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천지구 전투의 개요
본 전투는 1950년 6월 26일,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 서울 북쪽 17km의 의정부 정면에서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는 제 7사단과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제 2사단이 북괴 제 1군단(군단장 중장 김웅)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구성된 공격집단의 침공을 박아, 이를 격멸코자 한 방어전이다.
그 경과의 개요를 보면, 벽두에 제 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른 데 이어, 대전에서 증원한 제 2사단이 의정부 부근에서 격돌하게 되는 바, 바로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으로써 대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지역은 경원 본도인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과 서측의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 듯 남북으로 뻗힌 데다, 광천산맥과 천보산맥이 종벽을 이루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횡적연계와 종심배치에 불리한데 비하여 공격하는 입장은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공격 돌입이 용이하였다.
2. 포천지구 전투의 주요지휘관
*아군
제 7사단 장 준장 유재흥
(6월 26일 14:00부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
제 1연대장 대령 함준호
제 1대대장 중령 한태원
제 2대대장 소령 이의명
제 3대대장 소령 김황목
제 9연대장 중령 윤춘근
제 1대대장 소령 류환박
제 2대대장 소령 전순기
제 3대대장 소령 이철원
제 5포병대대장 소령 이규삼
배속부대
수도경비사 예하,
제 3연대장 중령 이상근
제 1대대장 소령 임백진
제 2대대장 소령 박남표
제 3대대장 소령 김붕상
제 18연대장 중령 임충식
제 2대대장 소령 장춘권
제 3대대장 소령 안민일
보국대대 제 2중대장 중위 박창암
기갑연대 장갑차 1개소대
포병학교 대전차포 2개중대
제 2사단장 준장 이형근
제 5연대장(대리) 중령 박기성
제 1대대장 소령 이정도
제 2대대장 소령 차갑준
제 16연대장 대령 문용채
제 1대대장 중령 유의준
제 2대대장 중령 김 헌
배속부대
제 25연대장 중령 김병휘
제 2대대장(대리) 대위 나희필
제 3대대장 소령 고동석
포병학교 제 2교도대장 소령 김풍익
육군사령학교장 준장 이준식
생도대대장 중령 조 암
배속부대
서울시경 전투경찰대대
인접부대
우 인접 : 제 6사단장 대령 김종오
좌 인접 : 제 1사단장 대령 백선엽
*적군
북괴 제 1군단장 중장 김웅
제 3사단장 소장 이영호
제 7연대장 대좌 김창봉
제 8연대장 중좌 김병종
제 9연대장 대좌 김만익
포병연대장 대좌 안백성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5연대장 대좌 최인덕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18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 105기갑여단장 소장 유경수
제 107, 109 전차연대기간
3. 포천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 전 상황
의정부 지역을 담당한 제 7사단은 유재흥 준장의 지휘 하에 제1, 9 양 연대가 사직리-쇄역리-적성간의 47km에 달하는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서울에서 제 7여단으로 창설된 뒤로, 1949년 2월에 수도여단으로 개칭되었다가 동년 5월에 사단으로 바뀌고, 다시 6월에 제 7사단으로 개칭됨과 더불어 이 지역을 담당케 되었는데, 이때에는 예하에 제1, 3, 9, 3개 연대와 포병 및 공병 등을 합하여 총병력이 9,698명이었다.
그런데 전쟁발발 3주전인 6월 1일부로 육군본부에서 일선 명령 제 43호를 하달하여 일부부대의 예배속 관계를 조정함에 따라, 제 3연대(연대장 중령 이상근)가 수도경비사 산하로 예속이 변경됨으로써, 동 연대의 3,050명이 사단을 떠나고, 이날 현재 제 1, 9 양 연대와 포병 및 공병 등, 6,788명의 공력이 이 지역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육본 작전명령 제 79호(50.6,13)에 의거하여 6월 15일부로 제 2사단 25연대(연대장 중령 김병휘)가 사단에 편입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동 연대는 온양에 위치한 까닭에 의정부로 이동키 위하여 준비하던 바, 주둔지로 선정된 호완리 일대가 민유지인 관계로 그 징발문제와 막사 및 식수문제 등 일련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7월 15일로 이동일자를 연기한 차에 본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 연대는 전투 후에 다시 제 2사단에 복귀되었다.
이리하여 사단은 예비대가 없이 양 연대를 일선에 내세워,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 9연대는 포천정면인 우 일선을, 함준호 대령이 지휘하는 제 1연대는 동두천 정면인 좌 일선을 각각 담당케 한 가운데, 38도 분계선 방어와 부대교육을 병행 실시하였다.
