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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세계 名將열전(13) - 손자(孫子·순쓰)

2006.12.18 23:33 | 세계 전쟁사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3485 주소복사

손자는 B.C. 4세기 중국 춘추시대 말기, 전국시대 초엽 오(吳)나라의 장군이며 유명한 군사전략가이다. 그는 원래 제나라 사람으로서 동향인 오자서(伍子胥)의 추천으로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섬기면서 그의 패업(覇業)에 공헌했던 장군이다.

손자는 전투현장의 일선지휘관으로서 보다 불후의 군사전략 명저,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저서외 그의 사람 됨됨이라든가 활약상을 확실히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손자병법 연구자들이 소개하는 손자의 인물평은 간단하다.


군령이 곧 군의 생명임을 강조

그의 본명은 손무(孫武)로서 제(齊)나라 출신이다. 오나라는 오늘의 소주(蘇州)근처에 도읍을 정했고 제나라는 산동성 근방을 가르킨다. 그는 병법에 통달했는데 오왕 합려가 그의 저서를 통독한후 그를 불러 병법의 몇가지 실제를 물어본다음 그를 군 지휘관으로서 임명했다. 합려가 손무에게 면접삼아 군지휘요령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차출해 이들을 2개대(隊)로 나눠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손무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도끼를 들고 전원이 알아듣도록 구령을 했다. 그는 북을 치면서 전후좌우 동작을 요구하는 구령을 몇번씩 되풀이했는데도 궁녀들은 킬킬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손무는 이런 동작에 대한 구령을 되풀이했는데도 궁녀들이 계속 말을 듣지않자 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대장 두사람을 훈련장에서 처벌하고 새로이 대장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때 손무는 "이부대의 장수는 신(臣)이며 장수가 군을 지휘할때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수도 있아옵니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이 훈련에서 군령이 곧 군의 생명이라는 교훈을 깊이 심어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후 궁녀들은 구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기침소리 하나 없이 군사훈련을충성스럽게 해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때 합려는 손무가 빼어난 용병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현장 확인하고 그를 휘하 장군으로 썼다. 오나라는 그후 강국인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제압했는데 이는 모두 손무의 공으로 이룩된 업적이었다.


최고의 병서로 인정받는 '손자병법'

그후 오나라가 손자의 군사전략으로 강대국으로 비약하자 오왕 합려는 마침내 교만해지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국정이 날로 문란해졌다. 손자는 이에 실망한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흰구름과 들의 학을 벗삼아 여생을 유유자적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은 특히 대적(對敵)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중요시 하면서 여러 가지 속임수와 적 내부갈등조장, 적군 동맹국간의 이간질등을 많이 열거하고 있으나 이것은 병법일뿐 그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고고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저서명인 동시 저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子)라고 하는 것은 옛날 동양에서는 남자에 대한 미칭(美稱)으로서 고인의 글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창작에 의해 일가를 이루면 그 글을 ‘자서(子書)’라고 불렀다. 예컨데 장자(莊子), 노자(老子), 순자(筍子), 한비자(韓非子)등과 같은 것이며 성인(聖人)의 저서는 경서(經書)라고 부른다.

손자는 전략전술을 담은 병서(兵書)인 동시에 국가 및 기업경영과 처세수양(處世修養)을 위한 기본 독본이기도 하다. 근자 우리나라를 비릇해서 일본, 미국, 유럽등지에서 손자병법이 정치, 경제, 외교에 있어서도 하나의 비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손자병법을 군사전략의 성경(聖經)이라고 칭찬하고 일본인들은 세계 제1의 병서이며 동방병학(兵學)의 비조(鼻祖)로 받들고 있다. 2차대전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 천하통일에 성공한 마오저둥도 정보심리전과 게릴라전을 위해 손자병법에 탐익했고 통일 베트남의 국부(國父)호치민(胡志明)과 베트남 게릴라전의 영웅 보구엔지압장군, 나폴레옹등이 모두 이 손자병법을 활용했다.

6·25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중공(中共)군의 전투행태를 봐도 마오저둥을 비릇 중공군 지휘관들이 손자병법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낮에는 쉬고 밤만 되면 인해전술로 북과 징, 꾕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돌진하는 전투행태가 모두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이다.

손자병법을 이용하는 북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을지문덕, 이순신장군등이 이 병서의 전략전술을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의 전략전술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측은 북한이다. 처음에는 김일성, 그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등이 해방후부터 지금까지 대남적화전략목표 달성을 위해 이 손자병법에 주로 의존해왔다고 할 수 있다.

손자는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할때 쉬면서 적과 담판하고 적이 약하고 아군이 강할 때 공격하며 몰아부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적이 강할때는 군사력동원보다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극대화해서 적내부에 갈등을 조장하며 분열을 일으키로 적과 적의 동맹국을 이간질해 적내부의 힘을 분산, 무력화 하도록 손자병법은 기술하고 있다.

