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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5.18'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천 - 1980년

2009.08.21 22:30 | 한국사 진행형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8302 주소복사

‘5·18’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천

이용기 (한국역사연구회)

들어가며 - 5·18의 역사성

1980년 5월, 광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일어났던 국가권력에 의한 민중학살과 그에 대한 민중의 항쟁, 즉 ‘5·18’은 80년대에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진보세력에게 하나의 출발점이자 거점으로 존재했으며, 적어도 90년대 초반까지도 현재적 실천성을 담보하는 ‘살아있는 역사’였다. 80년대 한국의 진보운동 혹은 민족민주운동은 5·18의 힘(=혁명성)과 좌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에서 ‘과학적 변혁운동’이라는 자양분을 섭취했고, 5·18 투사들의 희생정신을 통해서 운동의 추동력을 확보했으며, 5·18의 진실과 책임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학살의 주범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한마디로 ‘80년대의 진보’는 광주의 피를 먹고 자랐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기존의 ‘진보’가 쇠퇴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5·18은 현재적·실천적 의미를 잃어갔으며,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요란하면서도 지루한 소동의 와중에서 ‘흘러간 과거의 역사’로 화석화된 감이 있다. 즉 5·18은 공식적으로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현실에서는 항쟁의 지향과 의미가 탈각된 채 ‘국민화합’을 선양하는 기념비 혹은 광주·전남지역만의 기념행사로 박제화되고 있다.
질풍노도의 80년대와 그 餘震으로서의 90년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진보의 패러다임이 모색되고 있는, 또 모색되어야 할 오늘, ‘5월광주’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되새길 수 있을까? 이제 5·18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뿐인 ‘과거의 역사’일 수 밖에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은폐와 왜곡에 맞서 5·18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밝혀냈던 진보세력의 5·18 서술이 90년대 초반 이후 변화된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과 어긋났기 때문에, 5·18의 현재성과 실천성을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어긋남’은 무엇이고 왜 발생했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80년대식 진보’의 성취 및 한계와 관련되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일텐데, 이 글에서는 5·18의 진실과 의미를 어떻게 파악·정리·제시했는가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에 대한 답변의 한 단면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본 작업의 특성과 한계를 먼저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은 5·18에 대한 인식 일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역사서술’의 변화양상에 한정된 작업이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우리 한국사학계의 경우 아직도 동시대사(contemporary history)를 ‘역사’로 인정하는 것에 소극적이거나 혹은 현대사연구의 축적이 일천한 관계로 5·18은 한국사의 연구 영역으로 제대로 위치지워져 있지 않다. 오히려 5·18은 실천활동가와 사회과학자들의 논의대상이거나 정치와 언론 영역에서 다루어져왔고, 다만 한국사학계는 이를 역사서술에 ‘반영’하는 정도로 취급해 왔다. 따라서 5·18의 진실과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는가하는 점은 ‘역사서술’을 통해서 정리되기에는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기서 5·18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천을 살펴보는 것은, 5·18은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그 성격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 이외에도, 우리의 역사―적어도 현대사―속에서 어떤 위치와 의미를 갖는가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역사서술’이라 함은 역사책에 서술된 내용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실천가들의 팜플렛, 사회과학자들의 연구, 대중교양용 도서 등에 서술된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면서도 5·18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내용을 포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성격,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초점을 맞춰 구성해보겠다. 특히 5·18에 대한 논의·인식 지형이 변화하는 계기인 1987년 6월항쟁과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을 염두에 두면서, 각 시기별로 5·18 서술의 기본적 대립축인 정권측과 진보세력의 입장을 중심으로 갈래를 잡고 그 주변에 위치하는 다양한 서술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제1기(1980~1986) : 은폐와 은밀한 되새김

그[10·26사태-필자] 이후 한때 혼란 상태가 계속되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 위기에서 벗어나고 국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뒤, 각 부문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고등학교 <국사>, 1982)

광주민중항쟁은 4월혁명이 달성하지 못했던 한국사회 구조의 총체적 모순을 그간 내적운동 역량들을 길러 온 제반 노동권들의 연대를 통하여 타파하고자 했던 민중운동이다. (중략) 광주항쟁은 해방 이후 전개되어 온 우리 운동의 여러 목표들을 결합하고 투쟁의 과정속에서 확립하였으며, 민족·민주·민중이라는 성격을 우리 운동의 방향으로 규정해 준다. (전국민주학생연합, ?광주민중항쟁의 현대사적 재조명?, 1985)

1980년 5월 27일 이후, 5·18에 대한 언급과 서술은 항쟁을 진압하고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던 신군부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들은 5·18을 ‘불순 정치집단’의 조종을 받은 ‘폭도’들이 사회혼란과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일으킨 ‘광주폭동사태’로 규정하고,1) 정부 발표 이외에는 이에 대한 보도와 논의를 일체 금지시킴으로써 5·18에 대한 단 하나의 입장만을 강요하였다. 그렇지만 5·18에 대한 신군부의 입장은, 그것이 국가변란을 꾀한 폭동이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주지시키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논의 자체를 봉쇄하는 것, 즉 ‘은폐’에 무게가 실려있었다. 이는 정권측의 주장과는 달리 5·18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웅변해준다. 항쟁을 진압한 측에게 5·18은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짐으로 인식된 것이다.2)
