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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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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명 |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
무량수전(無量壽殿)은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661∼681)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創建)한 것이다. 그후 소실(燒失)된 것을 고려(高麗) 현종(顯宗)(1009∼1031) 때 중창(重創)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7년(1358) 다시 불에 타 버려 우왕(禑王) 2년(1376)에 재건(再建)하였고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1608∼1623) 연간(年間)에 단청(丹靑)하였다.
이 건물은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각각 약간 안으로 굽은 곡선(曲線)을 이루고, 굽받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가구(架構)는 직선재(直線材)를 사용하였고 장식적(裝飾的)인 요소(要素)가 적으며 공포(공包), 가구(架構)의 수법(手法)도 견실(堅實)하다.
1916년 해체수리시(解體修理時)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우왕 2년(1376)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양식(構造樣式)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주심포(柱心包)양식의 기본수법을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 하나이다.
전내(殿內)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봉안(奉安)하였는데 다른 불전에서와는 달리 불전을 측면(側面)에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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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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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 아래 통로에서 본 안양루의 모습이 액자 속 그림처럼 아름다웠다면, 안양루 아래 통로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석등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 느낌이다. 서로 중심축을 달리해 세워진 덕분에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무량수전과 석등은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왼쪽에 위치해 있다. 석등이 정확히 중심에 위치하면 대칭 구도로 인해 공간은 생명력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석등이 끝점이 되어 정작 중요한 장소인 무량수전에 대한 암시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섬세한 공간 구조가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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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浮石寺)를 창건(創建)한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의 진영(眞影)을 봉안(奉安)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高麗) 우왕(禑王) 3년(1377)에 건립(建立)되었고, 조선(朝鮮) 성종(成宗) 21년(1490)에 중수(重修)되었으며 동(同) 24년(1493)에 개채(改彩)되었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에 맞배집으로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비해 기둥의 배흘림이 약해졌고, 주두(柱頭)와 소로(小累)의 굽은 직선(直線)이며 굽받침이 없고, 공포(공包)와 가구(架構)의 수법은 간략하다. 구조양식(構造樣式)으로 보아 무량痔煥릿?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부(內部) 입구(入口) 좌우(左右)에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상(四天王像)의 벽화(壁畵)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의 회화사상(繪畵史上) 희귀한 것이며, 고분(古墳) 벽화(壁畵)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彩色)그림 중 하나로서 지금은 새로 지은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에 보관되어 있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국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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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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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 처마 끝에서 해마다 꽃을 피우는 작은 나무가 바로 선비화(仙비花)이다. 의상 조사가 부석사를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 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라고 일렀는데,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 한 방울 맞지 않고도 싹이 돋고 가지가 자라났다고 한다. 더욱 신비스러운 것은 천년이 넘도록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며, 봄이면 어김없이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나무의 잎을 달여 먹으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하여,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부인들의 손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현재는 철책으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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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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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보는 조사당의 모습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비록 측면 1칸의 작은 규모이지만 맞배 형식으로 올린 지붕은 넉넉하고도 늠름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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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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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주심포계의 과도기적 건물로 양식과 기법에서 특이한 요소들을 보여 준다. 기둥의 배흘림은 고려 때의 다른 건물에 비추어 약화된 편이다. 기둥에 주두를 얹기 전에 머리에는 헛첨차를 끼워 공포를 받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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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명 |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 |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방형(方形) 지대석(地臺石)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배치되고, 지대석 위의 팔각 하대석(下臺石)에는 복련(覆蓮)과 귀꽃 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었다.
8각의 간주석(竿柱石)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간주석 위의 상대석(上臺石)에는 부드러운 8엽(八葉) 앙련(仰蓮)이 조각되었다.
8각의 화사석(火舍石) 벽면(壁面)에는 네 곳에 화창(火窓)이 있고 네 곳에 세련된 보살상(菩薩像)이 조각되었다. 옥개석(屋蓋石) 위에는 보주(寶珠)가 있었는데 보주대(寶珠臺)만 남아 있다.
석등의 전체 높이는 2.97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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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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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 앞에 한 기가 놓여있다. 배례석은 종교 행사에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위에서 절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진다는 주장도 있다. 직사각형으로 각면마다 안상을 새겨 두었다. 위로는 한가운데 연꽃을 새겨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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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과 하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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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은 정방형으로 각면마다 2구의 안상을 음각하였다. 그 위로는 2단의 낮은 괴임위에 복련의 하대석을 두었다. 연꽃안에는 하나씩의 귀꽃으로 장식하여 귀꽃장식이 없는 옥개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대석위로는 2단의 중대석괴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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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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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각의 가늘고 긴 중대석을 올렸다. 중대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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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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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각으로 된 화사석은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등불을 모시는 곳이다. 4면에 화창을 뚫고, 나머지 4면에는 보살상을 양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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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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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각의 옥개석은 모서리가 약간의 반전이 있을 뿐 소박한 모습이다. 처마 밑으로는 깊게 패인 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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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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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의 꼭대기 가장자리에는 연꽃을 조각해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고, 보주는 없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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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명 |
안동신세동칠층전탑(安東新世洞七層塼塔) |
이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이 일대의 지명(地名)을 법흥리(法興里)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세워진 전탑(塼塔)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7m, 기단너비 7.75m이다.
단층(單層)의 기단(基壇)은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한 판석(板石)을 세워 만들고 탑신부(塔身部)는 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塼)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전의 크기는 길이가 약 28cm, 폭 약 14cm, 두께 약 6cm로 어긋나게 쌓았다.
각층 지붕 윗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이는 목탑(木塔) 양식(樣式)의 수법(手法)을 모방(模倣)하여 전탑이 조성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탑의 윗 부분에는 금동제(金銅製) 상륜부(相輪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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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장엄구 및 탑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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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모시기 위해 장엄한 각종 봉안물이다. 원래 사리 신앙은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화장하였을 때 나온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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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감실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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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부의 1층 남쪽면에 있는 감실로, 화강암으로 틀을 짜서 만들었다. 감실 내부의 상부에는 방추형의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것은 목탑의 찰주공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감실은 판자로 막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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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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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실을 오르내리도록 설치된 기단부의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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