북한측이 근자에 마침 핵문제를 둘러싸고 남북간, 북미간 마찰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때‘우리민족끼리 통일’구호아래 ‘민족자주’, ‘민족공조’를 날마다 내돌리며 극력 선전하는 것도 손자병법에 따른 우리 내부분열과 갈등조장용이며 한미동맹의 이간질용이다.

북한이 작년 느닷없이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를 통보하고 대규모 미녀군단을 응원단으로 파견하고 인공기가 한국텔레비전을 통해 전국방방곡곡에 방영되도록 한것도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북한을 미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남정보심리전인 것이다.

미국도 육군사관학교 교과목으로 손자병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지금 이라크전쟁 준비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대 이라크 정보심리전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미국 정부 최고위당국의 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무장해제 요구와 이라크 주변지역에 대한 미군병력과 항공모함파견, 부시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도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파월 국무장관등의 일일발언등이 모두 후세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짜여진 대 이라크 입체 정보심리전의 하나다. 최근 후세인의 망명설이 잇따라 흘러나오는 것도 미국이 손자의 최상책인 부전승(不戰勝)을 거두려는 전략전술에 다름 아니다.

손자병법은 전부 13편 2만5천자로 돼 있다. 중국에 여러 가지 병법저서가 있지만 첨단과학이 발달된 오늘까지 여전히 실용성있는 이론적 병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손자병법은 전쟁계획과 전투방법을 기술한 가장 오래된 명저이기도 하다. 손자는 극히 단순명쾌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럼에도 몇천년 전쟁사에서 교전국들은 이런 단순한 기본병법 원리조차 번번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다.

그 전략전술 이론의 두가지 교리는 어떤 침공도 격퇴할 수 있도록 적합한 방위태세를 갖출것과 적을 패망시킬수 있는 전략전술을 개발, 준비하라는 것이다. 적을 패배시키고 승리하는 방법 즉 전략전술은 쉽지않다.

손자는 적을 이기는 전략전술은 적과 실제 전투를 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손자는 무력사용은 최하책이며 무력은 오직 최후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정보심리전과 간첩활용을 통해 무혈 부전승을 거두도록 충고하고 있다.

손자는 능숙한 전략가들은 적과 교전하지 않고 적의 항복을 받아내고 적국의 도시들을 포위하지 않고 점령하며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국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이 모두가 손자병법 13편 간용(間用)편에서 강조하는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뜻이다.

손자는 간첩전과 정보심리전을 위해서는 천문학적 경비가 들어도 반드시 지출해야 한다고 말할정도로 이 전법의 긴요성을 역설했다. 북한의 최근 대남행태에 비춰, 그들의 전략전술도 핵(核)협박 벼랑끝전술에다 정보심리전과 흑색선전, 간첩전을 배합, 부전승을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손자는 무력을 사용하기전 먼저 반드시 딴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적국내에서 흑색소문을 광범하게 퍼뜨리고 뒤흔들어 혼란에 빠뜨리며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다. 또 적국의 고위관료들을 될 수있는대로 많이 매수해서 자기편으로 포섭함으로써 평소 적내부를 손바닥 들여보듯 훤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월맹의 보구엔지압도 이런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구사,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즉, 70년대초 사이공 독립궁에서 고위전략회의가 끝난직후 회의내용 전부가 곧바로 하노이 수뇌부에 전달돼 월맹군은 월남군의 뒷통수를 망치로 치듯 역공을 하곤했다.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극명하게 실증되었다.

요컨데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고 승산 없는 전쟁은 절대 않는다고 했다.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선 "지피지기(知彼知己), 즉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모공편· 謀攻篇). 손자는 전쟁을 할 때에는 " 남을 조종하되 내가 남에게 조종받으면 안된다(치인이불치여인·致人而不致於人-虛實篇)"고 했다. 즉 주도권을 잡지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상대방 병력을 분산시켜 수세에 몰아넣은 다음 실(實)한 것을 피하고 허(虛)한 것을 공격하는 전략전술을 권고했다.

또 적의 무방비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미쳐 대처하지 못한 곳을 노리라고 했다. 상대방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96년 98년 두차례 북한의 동해 무장 잠수함침투와 작년 서해교전등도 바로 이런류의 속임수 전술이다. 그는 궤도편(詭道篇)에서 전쟁은 속임수라고 했다. 즉 위장평화나 지키지 않을 허위협정과 합의로 상대 적군을 방심케 해놓고 기습공격, 적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속전속결로 하고 지구전은 어리석은 우책(愚策)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전술이 모두 손자병법의 이런 속임수와 속전속결로 짜여있다.

