면 그는 "제대로 모르면서 그런 말 하는 법이 아니다. 네가 진 실로 목사가 되려거든 박대통령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되어보라"고 되 받았다.
1970년대 초까지 청와대에서는 조찬기도회를 매년 열었지만 김 목 사는 참석만 하고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피했다. 오직 필요할 때 장문의 편지로만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1978년 추석 무렵 김목사는 경북 금릉군의 송천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오랜만에 금오산을 오른다. 때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가족 들과함께 이곳을 찾았다가 두 사람은 34년만의 해후를 했다. 그 순간 김목사는 '인의 장막' 속에 친구가 갇혀 있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가을에는 부마사태가 터졌지요. 며칠을 기도하며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하 고 10월25일에 청와대로 달려갔습니다만….".
그는 역사속으로 먼저 간 친구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로 박대통령이 조금 잘못한 것은 겸손하고 물러날 때를 잡 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둘째는 우리 민족에게 있 습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잘되면 질투를 하고 어떻게 되든 모함을 하 는 버릇입니다. 세번째는 인의 장막이지요.".
김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종을 우리 민족이 바로 받지 못하고 죄 를 지었습니다. 반성해야 합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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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3)
(17) 장택상가와 박정희가 .
1930년 당시 박성빈의 차남 박무희는 '도롱미골' 천수답 다섯 마 지기를 소작하며 살았다. 비가 오지 않으면 아예 농사를 포기해야 했고 그나마 논두렁이 대부분으로 경지면적이 아주 작아 소작인으로 서는 상당히 애로를 감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 논은 아랫마을 칠 곡군 북삼면 오태동에 사는 장택상의 선친 장승원 집안의 땅으로서 지주집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가을 박무희의 큰 아들 박재석은 아버지가 지게에 쌀 가마 를 싣고 도조(소작료)를 내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지 게 위에는 닭 한마리가 새끼줄에 묶여 있었다.
사진설명 : 경북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에 있었던 장택상의 선친 장승원의 집. '십만거부'로 불렸던 이 집 마당엔 가을마다 소작인들이 싣고 온 쌀가마니가 그득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중형 박무희도 이 집안의 토지 중 일부를 소작하고 살았다. 지금은 장씨 집안의 그 누구도 이곳에 살지 않고 있다.
"아부지예, 닭은 와 가져 갑니꺼?" "그 도조 검사하는 사람한테 줄거야.".
박정희 집안과 장택상 집안은 소작농과 지주사이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현대사의 여러 굴곡점에서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 면서 우리 사회의 음영을 그리게 된다.
1917년 11월9일 저녁6시 칠곡군 장승원의 집에 '상주군에 사는 공'이란 사람(실제인물은 채기중)이 찾아 왔다. 그는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했다. 장승원은 아들 장직상의 방에 가서 자도록 허용했다. 이날 밤 10시 장직상이 아버지 방으로 가서 문안을 드리고 자신의 방에 오자 손님이 와 있었다. 서로 인사한 뒤 두 사람은 이 방에서 같이 잤다. 다음날 아침 장직상은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렸다. 장승 원은 아들과 함께 아들방으로 건너와서 손님과 인사를 했다. 아침 식사를 끝낸 손님 공씨는 서울로 간다면서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공씨로 위장하였던 채기중은 장승원의 집을 나와서 동료 이형락, 강순필, 유창순과 만나 권총 한 자루씩을 주고 어두워질 때까지 기 다렸다. 음력 9월26일이라 그믐처럼 어두웠다. 암살자들은 일부러 이날을 받았다. 이윽고 채기중은 강,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장승원의 집으로 갔다. 장승원은 거실에서 막 저녁상을 물리고 있었다. 채기 중은 강,이 두 사람에게 "저 자가 장관찰이다"고 가르쳐주고 뛰어나 와서 담에다가 포고문을 붙였다. '조국광복에 협조하지 않는 대죄인 을 처단한다'는 취지의 포고문이었다. 그때 총성이 들리면서 세 사 람이 뛰쳐나왔다. 채기중도 같이 달아났다. 장승원은 대구 자혜병원 에 입원했다. 왼쪽 무릎에 박힌 총탄은 뽑았으나 목에 박힌 총탄을 뽑지 못하고 이틀 뒤인 11월12일에 사망했다. 일본헌병은 장승원이 죽기 전에 사정청취를 했다.