집권세력의 ‘은폐’ 입장은 이들의 의도가 반영된 국정교과서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1982년에 발간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제4차 교육과정)에는, 10·26 사태 이후 ‘사회혼란’과 ‘남침위기’에서 벗어나 국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정부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개혁을 추진했다는 주장이 서술되어 있지만, 그 어디에도 5·18에 대한 언급은 없다(국사편찬위원회 1982a, 175-176). 5공화국 성립의 정당성과 그것의 개혁성을 주장하면서도 5·18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 서술, 이것이 국정교과서 서술의 핵심이다. 이러한 서술은 국립방송통신대학 교재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바, “1980년말의 10·26사태로 공화당 정권은 물러가고 잠깐 동안의 제4공화국을 거쳐 1981년에 제5공화국의 탄생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결의에서 새 역사창조에 매진하고 있는 터이다”라는 서술이 바로 그것이다.3)
관변·보수학계의 서술도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다. 국가공식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현대사?(1982)와 ‘고시용 국사교과서’로 통용되던 변태섭의 ?한국사통론?(1986)은, 10·26 이후 사회혼란과 대학생 시위의 과격화로 인해 ‘광주사태’가 발생했으며, 정부는 비상계엄을 통해 이를 ‘수습’하고 국보위를 설치하여 ‘대규모적인 정치·사회·문화의 개혁’을 추진했다고 서술하고 있다.4) 여기서 5·18은 정치사회적 불안정을 가중시킨, 그래서 ‘수습’되어야 할 ‘사태’로 규정되고 있으며, 이에 반해 5공화국 집권층은 사태를 수습하고 일대 개혁을 단행한 ‘새 지도층’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관변·보수학계는 5·18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 않고 있으며, 이를 ‘광주사태’로 파악하고 5공화국 성립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국정교과서의 시각과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권측이 침묵을 강요하고 관변·보수학계가 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함으로써 5·18은 공식적으로는 은폐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항쟁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과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한 실천가들은 지하에서 은밀하게 광주를 되새기고 있었으며, 이는 광주의 진실을 말하려는 몸부림과 광주의 교훈을 통해 ‘변혁’을 꿈꾸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5·18에 대한 항쟁주체들의 시각은 1980년 6월에 작성된 작자 미상의 ?광주시민의거의 진상?에서 처음으로 정리되었다. 이 문건은 5·18을 “10·26이후 고조된 민주운동의 結晶이며 박정권 18년 독재하에 성장한 민주역량의 구체적 표현”이자, “군사독재체제 강화에 대한 도전이고 자유민주주의 열망의 표현”인 ‘광주시민의거’라고 규정하였다(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88, 193-208). ‘광주시민의거’라는 개념은 정권측이 주장하는 일부 불순분자들의 폭동이 아니라 광주시민 모두가 주체가 되었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으며, 특히 그 규모와 전개양태에 있어 일반적인 ‘운동’을 뛰어넘는 ‘의거’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항쟁 직후부터 살아남은 투사들에게 5·18은 ‘돌발적 사태’가 아니라 4·19 이래 지속되어 온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연장선에 서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은 ‘획기적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항쟁 1주기를 맞는 1981년 5월까지도 항쟁주체들 사이에서 견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5) 학생운동권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서 5·18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5·18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의거라고 파악하여 4·19 이래의 연속성을 강조하기보다는 ‘획기적 사건’이라는 단절성에 주목해서 5·18의 의미를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나갔다.
1981년 9월에 전남대 교내시위 도중에 살포된 유인물에는 항쟁을 경험한 학생운동권의 5·18 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5·18은 단지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아니라 “적과 아의 계급적 모순이 폭발적으로 격화”되어 발생한 ‘5·18 광주민중봉기’이며, 그 실패의 의미는 기존 운동의 “결정적 자기 한계”를 청산하고 “반제반파쇼 민족해방투쟁”으로 “혁명적인 질적 전환”을 촉구하는 “피의 선언”이라고 주장했다(광주광역시 1997, 235-246). 이 글은 항쟁의 실패를 “통한의 아픔”으로 되새기던 광주지역 학생들의 투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대단히 급진적이고 선언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초기의 ‘변혁론적 해석’은 이후 학생운동권의 ‘과학적 혁명이론’ 모색 과정에서 점차 세련화되었으며, 1985년에 이르면 민족·민주·민중이라는 이른바 ‘삼민이념’과 결합되면서 ‘광주민중항쟁’으로 정식화된다.
1985년 5월에 작성된 전국민주학생연합의 ?광주민중항쟁의 현대사적 재조명?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학술부의 ?5·18의 민중혁명성 고찰?은 그동안 학생운동권에서 논의되던 ‘변혁론적 해석’을 일차적으로 집대성하고 이후 진보세력의 5·18 인식의 기초를 마련한 글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 5·18은 “해방이후 70년대말까지 누적되어 왔던 반봉건, 신식민지로서의 정치경제적 모순”, 즉 “한국사회 구조의 총체적 모순”을 타파하고자 했던 ‘민중운동’이자 ‘혁명적 민중봉기’로 규정된다. 여기서는 모순의 총체성, 민중의 혁명성, 혁명운동의 합법칙성 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며, 미국을 제국주의로 파악하는 인식이 정형화되어 나타난다. 결국 5·18은 “4·19의 자유민주주의 혁명으로 반독재투쟁에 머물렀던 한계를 극복하고 그것과 결탁한 외세의 제국주의 침략까지를 분쇄하고자 했다는 민중해방운동”으로서 “현대사의 일대 분수령”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5·18의 계승은 민족·민주·민중이라는 삼민이념에 입각한 과학적 혁명운동을 전개해가는 것이라고 정리되었다(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88, 269-289; 389-405).
이처럼 지하의 학생운동권이 5·18을 급진적으로 되새기면서 ‘변혁’의 의지를 다져나가던 바로 그 1985년 5월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출간되고 나아가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 터졌다. <넘어넘어>가 항쟁주체들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된 5·18 현장보고서로서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5·18의 진상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세상에 밝혔다면,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미국에 대한 강렬한 문제제기와 함께 5·18을 사회적·정치적 이슈로 부각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5·18은 <한국민중사>(1986)를 통해 처음으로 역사책에 ‘광주사태’가 아니라 ‘광주민중항쟁’으로 기록되었다.