손자병법이 나온지 2,400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속에 담긴 국가경영 및 처세술등 기본적 도(道)와 전략전술은 핵과 미사일등 첨단무기가 최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유효한 전략전술로 살아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무턱대고 많이 축적하고 비싼 첨단 무기만 사잰다고 적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을 배우고 익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때다. 핵심은 전체 국민들의 민감하고도 철처한 안보국방의식과 정부의 빈틈없는 경계와 방위태세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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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名將열전(12) - 장제스(蔣介石·장개석)

2006.12.18 23:32 | 세계 전쟁사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3484 주소복사


2차대전후 장제스는 국공(國共)내전에서 마오제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공군에 본토를 빼앗기고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옮겼다. 그는 거대 대륙을 마오제둥에게 내주고 망명지 대만에서 뒤늦게나마 군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토지개혁을 단행, 정치적 안정과 경제번영을 이룩했다. 미소를 중심으로 한 동서냉전시기 대만은 한때 한국과 함께 아시아지역의 자유반공 보루로서의 역할을 했다.

장제스의 아호는 중정(中正). 1887년 10월 31일 샹하이 인근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에서 농업겸 소상업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이런 전통적 가업을 떠나 원대한 꿈을 이룩하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906년 바오딩(保定)군관학교에 입학, 짧은 교육기간을 거쳐 다음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육사에서 유학했다. 거기서 장제스는 辛亥혁명을 주도한 쑨원(孫文)을 만났다.

그는 도쿄에서 국민당 전신인 <중국통일혁명동맹>에 가입했고 이단체는 얼마후 신해혁명을 일으켜 300년간의 봉건전제국가인 청조(淸朝)를 전복하고 중국을 근대국가의 공화정으로 통일했다. 장제스는 그 후 5, 6년간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그의 군사정보지식을 확대하고 중국통일의 정치적 야망을 가다듬었다.

장제스는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이혁명은 마침내 중국을 중화민국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1918년 쑨원(孫文)의 부하로서 주로 군사면에서 활약하고 1923년 소련을 방문, 적군(赤軍)편제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장제스는 이때 소련에서 소련식 군사교육과 사회제도를 연구하고 신 중국건설을 위해 필요한 재정지원도 받아왔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군벌 타도와 중국 통일에 힘씀

장제스는 다음 10년간 중국북부에서 군벌을 토벌하고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는등 미래 중국통치자로서의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24년 귀국하자 그는 황푸(黃浦)군관학교 교장에 발탁되었고 1926년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북벌(北伐)을 개시했다. 황푸 군관학교시절 그는 젊은 장교들에게 자기의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고 성장하는 권력기반을 더욱 확충해나갈 기회를 잡았다.

쑨원이 지도자였던 국민당 광동정부는 1925년 쑨원이 서거하자 집단지도체제의 국민정부로 개편해 군을 국민혁명군이라 불렀다. 이때 장제스는 국민혁명군(북벌군) 총사령관으로서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고자 1926년 7월 북벌에 나선 것이다. 이때 장제스는 8개사단을 조직해 북부와 중부 중국의 북벌을 했다. 24년 시작된 1차국공합작이 깨진것도 이 무렵이었다.

장제스는 북벌 첫해 국민당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축출된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당 창당때 부터 참가한 창당 당원들이었다. 그다음해 그는 중국 최고갑부의 딸 세자매중 막내인 송미령(宋美齡)과 결혼했다.

송미령 친정의 막대한 부와 서구교육을 바탕으로 한 송씨네 금융가문은 장제스의 정치적 야망과 영향력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북벌 성공으로 그의 당내 위치는 확고해졌다. 북벌 때 국민정부 좌파와 중공(中共)은 장(蔣)의 정치적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해 북벌에 극력 반대했다.

거기다 북벌군은 10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군벌세력은 약 1백만 명으로 10대 1의 열세였다. 그 가운데 오패부(吳佩孚) 장작림(張作霖)의 세력이 제일 컸고, 손전방(孫傳芳)이나 염석산(閻錫山), 풍옥상(馮玉祥)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북벌은 중공과 일본의 제남사변(濟南事變)등의 방해로 한때 차질을 겪기도 했으나 풍옥상과 염석산이 국민혁명군에 협조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북경에 있었던 장작림(張作霖)은 동북으로 돌아가다 매복 일본군에게 황고둔(皇姑屯)에서 폭사당했다. 그후 그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국민정부의 깃발로 바꾸어 달고 장제스의 국민 정부에 합류 함으로써 장제스의 북벌은 성공으로 끝나고 그는 전중국을 통일할수 있게 되었다.


국민정부 총통이 되어 통일 중국을 통치하다

장제스는 북벌에 성공함과 동시 1928년 10월 10일 국민정부 총통이 되어 통일 중국을 통치했다. 이로써 국민정부는 군정(軍政) 단계를 마감하고 혁명 2단계인 훈정(訓政)의 단계로 접어 들었다. 훈정은 무력통일된 성(省)의 자치과정을 말하며 혁명의 마지막 단계가 헌정(憲政)이다.

