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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그의 우상 나폴레옹의 생애를 비교하면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박정희가 나폴레옹을 숭배하다가 그의 생애마저 복사를 하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식민지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필두로 하여 두 사람의 공통점을 뽑아
보면 10여 가 지나 된다. 훌륭한 어머니의 큰 영향력, 어린 시절의 병정놀이, 작은
키(박정희는 1m65㎝, 나폴레옹은 1m67㎝ 정도), 사관학교 교육(나폴 레옹은 두곳의
사관학교를 다녔고, 박정희는 세 사관학교를 이수),포 병 출신, 쿠데타로 집권.
쿠데타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이 나폴레옹 이다. 1799년 11월9일 30세 장군이던 그는
군병력을 동원하여 의회(5 백인회)를 해산하고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가 1815년에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왕정을 뒤엎은 것까지 치면 두 번 쿠데타를 한 셈이 다. 그의
손자인 나폴레옹3세도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에서 황제로 승격했다. 박정희도 유신
선포까지 포함하면 두 번 쿠데타를 했다.집 권 기간도 나폴레옹은 16년, 박정희는 18년.
두 사람은 각기 근대국 가의 초석을 놓았다. 이혼 경력, 비극적 죽음 뒤의 재평가도
공통점 이다.
사진설명 : 1979년 11월. 박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그의 집무실이기도 했던 청와대 본관 1층 서재를 정리할 때
찍어둔 서가의 사진. 이 서재의 도서 목록에는 전사, 전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그가 초등학교 때 익힌
독서습관이 평생을 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뒤에 과격파이던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친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여 처형당하자 나폴레옹도 과격파로 몰려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가 친지의 운동에 의해 풀려난 것은 박정 희 소령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에 남로당과 연루되어 구속된 다음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가 선배들의 구명 운동에
의해 살아난 경우와 비슷하다.
두 사람의 본질적인 유사성은 그들이 상징하는 시대정신이다. 나 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고양된 국민의 에너지를 결집시켜 국민 군을 조직하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전 유럽에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전쟁을 벌였다. 박정희는 4·19혁명으로 부풀려진
국민들의 기대와 열정을 장면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정권 을
탈취, 국가 근대화를 향해서 이 국민적인 에너지를 동원한 사람이 다.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가 박정희의 생애에 끼친 큰 영향은 소년 기에 읽는 위인전의
영향이 평생을 간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백지 상태의 어린 마음에 최초로
발자국을 만드는 위인들의 삶은 신 선한 충격, 흥분, 상상력을 제공하고 인생 설계의
길잡이가 되기 때 문이다. 박정희가 영웅들의 전기에 심취했다는 것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사회과학의 종합인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 연히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즉 경세에 대한 관심으 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초등학교에서 틀을 잡은 이런 관심과 독서 경향이 그의 인격에 크 나큰 영향을 끼치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 는 것이 청와대 집무실 도서목록이다.
'서재''라고도 불렸던 이 방에 는 약5백50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의 사후에 청와대
직원들이 서 재를 정리하면서 작성한 도서목록을 살펴보니 역사, 전사, 전기와 관 련된
책이 거의 전부이다. 특히 전기가 많았다. 일본에서 나온 김일 성 전기를 비롯하여
'이당 김은호' '학봉전집' '난중일기' '율곡집' '최수운 연구' '안중근 의사 자서전'
'신채호 전집' '홍의장군 곽재 우' '천추의 얼 윤봉길''퇴계학 연구' '롬멜 전사록'
'포드 대통령' '지미카터 자서전' '박은식 전서' 등등.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알렉산더 대왕 전기 등 위인전을 많 이 읽었다. 권력의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독과 보람을 그는 전기를 매개로 한 역사적
대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나폴레옹 전기,
플루타크 영웅전,삼 국지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권력과 인간의 장대한 드라마를
몇번이고 곱씹어 읽어감으로써 어떤 원리를 뽑아 내려는 독서법이기 도 했다.
청와대 본관 1층 집무실의 도서목록에는 시집과 소설이나 성경이 보이지 않는다. 시심이
없고 신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이다. 2층 침실 앞에도 서재를 겸한
거실이 있었다. 시집, 수필 류 같은 부드러운 책들은 주로 여기에 꽂혀 있었다.
겉으로는 차디차 게 보이던 박정희였지만 가슴속으로는 시심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그
는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 '금오산아 잘 있거라'의 가사를 썼고 작곡도 했다.
국민들을 분기시키고 신바람나게 만드는 데 있어서 노 래와 시의 힘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에 실린 시만 모아도 작 은 시집이 하나 만들어질 것이다. 먼저 떠나보낸
아내를 그리워하는 시들을 읽어 보면 박정희는 퍽 감상적인 인간이란 느낌까지 받을 정
도이다. 아내를 잃은 지 20일 뒤에 쓴 시의 한 구절.
'당신의 그림자/당신의 손때/당신의 체취/당신이 앉았던 의자/당 신이 만지던
물건/당신이 입던 의복/당신이 신던 신발/당신이 걸어오 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한 번 부르지 못했던/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어찌
잊으 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1974년 9월30일.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
마디 없소. 아니야,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아.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 마나 외로웠겠소.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
그는 시인들과 친했다. 6·25동란 때 정훈장교였던 시인 이용상은 1951년에 '아름다운
생명'이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고 했지만 돈이 없 었다. 이 시인의 사정을 전해 들은
박정희 대령(당시 육군 정보학교 장)이 '우리 집에 좀 와 달라'는 연락을 해 왔다.
이용상은 정훈부장 으로서 박정희 참모장과 함께 9사단에 근무한 적이 있고 계급 차를
넘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박 대령 부부가 세들어 살던 대구 봉 산동 집에 갔다.
육영수가 대문을 열어 주더니 대경실색.
"아이고, 조금 전에 왕학수(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 교수가 방바 닥에 오줌을 싸고
가셨는데 이 대위님이 또 오셨네요.".
이 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육영수가 풋고추에 소줏상을 들고
들어왔다. 박 대령은 장롱 속에서 꺼낸 신문지 뭉치 하나를 이용상에게 아무렇지 않게
던져 주는 것이었다. 이 대위가 "이게 뭐지요?"하고 물었다.
"시집 출판에 보태 쓰시오." "이 뭉치가 다 돈입니까? 이 돈 어디서 났습니까?" "세상이
다 도적놈들인데 난들 도적질 말라는 법 있소?".
옆에서 육영수가 거들었다.
"저 분 마음 변하시기 전에 어서 갖다가 좋은 시집 내세요.".
박 대령은 대구사범 동기인 인쇄소 사장에게 소개장까지 써 주었다.
'용금옥 시대'의 저자이기도 한 이용상에 따르면 '피비린내 나는 살육 의 마당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찾느라 애쓴'(조지훈의 발문) 이 시집은 '전란중 대한민국에서 출판된
유일한 시집'이란 것이다. 앞으로 이 전 기에서 발견하게 될 박정희의 균형감각과 교양,
그리고 여기에 바탕을 둔 결단력과 통찰력은 구미보통학교에서부터 내면화된 독서와
사색의 오랜 축적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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