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무첸스코, 핵도 사올 수 있다고 하는 말은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더니…. 당신이 그 영화에 출연했소?"
"예를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핵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마시오,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는 그것으로 외교 전략을 세워서 이용하고 있었다. 핵을 개발하는지 안 하는지, 핵이 실제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하게 만들어 놓고 외교적 협상 카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핵전 시나리오를 보면, 만약 서울 남산 1㎞ 상공에 20메카톤 핵폭탄이 폭발할 경우, 폭심지로부터 반경 10㎞ 이내의 모든 건물은 파괴되고, 그 안에 있는 인구 약 300만명이 즉사한다. 또한 32㎞ 반경 이내의 모든 시설이 핵폭풍으로 전소되면서, 그 이내의 인구 300만명이 방사능 낙진이나 부상으로, 회복 불능의 상해로 서서히 죽는 것이다.
만약에 20메카톤의 핵이 평양 금수산 주석궁 상공에서 폭발할 경우 평양 시민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그 경우는 서울의 피해보다 훨씬 적다. 왜냐하면 서울의 세 배가 넘는 면적의 넓은 공간에 인구도 300만명으로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6ㆍ25전쟁 당시 폭격기 공습으로 초토화가 된 기억 때문에 김일성 시대부터 모든 공장이며, 시설을 땅 속으로 은폐시켰다. 평양의 지하철은 100m 넘게 유난히 깊게 파서 만들었는데, 단순한 폭격이 아니라, 핵전에 대비한 은신처를 만들어 대비해 놓았다.
골프회동이 끝나고 나서 김정일은 중국의 외교 사절단을 만나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떴다. 야무첸스코와 다른 일행이 고려호텔에 있는 평양 냉면집으로 옮겨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 때 김정일의 통역을 맡았던 양성희가 동참했다.
"알고 보니 저의 선배시네요. 7년 선배."
지희숙의 말에 양성희는 수줍게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렇게 여자 나이를 공개해도 되갔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 나이도 사람들이 잘 모르니 안심하세요."
"모두 십년씩 젊어보입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박운종이 거들었다. 박운종은 두 여자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남조선에서 오신 두 분은… 언제 떠나십네까."
"사흘쯤 머물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더 머무시다 가시라요. 제가 안내해 드리갔습네다."
"감사합니다만, 영화 촬영 중이라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나인숙이 대답했다. 양성희는 나인숙과 박운종을 흘끔거리고 쳐다보았는데, 왠지 느끼한 분위기를 주었다.
골프가 시작되었다. 김정일의 골프는 보기 플레이 정도했는데, 몸집이 뚱뚱해서인지 허리를 돌리지 않고 아이스하키를 하듯이 샷을 했다. 짧은 스윙에도 폭발력이 강해서 장타가 나왔다.
야무첸스코 다음으로 김정일이 티샷을 했는데,공이 페어웨이 가운데 떨어졌다.동 반경기자들은 물론이고, 캐디들이 찬사를 보냈다. 북한 캐디들은 가급적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샷이 장쾌하게 날아가자, 굿샷하고 말했다.
김정일은 나인숙이 티샷을 하는 것 을 보더니 "굿샷. 덩말 잘치는구만"이라고 감탄했다.
“기래, 무현이는 어느 정도 치디.”
무슨 말인지 몰라 나인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참, 실례했구만,남조선 노대통령 각하 말이야? 핸디가 어드레.”
“전 정확히 잘 모릅니다, 위원장 각하. 아마 보기 플레이 정도로 추측이 됩니다.”
“기래요? 나와 비슷하구만, 만나서 골프나 한 번 쳐볼까.”
그들은 한때 골프 같은 경기를 부르조아의 퇴폐적인 운동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로 들어서면서 김정일이 생각을 바꿔서 평양근교에 골프장을 만들게 했고, 그때부터 그도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한수 더 떠서 정상회담을 하면서 골프 회동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야무첸스코와 김정일은 골프를 치면서도 계속 밀담을 나누었다. 골프장에 통역사 지희숙이 따라다녔고, 김정일 쪽에는 어젯밤에 보았던 늙은 남자는 보이지 않고, 지희숙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 통역사가 나와서 그의 말을 러시아어로 통역해서 야무첸스코에게 전했다.