장제스의 초기 공산당과의 군사 및 정치투쟁은 일방적인 우세였다. 1924년 국민당은 소련과 손잡고 중공당을 산하에 포용하는 연소용공(聯蘇容共)정책을 썼다. 이때 공산당은 개인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는 쑨원이 병사한후 국민당에서 좌파 및 공산당을 몰아냈다.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上海) 쿠데타를 일으켜 1928년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는 난징(南京)에 새로운 단독 국민정부를 세우고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어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장제스는 유일한 반대세력인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그들에게 정면 승부수를 던졌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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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열전(11) - 알랜 프란시스 부루크

2006.12.18 23:30 | 세계 전쟁사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3483 주소복사

알랜 부루크는 2차대전때 영국 합참의장겸 전(全)영국군 사령관으로서 윈스턴 처칠 수상의 전시내각 수석 군사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2차대전 기간 미국 및 소련연합국들과 연합전선을 매끄럽게 이끌어 오면서 다국적 연합군의 단결을 촉진하고 전투목표와 목적들을 수립할때 능동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2차대전 초기 부루크는 많은 전공을 세워 추축국 군대의 전진을 저지하고 전쟁 종반전 독일군을 패배시킬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도 포병부대를 지휘했던 알랜 부르크

알랜부루크란 애칭으로 불린 그는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니에르-드-비고르에서 아일랜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부루크는 울위치 영국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전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초중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02년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 포병장교로 임관되었다. 부루크는 1차대전때인 1914년 프랑스에 주두하기전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1차대전때 카나다와 인도 포병부대를 지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도는 영국식민지였고 카나다는 영연방내 자치령이었기 때문에 영국장교가 부대 지휘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부루크는 전투중 용맹성에 대해 여러차례 무공훈장을 받았고 영국의 공격부대를 후방에서 단계적으로 지원하는 포병지원 사격술을 창안, 격찬을 받기도 했다. 1차대전 종전후 그는 참모와 지휘보직을 번갈아 순회하면서 포병학교 교장과 전쟁성의 군사훈련 총책을 담당했다.


던커크 전투에서의 활약

1, 2차대전동안 그는 참모역할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가 군사훈련 책임을 맡았던 때는 1936년-37년사이였다. 부루크는 2차대전때인 1939년 프랑스에서 제 2군 사령관으로서 일선부대 지휘를 했다. 그는 <던커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돼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원정군의 대규모 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때 그는 훌륭한 전략전술을 발휘해 상부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던커크는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로서 지금은 인구 7만의 전자및 조선과 각종제조업도시로 발전했다. 독일군은 기갑부대를 한군데로 총 집중하면서 전격전을 한데 반해 프랑스와 영국군은 기갑사단들을 광범한 전선에 전개함으로써 던커크전투에서 대패했다. 영국은 모든 수단방법을 총동원, 30만명의 연합군을 철수시켰다. 쌍방의 희생은 컸고 얼마후 프랑스는 독일군의 나치점령하에 들어갔다.

이때 영국군은 방위선을 고수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싸웠다. 영국은 사용가능한 모든 선박들을 전투장병들의 집단 철수작전에 총동원했다. 6월 4일 22만명의 영국군과 11만 명의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철수했다. 4일 아침 독일군이 던커크를 점령한후 4만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다. 영국군은 예상보다 더 많은 장병들을 철수시켰으나 거의 모든 중장비들을 독일군에게 빼았겼으며 대부분 장병들은 영국에 무기없이 빈손으로 귀환했다.

던커크 전투때 독일공군은 연합군 함대에 대해서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 상선 80척과 상당수의 전함들이 격침당했다. 독일군 역시 연합군 보다 더 많은 항공기를 잃었다.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솜강(江) 전선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프랑스군은 흩어진 군부대를 재편성, 방어했으나 힘은 미치지 못했다.

6월 7일 아미앙과 해안선 사이 전선이 무너지고 그로부터 8일후 빠리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쉘부르, 셍말로, 브레스트, 셍나제르, 낭트등이 차례로 독일군에게 넘어갔다. 6월 22일 프랑스 헌팅징어 장군이 독일군과 휴전협정을 조인하고 그날부터 프랑스는 5년간 나치치하에서 사실상의 ‘점령통치’를 받았다.

부루크는 독일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후퇴를 지연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일부러 일선부대장들을 일일이 직접 방문함으로써 부대장들에게 영불해협을 통해 연합2군 장병들을 대부분 철수시킬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연합군에게는 던커크 철수작전이 대재앙이었다.