박정희가 태어나기 나흘 전에 있었던 이 사건은 우리 독립운동사 에 '광복회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지휘자인 박상진은 경주사람. 규장각의 부제학을 지낸 박시규의 장남으로서 대대로 고 관이 많이 나온 양반 집안출신이었다. 그는 16세 때까지는 집안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선산군 출신인 참정 허위)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상진은 21세 때까지 허위로부터 훈도를 받다가 서울 양정의숙으로 옮겼다. 여기서 법률경제학을 공부하여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하였다. 허위선생이 일제의 통감부 설치에 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 되어 1908년에 사형을 당하자 박상진은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그는 중국혁명상황을 시찰하러 가서 권총 을 10여 정 구해서 갖고 들어왔다. 박상진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권 총을 나누어주면서 광복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작전을 벌이기로 한 다. 전국의 조선인 부호들에게 취지문을 보내어 호응하지 않으면 처 형한다고 알렸다. 이들 부호들 중에는 장승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7년 10월에 박상진은 김한종과 유창순에게 장승원을 암살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항소심 판결문 인용).
'원래 그 자가 이왕과 소송을 벌이고 소작인을 괴롭히고 경북의 유력자임으로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 소문이 전도에 전파되면 광복회 의 사업을 추진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광복회 회원들은 장승원을 암살한 3개월 뒤에는 충남 도고면장을 살해한다. 그 사건의 지휘자인 김한종은 부하들에게 박용하 면장을 살해해야 하는 이유로서 이렇게 설명했다.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를 헌병에게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악인인데다 광복회를 불찬동하고 의연금을 내지 않으므로 이 를 죽여 타에 대한 위협으로 삼아야 한다.'(항소심 판결문).
1917년 음력12월12일 이른 저녁, 박용하의 집에 김경태와 임동근 이 들어왔다. 이 집에 살고 있었던 인원배는 예심조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나의 방으로 들어와 면장이 있느냐, 거기에 안내해달 라고 하기에 고모부 박용하의 방에 안내해주었다. 그 사나이는 면장 에게, 전번에 보낸 문서는 보았는가 하고 묻고 고모부가 보지 못했 다고 대답하자 문 밖에 있는 한 사람에게 한 장의 종이 쪽지를 받아 이것을 박용하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박용하는 그것을 다 읽고 지 금은 돈이 없으므로 연기해달라고 했다. 그 자는 안된다고 하면서 권총을 박용하에게 들이대 발사했다. 나는 현기증을 일으켜 그 자리 에서 쓰러졌다. 이윽고 정신이 들어 내실에 통지했으나 박용하는 몹 시 괴로워하다가 30분쯤 지나 절명했다.".
장택상(작고)은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했고 그의 형제들도 무장독 립군에 군자금을 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택상의 딸들은 몇년 전 할아버지 장승원을 '친일파'라고 부른 한 학자에 대해서 근거가 없 는 모함이라고 항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그들은 박상진과 그의 동 지들이 '일본인은 한 사람도 공격하지 않고 조선 사람만 죽인 것이 과연 독립운동인가'라고 항변했었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에 이 장승원 사건에 대해서 많이 들으면서 성장하였을 것이다. 셋째 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쪽으로 기울고 있었 기 때문에 자신들의 집안이 소작을 하고 있는 대지주 장승원에 대하 여 일정한 의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장택상은 미 군정시절에는 수도경찰청장으로서 좌익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46년 10월의 대구폭동이 구미로 파급되었을 때 박상희 는 이 폭동에 연루되었다가 군정 경찰에 의하여 사살된다. 장택상은 지주정당이라고도 불렸던 한민당의 핵심인사였다. 장택상 국무총리 는 1952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펴고 국회를 위협하여 대 통령 직선제 개헌을 도와 발췌개헌안을 성사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의 작전국 차장으로서 국장이던 이용문 장군과 함께 이승만 을 제거하는 모의를 하고 있었다. 5·16 뒤에 박정희는 한민당-자유 당-민주당계열의 구정치인들을 정계에서 배제하려 하는데 장택상은 반박진영의 지도자로 있었다.