?한국민중사?는 젊은 역사학도들이 ‘민중적 입장에서 한국사를 정리’하려는 취지하에 집필한 通史였는데, 여기서 5·18은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제목으로 책의 마지막 절에 배치되었다. 이 책은 항쟁주체들이 온몸으로 밝힌 항쟁의 진상과 학생운동권의 변혁론적 해석을 토대로 5·18의 전개과정을 서술하고, 그 성격을 군부독재의 재등장에 맞선 ‘광주민중항쟁’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5·18의 역사적 의의는 “해방 이후의 분단된 조국에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적 자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광주민중항쟁은 그 이전의 민족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총괄”하면서도 “이후의 민족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제시”한 ‘역사의 분수령’이었다고 평가했다. 즉 우리 사회의 모순구조의 실체를 드러내고 또 그것을 극복할 주체가 민중임을 확인시켜준 동시에 “과학적 인식 아래 대중 속에 뿌리박은 운동”이라는 방향성을 제시해준 계기로 5·18을 위치지운 것이다(한국민중사연구회 1986, 367-376).
5·18은 ?한국민중사?를 통해서 민족운동사에서 분수령적 의미를 갖는 민중항쟁으로 공개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5·18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대단히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서술을 담고 있는 한계를 드러낸다. 모순의 실체가 무엇인가, ‘과학적 인식’이 무엇인가, 이후 민족운동의 방향과 과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점들이 왜 5·18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는가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특히 핵심적으로는, 왜 ‘민중항쟁’인가에 대해서 설득력있는 근거와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민중주체’의 역사인식이라는 명제가 당위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한계를 보인다.6)
진보세력은 5·18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치열한 몸부림을 쳤음에도, 이들이 주장하는 5·18의 민중성·혁명성은 아직까지도 하나의 당위론이나 변혁의 열망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처럼 급진적인 5·18 해석은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를 갖춘 역사서술이라기 보다는 5·18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고 현실 투쟁의 정당성과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열정’에 의해 규정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작업은 87년 대투쟁 이후 민족민주운동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그 논리가 체계화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2. 제2기(1987~1992) : 진실공방과 변혁론적 위치짓기

10·26 사태 이후,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12·12 사태가 일어났다. 이를 전후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개헌 작업이 추진되어 (중략) 민주정의당의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하는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고등학교 <국사>, 1990)

광주민중항쟁은 4·19 이후 최대의 반독재 민중항쟁이었다. 시민들의 자기방어적 무장에 의해 시민전쟁의 상황으로까지 발전되었으나, 비조직적 시민군으로서는 막강한 물리력을 가진 지배권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민중들은 이 사건을 통해 군부파쇼의 폭압적 성격과 그것을 지원한 미국의 본질에 대해 점차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강의?, 1989)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서 일대 획을 그은 87년 6월항쟁은 5·18 역사서술에도 중대한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주의 피를 먹고자란 진보세력은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주장했고, 정권측도 더 이상 이를 은폐할 수 없게 되었다. 5·18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논쟁의 장으로 뛰어 올랐고, 이를 ‘과거완료형’으로 처리하려는 정권·보수진영과 이를 ‘현재진행형’으로 지속시키려는 진보진영간의 전면적인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5·18에 대한 역사서술의 갈래는 바로 이러한 지형속에 놓여 있었다.
정권측은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할 수 없게 되자, 5·18을 ‘광주폭동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말을 바꾸었다. 단 ‘이제 그만’이라는 단서를 전제로. 노태우 정권의 ‘광주민주화운동’론은 5·18을 “광주 시민·학생의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면서도, 시위대와 군경간의 충돌과정에서 격화된 무력충돌로 파악하는 쌍방책임론적 논리를 갖는다.7) 이는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진실에 대해서는 논의를 회피함으로써 그 역사성과 혁명성을 거세하고 우발적인 사건으로 만들려는, 그리하여 현재적 의미를 갖지 않는 ‘과거완료형’의 역사로 해석하려는 입장이다. ‘광주민주화운동’론은 국정교과서와 보수학계의 역사서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1990년에 발간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제5차 교육과정)는 “10·26 사태 이후,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12·12 사태가 일어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고 서술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1990a, 183). 이전 교과서에 비교할 때, 전혀 언급되지 않던 5·18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전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으며, 5·18과 5공화국 성립의 상관관계에 대한 언급도 없다. 또 교사용지도서에는 “최규하의 과도체제는 정치 발전을 활성화하고 정치 참여의 확대를 추구하면서 개헌작업에 착수하였으나, 학원사태와 노사분규가 과열되어 갔으며, 잇달아 12·12사태,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하였다”고 서술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이 마치 정치발전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1990c, 174) 더구나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아예 5·18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직도 국정교과서에는 5·18을 진정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하려는 입장보다는 이를 은폐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다.
보수학계의 5·18 서술 역시 본질적으로는 크게 변한 것 없이 단지 ‘記述的’인 측면에서의 말 바꾸기 정도에 그치고 있다. 변태섭의 <한국사통론> 개정판(1989)은 서문에서 “1987년은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확실히 큰 변혁의 계기”이며 “역사는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5·18 관련 부분을 ‘개정’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초판(86년)의 서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광주사태’를 ‘광주항쟁’으로, ‘수습’을 ‘진압’으로, 그리고 국보위가 ‘대규모적인 정치·사회·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였다’를 ‘전권을 장악하였다’로 고쳐썼다. 이것이 바로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쓴 내용이다.(변태섭 1989, 3; 542)
이보다 한 해 먼저 발간된 대한민국사편찬위원회의 <대한민국사>는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인식을 고수하고 있다.8) 여기에는, 10·26 이후 우리 사회가 “노사분규, 학원사태의 과열, 5·18광주사태의 발발 등 격렬한 반정부 민주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여 정치적·사회적 혼란에 빠져들었”고 “결국 새로 등장한 개혁주도 세력에 의하여 사회개혁이 광범하게 단행”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5·18광주사태’는 “일부 시위참여의 과열경향에 대하여 출동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발생한 민족적 비극이지만, “그 역사적 평가에 관하여는 현재로서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대한민국사편찬위원회 1988, 132-134). 정권측이 주장하는 쌍방책임론과 평가유보 입장에 충실한 서술이다.
