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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온조왕(溫祚王),백제 제왕 1대

2009.07.04 17:31 | 백제사 발자취 | 하늘

http://kr.blog.yahoo.com/ppis4988/28211 주소복사

백제의 시조로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朱蒙)의 셋째 아들로서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 부여로 왔을때 졸본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셋만 있었다. 졸본 부여왕은 주몽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주몽의 딸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 졸본 부여왕이 돌아가자 주몽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그 후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어머니는 예씨(禮氏)와 함께 와서 태자가 되었다. 

  비류(沸流)와 온조는 태자가 자기들을 용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는데, 많은 백성이 이들을 따라 떠났다. 결국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 종전에는 仁川으로 比定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아산시 仁州面 지방이라는 說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 경기 廣州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천안시 笠場面 虎堂里라는 설이 유력)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들의 남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북한산에 이른 그들은 부아악 (지금의 삼각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며 살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자 10명의 신하들이 말리며,  "생각해 보니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으로 한강이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산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또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있고 서쪽으로는 넓은 바다를 두고 있으니,이곳이야말로 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알맞은 곳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인천부근) 로 가서 살았다.  한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가 도와 주었다 하여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신라 박혁거세가 40년, 고구려 유리(琉璃)왕 2년 (기원전 18년)이었다.  한편 미추홀에 머물러 살던 비류는 땅이 질퍽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음을 알고 다시 위례성으로 옮겨 왔다. 비류(沸流)는 미추홀을 고집한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죽었다. 그러자 비류의 백성과 신하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 왔다.  온조는 모든 백성이 자진해서 따라왔으므로 나라 이름을 다시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왔기때문에 부여로 성을 삼았다.

  기원전 18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지었다.  

  기원전 17년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기원전 16년 9월, 말갈이 국경의 북쪽을 침범하므로 왕이 강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싸워 크게 이겼다. 살아 돌아간 적은 열에 한둘뿐이었다.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기원전 15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서 흉년이 들었다. 전염병이 돌았다.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14년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하였는데 신비스러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기원전 13년 7월, 그믐날인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기원전 11년 2월, 말갈병 3천이 몰래 칩입하여 위례성(慰禮城)을 포위 하였다. 10여일이 지나 양식이 떨어진 적은 그냥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 왕은 날랜병사를 뽑아 댜부현까지 쫗아가서 싸워 이겼는데 죽은자와 포로가 5백여 명이었다.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는 철책을 세웠다.  그러자 낙랑(樂浪)태수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얼마 전에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자하여 한 집안처럼 여겼소.그런데 지금 우리 땅 가까이에 성책을 만들고 있으니 ,이것은 혹시 우리땅을 침범하기 위한것이 아니오? 만약 지금까지의 우호관계를 위해 성채를 헐어 버린다면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싸워서 승부를 내는 수밖에 없소." 하였다. 왕이 회답하기를,  "성책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로부터 모든나라가 해왔던 일이오. 어찌 이 일때문에 우리 사이가 변하겠소? 태수는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오. 만약 태수가 스스로 강함만 믿고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고 이에 맞서 싸우겠소."  하였다. 이 일 때문에 낙랑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기원전 9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기원전 8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서 병산(甁山)의 성채를 쳐서 부서 버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아갔다. 7월에 왕은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의 성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기원전 6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니 61세 였다.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자주 영토를 침범해 오므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국모(왕의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니 나쁜일이 있을까 걱정된다. 그래소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한강 남쪽을 두루 살펴보고 땅이 기름진것을 알았다. 거기에 도읍을 정하고 오랬동안 편히 살길을 찾아야 겠다."  라고 말하였다.  7월에 한산(지금의 광주)에 성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겼다. 8월에는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 옮긴 뜻을 전하고 마한과의 국경을 확정하니, 북쪽은 패하(浿河 예성강)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 임진강), 서쪽은 바다에 이르며, 동쪽은 주양(朱壤 춘천)에 이러렀다.  9월 도성과 궁궐을 세웠다. 

  기원전 5년(온조왕 14)에는 남한산(南漢山)에 천도하였다.

  기원전 4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기원전 2년 낙랑이 침략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기원전 1년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馬韓)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서기 2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서기 4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서기 6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 버렸다.

  서기 7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서기 8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馬韓)은 점점 쇠약해지고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이 왕을 떠나 있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남에게 이곳을 빼앗긴다면 그 때는 후회하더라고 이미 늦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쳐서 빼앗아 후일의 위협을 예방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10월에 왕은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내어 마한(馬韓)을 쳐서 빼앗았다. 다만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두 성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서기 9년 4월에 원산성과 금현성이 항복하였다. 두성의 백성을 한산 북쪽으로 옮겨 살게 하니. 마침내 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10년 2월 원자 다루(多婁)를 태자에 봉했다.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13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15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16년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18년 7월 탕정성(湯井城 충청남도 온양의 온양성)을 축조하였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19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 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20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22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23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25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0월 남옥저(南沃沮-대련반도)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구가 부양에 와서 살기를 청하니 한산 서쪽에 살게 하였다

  2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그리고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28년 2월, 왕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 다루(多婁)가 왕이 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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