성공적 던커크 철수작전때 부루크 예하 사단장 두사람은 바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하롤드 루퍼트 알렉산더 장군이었다. 두사람은 나머지 2차대전 기간동안 높은 명성을 얻었다. 부루크는 이 두사람 부하들 보다 명성면에서 뒤떨어지지만 성공적 던커크 철수 작전 계획과 집행을 총지휘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훨씬 더 큰 영 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처칠 수상은 1941년 7월 부루크가 영국으로 귀환하자 그를 본토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데 이어 그해 12월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 승진시켰다. 그는 1946년까지 이 직책에 머물렀다. 부루크는 그후 합참의장으로서 고위 장성들의 견해를 처칠 수상과 미국 합참 의장에게 충실하게 전달해 연합군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전략전술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부루크는 영명한 군지휘관으로서 광범한 명성을 얻었지만 연합군의 유럽공격작전 지휘관을 포함해서 해외의 대규모 전투지휘를 맡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이런점이 무인인 그에게 하나의 좌절로 기록됨으로써 옥에 티로 남게 되었다.


많은 후일담을 담고 있는 부루크의 '전쟁일기'

2차 대전후 그의 전쟁일기 발췌문 내용이 아이젠하워 장군을 인신공격했다고 해서 한때 말썽을 빚기도 했다. 그가 전쟁일기에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군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미국의 전략을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부루크는 자기의 전쟁일기에서 그의 임무는 처칠수상의 정치적 영감을 군사감각으로 전환,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썼다. 실제로 그는 극동에서 연합군의 전군사력을 항일전투에 투입하기전 유럽에서 먼저 독일을 격파해야 한다는 ‘유럽 제일주의’스로건을 최초로 만들어 실천했다.

부루크는 또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이탈리아를 먼저 해방해야 한다는 전략을 짰다. 그는 전쟁을 계속하려는 독일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독일에 대해서 이런 목표아래 집중폭격을 계속했다. 그의 부하들이 최초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계획을 창안했다.

그가 이 상륙작전 개념을 처칠 수상에게 상신했더니 처칠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를 이 상륙작전의 최고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미군의 참전병력이 영국군에 비해 압도적이었기때문에 부루크 최고사령관 아이디어는 실현되지 못했다.

부루크는 군인으로서 그 자리를 원했지만 미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때 미국측은 참전군병력이 연합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기 아이디어는 부루크 부하들이 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최고사령관 자리는 미국쪽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처칠과 명콤비를 이뤘던 부루크

부루크는 처칠 수상을 "내가 만난 사람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전쟁일기 가운데서 자기 보스(처칠)는 "내가 만난 사람가운데서 함께 일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정치지도자로서, 부루크는 군사 지휘관으로서, 두사람은 전쟁을 계획하고 진행하는데 있어서 절묘한 명 콤비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루크는 스탈린을 포함해서 소련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측 군사지휘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국측 군사상대역인 조지 마셜 장군은 부루크를 가리켜 그는 자기직책에서 결심이 공고하지만 협상에서는 늘 부드럽고, 판단에서는 관용적이며 우정에서 는 항상 기쁨을 가져다 주는 호감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부루크 전쟁일기속에는 말못할 속마음을 드러냈지만 아이젠하워와 그는 직업군인으로서 서로 존경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전후 출간한 자기 회고록에서 "부루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날이 선듯 의견차를 서슴없이 드러내지만 이런 태도가 개인적인 우정을 손상하거나 그의 지지를 흐트러지게 하지 않은 탁월한 능력의 장군이었다"고 썼다.

처칠 수상도 부루크의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 동의하고 1944년 그를 육군원수 계급으로 승진시켰다. 2차대전때 전세계 연합국들은 하나같이 부루크의 전쟁승리에 끼친 그의 공헌을 인정했다. 폴란드와 벨지엄, 프랑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폴투갈, 에티오피아, 소련, 스웨덴등 연합국들은 부루크의 2차대전중 공헌에 대해서 존경의 뜻을 잊지않았다.


가려진 명성...

부루크는 전후 1946년 현역에서 은퇴한후 자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63년 6월 17일 79세를 일기로 영국 위트니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루크는 그의 전략적 외교적 능력외 영국 육군 원수로서 모든 것을 조국에 다 바쳤다.

그는 후리후리하고 체육선수같은 모습에다 말쑥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뽑내면서도 항상 군인으로서의 엄격한 자세를 흐트려 뜨리지 않았다. 부루크는 접근하기 어렵고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이면서도 근무중 늘 부하들에게는 인내와 포용력으로 대했다. 그는 근무중이 아닐때는 개방적이고 친철하며 모든 계급의 장병들에게도 접근이 쉬운 상사였다.

그의 전쟁일기 내용들은 2차대전중 중요하거나 사소한 모든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전쟁중 부루크의 예하 일선사령관들인 몽고메리와 알렉산더가 더 많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지만 전쟁정책 수립과 연합군의 단결을 이룩한 사람은 바로 부루크이기 때문에 그가 2차대전중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군인라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전쟁 초기 부루크는 다른 어떤 군인들 보다 전략전술 수립과 작전수행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참전병력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미국이 군사적으로 강력해지고 영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조지 마셜과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성이 부루크의 역할을 그늘 지게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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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열전(10) - 헨리 H. 아놀드

2006.12.18 23:29 | 세계 전쟁사 |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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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는 2차대전에서 연합군 승리를 도운 항공이론과 조직, 절차등을 확립했다. 그의 이런 이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 공군과 다른 나라들 공군들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라이트 형제로 부터 비행교습을 받고 조종사 자격을 얻다

그는 1886년 6월 25일 펜실베이니아 그래드윈에서 의사의 아들과 남북전쟁 참전군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보병소위로 임관되었다. 아놀드는 육사졸업후 기갑부대를 지원했으나 성적이 좋지않아 보병으로 배치되었다.