그렇지만 정권측과 보수학계의 5·18 서술은 현실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했으며, 오히려 5·18 서술의 주도권은 ‘학술운동’을 표방하며 기성학계의 권위와 보수적 시각에 도전하던 진보적 학술진영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1988년 이후 급속하게 쏟아져나온 5·18 관련 자료집, 회고록, 수기, 증언록 등을 토대로, 그동안 지하에서 실천가들이 경험적으로 다듬어온 ‘광주민중항쟁’론을 학술적으로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펼처갔다. 주로 진보적인 사회과학계가 주축이된 5·18 연구는 89~90년에 집중적으로 진행되어 몇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여기서 5·18과 관련된 주요 쟁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및 인식의 갈래가 정리되었다.9) 이러한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5·18은 대학교재용과 대중교양용 한국역사서에 ‘광주민중항쟁’으로서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5·18이 학술적인 역사서에서 ‘광주민중항쟁’으로 처음 기록된 것은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사강의?(1989)에서였다.10) 여기서 5·18은 4·19 이래 꾸준히 발전되어온 민족민주운동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유신체제 붕괴 이후 전사회적으로 확산된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에 대항해서 “시민전쟁의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던 “4·19이후 최대의 반독재 민중항쟁”으로 서술되었다. <한국사강의>는 5·18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내용을 가지면서도 민중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며 “시민들의 자체 무장에 의한 저항”의 특징을 갖는다는 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이라고 성격규정하였고, 이를 계기로 군사파쇼와 미국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5·18의 유산·교훈으로 평가했다(한국역사연구회 1989, 361-363). 그리고 한국역사연구회는 재차 <한국역사>(1992)를 통해서, 5·18은 유신체제 붕괴후 군사파쇼체제의 재편음모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민중항쟁이자, 이후 민족민주운동세력에게 중요한 투쟁경험과 인식지평의 새로운 확대를 가져다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서술했다. 특히 여기서는 ‘미국의 책임문제’와 이로 인해서 ‘반미운동의 대중적인 고양을 예고’한 점을 중시하는 서술이 두드러졌다(한국역사연구회 1992, 400-401).
이 시기에는 진보적·실천적 역사관에 입각해서 서술된 대중교양용 한국사 책이 다수 출간되었는데, 여기서도 5·18은 ‘광주민중항쟁’으로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바로 보는 우리역사>(1990), <일하는 사람을 위한 한국현대사>(1990),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992) 등은 아카데미즘 역사서에 비해 훨씬 생동감있고 때로는 선동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5·18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일반대중들에게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민중의 ‘영웅적 투쟁’과 ‘해방광주’의 도덕성이나 자치역량 등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광주민중항쟁’론은 5·18을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거나 민주헌정의 회복을 요구하는 반독재민주투쟁이었다는 해석을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민족민주운동의 새로운 발전의 단초를 제시해준 민중항쟁 혹은 민중봉기로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특히 이전과 같이 지하에서 경험적·선언적으로 변혁의 필요성을 외치던 수준에서 벗어나, 5·18의 역사적 맥락과 구조적 배경, 그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민중의 혁명성, 국가권력=군사파쇼와 그의 배후세력인 미국의 본질 등을 분석하여, 5·18을 사회변혁운동의 발전선상에 위치지우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광주민중항쟁’론 역시 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인가에 대해서는 주장의 선명성에 비해서 충분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즉 ‘항쟁’이라는 개념은 ‘무장투쟁’이나 ‘시민전쟁’과 같은 고도의 운동형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민중’이라는 개념과 관련해서는 항쟁의 주체와 지향의 측면에서 민중적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설득력있게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의 측면에서는 계급계층을 초월한 전시민적 참여를 강조하여 계급연합적 의미의 민중 개념을 퇴색시키는 면도 보이며, 지향의 측면에서도 일반(혹은 시민적)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민중적 지향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한계를 보인다.11)
따라서 ‘광주민중항쟁’론은 ?한국민중사?와 마찬가지로 ‘민중주체의 역사’라는 인식이 당위론적으로 전제되어 있으며, 그것을 채워줄 서술의 구체성을 갖기보다는 ‘민주화운동’론에 대한 차별화로서의 개념규정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러한 한계는 ‘광주민중항쟁’론의 인식론적 기반인 80년대 진보이념과 변혁론 일반이 안고 있던 한계, 즉 역사·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의 신화, ‘모순과 저항’의 이원항 속에서 파악되는 규범적인 민중 인식12), 구조결정론적?필연주의적?본질환원론적 편향 등에서 기인한다.13) 이런 인식틀에서는, 5·18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총체적 모순관계라는 구조적 배경에서 출발하며, ‘필연적으로’ 그 모순의 집중적 체현자인 기층민중이 중심이 된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따라서 민중의 의식적·조직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민중해방운동 혹은 민족민주운동이라고 인식된다.14)
이상과 같이 진보세력의 5·18 서술, 즉 ‘광주민중항쟁’론은 87년 이후 급격히 성장한 민족민주운동의 성취와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는 5·18에 대한 역사서술이, 실천가들의 인식을 진보적 사회과학계가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역사서술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론은 5·18의 역사적·현실적 실천성을 담아낼 수 있는 역사서술이라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한 역사학적 분석이 아니라 특정한 변혁론에 입각한 도식적인 서술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광주민중항쟁’론은 민족민주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쉽사리 우리 역사 혹은 현대사의 일대 사건으로 복권될 수 있었던 것만큼이나, 현실 운동의 성장·쇠퇴 여하에 따라서 또한 쉽게 그 활력을 잃어버릴 소지를 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제3기(1993~현재) : 역사바로세우기와 ‘역사화’

1979년 12월 12일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일부 병력을 동원해서 군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1980). 이 때 민주주의 헌정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진압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도 살상되어, 국내외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고등학교 <국사>, 1996)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
1. 변혁이념의 확산과 운동의 절적 전환기
2. 부마항쟁과 광주민중항쟁
  1) 부마항쟁과 유신체제의 종말 2) 광주민중항쟁과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출발
3. 민족민주운동의 흐름
  1) 새로운 출발(1983년) 2) 민족민주운동의 변혁적 정립(1986년)
  3) 6월민주화운동과 대중투쟁의 발전(1987년) 4) 도약의 시기(1988~89년)
4. 민족민주운동의 성격과 특징
  1) 변혁운동으로서의 총체성 획득 2) 기층대중운동의 성장
  3) 통일전선운동의 진전 4) 투쟁형태상의 발전
(?한국사? 20(한길사) 중 ?1980년대의 민족민주운동? 항목 목차)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5·18의 진실공방과 역사서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후 처음 맞는 5·18을 며칠 앞두고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5·18에 대한 ‘문민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5·18은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연장이자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었으며, ‘문민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민주정부였다.15) 여기서 5·18은 노태우 시절과 마찬가지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지만, 말로만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시킨 주인공으로서 그 숭고한 의의를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문민정부’의 광주민주화운동론은 진정으로 5·18의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입장이라기보다는 군사독재와 ‘문민정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매개장치로서 5·18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김영삼은 풍요속의 빈곤이라 할만한 ‘역사바로세우기’의 요란한 소동을 통해서 문민정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정치논리로 5·18을 활용함으로써, 5·18의 혁명성과 현재적 실천성을 탈각시키고 ‘중요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역사로 고정시키고자 했다.
