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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0,10은만수 만수는 완성이고, 1은 출발이다 만수를 위해서 완성을 위해서 매진하자 그리고 출발의 초심을 잃지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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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초휘는 균(鈞), 휘는 공(), 시호 소경(昭敬)이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楫)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하동부 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고, 비(妃)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1552년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는데, 1567년(명종 22) 명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으며, 《유선록(儒先錄)》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전적(典籍)을 간행하여 유학(儒學)을 장려하였다. 당시 사유(師儒)를 선발함에 문사(文詞)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오직 과거에 의거하여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치게 되어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敎誨)에 힘쓰도록 하였다.

  한편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선비들을 신원(伸寃)하였으며 남곤(南袞) 등의 관직을 추탈(追奪)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을 각각 중심인물로 하는 당쟁이 시작되어, 동서분당(東西分黨)과 동인(東人)북분당 등 치열한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무너져 치정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북변에서는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있었다.

  남쪽에서는 왜세(倭勢)가 위협적으로 팽창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왜국에 보내어 사정을 살피게 하였으나 당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의 보고가 상반되어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허송하다가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즉, 서인인 황윤길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지만 동인 출신인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했고 당시 정권은 동인이 잡고 있어 황윤길의 주장이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는 의주(義州)에까지 피란을 하여야 하는 시련 끝에 명나라의 원조와 이순신 등의 선전(善戰)으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전후 7년에 걸친 전화로 서울을 비롯한 전 국토는 유린되고 국가재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또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어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丁酉再亂), 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중에 3궁(三宮)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典籍)을 보관한 춘추관(春秋館)이 불타서 귀중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며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에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설단(設壇)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서 왕이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때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얽어 옮기려고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하였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병(兵)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강한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하였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전후의 복구사업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당쟁이 일어 그는 재위 41년간의 태반을 당쟁과 미증유의 전란에 시달리다 그 위를 암군(暗君) 광해군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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