김정일의 통역관 양성희는 42세의 나인데도 불구하고 삼십대 초로 보일만큼 건강하고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기쁨조 출신으로 모스코바대에 유학을 다녀온 경력이 있고, 이십년 전에 김일성으로부터 금딱지 시계도 하사받은 노력 영웅이었다. 지금은 인민무력부에서 여자 군관들 교육을 맡고 있었다. 그의 소속은 정확히 제216부대 교양담당 교수였다. 제216부대는 김정일의 생일날짜를 따서 만든 제1호 밀착 경호훈련부대이다.
2홀 정도 돌자 야무첸스코와 김정일은 골프보다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고 밀담을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핵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나인숙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무첸스코가 농담삼아 지껄인 말이었지만, 자신은 무엇이든지 요청하면 대줄 수있는데, 그 무엇 속에 핵이 포함된다고 했다.
"장보고? 그거이 우리가 옛날에 만들었디. 남조선에서는 사극이 잘 안 된다고 들었는데, 흥행이 될까? 동무도 대박 좋아하디?"
그는 남한에서 유행하는 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사극보다 실미도라든디. 태극기 휘날리며, 아니면 살인의 추억이라든디. 친구, 고등학교 아들 그 뭬야, 말죽걸이 뭬라고 했디?"
그는 옆의 당간부에게 물었다. 당간부가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말죽거리 잔혹사입네다."
"기래. 그런 것이 흥행되디만, 그런 거이 예술성이 없디. 예술성이 없으면서 흥행되는 거이 색즉시공, 가문의 영광, 어린 신부가 모두 청년들 이야기를 재료로 하면서리…."
나인숙은 그가 한국의 흥행 영화를 모두 본 것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파티는 영화 이야기로 채워졌다. 당연히 나인숙이 화제였고, 그는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장보고 영화 판권을 사겠다고 하였다. 이 대표가 좋아할 것이다.
나인숙은 평양에 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팔았기 때문이다. 판매 계약서는 안 썼지만, 이 정부에서 국방위원장이 한 말은 곧 법, 아니 교시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지킬 것이다.
제3 초대소에서 있었던 파티는 밤 1시 경에 끝났다. 나인숙은 밤 11시에 시작해서 자정이 넘어 끝나는 특이한 파티에 처음 참석했다. 나인숙을 비롯한 야무첸스코 일행은 잠을 오래 자지 못했다. 5시 경에 깨어서 간단한 죽을 먹었다. 그리고, 차량으로 이동해서 골프장으로 향했다. 골프장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거리를 보니, 매우 한산하였다. 이른 새벽이어선지 차량도 별로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버스형 전차가 일찍 출근하는 평양 시민들을 실어나르는 것이 가끔 눈에 띄었다.
골프장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안내원이 그들을 라커룸으로 안내했다. 골프채를 비롯한 장비를 가지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마련해 놓았다. 발과 옷의 치수를 어떻게 알았는지, 옷이 몸에 맞았고 골프화도 신고 편안함을 느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인숙이 즐겨 사용하는 클럽은 캘러웨이인데 그것을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들이 골프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다른 손님들은 전혀 없이 비워놓았다. 아마도 국방위원장이 골프를 치러 온다고 하자 소개시킨 인상이다. 눈에는 그렇게 많이 띄지 않았으나, 평양 골프장을 중심으로 해서 경호가 삼엄한 느낌을 주었다. 코스의 앞뒤로 비어 있는 것을 한국에서는 대통령 골프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대로 대통령 골프를 치게 되었다.
어젯밤을 새워서 나인숙은 몹시 피곤했다. 초소에 누가 방문하든 그녀는 상관이 없어서 잠을 청하려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누었다. 삼십여분 시간이 지났을 때 여자 도우미가 와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오라고 했다. 나인숙은 타이트한 빨간 스커트에 빨간 블라우스를 걸치고 도우미를 따라 초대소 지하실에 있는 넓은 피티장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길쭉한 테이블이 있고 양 옆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안주와 양주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이미 술잔이 오고 가면서 마시고 있었다. 남자들 사이사이에 앉아 있는 여자들은 술시중을 드는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젊고 예뻤다.