‘문민정부’의 ‘광주민주화운동’론이 어떻게 역사서술로 구체화되는지를 국정교과서의 5·18 서술을 통해 살펴보자. 1996년에 발행된 국사교과서(제6차 교육과정)는 5·18을 10·26사태에서 ‘전두환정부’ 출범에 이르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음모에 반발한 ‘민주화운동’으로 위치짓고, 시민군과 신군부의 충돌과 살상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5·18을 단지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던 노태우정권 시절의 교과서 서술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이다. 그렇지만 위에서 예시한 아주 간략한 5·18 서술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문민정부가 주장하는 광주민주화운동론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난다. 교과서에 따르면, 항쟁의 주체는 ‘시민’이고 이들의 요구는 단지 ‘민주주의 헌정체제의 회복’이었다. 또한 5·18 투사들의 목숨을 건 항쟁 대신에 ‘무고한 시민들’의 살상이 언급되고, 항쟁이 남긴 것은 단지 ‘큰 충격’으로 제한된다.
이러한 서술은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만 파악될 수 없는 항쟁의 혁명성과 역사적 의미를 거세하는 것임은 물론이고, 정권 스스로가 규정한 ‘민주화운동’의 실천적 의미조차 퇴색시키는 것이다. 즉, 5·18을 통해서, 민주주의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고한’=순진한(?) 시민들의 민주화요구조차도 압살한 신군부의 폭력성과 불법성을 설명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진 서술이다. 결국 문민정부의 ‘광주민주화운동’론은 신군부=군사독재와 대비되는 문민정부의 민주적 정통성을 주장하려는 논리이자, 문민정부 출범으로 이제 5·18=민주화운동은 그 진행을 멈추고 과거의 일로 고정되어야 한다는 논리라고 볼 수 있다.16)
이처럼 정권측의 ‘광주민주화운동’론은 문민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정치논리 혹은 체제논리라는 한계를 갖지만, 적어도 항쟁주체와 진압주체 중에서 ‘누가 과연 폭도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평가를 내렸다.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가해자=신군부의 부당성과 저항자=광주‘시민’의 정당성은 확인된 것이다. 이는 5·18의 진실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요구해온 민족민주운동 혹은 진보세력의 승리를 의미했지만, 결코 이들이 주장한 ‘광주민중항쟁’론의 승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진보세력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와 ‘광주민주화운동’론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광주민중항쟁론을 고수했지만, 이들의 5·18 서술은 교과서적으로 체계화되었다는 점 이외에는 이전에 비해서 진전된 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진보세력의 ‘광주민중항쟁’론은 <한국사>(1994)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진보적 역사학계의 연구성과에 기반해서 우리 역사를 전 26권으로 집대성한 이 방대한 한국통사 중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제20권 <자주·민주·통일을 향하여 2> 중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 항목에서 다루졌다. 이 책의 5·18 서술을 보면, ‘발발배경-전개과정-교훈’의 전형적인 서술구조를 가지며, 서술의 내용 역시 이전 시기의 광주민중항쟁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정도이다. 다만 두드러지는 점은, 목차에서도 얼핏 엿볼 수 있듯이 5·18은 항쟁 자체보다도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새로운 출발의 계기라는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따라서 배경·전개=사실보다는 교훈=계승이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한국사편찬위원회 1994, 66-72). 이는 5·18이 진보세력에게는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건, 즉 ‘광주민중항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문제는 그것이 남긴 교훈―그것도 이미 잘 정리된 테제―을 실천해가는 것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17)
교과서적으로 체계화된 ‘광주민중항쟁’론은 진보사학계가 학술적·사회적 힘을 강화하는 것과 비례해서 그 파급범위를 넓혀갔다. ‘광주민중항쟁’론은 근현대사 강의교재로 발행된 <강좌 한국근현대사>(1995)와 <한국현대사 강의>(1998)는 물론이고 방송대학교 한국사교재인 ?한국사의 이해?(1998)에까지 반영되어 대학강단에서 권위있는 역사해석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또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대안교과서로 집필된 역사학연구소의 <교실밖 국사여행>(1993)에서도 5·18은 ‘광주민중항쟁’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이러한 서술은 진보적인 중등교사들의 노력으로 실제 수업에까지 반영될 수 있었다.18)