이 장택상의 정치적 문하생이었던 사람이 김영삼 현 대통령이고 김대중 차기 대통령도 1950년대 중반에 잠시 그의 비서역할을 한적 이 있었다. 한국현대사라는 캔버스에 그린 장택상과 박정희의 이런 대칭적인 역정은 지주와 소작농 출신이라는 환경의 차이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사회적 출신환경이 한 인간에게 던져 주는 어떤 제약의 존재를 느끼게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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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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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자와 지주 곧 그들은 이조당시 조상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갖고있었다 무슨대비 한상희 그들후손들이지금도 많은 산도가지고있다 우리나라의 전국토에 논밭이장택상이것아닌것별로없었다 우리도 소작자이였어니까 해방후 토지개혁이이승만대통령령으로 시행했다
가족몇명이면 그이상토지는 소작자에게 상환으로 물려주라는법이다
샅샅이조사하여 단행했다 그래도 남의친척명의로 빠져나간것뿐이지 친일파라고해서 가진것도있겠지만 개인소유권은 인정했다 빨갱이식이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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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2) (16) 초등학교 성적표 .
구미 초등학교(교장 장재규)가 보관중인 박정희의 졸업원부에는 '학 업성적'과 '신체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1927년 4월1일부터 1932 년3월25일까지 매 학년마다 기록된 성적은 과목당 10점만점이 기준이다.
사진설명 : 지금 구미초등학교에 보존되어 있는 박정희의 성적표에는 만점(10점)이 많다. 그는 특히 역사, 지리, 산술, 조선어에서 성적이 좋다. 이런 경향은 그가 대통령이 된 뒤까지 계속되어 그는 숫자에 밝고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박정희의 성적표엔 8점 미만은 전무하다. 박정희의 동창생 박승용(82) 은 보통학교시절 성적은 항상 박정희, 김장호(사망), 김홍기(사망), 박 승용 순이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성적표에 기재된 과목은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산술, 국사(일본역사), 지리, 이과(생물과 물리), 직업, 도화, 창가,체조, 가 사실습 등 12과목에 조행평가가 곁들여 있다. 이중 국사,지리,이과, 직 업, 가사실습은 상급학년(4학년 이상)에서만 배웠다. 이들 과목은 일본 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부터 내용이 변해 군국주의적 경향을 강 하게 드러내고 조선어 사용규제와 일본어 공용 방침을 엄격하게 적용하 기 시작한다. 박정희가 졸업할 무렵부터였다.
박정희가 6년 동안 가장 성적이 나쁜 과목은 체조였다. 3학년때 8점, 나머지는 9점이었다. 체조 다음으로 저조한 과목은 창가였는데 5학년때 까지 9점만 받다가 6학년에 와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6학년때 그의 성 적은 13개 과목 중 체조와 가사실습만 9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만점인 10점이었다.
박정희가 특히 잘한 과목은 국어(일본어)와 조선어 및 역사와 지리 였다. 5,6학년 때는 모두 10점 만점을 기록한 과목들이다. 이때가 이 순신과 나폴레옹에 심취한 시기로서 이 소년의 역사에대한 호기심이 하 나의 성격으로서 굳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6년간 그의 조행 평가는 항상 갑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고란엔 1,2, 5,6학년에 우등상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학년별로 살펴볼 때 가장 성적이 나빴던 해는 3학년과 4학년 때였 다. 3학년(1928년) 때는 10점 만점을 받은 과목이 한 과목도 없고, 9점 과목이 넷, 8점이 셋이었다. 4학년이 되면서 성적은 다시 좋아지기 시 작한다.