탁자의 건너편에 눈에 익은 북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를 단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데 단번에 눈에 확 띈 것은 북한 소식 TV나 신문 기사 사진을 통해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방위원장 김정일이었다. 김정일 옆에는 당 간부로 보이는 늙은이들이 여러 명 앉아 있었다. 김정일의 바로 뒤에는 통역관으로 보이는 나이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야무첸스코 쪽에는 중국과 이르쿠츠크 바이칼 별장에서 본 일이 있는 러시아 사업가들이었다. 나인숙이 들어서자 김정일을 비롯한 당 간부들이 바라보았다. 더구나 블라우스 위로 터질 듯이 불룩한 그녀의 젖가슴에 시선을 보냈다. 초대소 여자 직원이 야무첸스코 옆에 비어 있는 자리로 나인숙을 안내했다. 야무첸스코 바로 뒤에는 통역사 지희숙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가 한국의 영화 배우 나인숙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골프가 프로입니다. 내가 질 정도니까요."
야무첸스코가 러시아어로 소개했고, 김정일 뒤에 있던 통역관이 한국말로 통역했다.
"안녕하세요. 각하, 나인숙입니다."
그녀는 어떨결에 각하라는 칭호를 붙였다. 그러자 김정일을 비롯한 당간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레 각하라고 부르지 마시라요. 배우 동지, 그 부르좌 칭호는 마음에 들지 않소. 동무래, 어드레 영화에 출연했소."
"제가 출연한 영화는…."
나인숙은 난감하였다. 배우라는 칭호를 받고 있지만, 아직 개봉된 영화에 출연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장보고의 생애를 다룬 영화에 주연을 맡아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국방위원장 각하."
김정일은 야무첸스코와 함께 동행한 명단 중에 두 명의 한국인이 끼였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다. 더구나 나인숙이 영화배우라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표명했다.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야무첸스코로부터 나인숙이 골프 프로라는 말을 듣자 함께 라운딩하자는 제의를 했다. 야무첸스코와 김정일 간에는 비공식적인 골프 회동 스케줄이 있었던 것인데, 그곳에 나인숙을 불렀던 것이다.
야무첸스코 일행은 평양 비행장에서 내리자 곧 영접나온 간부들의 안내를 받아 제3초대소로 갔다. 평양 모란봉에 있는 제3초대소는 북한 당국에서 비공식적으로 귀빈이 오면 투숙시키는 별장이었다. 대동강 변에 있지만, 산에 둘러싸여 평양 시민들조차 그곳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른다.
산의 초입에 들어서면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장을 한 안전부 요원들이 경비를 섰는데, 산길로 들어서는 1㎞ 거리에 여러 개의 감시 카메라가 있어 들어가고 나가는 모든 것을 감시했다. 그렇게 삼엄한 것은 그 별장의 귀빈을 만나러 국방위원장이 오기 때문이었다. 그 초대소는 주석궁하고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밤이 늦어서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으나, 파티가 있다는 전갈이 왔다. 그때가 밤 11시였다. 밤 11시에 파티를 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파티가 있을 것이라는 전갈을 받은 후에 초대소 직원들이 갑자기 바빠지는 것이 보였다. 초대소에는 십여명의 예쁜 여자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비상이 걸린 것처럼 바쁘게 몸을 놀리고 왔다갔다 하며 들떠 있었다.
나인숙의 숙소는 대동강이 보이는 2층의 끝방이었다. 복도뿐 만이 아니라, 나인숙의 방까지 들어와서 청소를 하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청소가 아니라 혹시 폭발물이나, 무기가 있을까 하고 다시 한 번 점검한 것이었다. 초대소에 도우미로 있는 예쁜 여자 직원들은 모두 특수 교육을 받은 인민무력부 군관이었다.
"우리가 왔을 때는 청소를 안 하다가, 누가 오는데 청소를 하고 이렇게 야단법석이에요."
나인숙은 방안에 들어와서 청소를 하는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수줍고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