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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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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제 목  개성.문산지구 전투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2004/09/08
요 약 정 보
 
● 전투시기 : 1950.6.25-6.26
● 전투지역 : 경기도 개성, 문산
● 주요지휘관 :백선엽 대령, 김점곤 대령, 김익열 대령
● 참고문헌 :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38도선 초기전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상 세 설 명
 

1. 개성-문산지구 전투의 개요

  개성-문산지구 전투는 청단(靑丹)·연백(延白)·개성·고랑포(高浪浦) 일대에서 한국군 제 1사단이 제 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 1 및 제 6사단과 맞서 싸운 방어전투이다.
청단-개성 일대에 배치된 제 12연대는 초전에 분산되어 영정포에서 한강 하구를 도하하여 김포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38도 분계선의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간을 방어하던 제 13연대 3대대 또한 임진강 남쪽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한편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제 11연대는 25일 오후 문산으로 이동하는 즉시 주저항선을 점령하였고, 제 1연대는 그 우측방의 파평산(坡平山)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2. 개성-문산지구 전투의 주요 지휘관

구분

부대

계급

성명

한국군

제 1사단장

대령

백선엽

제 11연대장

대령

최경록

제 1대대장

대위

고한조

제 2대대장

소령

정영홍

제 3대대장

소령

김재명

제 12연대장

대령

김점곤

제 1대대장

소령

신현홍

제 2대대장

소령

한순화

제 3대대장

소령

이무중

제 13연대장

대령

김익열

제 1대대장

소령

김진위

제 2대대장

소령

윤천태

제 3대대장

소령

유재성

북한군

제 1사단장

소장

최광

제 1연대장

대좌

황석

제 2연대장

대좌

김양춘

제 3연대장

총좌

이창권

제 6사단장

소장

방호산

제 13연대장

대좌

김순진

제 14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 15연대장

대좌

김현기



3. 개성-문산지구 전투의 진행과정

  가. 전투전의 상황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방어진지의 재편성으로 인하여 제 1사단의 교육훈련 진도는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즉 제 11·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 13연대는 2개 대대가 대대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을 위해 자하리(紫下里) 부근에서 야영 중에 있었다.
  더욱이 북한측이 제기했다가 무산시킨 요인교환과 적의 공격징후마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의 경각심은 해이해져 있었다. 이런 사유로 사단에서는 6월 24일에 보직병력의 약 1/3을 휴가 보내고 나머지 병력의 1/3범위 내에서 외출·외박을 실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총병력의 57%가 부대를 떠난 상태이었으며, 제 12연대 경우 80여km에 이르는 방어 정면에 배치된 병력은 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육군본부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제 11연대의 경우에는 60mm 및 81mm 박격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용화기를 부평의 병기대대로 후송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사단장이 6월 14일부터 보병학교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중이어서 제 11연대장이 대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나. 개성-문산지구의 전투
  
  ①청단-백천지역 철수
  제 12연대 3대대(대대장 소령 이무중(李茂重))는 읍천(邑川)에서 예성강 동쪽 전포리(錢浦里)까지의 54km 정면에 3개 중대를 일선으로 배치하고 산간소로 5개소에 경찰초소를 설치하여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나 초소간의 간격이 너무 넓어 횡적 연락과 상호지원이 불가능하였다.
  이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한 적은 공격준비사격을 하지 않고 은밀히 접근하여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는 동시에 대남방송을 통해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제 3대대는 국지적으로 적을 지연시키다가 청룡반도(靑龍半島)와 용매도(用媒島), 백석포, 김포반도, 강화도를 경유하여 문산리로 철수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분산되었다.
  
  ②개성지역 철수
  제 12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韓順華))는 예성강 청학동(靑鶴洞) 소반고개간 20km에 달하는 방어 정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적 제 6사단 15연대는 전차 5~6대의 선도하에 1번 도로를 따라 개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송악산 남쪽 무명고지에 배치된 제 6중대는 적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되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중대장 백원담(白源淡) 중위가 전사하고 병력은 소대 또는 분대단위로 분산되었다. 여현 일대를 경비하던 제 5중대도 개성이 함락된 상황을 확인하자 곧 소대 단위로 철수하였으며, 비둘기고지에서 교전하던 제 7중대도 방어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 대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자남산(子男山)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제 12연대장 전성호(全盛鎬) 대령은 이날 09:00쯤 상황을 종합 분석한 끝에 1번 도로가 차단되기 전에 임진강 철교를 통해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때마침 개성 북쪽 일대에서 철수중인 병력을 수습하면서 제 1대대가 배치된 고남리(古南里)로 내려오던 제 2대대장과 만난 연대장은 연대본부 및 제 1대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적에게 일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연대예비인 제 1대대가 손실 없이 보존되어 있어 즉각적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격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기습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철수부대에 왜 이와 같은 임무를 부여했는 지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연대장은 곧 연대본부와 직할대 및 제1대대를 지휘하여 고남리를 떠났으나, 이동 중 차량사고로 후송되고 그 후임으로 김점곤(金點坤) 중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한순화 소령은 특공대를 편성하여 개성시내 남대문으로 접근하다가 행군대형을 갖추고 대기 중인 적을 기습한 후 영정포를 경유, 김포반도의 강녕포(康寧浦)로 도하하여 통진(通進)에서 재편성 중 26일 오전에 급편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었다.
  