그런데 일선 경비보다도 교육훈련에 더욱 치중하여, 각 연대로 하여금 1개 대대를 경계진지에 배치하고 2개 대대를 의정부 부근으로 뽑아 소정의 교육을 실시케 하되, 3개월마다 순환교대 방식으로 전술을 숙달하게 하였던 것이다.
나. 작전계획
북괴는 전쟁발발 2주 전인 6월 10일에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비밀리에 군사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기동훈련을 빙자한 전투 병력의 일선전개를 꾀하였는데, 이때에 벌써 이들은 주력의 침공경로를 철원-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결정한 듯하다.
이는 그 회의 직후에 단행된 병력의 이동상황으로 볼 때, 이른바 그들의 정예라고 하는 제3, 4 양 사단과 유일한 기갑부대인 제 105기갑여단을 철원-운천-연천 부근에 집결시켜 경원선 주변에서 공격태세를 갖추게 한 점과 전쟁 중에 입수한 노획문서 가운데 연천-의정부를 거쳐 조기에 서울을 점령한다고 밝혀진 점, 그리고 개전 이후의 부대기동등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그들의 침공기도는 처음부터 주력으로써 의정부로 지향한다는 계책을 세운 것으로 추단된다. 즉, 제 1군단(군단장 중장 최웅)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하는 동시에, 동측의 제 2군단(군단장 소장 김광협)과 서측의 제1, 6 양 사단과의 협조아래 수도 서울을 침탈 도모코자 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당 사단의 책임지역이 그 주목표로 부상하게 되었거니와, 이들은 다시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월 18일부로 인민군 최고사령관(김일성 : 본명 김성주)의 명의로 된 정찰명령 제 1호를 하달하였는데, 그 개요를 보면, 소대군위 이하의 병력 배치선 까지 정찰토록 하는 세밀한 계획을 세워 특히 유개진지와 병력배치상황 그리고 장애물 지대 및 예상 집결지 등을 확인토록 하였으며, 여기에 이어 공격목표의 선정과 부대의 기동계획을 마련토록 명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찰을 마친 그들은 동월 22일 14:00부로 전투명령 제 1호를 하달하여 23일 12:00까지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토록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사단의 경계진지와 주진지를 빠짐없이 공격목표로 선정한 점과 포병을 비롯한 공병과 반전차포 및 항공등의 지원 아래 서울까지 일거공략 하려는 계획을 미리 밝히고 있는 점이다.
육군본부에서 교육각서 제 2호에 따른 교육을 실시케 함으로써, 이에 치중하여 38도 분계선 남연의 전진진지에 1/3 병력만을 배치하고 주력은 28km 후방의 의정부 부근으로 집결시켜 대대급 이하의 기초훈련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각 연대의 지휘소도 주력과 함께 모두 의정부 부근에 위치하고, 일선대대는 각각 20km 내외의 광정면을 경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다. 포천지구의 전투
사단의 동반부인 포천지역은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 9연대가 맡아 사직리(기산리 동북쪽 5km)-추동리(포천 서북쪽 11km)간의 26km에 달하는 책임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는데, 본래 이 지역은 금화에서 운천과 포천을 거쳐서 의정부에 이르는 43번 도로를 중앙에 끼고 동측의 광주산맥과 서측의 천보산맥이 종으로 뻗어 장방구형을 이룬 지대로써 정상적으로는 2개 사단의 방어정면에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전투정면을 3,4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제 9연대가 전담하여 북한군 제 109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침공한 제 3사단과 대결케 되었는데, 당시에 연대는 사단의 방침에 따라 1개 대대로써 일선경비를 담당하게 하고 2개 대대를 38도 분계선에서 26km 뒤에 떨어진 금오리의 연대 지휘소 부근으로 뽑아 소부대 전술교육을 실시하는 상태인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일선경비를 맡은 대대는 전 정면배치가 곤란하여 통행의 요로만을 한정하여 거점방어태세를 취하였으니, 이날 제 1선에는 전순기 소령이 지휘하는 제 2대대가 2일 전인 23일부로 제 3대대(대대장 소령 이철원)의 진지를 인수하여, 대대본부를 전과 다름없이 포천에 두고 제 7중대(중대장 중위 송영환)를 오른쪽 제 1선으로 하여 43번 도로와 38도선이 접하는 양문리 일대에, 제 6중대(중대장 대위 이인호)는 왼쪽 제 1선으로 그 서쪽의 소로인 325번도가 영평천에 이르는 가양리와 추동리 부근에 각각 배치하는 한편 제 5중대는 예비로 4km 후방의 신평리(만세교 서쪽) 부근에 공치하였다.
