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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8대 왕으로서 구이왕(久爾王), 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한다. 제5대 초고왕(肖古王;재위166-214년)의 아우이다. 제6대 구수왕(仇首王;재위214-234년)의 뒤를 이어 맏아들 사반왕(沙伴王;재위 234-234년)이 왕위에 올랐으나, 아직 어리므로 이를 폐위시키고 234년 왕위를 계승했다. 왕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 기반을 확립하였다. 고이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주서 周書》 및 《수서 隋書》의 백제전에 보이는 “백제시조구태(百濟始祖仇台)”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질적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본에서 815년 완성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고이는 ‘구이(久爾)’ 또는 ‘고모(古慕)’로 표기되어 있다. 236년 10월에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238년 정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鼓吹]를 사용하였다.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4월에 왕궁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누른 용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 나갔다. 239년 정월에 비가 오지 않다가 5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240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4월에 진충(眞忠)을 좌장(左將)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7월에 석천(石川)에서 크게 사열하였는데, 한 쌍의 기러기가 냇가에서 날아오르자 왕이 쏘아 모두 맞혔다. 242년 2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남쪽의 진펄[南澤]에 논[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 4월에 숙부 질(質)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질(質)은 성품이 충직하고 굳세어 일을 꾀함에 실수가 없었다. 7월에 [왕이] 서문으로 나가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243년 정월에 큰 제단[大壇]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246년 여름에 가뭄이 심해서 보리가 여물지 못했다. 8월에 위(魏) 나라의 유주 자사 관구검이 낙랑 태수 유무(劉茂), 대방 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군 진충(眞忠)을 보내어 낙랑의 변방을 쳐서 빼앗았다.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크게 노하자, 왕은 그가 쳐들어 올까 염려 하여 사로 잡은 백성들을 돌려 주었다. 247년 정월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2월에 진충(眞忠)을 우보(右輔)로 삼고, 진물(眞勿)을 좌장으로 삼아 군사 업무를 맡겼다. 248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또 일년간의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었다. 249년 정월 갑오에 금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255년 9월에 신라를 침공하여 괴곡(槐谷) 서쪽에서 싸웠는데, 신라 장수 익종(翊宗)을 죽이는 등 크게 이겼다. 10월에는 봉산성(烽山城; 현재 경북 영주)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57년 정월에 크게 가물어 나무들이 모두 말랐다. 258년 봄에 말갈 추장 나갈(羅渴)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은 사자를 후하게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259년 9월에 청자(靑紫) 색의 구름이 왕궁 동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누각과 같았다. 《삼국사기》에 보면 260년(고이왕 27) 1월에 관제를 제정하여 내신좌평(內臣佐平), 내두(內頭)좌평, 내법(內法)좌평, 위사(衛士)좌평, 조정(朝廷)좌평, 병관(兵官)좌평 등 6좌평과, 좌평, 달솔(達率), 은솔(恩率), 덕솔(德率), 한솔(蘖率), 나솔(奈率), 장덕(將德), 시덕(施德), 고덕(固德), 계덕(季德), 대덕(對德), 문독(文督),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剋虞) 등 16 직제를 마련하였고, 2월에는 복장제(服裝制)를 마련하여 6품 이상의 관원은 자색(紫色)관복에 은화(銀花)의 관을 쓰고, 11품 이상은 비색(緋色), 16품 이상은 청색 관복을 착용하게 하였다. 3월에 왕의 동생 우수(優壽)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이렇듯 모든 관제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부락정치나 다름없던 정치체제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발전시켰고,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데도 진력하여 건국 태조와 같은 업적을 남겼다. 261년 정월 초하룻날[初吉]에 왕이 자주색의 소매가 큰 두루마기[紫大袖袍]와 푸른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금꽃[金花]으로 장식한 검은 비단관[金花飾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 띠[素皮帶]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烏韋履]을 신고 남당(南堂)에 앉아 정사를 보았다. 2월에 진가(眞可)를 내두(內頭)좌평으로 삼고, 우두(優豆)를 내법(內法)좌평으로 삼고, 고수(高壽)를 위사좌평으로 삼고, 곤노(昆奴)를 조정(朝廷)좌평으로 삼고, 유기(惟己)를 병관(兵官)좌평으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신라가] 듣지 않았다. 262년 정월에 영을 내려, 관리로서 재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그 물건의 3배를 물어 내게 하고, 일생동안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266년 8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봉산성(烽山城; 현재 경북 영주)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성주 직선(直宣)이 장정 2백 명을 거느리고 나와 백제군을 격파했다. 269년 9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자궁(紫宮;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 하늘의 구역을 말함)에 나타났다. 272년 11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278년 10월에 군사를 내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283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286년 정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사이좋게 지내자고 청하였다. 그해 11월, 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이 책계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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