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왕으로서 재위 B.C.194~?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위만은 B.C.206년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 BC 247 ?~BC 195)는 중국을 통일한 후 무직의 무뢰배였고 한 고조의 절친한 친구였던 노관(盧 )에게 이성(異姓) 제후 7명[초왕(楚王) 한신(韓信), 회남왕 경포, 양왕 팽월, 연왕 노관, 장사왕 오신(吳臣), 민월왕 무저, 남월왕 조타]의 한 사람으로 연왕(燕王)에 봉했다. 그러나 곧 이성 제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노관은 흉노(匈奴)로 망명했고, 이때 연왕의 부장으로 있던 위만은 연의 망명자 1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와 고조선의 준왕(準王)에게 거두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뒤 준왕의 신임을 얻어 준왕의 신임을 얻어서 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받는 한편, 규[圭:천자가 제후에게 주는 상원하방(上圓下方;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의 옥(玉)]도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는데 위만은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자기 세력을 키웠다. 마침내 위만은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漢)나라의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고는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準王)을 쳐서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에 정했다. 위만은 준왕(準王) 때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불렀다. 이때를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B.C.194~B.C.180)라고 하였다. 즉, 위만조선이 성립한 시기는 한(漢)나라 고조(高祖; BC 247 ?~BC 195)의 아들인 효혜제(孝惠帝;이름은 영; B.C. 195 ∼188)와 고조의 부인이며 효혜제의 어머니인 고후(高后)[여태후(呂太后)로서 이름은 여치(呂雉;기원전241~180 )]가 정치를 하던 시기를 말한다. 위만이 나라를 세울 무렵 한나라는 건국 초기여서 국가적인 체계가 제대로 서지 못했고, 흉노(匈奴)의 계속적인 위협을 견제해야 했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정책을 폈다. 위만은 한(漢)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원조받아 세력을 신장시키면서 흉노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眞番), 임둔(臨屯) 등을 아울러 복속하여 수천리에 달하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고 주위의 여러 씨족사회를 통합하여 갈등을 줄이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했다. 위만은 강력한 국가를 형성, 손자 우거왕(右渠王)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로 꼽힌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 중국 문헌은 모두 '연나라 사람'(燕人)이라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한 점을 들어 연나라 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통의 인물로 보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는 풍습은 동이족 이외에 다른 이민족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오랑캐의 옷'[蠻夷服]이라는 것도 막연히 중국인의 복장이 아니었음을 말할 뿐이므로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고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뒤 나라 이름을 계속 '조선'이라 했고, 고조선이나 진번 주민의 지지를 받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위만의 집권을 고조선 내에서의 단순한 정권교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