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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07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3)



(17) 장택상가와 박정희가 .

1930년 당시 박성빈의 차남 박무희는 '도롱미골' 천수답 다섯 마 지기를 소작하며 살았다.
비가 오지 않으면 아예 농사를 포기해야 했고 그나마 논두렁이 대부분으로 경지면적이
아주 작아 소작인으로 서는 상당히 애로를 감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 논은 아랫마을 칠
곡군 북삼면 오태동에 사는 장택상의 선친 장승원 집안의 땅으로서 지주집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가을 박무희의 큰 아들 박재석은 아버지가 지게에 쌀 가마 를 싣고 도조(소작료)를
내러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지 게 위에는 닭 한마리가 새끼줄에 묶여
있었다.

사진설명 : 경북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에 있었던 장택상의 선친 장승원의 집. '십만거부'로 불렸던 이 집 마당엔
가을마다 소작인들이 싣고 온 쌀가마니가 그득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중형 박무희도 이 집안의 토지 중 일부를
소작하고 살았다. 지금은 장씨 집안의 그 누구도 이곳에 살지 않고 있다.


"아부지예, 닭은 와 가져 갑니꺼?" "그 도조 검사하는 사람한테 줄거야.".

박정희 집안과 장택상 집안은 소작농과 지주사이라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현대사의 여러
굴곡점에서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 면서 우리 사회의 음영을 그리게 된다.

1917년 11월9일 저녁6시 칠곡군 장승원의 집에 '상주군에 사는 공'이란 사람(실제인물은
채기중)이 찾아 왔다. 그는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했다. 장승원은 아들 장직상의 방에
가서 자도록 허용했다. 이날 밤 10시 장직상이 아버지 방으로 가서 문안을 드리고 자신의
방에 오자 손님이 와 있었다. 서로 인사한 뒤 두 사람은 이 방에서 같이 잤다. 다음날
아침 장직상은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렸다. 장승 원은 아들과 함께 아들방으로 건너와서
손님과 인사를 했다. 아침 식사를 끝낸 손님 공씨는 서울로 간다면서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공씨로 위장하였던 채기중은 장승원의 집을 나와서 동료 이형락, 강순필, 유창순과 만나
권총 한 자루씩을 주고 어두워질 때까지 기 다렸다. 음력 9월26일이라 그믐처럼 어두웠다.
암살자들은 일부러 이날을 받았다. 이윽고 채기중은 강,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장승원의
집으로 갔다. 장승원은 거실에서 막 저녁상을 물리고 있었다. 채기 중은 강,이 두
사람에게 "저 자가 장관찰이다"고 가르쳐주고 뛰어나 와서 담에다가 포고문을 붙였다.
'조국광복에 협조하지 않는 대죄인 을 처단한다'는 취지의 포고문이었다. 그때 총성이
들리면서 세 사 람이 뛰쳐나왔다. 채기중도 같이 달아났다. 장승원은 대구 자혜병원 에
입원했다. 왼쪽 무릎에 박힌 총탄은 뽑았으나 목에 박힌 총탄을 뽑지 못하고 이틀 뒤인
11월12일에 사망했다. 일본헌병은 장승원이 죽기 전에 사정청취를 했다.

박정희가 태어나기 나흘 전에 있었던 이 사건은 우리 독립운동사 에 '광복회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의 지휘자인 박상진은 경주사람. 규장각의 부제학을 지낸 박시규의
장남으로서 대대로 고 관이 많이 나온 양반 집안출신이었다. 그는 16세 때까지는 집안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선산군 출신인 참정 허위)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상진은 21세 때까지
허위로부터 훈도를 받다가 서울 양정의숙으로 옮겼다. 여기서 법률경제학을 공부하여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하였다. 허위선생이 일제의 통감부 설치에 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 되어 1908년에 사형을 당하자 박상진은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고등경찰요사'에 따르면 그는 중국혁명상황을 시찰하러 가서 권총 을 10여 정 구해서
갖고 들어왔다. 박상진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권 총을 나누어주면서 광복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작전을 벌이기로 한 다. 전국의 조선인 부호들에게 취지문을 보내어 호응하지
않으면 처 형한다고 알렸다. 이들 부호들 중에는 장승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1917년 10월에 박상진은 김한종과 유창순에게 장승원을 암살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항소심 판결문 인용).