이렇게 볼 때, 대대의 실 병력이 배치된 지역은 6km의 점령지대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19km에 해당하는 산록과 야지는 거의 무방비상태로 있었으며 특히 동측의 기산리 북쪽은 391번도 연변에서 1개 분대의 수색대가 봉쇄할 뿐이었다.
그리고 박창암 중위가 이끄는 보국대대 제 2중대가 전날부터 38도 분계선 북쪽의 유정리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대대와는 유기적인 협조를 취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상과 같은 상황아래 이날을 맞이하게 되었거니와, 다행히도 연대의 전 장병이 영내대기 상태에 있었으니, 이는 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전날 사단으로부터 『재량에 따라 주말외출을 실시토록 하라』는 통보를 받고, 오랫동안의 긴장 속에서 대기한 바 있는 병사들에게 외출과 외박을 허용할까 생각하다가 당면의 적정이 수상한 까닭으로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그는 뒤에 당시를 회고하며 술회하기를,『오랜만의 외출이라 처음에는 제 2대대만 제외하고 모두 허용하려고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적정이 심상치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철원에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있는가 하면 북한의 정규군이 38경비대와 교대하였다는 소문이 떠돌고, 23일 밤에는 제 2대대장으로부터 운천에서 차량대열이 유정리로 이동한다는 보고에 이어 바로 영평천 부근에 전차가 나타났다고 속보되는 등, 모든 면에서 평상시와 달랐다. 그래서 제 1, 3 양 대대의 병사들의 외출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일단 중지시키고 이상이 없으면 명일(25일) 주간에 시행토록 하자고 하였더니 대대장들도 내 뜻에 따라 모두 영내에 남았으며 나도 감기로 미열이 있었지만 청량리 숙소에 전화연락만을 하고 영내에서 대기하였다』고 하니, 일선 지휘관의 심회를 헤아리고 남음이 있다.
이 같은 조치로 연대의 주력은 금오리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더욱 경계를 엄히 하던 바, 이날 새벽에 북한 제 3사단은 대좌 김창봉이 이끄는 제 7연대를 선봉으로 삼아 제 109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일시에 엄습하니, 돌연 포천 정면의 38도 분계선 연변이 불길에 휩싸였다.
①제 9연대 2대대의 전황
제 2대대(대대장 소령 전순기)는 3개월마다 상호 교대하는 방식으로 일선 경계임무를 수행케 하는 연대의 방침에 따라 23일부로 제 3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기설진지를 점령하였는데, 이때에 대대장은 제6, 7 양 중대를 제일선에 배치하기에 앞서 『근간에 적의 동향이 심상치 아니하니 경계를 철저히 하고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진지를 더욱 보강하라』고 강조함과 아울러 중화기중대의 기관총 소대를 분할하여 각각 1개소대(기관총 1개반과 81mm 박격포 2문)씩 배속시켰다.
그런데 이날 03:40을 전후하여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한 적은 미리 대대의 병력 배치상황을 탐색한 듯 경계진지만을 골라 포격을 집중하였으니, 오른쪽 제 1선인 제 7중대(중대장 중위 송영석)지역에서는 양문리 일대와 그 서쪽의 287고지 북쪽에 포화가 집중하고, 왼쪽 제 1선인 제 6중대(중대장 대위 이인호) 지역에는 하양리-주원리-추하리 일원을 초연으로 뒤덮어 마치 산 전체를 무너뜨릴 듯하였다.
제 7중대 정면에는 양중교(일명, 삼팔교)를 넘어선 3대의 전차가 양문교 부군까지 침습하여 포구를 동남쪽을 지향하고 동 중대 제 1소대의 진지를 강타하는가 하면 바로 그 서쪽의 희악사 부근에서 수 미상의 적이 측후방으로 침공하여 단숨에 이 소대진지를 삼키고자 하였다.
이때에 동 소대는 소대장이 공석이므로 선임하사가 지휘하여 양문리 남쪽 500m에 있는 무명능선 서단에 배치한 기관총 소대와 함께 이 요선을 지키고 있었는데, 의외의 강습을 받게 되자 가능한 모든 화력을 활용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교전 30분 동안에 이미 과반수의 병력을 잃고 어둠속에 분산되고 말았다.