이처럼 ‘광주민중항쟁’론은 진보세력에게는 정식화된 역사해석으로 자리잡고 학술적·사회적으로도 그 전달범위를 넓혀갔지만, 현실에서는 5·18의 변질과 박제화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즉 문민정부가 주장하는 ‘광주민주화운동’론은 노태우 정권 시절과는 달리 사회적인 설득력을 확보해갔으며, 더우기 항쟁의 진원지인 광주에서까지 뚜렷한 하나의 5·18 해석으로 자리잡아 갔다. 특히 지역성이 강화되는 正負효과의 양측면, 즉 지방자치제의 발전과 민주화운동의 지역적 분열이라는 모순적 현상을 통해서 ‘광주의 지역화’ 양상이 강화되었다. ‘광주의 지역화’는 두 가지 특성을 보이는데, 하나는 광주만의 투쟁이자 기념행사로 축소되는 면과, 또 하나는 광주시민 전체의 운동이나 ‘광주시민정신’ 등으로 해석되면서 민중성·혁명성이 탈각되는 현상이었다.19)
이는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문민정부 출범 등을 계기로 민족민주운동의 이념과 활동력이 쇠퇴하고 ‘대적전선’이 이완되면서 80년대 진보패러다임에 입각해 있던 ‘광주민중항쟁’론의 호소력 혹은 설득력이 저하된 것에서 기인했다. 사실 5-6공화국 시절에 민족민주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념과 지향에 대한 동의보다는 반민중적인 정권에 대해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에 대한 도덕적 신뢰에서 비롯되는 면이 강했다. ‘광주민중항쟁’론 역시 그 사실적·논리적 정합성 때문에 설득력을 가져나가기 보다는 정권측의 은폐·왜곡에 대한 선명한 안티테제로서의 실천성 때문에 사회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민정부 출범 이후 변화된 5·18 담론의 지형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광주민중항쟁론은 80년대 진보이념의 도식성과 당위론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왜 광주인가 혹은 왜 광주만일 수 없는가, 그리고 왜 민중항쟁인가에 대해서 좀더 설득력있는 답변을 제시해야 했다.20) 그렇지만 진보세력은 교과서적으로 정리된 ‘광주민중항쟁’론을 되풀이할 뿐, 이를 넘어서는 풍부한 설명이나 심화된 인식을 보여주지 못했다.21)
이처럼 진보적 학술운동 진영의 ‘광주민중항쟁’론이 탄력성을 상실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5·18에 대한 역사서술은 오히려 기성 아카데미즘 영역에서는 다양한 방식과 관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주목되는 부분은 진보적 성향의 역사학계 원로인 강만길의 <고쳐 쓴 한국현대사>(1994)이다. 강만길은 해방 이후의 역사를 ‘민족통일운동’의 맥락에서 정리하면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민족통일운동에 연결되는 위치에 있음을 갈파하는 역사학적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갑오농민전쟁, 호남의병전쟁, 광주학생운동, 해방후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민중항쟁의 역사적 전통속에서 5·18의 ‘무장항쟁’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독립운동상에서 무장투쟁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5·18의 무장항쟁적 측면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이었던 보수적 시각의 표리부동과는 대조되는 일관성을 보였다.(강만길 1994, 253; 282-285)
한편 중도적 성향에서 한국사를 체계화한 한영우의 <다시 찾는 우리 역사>(1997)는 5·18을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선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서술했는데, 정권측과 국정교과서의 ‘광주민주화운동’론과는 몇가지 다른 면을 보인다. 첫째는 5·18을 신군부의 불법성과 문민정부의 정통성을 설명하는 매개로서가 아니라 ‘민주화운동’론 자체의 적극적인 의미를 부각시킨 점이고, 둘째는 5·18의 교훈과 계승으로서 미국의 문제를 간략하게나마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한영우 1997, 581-582)
이와는 다소 다른 맥락에서 서중석은 진보세력의 변혁론적 인식과는 구별되면서도, 5·18의 혁명성과 계승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서술을 보인다. 그는 5·18을 민족운동사의 맥락에서 중요한 계기로 평가하면서도 ‘광주민주항쟁’이라고 성격규정하여, 진보세력이 당위론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민중주체의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적 시사를 던졌다.(노태돈 외 1997, 426-428)
위와 같은 서술을 통해서 5·18은 ‘학술운동’을 표방하던 소장학자들에만 제한되지 않고 아카데미즘 영역에서도 한국사의 중요한 한 계기로서 정당하게 위치지워질 수 있었다. 특히 보수적 성향의 원로학자들이 한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하면서 여전히 5·18을 다루어지지 않거나 혹은 국정교과서식의 서술을 되풀이함으로써 현대사의 예민한 부분을 사실상 비켜가고 있는 것과 대비해 본다면,22) 이러한 서술은 5·18을 역사학의 범위에 포섭해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5·18은 은폐와 왜곡의 굴레에서 벗어나 국가적·학술적·사회적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역사적 사건으로 명확하게 위치워졌다. 물론 그 진실과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상당한 편차를 보이지만, 5·18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는 5·18을 복권시키려고 노력해온 진보세력의 투쟁의 성과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광주민중항쟁’론이 선명성과 실천성만으로는 더이상 5·18에 대한 유의미한 역사서술로서의 독점적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말해주기도 했다.