  ③문산지역 전투
  제 11연대(연대장 대령 최경록(崔慶祿))는 25일 08:30에 출동하여 11:00~15:00 사이에 열차를 이용, 문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행군한 병력은 9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전리(赤田里)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제 11연대는 임진강철교 부근 마정리(馬井里)의 1번 도로 좌우측에 제 1대대를, 임진강나루터 남쪽에 제 2대대를 배치하고 제 3대대를 예비로 적전리에 집결 보유하였다. 이렇듯 연대가 방어배치하는 동안에 휴가, 외출 장병이 줄을 이어 귀대하였으므로 연대병력은 1,500여 명으로 증가되었다.
  제 11연대장은 개성지구의 제 12연대 일부 병력이 임진강철교를 통해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여 사단공병이 폭약을 장전하고 점화하였지만 불발로 그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적은 평양-개성-서울로 연결된 가장 양호한 경의도로를 주병참선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까지도 적 전차는 임진강 돌출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적은 애당초 남침계획을 수립하면서 아군이 반드시 임진강철교를 폭파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전차를 1번 도로상에는 투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군이 주저항선을 거의 점령했을 때인 17:00경 철교 북쪽에서 전술행군대형으로 1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대규모의 적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적은 임진강철교 부근에서 격퇴되었다. 그 뒤에도 적 15연대는 수차에 걸쳐 임진강철교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자 공격을 중단하고 아군이 철교를 폭파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④파평산 전투
  제 1사단의 우전방인 제 13연대(연대장 대령 김익렬(金益烈))는 제 1·2의 2개 대대를 파평산에 투입하여 가여울-적성-문산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될 것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어나갔다. 그러던 중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고랑포, 자하리로 공격하다가 아군의 살상지대에서 격멸되었다.
  날이 바뀐 26일, 전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파평산 북쪽 320번 도로상에 적 전차부대가 출현하였으며, 그 중 선두 5대가 파평산 북단으로 육박하였다. 이에 맞선 아군은 2.36인치 로켓포를 사격하였지만 전차의 특성도 모르는데다가 사격술마저 미숙하여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하였다.
  제1대대장 김진위(金振暐)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 2개 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안고 적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앞을 다투어 뛰어들었다. 아군의 필사적인 육탄공격에 겁을 먹은 듯 적 전차 5대는 진출을 포기하고 도로변의 초가 옆에 정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광탄에 의해 초가집에 불이 나고 그 화염이 전차에 옮겨 붙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에 적 1개 연대규모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아군은 치열한 근접전을 펼치면서 끝까지 방어진지를 고수하였으며, 그 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가운데 밤이 깊어갔다.
  
  ⑤임진강방어선의 붕괴
  아군 제 1사단은 후방에서 증원된 부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강된 것에 힘을 얻어 26일에는 주저항선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상황 진전을 보아가면서 반격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 인접부대인 제 7사단이 덕정(德亭)-축석령(祝石嶺)선으로 철수한 탓으로 제1사단의 우측방이 완전 노출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가여울-적성으로 진출한 적 제1사단은 아군의 저항이 전혀 없는 상황 아래에서 아군 제 1사단의 주저항선을 우측방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군의 임진강철교 폭파기도가 실패한 것을 확인한 적 제6사단은 문산 돌출부에 전차를 투입하고 26일 이른 새벽에는 임진강철교를 통해 전차 5대를 앞세운 보·전·포 협동부대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와 맞선 제 11연대는 임진강철교로부터 남쪽으로 종심 깊게 편성한 방어지대에서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전차와 대결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이 없어 문산 남쪽 구릉지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상황은 시간이 경과할 수록 적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으나 문산 북쪽까지 진출한 적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역습의 호기라고 간파한 제 11연대장은 배속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포함한 3개 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역습을 단행함으로써 지역 내의 적을 임진강철교 북쪽으로 격퇴하고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바로 이 무렵 우측방의 제 13연대는 파평산 방어진지의 노출된 우측방으로 육박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해 주저항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적 제 1사단의 주공이 320번 도로를 따라 서진하면서 문산리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추이를 지켜보던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최후 저지선으로 철수하여 마지막 결전을 펼치면서 반격의 기회를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따라 제 1사단은 야간철수를 계획하였으나 적의 압박이 가중되어 위급한 국면이 전방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아군은 철수명령을 하달하였고, 사단 전술지휘소를 봉일천국민학교로 이동 설치하였다.


4. 개성-문산지구 전투의 결과

  적의 무리들은 6월 25일에 개성으로부터 그 남단에 있는 영정리(포)로 철수한 제 12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한순화)를 뒤따라 온 것으로 보이는 적 제 6사단 예하의 부대로 추단되었는데, 이들은 한순화 소령이 이끄는 대대가 강화를 거쳐 김포반도 서단에 있는 통진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6월 27일에 김포-오류동 지역으로 나오게 되자 그 뒤를 이어 김포지역을 침공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6월 28일전에 행주와 개화동일대의 개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개화산과 이산포 서북쪽 7km의 김포반도 대안 변에 있는 봉성산(129고지)등을 점령하여 한강하류 지역을 통제하는 한편, 신전동에 있는 138고지를 장악하여 김포가도 주변지대를 선점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행주나루로 도하한 부대 중에서, 여러 부대가 혼성이 되어 질서를 찾지 못한 부대나 지휘자가 없는 부대는 이러한 적의 불시 사격에 직면하자 강변에 있는 갈대밭에 뛰어들어 끝내 각개행동으로 분산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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