필리핀 근무를 마친후 다시 기갑부대를 지원했으나 두 번째로 거부당했다. 그의 실망은 컸다. 그는 하는수 없이 통신부대로 배치돼 1911년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라이트형제로 부터 비행교습을 받고 조종사 자격증을 받게 된다.

아놀드는 미국군에서 기십명에 지나지 않는 최초의 조종사집단에 들어갔다. 그의 조종사 자격증은 미국에서 발부된 자격증중 29번째였다. 이것이 그가 미국 항공 부대를 발전시키고 독립공군 창설의 산파역을 맡게된 인연이자 배경이 되었다. 아놀드 는 1911년 9월 미국정부 우편물을 항공기로 실어나르는 최초의 비행을 했고 1912년에는 6,540피트의 고도비행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비행 신기록을 수립하며 항공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놀드

아놀드는 초창기 항공사상 이런 저런 신기록들을 수립하면서 항공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 매리랜드 파크 대학 활주로에 소수그룹의 조종사들과 항공기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 이 소수그룹 조종사들은 신참비행사들을 훈련시키는외 비행기부품과 비행절차에 관한 군사 노멘크라투르(특권계층)를 형성했다.

이들은 또 항공무기와 폭격조준기 그리고 공대지 통신들에 관해서도 실험을 했다. 아놀드의 초급장교시절 하늘을 나르는 초창기 항공술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다. 몇 차례 추락을 경험한후 그는 스스로 지상근무를 선택했다. 그는 3년이상의 지상근무를 한다음 초기의 추락공포에서 겨우 벗어나 다시 조종사로 복귀했다.


1,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

아놀드는 비교적 풍부한 조종경험을 쌓아올렸기 때문에 그가 원치않았는데도 1차대전동안 항공본부 참모로서 워싱턴근무 명령을 받았다. 그는 워싱턴 본부보다 전선에 나가 조종사로서 항공근무를 하고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차대전 종전후 그는 계급과 직책에서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승진의 사닥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항공부대를 공군으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빌리 미첼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따랐다. 미첼은 미국 조종사로서 1차대전때 미국 항공부대 최고사령관이었고 대량폭격편대 전술을 창안했다. 그는 이때 부터 공군의 독립을 주장했고 미래전에서 폭격기가 전함을 대체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놀드는 이어 항공전술에 끼친 업적으로 제 1회 맥케이 토로피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전략공군의 항속거리를 실험하기 위해 본토에서 알라스카까지 B10폭격기 편대 비행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최고의 비행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맥케이 트로피는 클레렌스 맥케이가 1911년 제정했다. 맥케이는 당시 우편전신회사 사장이었다.

항공과 전신은 조종사들이 공대지 항공 통신을 하는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35년 육군항공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오스카 웨스토버 사령관이 193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아놀드는 그의 후임으로 그 자리에 승진 임명되었다.

아놀드는 항공 사령관으로서 전쟁에 필요한 대량군수산업 확장을 위한 토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2차대전동안 합동참모본부 고위간부의 한사람으로서 여러곳 전투현장에 대한 공군전략을 지휘하는 최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까다롭지만 타고난 감각을 지녔던 공군 지휘관

아놀드는‘햅’(Hap·행복을 뜻함)이란 자기별명과는 달리 언제나 까다로운 지휘관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부하들 업무에 간섭하면서도 자기 막료들을 효율적으로 부리고 조직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변덕스런 기질은 일면 자신을 가볍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커다란 단점을 동시에 훌륭한 장점으로도 만드는 비범한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공세적 드라이브와 비전, 사물을 주도하는 감각등은 거대 공군을 지휘하는데 불가결한 요소였다.

1913년 아놀드는 보병부대로 돌아와 필리핀에서 또 다른 직무를 맡게 된다. 그는 필리핀 바탕가에서 야전훈련중 유명한 조지 마셜 중위(후에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됨)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두터운 우정과 직업적 관계는 그후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아이젠하워, 맥아더 원수등 적잖은 전쟁영웅들을 소개했지만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에는 아직도 많은 영웅들이 남아있다. 이들도 이 아메리카 영웅그룹중의 한사람이다.