나오며 - 5·18을 다시금 되새기는 길

5·18 자체가 항쟁이었던 것만큼이나 그것의 진실과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 역시 가히 ‘항쟁’이었다. 5·18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청춘을 바쳤으며, 5·18 투사들의 외침을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역시 많은 희생과 눈물이 뒤따랐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과 진보를 꿈꾸었던 사람치고 5·18의 恨과 의미를 마음속 깊이 되새겨보지 않은 이는 없었을 것이고, 바로 이러한 성과 위에서 우리의 민족민주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적어도 5·18을 총칼로 억눌렀던 군부독재 혹은 군사파쇼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5·18은 이제 그 진군을 멈추고 ‘과거의 신화’로서 역사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5·18은 이미 20여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고, 현실적으로도 더이상 우리 사회의 진보를 만들어가는 데서 핵심적인 담론·쟁점일 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고전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5·18은 잘 정리해서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모셔두어야 할 박제화된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현재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는 눈을 더욱 풍부화시켜가야 한다. 이러할 때, 우리는 5·18을 가장 진지하고 처절하게 되새겨왔던 진보세력의 ‘광주민중항쟁’론의 성취와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그것을 더욱 풍부화시키는 혹은 한단계 더 뛰어넘는 인식의 지평을 열어야 하겠다. 필자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없고, 다만 여기서는 도식화된 혹은 교조화된 ‘광주민중항쟁’론을 지양하기 위해서 몇가지 다시 생각해볼 지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진보세력의 ‘광주민중항쟁’론이 갖고 있는 과잉된 실천성과 도식주의적 편향을 극복해야 한다. 진보세력은 5·18의 진실과 의미를 급진적으로 되새기는 과정에서 80년대 진보패러다임의 핵심인 ‘변혁론’을 이끌어냈고, 다시 이 변혁론을 매개로 5·18을 해석하여 ‘광주민중항쟁’론을 정식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진보세력은 은폐되었던 5·18의 진상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학살자에 대한 ‘적개심’과 투사들의 뜻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지나치게 긴박되어, 5·18을 사실에 근거해 파악하기보다는 현실운동의 논리에 입각해서 그 성격·의미를 ‘규정’해 버렸다. 현실운동의 논리에 맞게 5·18을 해석하는 것만이 ‘실천적’ 관점이라고 여겼던 진보세력은 그 운동논리가 갖는 도식성만큼이나 광주민중항쟁을 도식적으로 이해했으며, 변혁적 관점의 해석이라고 규정한 ‘광주민중항쟁’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를 ‘사상적 불철저성’으로 치부하였다. 결국 진보세력의 ‘광주민중항쟁’론은 80년대 변혁론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가자, 애초의 실천성조차 퇴색한 채 끊임없이 되새겨야할 원천이라기보다는 급진적으로 정식화된 과거형 서술로 화석화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주민중항쟁’론에 담긴 ‘민중항쟁’의 의미와 ‘광주’의 지역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선, 5·18은 과연 민중항쟁인가에 대해서 좀더 설득력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기층민중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민중항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항쟁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배경과 원인, 그리고 그 경로를 밝히고, 민중이 지키고자했던 또는 쟁취하고자했던 바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중은 모순의 집중적 체현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항쟁을 주도했고,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본질적’으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도식적이고 규범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항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민중공동체’의 새로운 질서와 연대의 원리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진보를 고민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한 광주의 특수성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구조적인 이해에서 벗어난 ‘자유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왜 광주(혹은 광주·전남)에서만 항쟁이 발생했는가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또 왜 광주였는가라는 질문을 바꿔서 왜 다른 지역은 침묵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광주만의 항쟁이라는 사실은 광주지역의 선진성이나 신군부의 선택적 음모론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면이 있을 뿐더러, 현재 5·18이 지역화되는 현상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열쇠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5·18이 ‘살아있는 역사’라고 하는 것은, 현실운동의 정당성과 지향을 말해주는 원천으로서 5·18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쟁 주체들의 저항과 좌절의 의미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진보’를 더욱 풍부화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위치에서 5·18에 다가가는 방식이 아니라 다시금 5·18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미래를 전망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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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5·18과 관련한 ‘유언비어론’, ‘지역감정론’, ‘불순정치집단론’, ‘폭도론’, ‘폭동사태론’ 등의 담론은 최정운, 1997, ?폭력과 언어의 정치: 5·18 담론의 정치사회학?, 한국정치학회, <5·18 학술심포지움 발표문>을 참조.
2) 항쟁 진압세력이 5·18을 ‘은폐’하려고자 했던 점은 우리 사회가 ‘6·25사변’을 다루는 방식과 대비된다. 신군부측에게는 이 둘 모두가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6·25사변’이 끊임없이 교육되어야할 대상이었던 반면에, 5·18은 망각의 대상이었다.
3) 이원순 외, 1985, <교양 국사>, 한국방송통신대학, p.346. 여기서는 10·26이 1980년의 사건으로 기술되고 최규하 과도정권이 제4공화국으로 혼동될만큼 현대사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이 두드러진다.
4) <한국현대사>는 ?민주주의의 토착화? 항목에 “1980년 5월 유신시대의 잔존 세력 퇴거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가두 데모가 과격화하자,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광주사태를 수습한 정부는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중략) 대규모적인 정치·사회·문화의 개혁을 전개해 나갔다”(p.437)고 서술했고, <한국사통론>은 이를 이어받아 “1980년 5월 유신 잔존세력의 후퇴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이를 수습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대규모적인 정치·사회·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였다”(pp.524-525)고 서술했다.
5) ‘광주시민의거’라는 인식은 1981년 5월에 작성된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광주사태 1주년을 맞는 우리의 주장?과 전남도민 일동 명의의 ?전남도민 5월 시국선언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광주광역시 1997, 210; 218-220).
6) ?한국민중사?의 ‘광주민중항쟁’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에서는, ‘민중’이라는 용어가 19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기층민중으로 구성된 시민군’이라는 서술 이외에는 ‘민중’의 구성과 성격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오히려 전반적인 서술기조는 민중을 ‘일반시민’ 혹은 광주시민 전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7) 노태우 정권의 5·18에 대한 입장을 사실상 규정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건의안은 5·18의 성격 재규정과 관련해서, “동기에 있어서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인정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폭동이나 폭거’로 볼 수도 있다는 양면적 인식을 보여준다(<<동아일보>> 1988년 2월 16일자).