'원래 그 자가 이왕과 소송을 벌이고 소작인을 괴롭히고 경북의 유력자임으로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 소문이 전도에 전파되면 광복회 의 사업을 추진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광복회 회원들은 장승원을 암살한 3개월 뒤에는 충남 도고면장을 살해한다. 그 사건의
지휘자인 김한종은 부하들에게 박용하 면장을 살해해야 하는 이유로서 이렇게 설명했다.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를 헌병에게 보고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악인인데다
광복회를 불찬동하고 의연금을 내지 않으므로 이 를 죽여 타에 대한 위협으로 삼아야
한다.'(항소심 판결문).

1917년 음력12월12일 이른 저녁, 박용하의 집에 김경태와 임동근 이 들어왔다. 이 집에
살고 있었던 인원배는 예심조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나의 방으로 들어와 면장이 있느냐, 거기에 안내해달 라고 하기에 고모부
박용하의 방에 안내해주었다. 그 사나이는 면장 에게, 전번에 보낸 문서는 보았는가 하고
묻고 고모부가 보지 못했 다고 대답하자 문 밖에 있는 한 사람에게 한 장의 종이 쪽지를
받아 이것을 박용하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박용하는 그것을 다 읽고 지 금은 돈이
없으므로 연기해달라고 했다. 그 자는 안된다고 하면서 권총을 박용하에게 들이대
발사했다. 나는 현기증을 일으켜 그 자리 에서 쓰러졌다. 이윽고 정신이 들어 내실에
통지했으나 박용하는 몹 시 괴로워하다가 30분쯤 지나 절명했다.".

장택상(작고)은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했고 그의 형제들도 무장독 립군에 군자금을
대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택상의 딸들은 몇년 전 할아버지 장승원을 '친일파'라고 부른
한 학자에 대해서 근거가 없 는 모함이라고 항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그들은 박상진과
그의 동 지들이 '일본인은 한 사람도 공격하지 않고 조선 사람만 죽인 것이 과연
독립운동인가'라고 항변했었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에 이 장승원 사건에 대해서 많이 들으면서 성장하였을 것이다. 셋째
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쪽으로 기울고 있었 기 때문에 자신들의 집안이 소작을 하고 있는
대지주 장승원에 대하 여 일정한 의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장택상은 미 군정시절에는 수도경찰청장으로서 좌익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46년 10월의
대구폭동이 구미로 파급되었을 때 박상희 는 이 폭동에 연루되었다가 군정 경찰에 의하여
사살된다. 장택상은 지주정당이라고도 불렸던 한민당의 핵심인사였다. 장택상 국무총리 는
1952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펴고 국회를 위협하여 대 통령 직선제 개헌을 도와
발췌개헌안을 성사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의 작전국 차장으로서 국장이던 이용문
장군과 함께 이승만 을 제거하는 모의를 하고 있었다. 5·16 뒤에 박정희는 한민당-자유
당-민주당계열의 구정치인들을 정계에서 배제하려 하는데 장택상은 반박진영의 지도자로
있었다.

이 장택상의 정치적 문하생이었던 사람이 김영삼 현 대통령이고 김대중 차기 대통령도
1950년대 중반에 잠시 그의 비서역할을 한적 이 있었다. 한국현대사라는 캔버스에 그린
장택상과 박정희의 이런 대칭적인 역정은 지주와 소작농 출신이라는 환경의 차이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사회적 출신환경이 한 인간에게 던져 주는 어떤
제약의 존재를 느끼게도 해준다.


소쩍새 2007.10.21  19:44

소작자와 지주 곧 그들은 이조당시 조상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갖고있었다 무슨대비 한상희 그들후손들이지금도 많은 산도가지고있다 우리나라의 전국토에 논밭이장택상이것아닌것별로없었다 우리도 소작자이였어니까 해방후 토지개혁이이승만대통령령으로 시행했다

가족몇명이면 그이상토지는 소작자에게 상환으로 물려주라는법이다
샅샅이조사하여 단행했다 그래도 남의친척명의로 빠져나간것뿐이지 친일파라고해서 가진것도있겠지만 개인소유권은 인정했다 빨갱이식이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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