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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0,10은만수 만수는 완성이고, 1은 출발이다 만수를 위해서 완성을 위해서 매진하자 그리고 출발의 초심을 잃지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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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우거왕(右渠王 )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서 위만(衛滿)의 손자이다. 우거왕이 집권할 당시는 한나라 무제(武帝;BC 156~BC 87)가 강력한 대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한 무제는 북서쪽으로 서역과 흉노를 격파하고, 남쪽으로 귀주지역과 남월지역(현재의 베트남)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조선대로 주변 나라들과 중국의 중간에서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톡톡히 챙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마찰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과의 화평관계는 잠시뿐,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왕 때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한(漢)은 고조선을 약화시킬 속셈으로 BC 128년에 만주 요동지역에 있던 예맥(濊貊) 족장 남려(南閭)를 교사하여 우거왕에게 반기를 들도록 하였다. 남려는 요동태수의 후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으며 조선 왕 우거()와의 관계를 끊고 그가 지배하던 28만의 인구와 함께 한나라에의 내속()을 청하자 한(漢)은 곧바로 그 지역에 창해군(滄海郡: 창해군은 무역의 전진기지 정도로만 역할을 하다가 2년 후에 폐지 되었다)을 설치하였다.

  우거왕은 이 사태를 주목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주변나라 사신들이 고조선을 통과하여 중국에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의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한은 전쟁의 빌미를 찾았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BC 109년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고조선에 보내 전쟁의 꼬투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섭하는 돌아오는 길에 그를 수행한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패수에서 살해하였다. 이 공으로 섭하(涉河)는 요동군 동부도위(遼東郡 東部都尉)로 임명되었는데, 고조선 또한 물러서지 않고 군사를 몰아 섭하를 죽이고 요동군을 짓밟았다.

  한나라 무제(武帝;BC 156~BC 87)는 기다렸다는 듯이 흉노(匈奴)와 남월족을 복속시킨 다음 예봉(鋒; 날카로운 기세를 말함)을 고조선 침공에 돌렸다. 육군은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의 지휘 아래 조선의 서쪽에서 공격하였고, 수군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의 지휘 아래 발해만을 건너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대제국인 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고조선은 긴장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우거왕이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오히려 기선을 제압하여 한의 수륙 양군을 격퇴시켰다.

  고조선의 강력한 반격에 당황한 한나라 무제(武帝)는 위산(衛山)을 사신으로 보내 휴전협상을 시도하였다. 우거왕은 태자를 보내어 협상의 뜻이 있음을 밝혔으나 위산은 태자에게 항복할 것을 강요하였다. 태자는 협상이 진행될 수 없음을 알고 돌아옴으로써 휴전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후 한의 수륙 양군은 다시 왕검성까지 진격하여 공격하였으나 고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전쟁은 지리한 소강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소강상태는 한과 조선에게 모두 불리하였는데, 특히 고조선의 왕검성 안에서는 주전론자와 화전론자가 대립하여 전의를 반감시키고 있었다. 이러던 중 주전론자에 밀린 화전론자(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니계상 삼(尼谿相 參) 그리고 장군 왕협(王) 등은 고조선을 등지고, BC 108년 주화파(主和派) 니계상(尼谿相)삼(參)이 보낸 자객에게 우거왕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왕검성의 수비는 왕의 측근인 성기(成己)가 맡아 한의 군사들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점점 초조해진 한의 진중에서는 투항해온 화전론자 중 노인의 아들 노최(路最)로 하여금 성안의 주민을 이간시켜  우거왕의 아들 장(長)과 함께 성기를 모살하고 왕검성을 함락시켜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조선 지휘부의 이탈과 배반으로 왕검성은 함락되었고,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개국한 고조선은 한과의 전쟁을 끝으로 패망하고 말았다. 이때가 BC 108년이었다.

  아래의 내용은 사마천《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에 나오는 위만조선 멸망과 관련이 있는 문구입니다. 참고하세요.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元封二年 漢使涉河?諭 右渠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從齊勃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爲兩將未有利 及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 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 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子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左將軍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 其圍右渠 常持和節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 乃陰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與樓船期戰 樓船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 求閒 ?降下朝鮮 朝鮮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天子曰將卒不能 前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正)之 有便宜得以從事 遂至 左將軍曰 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 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 遂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 入左將軍營計事 ?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左將軍已?兩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陰 尼谿相參 將軍王?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將 戰益急 恐不能與 戰 王又不肯降' 陰 ? 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 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己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封參爲(?淸侯 陰爲荻?侯 ?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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