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요(瑤)이며 신종(神宗)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고 비(妃)는 창성군(昌城君) 진(拂)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에서 명(明)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대립이 격심했으며, 친명파의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뒤에 창왕(昌王)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1389년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정몽주(鄭夢周)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舊勢力)에 이어 새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 즉,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