한편 왼쪽 제 1선인 제 6중대는 성일영 소위가 지휘하는 제 3소대가 추동리에서 한차례 고전을 벌인데 이어, 장자동으로 집결한 중대의 주력이 그 서남쪽 삼차로를 막아 287고지에 연한 방어진지를 급편 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또한 325번 도로를 따라 침공한 전차대의 강습으로 말미암아 대동소이한 양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적의 전차대가 그 남쪽 2km의 장승거리를 넘어서자 분산병력을 수습하여 무이산(포천 북쪽 7km)쪽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대대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로 삼성당리 계곡을 따라 포천 쪽으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제7, 6 양 중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에 12km 후방인 포천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는 대대장 전순기 소령이 일선의 위급한 전황을 연대장에게 보고함과 아울러 증원 병력과 특히 대전차 화기의 지원을 요청한 다음 제 8중대장 박기순 중위를 대동하고 만세교 초소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06:00에 여기에 도착한 대대장은 곧 예비인 제 5중대로써 북만세 좌우측방의 160고지와 208고지에 연한 저지 진지를 급편하게 하여 연대의 주력이 진출할 때까지 지연전을 펴기로 하였는데, 이때에 적은 양문교를 넘어 만세교 쪽으로 지향하고 있었으니, 43번 도로를 따라 주력으로써 침공하리라고 판단한 대대장의 예견은 적중하였으나, 소총만을 들고 능선을 지키는 병사로서는 이 기계화 부대를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②만세교 부근의 지연전
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첫 보고를 받은 것은 04.30이었다.
그는 대대장의 유선보고를 받는 순간 근래에 야기된 일련의 사건이 연상되어 이것이 곧 적의 대규모 공격일 것으로 판단하고 이 사실을 사단에 보고하는 한편 연대비상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금오리에 대기 중인 제 1, 3 양 대대로 하여금 『천계산(424고지)-가랑산(350고지)간의 주진지를 점령하여 기정방침에 따라 적을 조지, 격멸토록 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제 2대대장 전순기 소령에게 현 위치에서 최대한의 지연전을 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양 대대가 출동태세를 갖추는 동안에, 허 현 대위가 지휘하는 57mm 대전차포 중대로 하여금 만세교로 직행하여 전차대의 예봉을 격쇄토록 조치함과 아울러 2.36인치 로켓포 12문을 모아 역시 만세교 부근의 요선을 지키도록 후속, 급파하였다.
4시간 동안을 홀로 고군분투한 제 2대대는 일선 분산병력의 수습에 힘쓰며 북만세선의 진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08:00를 전후하여 다시 침습하기 시작한 적이 43번 도로를 따라 밀고 내려왔다.
그런데 이들은 진지공격 보다도 급속진출을 위주로 삼아 열의 전차를 앞세우고 밀려들자, 208고지 북쪽 기슭의 제 5중대 2소대(소대장 소위 이학봉) 진지에서 기관총 측사화력으로 집중타를 가하니, 선두전차가 만세교 북쪽 300m 거리에서 일단 멈추어 서면서 포구를 돌려 동진지를 반격하였다.
이로부터 중대는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적의 전차에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실탄만 소진케 되었는데, 바로 이때에 연대에서 급파한 대전차포 중대(-)가 만세교에 다다랐다.
이리하여 진전 50m 까지 적을 유도한 동 중대(-)는 선두차를 명중시키고 함성을 지르며 기뻐하였으나 그것은 일순뿐으로 파괴된 줄 알았던 전차는 오히려 진지에 포격을 연발하며 계속 진전으로 육박하는 것이었다.
이에 좌측포가 다시 수 발을 더 명중시켰으나 아랑곳없이 목전에 당도하니, 겁난 병사들이 조준경만을 빼어들고 신평리(포천 북쪽 5km)쪽으로 급히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적은 위세를 돋우어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 다시 탄장선으로 침공하니, 이때가 09:40으로 만세교 부근의 지연전은 2시간을 채 지나지 못하였으며 제 2대대 5중대의 장병들은 구릉에서 이를 방관하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③적 기계화 부대의 선공
북한 제3사단은 이날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돌파하여 10km 남쪽의 만세교 부근까지 돌입한 연후에 일단 멈추어 전열을 정비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10:30을 기하여 재공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제 7연대(연대장 대좌 김창봉)로써 43번 도로를 따라 정면공격을 꾀하는 한편, 제 9연대(연대장 대좌 김만익)를 서측의 325번 도로로 우회시켜 일격에 포천을 확보하고자 기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들은 본도상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포병부대(포병부대장 대좌 안백성)화력을 여기에 집중하는 동시에 기계화 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연대 주저항선의 중앙지대를 돌관하여 장차 크게 공위코자 한 것으로 추단되었다.