매년 2백51일의 출석일수 중 개근한 해는 한번도 없었다. 몸이 아파 결석한 날은 1학년 때 18일, 2학년 20일, 3학년 16일, 5학년1일, 6학년 때 3일이다. 4학년 때는 사고로 9일간 결석했다고 적혀있다. 저학년이 던 시절 병결로 기록된 날 가운데 어느 하루는 늑대를 보고 집으로 되 돌아간 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병으로 결석하 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의 발육상태 기록을 보면 1학년 때 129.9cm이던 키가 6학년 때는 135.8cm로 6년간 겨우 5.9cm가 자랐다고 되어있다.체중은 1학년때 15.4kg 이던 것이 6학년에 와서는 30kg이 되었다. 시력과 청력 치아 등 기타 사항은 모두 정상판정을 받지만 신장, 체중 및 흉위를 합산해 발육상태 를 평가하는 개평란에는 6년 내내 '병' 판정을 받고 있다. 체조 점수가 저조한 까닭은 그의 발육부진에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성적을 셋째 형 상희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점이 드러난 다.박상희는 박주생이란 이름으로 만 열다섯 살이던 1920년4월1일에 구 미 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4학년을 마치고 1923년3월24일에 졸업했 다. 당시는 4년제였다. 4학년 성적을 보면 8개 과목중 10점 만점에 9점 을 받은 과목이 수신, 조선어, 산술, 이과, 도화였고 나머지는 8점이었 다. 품행을 의미하는 조행은 을의 평점을 받았다. 3년간 병으로 결석한 날 수는 7일이고 신체발육상태는 갑이었다. 박상희는 4학년으로서 졸업 하자마자 6년제로 변한 이 학교에 5학년으로 재입학했다. 1925년에 졸 업할 때의 6학년 성적을 보면 11개 과목 중에서 조선어, 지리에서 만점 인 10점을 기록했고 체조에서 8점, 나머지 과목은 모두 9점이었다. 조 행도 갑을 받아 고학년으로 오를수록 성적이 좋아졌다. 만 20세에 졸업 한 박상희는 곧 동아일보 선산지국의 기자가 된다. 그는 향학열을 가슴 에 묻고 있다가 나이 24세이던 1929년에 대구사범에 응시하여 낙방한것 으로보인다. 1970년 무렵에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던 김종신이 박대 통령에게 '박상희씨가 대단한 수재였다던데요'라고 하자 대통령은 다소 퉁명스럽게 "형은 대구사범 1회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는데 뭘"이 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학적부에는 '입학 전 경력'으로서 '한문을 수학'이라고 적 혀있다. 누님 박재희에 따르면 박정희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박정희는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갔 으니 시간을 상당히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어머니 백남 의는 막내에게 사랑채의 한 방을 공부방으로 내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나만의 공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박정희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 는 사람'으로 만드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나만의 공간'은 사교성이 약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자립심을 키우기도 한다. 누님의 증언 에서 이 소년의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정희가 검정 고무신을 신게 된 것은 5학년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사다주셨어요. 그날 밤 그것을 품에 꼭 안고 자더니 다음날 학교에 갈 때는 짚신을 신고 고무신은 학교에 가서 신는다고 들고 가더군요. 정희 는 또 아버지에게 자그마한 갈쿠리와 지게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공 일에는 뒷산에 올라가 빨간 갈비를 끌어모아 묶음을 만들어 두어요. 그 리곤 아무도 손을 못대게 해요. 이것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어머니 한테 팔아달라고 해서 돈이 생기면 공책과 연필 따위를 사곤했습니다.".
조선총독부 농림국의 통계를 보면 1910년 우리나라 농가의 평균경작 면적은 1정보, 즉 3천 평이었다. 1936년 조사에서는 이것이 1.61정보로 늘어난다. 박정희가의 경우, 위토답으로 경작하고 있던 외가쪽 문중 소 유인 1천6백 평이 전부였다. 박정희 집안은 우리나라 평균에도 못미치 는 빈농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박정희가 5학년이던 1930년의 통계에 따 르면 전국의 농가중 박정희 집 같은 소작농이 약 45%, 자작겸 소작농이 약 31%, 자작농이 약 18%, 지주가 3.6%였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 지주와 소작농가수는 계속 늘었고 자작농가수는 줄었다. 농촌에서는 빈 부 차이가 극심해지고 있었다. 일제는 대지주를 보호하는 정책을 썼고 일부 지주들은 친일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계급적인 모순 속에 놓인 박정희 집안에서 신학을 배우게 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사회주의운동 가의 길을 걷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군인의 꿈을 키운다.
박정희 집안은 지주와 순사로 상징되는 지배체제에 대한 반감을 가 질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는 칠곡군의 대지주 장승원으로부터 논 다 섯마지기를 빌어 소작하고 있었다. 박무희의 장남 재석은 "할아버지(박 성빈)께서 장관찰(장승원은 대한제국 시절에 경북 관찰사였다)의 집을 출입하셨는데 그 인연으로 해서 소작을 하게 된 것이아닌가 한다"고 했 다. 당시의 소작료에 대해서 박재석은 "7(지주에게 내는 비율)대 3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장승원은 미군정 시절에 수도경찰청장으로서 공산당 소탕에 앞장 섰고 뒤에는 국무총리를지낸 장택상(작고)의 선친이다. 장 승원의 선친은 장석룡으로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가는 지주로 불리기도 했는데 연간 7만5천석 의 소작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요사이 금액으로 환산해도 연간 1백억원 대 이상의 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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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네, 보이소" .