전세계 수백 인종들의 다양한 이민들로 구성된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200여년 역사의 큰 나라로 발전하면서 나라규모와 정비례해서 수많은 영웅들이 차례차례 탄생했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세계 명장열전(9) - 니미츠 제독

2006.12.18 23:28 | 세계 전쟁사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3481 주소복사

▲ 니미츠 항공모함
최첨단 항공모함 니미츠 호도 그의 이름에서 따올만큼 미국 해군사상 그의 명성은 가히 전설적이다. 미국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니미츠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 해군을 패배시킨 대규모 작전을 직접 계획, 조정하고 집행했다.

그가 육군이며 고집센 맥아더 원수와 협력해서 태평양 전쟁을 수행해 나가기란 매우 어려운 과업이었다. 니미츠 제독의 친화력과 외교력, 그리고 관용성이 없었더라면 맥아더와의 협력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제한된 물적 인적자원을 가지고 새로운 전술과 책략으로 과감하게 밀어 부침으로써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의 오랜 해군생활과 해상함대의 실전경험, 그리고 잠수함 근무경력이 육해공군 해병대등 다면적 태평양 총사령부를 효과적으로 지휘, 승리를 움켜잡을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평탄한 성장기

니미츠는 1885년 2월 24일 택사스주 프리데릭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육군사관학교를 지망했으나 당해 연도 빈 자리가 없어서 1905년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퇴역 함장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묘한 모양의 호텔을 지어 여행업을 했으며 그는 부유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니미츠의 해군사관학교 성적은 우수했고 특히 수학에서 뛰어났다. 114명 졸업생중 7등의 석차로 학업을 마쳤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온후 아시아 해군함대에 배속되었고 진급을 거듭해 데카투르 구축함장이 되었다.

해군생활에 그럭저럭 익숙해질 무렵 그는 큰 사고를 내 자칫 해군을 떠날번 한 적도 있었다. 1908년 7월 7일 구축함 좌초사건이 바로 이런 악운이었다. 그때 직무태만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처벌은 다행히 견책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니미츠는 미국본토에 돌아와 5-6차례 번갈아가면서 잠수함 근무를 한후 1913년 독일과 벨기에 디젤엔징 개발연구를 위해 유럽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한후 그는 독일과 벨기에에서 배운 신지식을 제2 마우미호를 디젤엔징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선박건조 작업을 감독 지휘하고 1916년 10월 16일 이배를 진수시킨후 행정책임자겸 수석 엔지니어로 복무했다. 마우미호는 해면을 운항하는 미해군 최초의 디젤엔징 선박이었다.

니미츠가 개발한 디젤엔진 마우미호의 1차대전 승리

니미츠가 디젤엔진으로 개발한 마우미호는 1차대전 참가이전 미국 동해안과 쿠바연안을 운항했다. 미국이 1917년 4월 6일 개전후 마우미호는 영국으로 파견돼 해상에서 구축함에 재급유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마우미호의 해상급유는 함대가 장기간 모항이나 우호국 항구에 돌아가지 않고도 장기간 해상에서 작전할수 있어서 2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이 1917년 4월 1차대전에 참전하자 말자 니미츠는 마우미 호와 함께 대서양 함대에 합류했다. 그는 그해 8월 해군 소령으로 승진한후 사무엘 S. 로빈손 잠수함전단 사령관 부관이 되었다. 로빈손 사령관은 그후 다음 10여년간 니미츠의 후원자로서 그를 계속 돌봐주었다. 두사람의 경우처럼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존경할 만한 상관 밑에는 언제나 니미츠 같은 훌륭한 인재가 발굴될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1차대전이 끝난후 그는 워싱턴에서 해군사령부 참모장교로 근무했고 1920년 진주만(펄하버)으로 전근, 후일에 대비, 새로운 잠수함기지 건설을 감독 지휘했다. 니미츠는 그후 20여년간 전함과 구축함등 근무는 물론 다양한 잠수함 근무경력을 쌓았다. 그는 여러차례 워싱턴 근무를 했고 미국대학들에서 최초의 해군예비장교훈련 프로그램을 조직, 운영하는 책임도 맡았다.

1938년 해군소장으로 승진한후 산디에고에서 순양함 단대(單隊)와 하와이에서 아리조나 전함을 포함한 전투함 단대를 각각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1939년 워싱턴에 돌아와 해군사령부 항해국장을 맡는다. 이어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을 때 해군 징모국장으로서 전시 대규모 병력증원 책임을 맡았다.


맥아더와 함께 태평양 전쟁 지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 추천으로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후, 그를 해군대장으로 진급시킨다. 그때 태평양지역에는 육해공군 해병대등 모든 군종을 합친 단일 사령부만 있었기 때문에 각군별 연락과 협력등 운영상 문제가 많았다. 육군과 맥아더 장군은 해군장성 지휘를 받으면서 전쟁수행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타협의 산물로서 니미츠와 맥아더가 각각 태평양 전쟁수행 책임을 공동으로 맡는 두 개 지휘체계를 갖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니미츠의 원만한 성격과 친화력 때문에 두 장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맞아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 앞에서 비교적 잘 협력해 나갔다.