그런데 연대(-)는 병력의 부족으로 43번 도로 양 측방의 천계산과 가랑산에 진지를 선정함으로써 서 측방이 공백상태로 남은 데다 대포병 장비나 대전차 화기가 없으니, 이 싸움은 처음부터 그 귀추 여부를 헤아릴 수 있었다.
④제 9연대 주저항선의 붕괴
일진광풍이 지난 뒤로 연대(-)의 장병들은 후속 도보부대만은 기필코 격멸키로 다짐하고 현 진지를 고수하던 바, 기계화 부대가 지난 1시간 뒤에 이윽고 적의 보병이 침공하였다.
이들은 연대 주력의 배치선을 탐지한 듯 먼저 포격을 가하였는데, 120mm 박격포를 비롯한 122mm 유탄포와 76mm 야포 등 곡사화력으로써 특히 제 1대대의 진지인 천계산 서쪽에 집중포격을 가한 다음 43번 도로를 따라 2열종대로 열을 지어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적의 선두가 신북대교를 넘어서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제 3대대와는 통신마저 두절되어 정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으며, 제 1대대도 이날 세 차례에 걸친 대결 끝에 42명이 전사하고 80여명이 부상하게 된 데다 휴대한 탄약을 모두 소모하고 보니 전의가 떨어져, 보다 적극적인 방어책을 취하지 못한 채로 현 진지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반하여 적은 진지 공격보다도 남하진출에 주안한 듯 전차의 엄호 하에 주력으로써 신 북대교를 통과하니, 이때가 14:00로서 3시간 동안에 걸친 분투도 보람 없이 끝내 연대의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 3대대와는 통신이 두절되어 끝내 연락을 취하지 못한 채로 연대본부는 제 1대대와 함께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명령을 받지 못한 제 3대대는 남은 병력으로 가랑산의 진지를 계속 지키고 있다가 이날 밤에 단독으로 철수하여, 왕방산 기슭을 따라 회암령을 넘은 다음 동두천 가도의 덕정 부근으로 빠지게 되었는데, 전진 중에 대부분이 낙오되어 다음날 아침에 옥정리로 집결한 병력이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로 이 병력은 제 1연대와 합세하여 의정부로 후퇴하다가 천보산 북쪽에서 다시 분산되어 그 일부만이 우이동으로 집결하게 되는 바, 그 과정은 제 1연대의 반격상황에서 약술하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연대는 포천 정면에서 북한군 제 3사단과 대결 끝에 중과부적으로 분산되어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고 제1대대만이 태릉으로 집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⑤제 3연대의 전투참가
포천 정면에서 제 9연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인 이날 정오에 사단에서는 제 5포병대대(-)만을 증파하고 후속 예비 병력이 없어 기울어지는 전황을 지켜보던 바, 육군본부에서 수도경비사(사령관 대령 이종찬) 예하의 제 3연대(연대장 중령 이상근)를 급파하였다.
이 당시에는 이미 제 9연대의 주저항선이 무너져 적의 보병부대가 탄장을 통과한지 1시간이 지나고 기계화 부대가 이보다 3시간 전에 포천에 돌입하였던 것이니, 이제 공격의 화살이 곧 목전에 다다른 급황 이었다.
그러나 사단장으로부터 탄장으로 직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적정을 확인키 위하여 수색소대장 김철순 중위로 하여금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포천까지 위력정찰토록 지시하고 자신은 주위의 지형을 살피던 바, 15:30에 이르러 수색소대장으로부터 어용동(포천 남쪽 1km) 부근에 적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입수되자 곧 주력을 반전시켜 3km 후방인 송우리에서 급편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 측방에 각각 2개 중대씩 배치하는 한편 이봉근 중위가 지휘하는 혼성 제 11중대로 하여금 43번 도로를 포함한 중앙지대를 담당케 하여 진지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때에 마침 제 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현지에 당도하자, 그에게 동측의 2개 중대를 지휘케 하고 제 3대대장 김붕상 소령은 제 11중대를 포함한 서측의 3개 중대를 맡아, 양 대대로써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장송우 북쪽의 134고지에 연대 관측소를 설정하여 제3대대장과 함께 그 고지로 올라가 본대를 장악하고, 57mm 대전차포 2문을 그 동측의 노변에 배치하였으며, 연대 통신대장 김성규 중위와 제 1대대의 통신소대장 김덕수 소위는 통신망을 구성하는 등 대결 태세를 취하였다.