언론인 출신 청와대 공보비서관 김종신이 쓴 '박정희 대통령 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상모리는 겨울에는 유난히 추웠습니다. 들판이 트인 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 강바람이 대단했습니다. 모래바람이 불 때는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고, 눈보라는 살점을 에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두껍게 솜을 드린 바지저고리에다 목에는 목수건을 감아 얼굴까지 덮게 하고, 귀에는 귀막이까지 하고 눈만 빠꼼히 나오게 여며 주셨습니다.'.
사진설명 : 박정희 집안은 소작하는 농토가 약 1천6백평에 불과한 빈농이었다. 당시 조선의 농가당 평균 경작면적은 약 4천평이었다. 가난한 소작농 출신이란 것이 지주계급과 권력남용에 대한 박정희의 반골의식을 더욱 강화했던 것 같다.
기자는 소년 박정희의 활동공간이었던 통학길과 상모동 주변을 느껴 보려고 겨울에 맞추어 답사를 했다. 대문을 제외하고는 산자락으로 빙 둘러싸인 박정희 생가는 울타리가 없는 대신 대나무와 탱자나무숲에 포 위되어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대나무와 탱자나무들은 박정희의 키를 닮았는지 그다지 크지 않다. 생가 부근에는 큰 나무가 없다. 박정희가 어머니 손길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새벽밥을 먹고 나서던 삽작문 부근에 서 동리를 내려다 보면 멀리 낙동강이 아련하게 보인다. 지금은 앞을 가 로 막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잘 볼 수 없지만 1920년대 그 무렵엔 낙동강 에서 피어오르던 자욱한 물안개가 흐릿하게 보였다고 한다.
아랫마을에서 이 집으로 도달하는 길은 구불거리는 소로와 논두렁 밭 두렁뿐이었다. 그 나머지 공간은 밭이기도 했고 논이기도 했으며, 혹은 잡풀들이 솟아난 벌판이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낙동강에서 불어 오는 찬바람은 마치 이 집을 향해 몰려드는 것처럼 매서웠다. 박정희의 집은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방향인 동쪽으로 대문이 나 있다.
생가로부터 5백여m 아래로 철로가 지나가고 있다. 1905년 5월28일 개 통된 경부선이다. 경부선은 1911년 11월1일 압록강 철교가 준공되자 남 만철도와 연결되어 북경까지 갈 수 있었다. 경부선은 원래는 구미를 지 나지 않았다. 칠곡군 약목에서 금릉군의 부상을 거쳐 김천으로 빠졌다. 박정희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916년에 금오산 우회철도공사가 완공되 면서 약목-구미-김천으로 노선이 변경되어 박정희의 집 앞을 지나게 되 었다. 이로써 구미역은 선산군 일대의 경제-문화적 관문이 되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특급열차는 4대가 있었다. 하얼빈까지 가 는 '히카리(광)', '쓰바메(연)'와 북경(북경)까지 갔던 '노조미(희망)', '다이리쿠(대륙)'가 그것이다. 생가에서 박정희의 어머니가 학교에 가는 막내를 뒤따라 나와 배웅하던 '청녕둑'이란 곳까지는 잰 걸음으로 10분 거리. 이곳은 현재 야트막한 언덕으로 변해 있지만 당시엔 나무가 많았 다. 청녕둑을 지나면 사곡동으로 이어진다. 박정희가 '나의 소년시절' 에서 '사곡동 뒤 솔밭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가끔 늑대가 나와 혼자서는 다니지 못했던길'이라고 썼던 이곳은 현재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도로 가 가로지르고 도처에 주택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박정희가 새벽같이 학교로 걸어가야 했던 길은 철로변을 따라 구불구 불 이어진 논두렁과 소로였다. 소년 박정희는 상모동에서 출발해 사곡동, 광평동, 송정동을 가로질러 원평동의 구미역 부근까지 철로변을 따라 걸 어야 했다. 편도 8㎞라면 어른들의 보속으로 두 시간 거리다. 어린소년 이 매일 오전 8시에 시작하는 수업에 맞춰 집을 나서야 했으니 새벽 5시 가 조금 넘을 때 출발해야 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기자가 걸어 보았다. 아침에 어머니가 배웅하 던 청녕둑에 다다를 때까지는 산 구릉에 파묻힌 그의 집은 보이지 않는 다. 그 대신 밤하늘 아래로 검은 산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다. 박정희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맡추어 청녕둑 근처에서 해질 무렵의 서쪽 하늘 을 보면 금성과 수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해뜰 때나 해질 무렵이면 우 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별이지만 청녕둑 근처에서 보는 이 별은 유난히 밝다. 별이 뜨는 방향으로 검은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상대적으 로 별이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차길을 따라 약 1㎞쯤 걸어가면 철 길 아래로 흐르는 하천과 만난다. 금오산에서 시작되어 구미공단을 통과 해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이 하천은 현재 복개되어 콘크리트 틈 사이로 겨우 바닥을 볼 수 있다. 구미 보통학교 아이들은 이 철길 아래 모래사 장에서 자주 놀았다고 한다. 김재학(71·박정희 생가 보존회 회장)은 박 정희와 권해도의 씨름사건을 들려주었다.