8) 대한민국사편찬위원회는 80년대를 풍미한 진보적인 현대사 인식인 이른바 ‘수정주의적 시각’의 대두에 대응하기 위한 보수학계의 시도로 1987년에 조직되어 ?대한민국사?를 발간했다. 이 책의 정치사 분야는 김운태와 김학준이 집필했다.
9) 대표적인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세균 외, 1989, <5·18 광주민중항쟁과 한국민족민주운동>, 광주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광주5월민중항쟁>, 풀빛
   정해구 외, 1990, <광주민중항쟁연구>, 사계절
10) <한국사강의>는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을 표방하면서 결성된 학술(운동)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가 발간한 대학교재용 한국역사서이다. 이 책은 ‘역사발전의 주체인 민중을 중심으로 서술하며, 근현대는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민족민주운동을 중심에 두고 서술한다’는 서술원칙 하에서 집필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확산된 한국사에 대한 민중적·진보적 관점의 역사서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11) <한국사강의>는 5·18 이전에 보수야당·중산층과 민중운동 세력간에 차이가 있었음을 언급하는 정도이며, <한국역사>는 오히려 ‘민중’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또 <바보사>는 민중사관을 강하게 표방하면서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광주의 모든 애국시민’으로 항쟁의 주체를 서술하고 있어서 ‘민중’이라는 개념을 무색케하고 있다. 또 ‘해방광주’ 역시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시민공동체’ ‘시민자치’ ‘시민적 도덕성’ 등으로 설명된다. 물론 <일사>처럼 부분적으로는 항쟁참가자의 계급분석을 통해서 기층민중이 항쟁의 주도세력으로 발전한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항쟁의 민중적 요구와 지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서술이 없다.
12) 민중은 모순의 집중적 체현자로서 계기만 주어진다면 그 모순에 가장 전투적이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존재로 설정된다. 또한 민중은 주체적인 한계로 인해 모순의 총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투쟁의 과정에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며 올바른 지도와 결합될 때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추구해간다고 파악된다.
13) 80년대 진보이념과 변혁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대해서는 김동춘, 1990, ?레닌주의와 80년대 한국의 변혁운동?, <역사비평> 겨울호; 최종욱, 1998, ?지식인의 무책임성에 대한 자기 반성과 제안?, <한국좌파의 목소리>, 민음사를 참조
14) 이러한 편향은 특히 사회과학계의 5·18 서술에서 두드러지는데,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1992)가 “비록 광주민중항쟁이 절차적 수준의 요구를 주도하는 민주화투쟁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반독점자본의 지향은 내포한 민족민주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지배세력은 이미 항쟁의 본질을 알고 공세로 나왔던 반면, 항쟁 주체들은 역사적 한계로 그러한 투쟁의 성격을 보편화시키지 못했을 따름”(p.329)이라면서, 5·18의 성격을 ‘반제반독점 민족민주운동’으로 규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15) 대통령 비서실, 1994, <김영삼대통령연설문집>Ⅰ, pp.185-186
16) 고등학교 <정치> 교과서(1996)에 “독재 정권의 정통성 부족에서 비롯된 반정부적인 성향은 정치 발전에 부정적인 요인을 작용하고 있다”(p.46)고 서술한 것은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문민정부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민주화운동은 단지 정통성이 부족한 독재정권 하에서나 의미를 갖는다.
17) 다만 진보세력의 ‘광주민중항쟁’ 서술에서 차이가 있다면, 민족모순을 강조하는 NL적 경향과 계급모순을 강조하는 PD적 경향의 정파적 특성을 반영하여, 미국의 개입문제를 강조하는 입장과 기층민중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입장의 차이 정도가 두드러진다.
18) 전국역사교사모임은 ‘선생님을 위한 역사수업지도안’인 <우리 역사, 어떻게 가르칠까>(1995: 푸른나무)에서 모의재판 방식을 이용한 ‘광주민중항쟁’ 수업지도안을 제시했다.
19) 정근식, 1995, ?5·18광주항쟁?, <역사비평> 가을호
20) 손호철은 5·18을 ‘시민항쟁’으로 보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서 5·18이 기층민중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또 단순한 절차적 민주화를 넘어순 좀더 근본적인 민주화와 해방을 지향했던 점을 밝혀내어 ‘민중항쟁’이라는 개념을 구체화시켰다(손호철, 1995, ?80년 5·18항쟁: 민중항쟁인가 시민항쟁인가??,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새길). 그렇지만 그는 5·18이 광주시민 ‘전체’의 항쟁이 아니었다는 점, 즉 상층부류는 항쟁에 소극적 혹은 부정적이었다는 점과 기층민중이 주도적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을 뿐, 그러한 원인과 의미에 대해서는 “항쟁의 주체는 이 같은 모순의 ‘담지자’인 ‘민중’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p.176: 강조는 필자)고만 말하는 규범적인 민중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 항쟁의 지향이 ‘좀더 근본적인 민주화와 해방’을 내포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손호철의 진전된 연구도 논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5·18을 ‘시민항쟁’=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으로 파악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
21) 1990년을 전후해서 활발하게 전개된 진보적 사회과학계의 5·18 연구가 그 이후 급격하게 위축되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계의 침체는 곧바로 진보적 역사학계의 5·18 서술의 위축으로도 이어졌다. 한국역사연구회가 <한국역사입문>을 내면서 4·19까지만 정리하고 그 이후의 역사를 배제시킨 사실은 사회과학계의 논의가 식어버리자 역사학계가 ‘책임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고 있음을 시사한다. 동 연구회는 <한국현대사>(1991)에서는 사회과학계의 연구성과를 적극 수용하여 ‘현재’까지의 역사를 모두 포괄한 바 있다.
22) 한국사학계의 원로인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몇차례의 개정증보에도 불구하고 ‘4월혁명’까지만 서술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아마도 4·19 이후의 역사는 아직 역사학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한데, 이런 태도는 1961년에 발간한 <국사신론>(제일문화사)에서 4·19를 서술했던 것과는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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