2차대전때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지역에서 두 개의 거대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런가운데 미국은 대일(對日)태평양전쟁 보다 독일과 이탈리아등 대(對) 추축국(抽軸國) 전쟁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니미츠는 시간을 다투어 그의 전략전술을 밀어부쳐 일본의 확전을 저지하고 그들이 빼앗은 영토를 탈환하며 전선을 일본 본토까지 몰고갔다. 그는 일본군에 관한 미국 암호해독자들이 넘겨준 군사정보를 이용해서 1942년 5월 산호섬 전투에서 첫 교착상태를 돌파했다.

니미츠는 다시 군사정보에 의지해서 다음달 6월 미드웨이섬 전투때 야마모토 이소로꾸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적군의 해역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전사후 원수로 승진)은 바로 진주만 기습폭격을 명령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일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서 미드웨이 전투에서 미해군 함대를 뿌리채 절멸시키려는 필사의 대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니미츠와의 이 전투에서 미국에 일본해군의 우위를 빼앗기고 과다캐널로 후퇴했다가 1943년 4월 18일 북부 솔로몬제도 전선 시찰중 암호를 해독한 미육군 항공전투기에 의해 폭사당했다.

<이소로꾸>는 56 숫자의 일본 발음으로서 그가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 나이가 56세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미국 하버드대학에 유학했고 1925 ~ 28년사이 주워싱턴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어 미국의 엄청난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애당초 대미전 을 반대했다는 설도 있다. 니미츠는 이런 야마모토 함대와 미드웨이 전투에서 대결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함대가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했을 때 대부분 일본 함재기들은 함상에서 재급유를 하거나 재무장중이었다. 니미츠의 이때 대승은 대일전 첫승리였고 일본해군으로서는 350년 만의 대패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측 손실은 전체 함대에서 9척의 항공모함중 4척의 침몰과 300대 항공기, 많은 최상급 조종사들의 전사였다. 태평양 전쟁중 핵심적 전투인 미드웨이 전투는 미국측에 결정적 우위를 가져다 주는 대신 일본에는 결정타를 안겨주었다.

니미츠와 맥아더 장군은 광할한 태평양상의 일본 점령 섬들을 하나 둘씩 탈환하는 메뚜기 뛰기식 작전에서 긴밀히 협력해 나갔고 이런 협력작전이 일본 본토쪽으로 점점더 가까이 포위해 들어갔다. 니미츠 제독 휘하의 군대는 1943년 11월 길버트를 점령한데 이어 1944년 2월에는 마셜군도를,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다시 마리아나 군도를 점령함으로써 숨돌릴사이 없는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몰아부쳤다. 니미츠는 그해 10월 오스트레일리아 쪽에서 올라온 맥아더 장군휘하 군대와 합동작전을 벌여 필리핀을 완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정부는 대일전에서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운 니미츠 제독에게 미국 해군역사상 최초로 만들어낸 별 다섯 개의 계급을 달아주어 그를 5성계급의 함대원수로 승진시켰다. 미국 대통령과 전쟁성이 협의 한 끝에 니미츠 대장의 전공을 만장일치로 인정, 그에게 이런 영광스러운 최상급 계급을 부여한 것이다.

니미츠는 1945년 초 괌과 이오지마, 그리고 오키나와섬에 대한 총공세를 취해 이섬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 일본이 항복했을 때 일본본토 공격을 준비중이었다. 1945년 8월 29일 니미츠는 사우스 다코타 기함을 타고 도쿄만에 들어갔다.


'니미츠의 날'을 부여받는 금의환향

그는 같은 해 9월 2일 미조리호 함상 항복서명식에서 미국정부 대표로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고 합의문서에 서명했다. 니미츠는 그해 10월 5일 <니미츠의 날>로 지정된 날 워싱턴으로 돌아와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이런 환영축제가 있은 후 그는 해군총사령관 직책을 맡았고 다음 2년간 핵추진 잠수함들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병력과 전함들의 전시동원 해제작업을 감독했다.

니미츠는 1947년 12월 15일 퇴역했다. 그는 그후 수년간 해군장관 고문역을 맡았고 2 년간 카슈미르 분쟁지역의 유엔 판문관을 지냈다. 니미츠 해군원수는 만년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겪었다. 그는 1966년 2월 20일 81세 생일 직전 수술 병발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검소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샌 프란시스코 금문교 국립묘지 묘비에는 5성계급과 출생및 별세 일자만이 기록돼 있을뿐이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출한 계급높은 장성이면서도 생전 그의 겸양지덕이 묘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는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육해공군 구별없는 전군적 존경과 협력을 얻어낼수 있는 달인으로서 2차대전중 가장 영향력 높은 미해군 지도자로 기록되고 있다.

그의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과감한 전투를 벌이게 해, 마침내 일본의 가장 우수한 제독인 야마모토를 미드웨이 전투에서 제압할 수 있게 했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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