양 대대는 혼성병력을 재조정 하면서 계속 진지를 구축하던 바, 17:00을 전후하여 적의 포격이 격렬하게 불을 뿜고 또한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심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때에 양 대대는 개인호의 경우, 2/3 정도 굴착하였을 무렵이었는데, 이같이 포격이 격증하자 진전을 살펴보니, 2,000m 직전방의 도로상에 1단의 기계화 부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마치 나무단을 쌓아올린 우마차 대열과 같이 짙은 위장을 하고 남진을 계속하는데 어느 덧 그 선두가 선단리를 지나 1,500m 전방으로 다가섰다.
이에 양 대대의 진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시작하였는데, 특히 연대의 중화기가 집결된 제 12중대는 중대장 대리인 김현경 중위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거리 1,300』을 불러 81mm박격포 1개 반의 포화를 유도하는가 하면, 동 소대장 최소위(본명미상)는 다른 1개 반을 맡아 포수 진삼섭 일등 중사에게 고폭탄을 쏘라고 외치고 다시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동 중대의 기관총 사수 이재철 하사는 장송우 부근에서 기총을 휘두르는 등 중화기 화력을 퍼부었으며, 이와 더불어 각 소총 중대도 60mm 박격포와 각종소총으로 동시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 기계화 부대는 아랑곳없이 계속 차전으로 밀려들더니, 선두에선 2대의 전차가 장승거리 부근에 멈추어서면서 제3대대의 관측소에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8대의 전차가 이에 가세하여 포격과 기총으로 양 대대의 진지를 위압하는데, 특히 중화기 진지에는 포격이 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에 57mm 대전차포가 불을 뿜어 장승거리 부근에 버티고 선전차에 일격을 가하고, 또한 제 11중대(중대장 중위 이봉근)의 화기소대장 이정선 소위가 이끄는 2.36인치 로켓포의 직격탄으로 철갑을 명중시켰으나 이 역시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적의 역사화력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부터 적의 전차대가 송우리의 방어진을 돌파하게 되자, 후속 보병만이라도 격멸코자 하였으나, 잇따른 후속종대는 보병뿐만 아니라 전차와 자주포를 비롯한 각종차량이 장사진을 이루어 밀려드니, 더 이상 항거의 수단를 잃고 말았다.
제 3중대(중대장 중위 조재준)의 제 3소대장 김학석 소위는 여기에서 159여 대의 각종차량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는 701호를 표식한 전차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전황이 급전하여 당면한 대책이 화급한데 아무도 다음 행동을 지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어느덧 18:30에 이르러 적의 보전협동부대가 침공하자 양 대대의 진지가 무너져 동서 양 측방으로 분산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 뒤로 연대(-)는 각대대장의 단독결정에 따라 철수케 되었는데, 대체로 제 1대대는 43번 도로 동측에서, 제 3대대는 그 서측에서 각각 퇴로를 모색케 되었으나 병력이 크게 분산되어 이 과정에서 대부분이 본대와 이탈하여 의정부를 목표로 전진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제 1대대장 임백진 소령이 이날 밤 20:00까지 축석령에서 수용한 혼합병력이 150명밖에 되지 않아, 21:00에 다시 이곳을 떠나 금오리 남쪽의 155고지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제 3연대의 송우리 전선이 무너짐으로써 이제 포천지역은 적의 독무대로 화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의정부 동북쪽의 방비가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4. 포천지구 전투의 결과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로 그 파급영향은 거의 전 전선에 미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좌 인접인 제 1사단(사단장 대령 백선엽)은 아직 임진강 방어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동측방이 뚫리니 그 위협으로 말미암아 철퇴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태릉 정면에서도 선도대대가 적선 후방에 위치하게 되는가 하면 춘천의 제 6사단과 강릉의 제 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및 심리적인 충격으로 작전지도에 혼미를 거듭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적은 서울 탈환을 제 1목표로 삼아 의정부 지역의 전과 확대를 획책하는 한편 일부의 병력을 27일에 벌써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측방에서 위협을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