"그분은 키가 작아 권군의 가슴에 찰 정도였지요. 그 날도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물장구도 치고 씨름도 하곤 했는데 박정희와 권해도가 한 판붙게 됐답니다. 권해도가 이겼지요. 그런데 박정희는 자신이 이길 때 까지 계속하겠다고 우겨 아이들도 끝까지 심판을 봐야 했다는 겁니다. 씨름은 해가지고 나서도 계속되는 바람에 권해도가 기권해버렸답니다.".
머리 속엔 이순신을, 가슴속엔 나폴레옹을 품고 다니던 말없는 학생 박정희는 승부에 대한 집요함을 벌써부터 키워가고 있었던 듯하다. 소년 은 노는 날이면 앞산에 올라 혼자서 목검놀이를 하든가 아니면 동네 아 이들을 모아놓고 전쟁놀이에 열중했다고 한다. 유아기의 정희에게 젖을 물려주었던 큰 누나 박귀희는 아들 은희만(61)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었다고 한다.
"정희는 산에서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 놓고 대장처럼 명령하곤 했단 다. 나무칼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면서 '저거 때려 부셔!'라고 소리치곤 했지.".
박정희가 군인을 동경하게 된 한 계기는 밀주단속을 하던 일본 순사 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김재학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일본 순사들이 밀주 단속하러 온다고 하면 정희네 식구는 집 안에 감춰두었던 술독을 대나무숲 속에 파묻는다고 야단이었지요. 그 시대에 구미면에 일본 순사가 세 명인가 있었는데 모두 무서워 했습니다. 그런 데 일본 순사가 상모리에 나타났을 때 마침 일본군인과 시비가 붙은 걸 박정희가 보았답니다. 제 아무리 일본 순사라 해도 군인들에게는 굽신거 릴수밖에 없었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지요. 박정희는 이 장면을 유 심히 보더니 '나도크면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말했답니다.".
박정희는 권력을 지향하면서도 남용되는 권력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품고 있었던 사람이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런 반골의식을 버리지 못 했다. 이런 생각이 싹튼 것이 일본 순사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그럴듯 해 보인다. 박정희가 다니던 구미 보통학교 바로 옆에 선산경찰서 주재 소(요사이의 파출소)가 있었고, 박정희의 큰형은 긍융조합에 돈을 갚지 않는다고 순사들이 잡으러 다니는 것을 피해서 만주로 달아났다. 뒤에 나오지만 셋째형 상희는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경찰서에 자주 불려가고 예비검속을 당하고 있었다. 소년은 순사의 권력을 가깝게 느끼면서 자랐 다. 구미 주재소에는 기타하라(북원)라는 순사부장이 있었다. 조선사람 들이 문패를 삐딱하게 달거나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불러서 혼을 내곤 했다. 한 유지가 '잘 봐달라'는 뜻에서 장닭을 선물했다. 일본 인 처가 일본식으로 닭을 잡는데 먼저 닭의 털을 뽑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던 닭이 털이 뽑혀 햐얀 살이 드러난 채로 후다닥 달아났다. 기타하 라의 처는 이곳저곳 골목을 누비면서 조선사람들을 보고는 이렇게 하소 연했다고 전한다.
"아노네, 보이소. 계라니노 아버지노, 저고리노 벗어하고 도망갔소, 못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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